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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 나이트 – 145화


샤오민은 몇 개 안 남은 빨래를 남겨두고서 멍하니 지크가 무술을 전개하고 있는 장면을 바라보았다. 바람을 가르는 지르기와 차기가 경쾌하게 끊어지며 그녀의 시야를 가득 메웠고, 보고 있는 샤오민의 마음속엔 이상한 느낌이 꿈틀거렸다. 지크의 체조(?)는 얼마 안 있어서 끝났고 그는 배가 고픈 표정을 지으며 샤오민을 바라보았다.

“어, 뭐하세요?”

지크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꼽고서 자신을 바라보자 샤오민은 아차 하며 서둘러 빨래를 널기 시작했다. 하지만 너무 급하게 널려고 한 탓인지 그녀는 심한 기침을 하면서 몸을 웅크렸다. 지크는 흠칫 놀라며 그녀에게 달려갔다.

“젠장! 괜찮아요?”

“저, 저는 괜찮… 콜록콜록!!”

입을 가린 그녀의 손에서 피가 배어 나오는 것을 본 지크는 눈을 크게 뜨고 그녀의 손을 펴 보았다. 설마 했지만 심각한 폐병을 그녀는 앓고 있었다. 기침이 다시 잠잠해지자, 그녀는 자신의 손에 묻어있는 피를 닦아내며 다시 빨래를 손에 잡았다.

“하아, 하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지크 씨…. 어머, 식사를 드려야 하는데,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그러나, 지크는 인상을 찡그린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불끈 쥐면서 고개를 돌렸다.

“… 알았어요. 기다릴게요….”

지크는, 자신의 눈앞에서 누군가가 죽어가는 장면을 볼 수가 없었다. 사람을 죽이는 건 그에게 쉬운 일이었으나 살리는 것은 할 수가 없는 일이어서였다. 그래서 샤오민과 같이 지병이 있는 환자를 보면 안타까움에 분노를 터뜨리곤 한다.

샤오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서 약간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지크를 바라보았다. 뭔가… 그야말로 바람과 같이 느껴지는 사나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마지막 빨래를 줄에 널어 놓고서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 끝났어요 지크 씨. 안에 먼저 들어가 계세….”

지크는 그녀가 의자에서 일어섬과 동시에 그녀를 양팔로 번쩍 안아 올렸다. 샤오민은 깜짝 놀라며 지크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이렇게라도 해 드려야 맛있는 식사를 먹을 것 같아서요, 헤헷…. 자, 들어가자고요.”

샤오민은 지금의 분위기가 약간은 이상하긴 했지만 나쁘지는 않다는 듯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왕이면 빨래 바구니도 같이 들어다 주실래요…?”

지크는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선 그녀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것이었다.


슈렌은 목에 두르고 있는 흰색의 머플러로 입 언저리를 가리며 터져나간 도시의 외곽 성벽을 바라보고 중얼거렸다.

“… 중상은 입었겠군, 지크라면….”

그는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검은색의 옷을 입고, 같은 색의 큰 모자를 쓰고 있는 한 사나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사나이 역시 슈렌을 본 듯, 그에게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슈렌 역시 그에게 다가갔다. 곧, 둘은 등을 맞댄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온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만날 줄은 몰랐다 바이런.”

“… 오래간만이다 슈렌. 후후후….”

검은 옷의 사나이-바이런은 언제나처럼 차가운 웃음으로 말을 끝냈다. 슈렌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간만이라는 소리는 틀리지 않다만… 넌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예전부터 너에게 직접 묻고 싶었던 말이다.”

그 질문을 들은 바이런의 입가에선 웃음이 사라졌다.

“… 나 같은 녀석도 있어야 하지 않겠나… 리오나 너희들이 정의를 행하는 것처럼 말이야….”

그 대답을 들은 슈렌은 눈을 뜨고 바이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바이런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게 마련이야… 그 그늘의 역은 나 혼자면 충분하겠지. 그리 기쁜 일은 아니거든… 후훗, 쓸데없는 말을 지껄였군. 난 간다, 제국의 수도로 가니 지크와 리오를 데리고 오도록. 같이 오는 게 신상에 좋을 거다, 후후후후….”

슈렌은 자신에게서 천천히 멀어져 가는 바이런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800년 가까이… 자신의 일을 가장 확실하게 해온 가즈 나이트 중에 한 명의 모습이라고 생각이 되어서였다.

“… 잘가라, 바이런….”

슈렌 역시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어딘가에서 상처를 치료하고 있을 지크를 찾기 위해….


오후가 되어서, 지크는 샤오민의 부탁으로 감자를 깎고 있었다. ‘칼’에 있어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크였기에 감자 깎기란 매우 쉬운 일이었다. 순식간에 감자를 깎아내고 있는 지크를 보고 샤오민은 신기함 반, 놀람 반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머, 정말 빨리 깎으시네요? 그것도 알맞게… 정말 대단하시네요.”

지크는 다른 감자를 집으며 씨익 웃어 보였다.

“헤헷, 하지만 샤오민 씨처럼 요리를 잘하지는 못해요.”

샤오민은 지크의 칭찬을 듣자 얼굴을 약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동생을 제외하고 남자와 이렇게 오랫동안 같이 있어 본 적은 그리 많지가 않아서 그런 것도 있었다.

“아, 동생이 올 때가 되었네요. 전 그 애 간식을 준비할 테니 지크 씨는 계속 수고 좀 해주세요.”

“오케이! 알겠습니다!”

지크는 칼을 손에 든 채로 샤오민에게 경례를 붙였다. 샤오민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돌리고 재료를 다듬기 시작했다. 간식이 다 되었을 때, 그녀의 동생 루이크가 약간 피곤한 표정으로 집 안에 들어왔다.

“누나, 다녀왔어. 어, 깨어나셨네…?”

루이크는 지크가 멀쩡히 앉아서 열심히 감자를 깎고 있는 모습을 보고서 의혹의 눈길을 지크에게 보내었다. 지크가 그리 마음에 들진 않는 모양이었다.

“… 누나에게 ‘이상한 행동’은 하지 않았겠죠?”

루이크의 당돌한 말을 들은 지크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풋, ‘이상한 행동’이 어떻게 하는지 말해줄래? 그럼 너 없을 때 해볼게.”

한 방 얻어맞은 루이크는 말없이 가방을 내려놓으며 지크와 마주 앉았다. 공부에만 열중해서 약간 허약한 편인 루이크와 지크의 어깨는 넓이부터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

“무슨 운동 한 적이 있나요? 꽤나 건장하군요, 얼굴은 말랐는데….”

“별로… 공부를 안 하니까 그런 것 같아.”

진지하지 못한 대답은 싫어하는 성격인 루이크는 지크의 대답을 듣고서 바로 고개를 돌렸다.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샤오민이 동생을 위해 만든 간식을 들고 부엌에서 나왔다.

“자, 식기 전에 먹으렴 루이크.”

그녀가 음식을 놓자마자 지크는 깎은 감자가 들어있는 바구니를 들고 일어서서 샤오민에게 물었다.

“감자 어디에 놓을까요?”

“부엌 안에다가 놔주세요. 수고하셨어요 지크 씨.”


퇴근 시간, 샤오린은 급히 옷을 갈아입고는 병원을 빠져나갔다. 동료 간호원들이 애인이 생겼네 하며 놀려댔지만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길을 재촉했다.

“하아… 괜찮을까 그 사람? 내상이 심하던데….”

그녀의 혼잣말을 들은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천천히 샤오린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그런 쪽에는 전혀 익숙하지 못한 샤오린이 그 사나이를 느꼈을 리는 만무했다.

“취미는 아니지만 어쩔 수 없지….”

사나이-슈렌은 자신의 머플러를 다시 감으며 계속 걸어 나갔다. 푸른색의 장발이 밤바람에 살짝 휘날렸다.

집 앞에 당도한 샤오린은 집 열쇠를 찾아가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집 앞이니 어느 정도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때, 그녀의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그녀는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다보았다. 큰 키에, 머플러를 두르고 있는 한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 실례합니다 아가씨. 몇 가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밤이라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의외로 정중한 말투였다. 그러나 집 안에 있을 지크의 상황을 보면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가오시지 말고 거기에 계속 계세요, 그러면 대답해 드리겠어요.”

슈렌은 꽤나 생각이 깊은 여자라 생각하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요즘에 상처를 입은 한 남자를 보지 못했습니까? 붉은 외투에 푸른색 바지를 입고 있습니다만… 몸은 건장한 편이고 얼굴은 약간 마른 편이지요.”

말할 것도 없이 지크였다. 샤오린은 호흡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그런 사람은 본 적이 없군요. 질문이 다 끝나셨다면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슈렌은 잠시간 그녀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샤오린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웅크렸다. 이렇게 긴장한 적은 한 번도 없는 그녀였다.

“후우… 어쩌지?”

상처는 치료한다고 했지만 계속해서 불안감 속에 살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집 문이 닫히자, 슈렌은 다시 모습을 나타내고 샤오린의 집을 바라보았다.

“좋아… 이 정도면 안심할 수 있겠어. 며칠간 몸보신이나 잘해라 지크.”

슈렌은 다시 돌아서서 밤 속으로 사라져 갔다. 리오나 지크처럼 시끄럽지 않게, 그들의 형제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조용하게….


“아, 돌아왔나요 간호원 누나?”

샤오린은 온도차 때문에 흐려진 자신의 무테 안경을 벗고서 자신을 맨 처음 맞아준 지크를 바라보았다. 24시간 전에 비실거리던 사람 같지가 않을 정도로 지크는 활기에 차 있었다.

“… 오늘은 아프지 않나요?”

“뭐, 별로… 다 나은 것 같아요.”

샤오린은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으로 지크의 복부를 손바닥으로 강하게 눌러보았다. 1분여가 흐른 뒤에 그녀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지크를 쳐다보았다.

“아니, 어떻게…!? 도대체 무슨 마법을 쓴 거죠?”

지크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샤오린은 믿을 수가 없었다.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내장의 상처가 만져질 정도였는데 지금은 말끔히 나아있는 것이었다.

“특이 체질이라서 그래요, 헤헷….”

아무리 그래도 ‘의학’이라는 것을 배운 샤오린에겐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단숨에 불가사의한 인간이 되어버린 지크는 휘파람을 불면서 어제 신세를 졌던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내일 보자고요 간호원 누나. 그럼 전 먼저 잡니다.”

샤오린은 정신이 혼미한 듯 머리를 감싸고 윗층으로 올라갔다. 아무래도 좋은 꿈은 꾸기가 어려울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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