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172화
칠장(七章).
그럴 거라 생각했다. 그의 눈빛이 나를 향했을 때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심연의 검은 안개는 날카롭게 떠올랐다 소리 없이 사그라져 버렸다.
그 안개가 쓸어간 자리에 남아있던 것은 오직, 나 혼자뿐이었다.
피곤하다. 안배의 기다림이 너무나도 길다. 대법은 성공했지만 그 기다림이 너무나도 길다. 나는 오늘도 그날을 기다린다.
부활의 때를 기다리며…
변화(1).
“…….”
나는 눈을 떴다. 여기는 어디일까? 으으, 머리가 아프다. 어디에선가 희미한 목소리가 울려온다.
<실패했습니다.>
무슨 소리지? 무엇이 실패했다는 소리지? 나는 눈을 감았다. 문득, 차가움이 느껴진다. 그리고 역한 냄새가 나의 심신을 자극한다. 피곤하다. 가슴이 아프다. 나는 눈을 떴다.
<또 인가?>
이번의 음성은 예전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부드럽지만 왠지 소름이 끼치는 음성. 마치 어린아이의 혼을 달래는 달콤한 악귀의 숨소리 같았다. 차갑다. 싫다. 이 어둠과 함께 내 기억이 묻혀버리는 것이 싫다. 그들은 나에게 영원히 잠이 들라 강요했다. 하지만 나는 쉽사리 지고 싶지 않다. 나는 눈을 감았다. 순간, 고요하고 날카로운 음성이 주문처럼 나의 온몸을 옥죄었다.
<암흑 속에 갇힌 자여. 그대는 깨어나지 말지어다. 그대여. 편안한 안식이 그대를 맞이하는 것을 보라. 영원히 잠이 들라. 깨어나지 말지어다. 육체를 뚫고 올라오는 짓은 무모하다. 그대는 그대의 육신이 망가지는 것을 바라는가? 암흑 속에 갇힌 자여. 그대는 깨어나지 말지어다. 그대로. 그대로 영원히 잠들지어다. 암흑 속에 갇힌 자여. 영원히 잠들지어다.>
정신이 혼미해진다. 눈을 떴을 때 머리가 빠개질 듯 아파온다.
<죄송합니다. 또 실패했습니다.>
두려움에 가득 찬 목소리다. 나의 깨어남이 그를 두렵게 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는 더더욱 잠이 들 수 없다. 나는 눈을 감았다. 조금 후 나는 눈을 뜰 것이다. 일그러진 얼굴들. 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리고 나는 다시 눈을 떴다.
“…….”
어두웠다. 사방이 어두웠다. 무언가 묵직한 것이 느껴진다. 나는 그것의 정체를 확인한다. 어린아이? 으흑? 머, 머리가. 머리가 빠개질 듯 아파온다. 어디선가 그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암흑 속에 갇힌 자여. 그대는 깨어나지 말지어다. 영원히 잠이 들라. 깨어나지 말지어다. 암흑 속에 갇힌 자여. 그대는 깨어나지 말지어다. 영원히 잠들지어다. 깨어나지 말지어다. 깨어나지…>
나는 스스로 눈을 감는다. 목소리에 순응하면 심신이 편안해진다. 나는 조금 더 편안함을 위해 그 목소리를 따라 해본다.
“깨어나지 말지어다. 암흑 속에…. 깨어나지…..”
무리를 한 것 같다. 의문점이 있었지만 나중에, 나중에 다시 눈을 떠야 할 것 같다. 나는 눈을 감았다.
동천은 옆에서 누군가가 자꾸만 중얼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이씨, 누가 이 오밤중에 떠들고 지랄이야?”
부스스한 눈으로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물론, 화정이가 있었지만 그녀는 방금 전의 상황에서 제외된 지 오래였다. 결국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동천은 헛것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동천은 머리를 벅벅 긁다가 잠이 들었다.
“…….”
화정이는 아침이 올 때까지 무언가를 중얼거리듯 입술을 오물거렸다.
만검장(萬劍壯).
동천은 오늘도 힘겹게 물통을 나르고 있었다.
“헉헉.”
입에서는 단내가 풀풀 날렸지만 동천의 입가에서는 연신 미소가 서려 있었다. 왜냐하면 이제 이 짓도 이것으로 끝이 나기 때문이었다. 동천은 사부가 옆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물을 쏟아부었다. 시원한 물줄기가 모든 이의 가슴을 후련하게 해주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두 쏟아낸 동천은 감격 어린 얼굴로 역천을 응시했다.
“사부님.”
그러자 이에 회답이라도 하듯 동천 못지않게 역천의 울먹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오, 제자야. 장하도다. 꼭 일 년만이로구나.”
“사부!”
“제자야!”
둘은 헤어졌다 십 년 만에 만나는 부자상봉을 무색게 할 정도로 감격에 겨워하며 껴안았다. 하긴, 역천의 입장에서는 삼 개월이면 끝낼 것을 여지껏 지지부진 끌고 가다 일 년 만에 해냈으니 기쁘기 그지없을 것이고, 반대로 동천의 입장에서는 넉넉잡고 삼사 년을 생각했는데 엄청나게 빨리 끝냈으니 얼마나 감격스럽지 않겠는가. 동천은 사부의 품에 안겨 이 모든 영광(?)을 하늘님에게 돌렸다.
‘흑흑. 하늘님 아버지. 드디어 끝났습니다요. 이게 다 하늘님의 보살핌으로 끝낸 것이니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하늘님 만세! 만세!’
도연은 기뻐하고 있는 동천에게 다가와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고생이 많으셨는데 드디어 해내셔서 기쁩니다.”
평소 같으면 비꼬는 말투로 쏘아붙였겠지만 오늘은 정말로 특별한 날이라 동천은 도연의 축하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그래. 너도 수고했다. 흑흑흑. 눈물이 앞을 다 가리누나.”
역천은 슬쩍 눈물을 내비치는 제자를 보고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자자, 제자야.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안으로 들어가서 잠시 쉬거라. 아니, 며칠 푹! 쉬거라. 그동안 수련을 하느라 힘들었을 테니 며칠 쉬는 것도 좋은 보약이 될 것이다.”
동천은 속으로 신이 나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지만 제자 된 자세를 유지하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아마, 사부님의 호된 질책과 정성 어린 관심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저란 존재는 없었을 겁니다. 흑흑! 사부!”
“제자야!”
그들이 그렇게 다시 달라붙어서 기쁨을 누리고 있을 때 도연은 먼 산을 바라보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로부터 삼 일 후. 의자에 거만하게 기대어 호두를 까먹고 있던 동천은 잔치가 준비되고 있다는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무슨 소리야?”
소연은 손으로 입술을 살짝 가리며 낮게 웃었다.
“호호. 제가 주방 아저씨께 살짝 듣고 왔는데요. 전주님께서 주인님을 위해 잔치를 준비하라고 하셨대요.”
“그래? 그게 언제인데?”
“내일이래요. 아마도 주인님을 깜짝 놀라게 하기 위해서 전주님이 아무 말씀도 안 하셨나 봐요.”
사부가 자신을 위해서 잔치를 연다는 소리를 듣고 동천은 벌써부터 콩고물에 관심을 보였다.
“히히! 그럼, 작년처럼 먹을 것도 많고 선물도 많이 주겠네?”
소연은 곤란한 질문에 난색을 표했다.
“그게, 먹을 거는 몰라도 선물은 잘…”
확실치 못한 대답에 동천의 안면이 무섭게 돌변했다.
“몰라?”
소연은 주인님의 기쁜 모습을 보려다 괜히 자신이 혼나게 될 위기에 처해지자 슬그머니 동천의 사정권에서 물러났다.
“그러니까, 생각 있는 분들이라면 뭔가 주시지 않을까… 호호호!”
소연이 궁여지책으로 꺼낸 말이었지만 동천은 기분 좋게 웃었다.
“히히히! 그렇겠지? 대가리가 좀 돌아가는 인간들이면 뭔가 하나씩은 준비하고 오겠지? 아아, 벌써부터 내일이 기다려지는데?”
“예에. 저도 기다려지네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소연의 얼굴은 내뱉은 말과 정 반대였다. 그녀는 내일이 두려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