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175화
오랜만에 사부와 단둘이 식사를 하게 된 동천은 영수산에서 감 부부를 만나 자신이 어떻게 그때의 위기를 잘 대처했는가에 대해서 열변을 토해냈다. 역천은 지금 듣는 소리까지 합하면 정확히 여섯 번째였지만 마치 처음 듣는 사람처럼 이야기 내내 감탄사를 연발했다. 워낙, 잘 차려진 식단이라 무리 없이 식사를 마친 역천은 제자의 배웅을 받으며 암한문을 나섰다.
“그럼, 살펴가세요.”
역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오냐. 너도 들어가서 푹 쉬거라. 아마도 내일부턴 편히 쉬는 게 극히 드물 테니 말이다.”
동천은 사부의 어투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예? 무슨 말씀이세요?”
자신의 감정을 들켜버린 역천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황급히 제자에게서 등을 돌렸다.
“아무것도 아니다. 이 사부는 이만 갈 터이니, 푹 쉬거라.”
“네, 사부님.”
아무래도 사부의 행동이 이상했지만 동천은 내일부터 수련이 다시 시작되는 것 때문에 사부가 그러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되면 잔치는 물 건너갔다는 소리와 다를 바 없었다. 동천은 모처럼의 기회가 물거품이 되어 울화가 치밀었지만 아직 사부가 사정권에 있었기에 겉으로는 자중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사이 제법 멀찍이 걸어갔던 역천은 갑자기 동천에게 달려와 그를 끌어안았다.
“제자야! 푹, 푸욱-! 쉬거라! 알겠느냐? 누가 놀자고 해도 놀지 말고, 푹 쉬거라!”
정말로 심상치 않은 사부의 행동 때문에 동천은 혼란스러웠다. 동천은 역천의 품에 파묻힌 채 말했다.
“사, 사부님. 도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예?”
동천의 물음에 역천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품에서 놓아주었다.
“그냥, 안아봤다. 사부가 제자도 못 안아보냐? 험! 쉬거라.”
제자의 따가운 눈초리가 뒤통수를 때려왔지만 역천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양, 팔자걸음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그렇게 일각여를 묵묵히 걸어가던 역천은 더 이상 못 참겠는지 소나무 한 그루를 부여잡고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아이고! 내가 죽일 놈이지! 내가 죽일 놈이여! 그놈의 술이 뭔지. 아이고! 요, 요놈의 주둥이!”
찰싹찰싹!
역천은 자신의 입술을 연신 때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나 때리는 소리에 비해 손에 쥐는 힘은 형편없었다. 즉, 소리만 요란하다는 말이었다. 한참 동안 입술을 때리던 역천은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아하니 지나가다 호기심에 보게 된 아랫것 같았다. 역천은 언제 그랬냐는 듯 눈알을 치켜떴다.
“뭘 꼬라 봐? 전주 우는 거 처음 봐?”
사십 줄에 다다른 하인은 어찌할 바를 몰라하다 재빨리 바닥에 엎드렸다.
“아닙니다요!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하인의 조아림에도 불구하고 역천은 얼굴을 붉히며 펄쩍 뛰었다.
“뭐? 그럼, 내가 우는 것을 전에도 봤단 말이야? 너 이 녀석! 솔직히 말해! 너 첩자지!”
하인은 대경하며 황급히 부인했다.
“아닙니다요! 전주님. 살려주십시오! 저는 그냥, 지나가다 전주님께서 슬퍼하시는 것을 보고 이 연유가 궁금하여 잠시 지켜보았던 죄밖에 없습니다. 전주님. 그것이 죄라면 달게 받겠으나 엉뚱한 첩자의 죄를 뒤집어쓰는 것은 정말로 억울합니다!”
간곡 어린 호소에 마음이 움직였는지 역천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첩자 대신 전주비애방관죄(專主悲哀傍觀罪)라면 억울하지는 않겠구먼?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역천의 부름에 어디선가 여러 명의 무사들이 나타났다. 그들 중 우두머리인 듯한 사내가 대표로 입을 열었다.
“부르셨습니까!”
“잘 왔다. 이 녀석을 끌어다가 신분을 확인해서 뭔가 있는 놈이면 곤장 스무 대만 때리고, 깨끗한 놈이면 곤장 백대를 때린 뒤 보내주거라. 알겠냐?”
순간 우두머리 무사가 움찔한 행동을 보였다. 아무래도 전주가 바꿔서 명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아하니 술에 조금 취한 것 같기에 그는 아무 말 없이 떨고 있는 하인을 끌고 갔다. 역천은 하인이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만족의 웃음을 띄웠다. 그러나 역천의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열 발자국도 떼기 전에 다시 침울한 모습을 보였다.
“아이고, 제자야! 이 못난 사부를 용서해다오! 흑흑, 이 사부가 그깟 술 한 병에 넘어가다니 창피하기 짝이 없구나!”
주위에 나무가 없어서 벽에 기대 흐느끼던 역천은 그 술맛이 떠오르자 침을 꿀꺽 삼켰다.
“쩝. 그래도 그게 기가 막히긴 했는데 말야.”
제 버릇 남 못 주는 역천이었다.
하여간 그날 동천은 사부의 뜻대로 잠만 퍼질러 잤다. 그리고 아침 일찍 일어나 평상시대로 모든 일과를 마치고 사부를 기다렸으나 동천을 찾아온 사람은 사부가 아니라 의외의 인물이었다.
“헤헤, 소전주님. 그동안 별고 없으셨는지요.”
동천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눈앞의 인간이 여기에, 그것도 아침 일찍 자신을 찾아올 리 만무했기 때문이었다.
“한 당주? 자네가 여기엔 웬일이지?”
정말로 오랜만에 등장한 한심은 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아버님의 명으로 소전주님을 데리러 왔습니다.”
동천은 한심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아버님이라고? 얘도 애비가 있었나? 쯧쯧, 그 인간 참 불쌍하다. 저런 한심한 한 당주를 낳고, 얼마나 상심이 컸을까?’
한심은 소전주가 자신을 보면서 고개를 저어대자 동천 못지않게 놀라했다.
“아니? 지금 안 가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처음엔 뭔 소리인가 했지만 동천은 곧 한 당주가 오해했음을 깨달았다. 동천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소리에 한심은 안도하는 듯했다.
“가신다고요? 다행입니다. 저는 또 안 가신다고 깜짝 놀랐지 뭡니까? 하하.”
가는 거는 문제가 아니었으나 그렇게 되면 복잡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여러 문제들을 다 제쳐두고라도 가장 중요한 사부님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동천은 쉽사리 따라갈 수 없었다. 그래서 동천은 한심의 제의를 정중히 거절했다.
“나도 가고 싶은데 문제가 있어. 사부님을 기다려야 하거든. 그래서 아쉽지만 못 가겠어. 다음에 와.”
한심은 아리송한 표정을 보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제가 아버님께 듣기로는 전주님과 말이 다 끝났다고 하던데, 소전주님은 못 들으셨나요?”
동천이 역천에게 어제 들은 거라곤 푹 쉬라는 말뿐이었다. 그 이외는 없었다. 그래서 동천은 말했다.
“못 들었는데?”
그러자 한심은 난색을 표했다.
“큰일 났네? 어쩌지? 아무래도 그냥 돌아가면 아버님께서 불호령을 내리실 텐데… 아아,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한심은 처절하다 못해 절망 어린 모습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동천은 당주가 하는 짓을 멀거니 지켜보았다. 인간적으로 좀 불쌍하게 보였다. 당주 신분에 저러고도 용케 그 신분을 유지하는 게 희한할 정도였다. 마침, 더 놀고 싶었던 동천은 인간 하나 구제해주자고 마음먹었다.
“한 당주. 정말 사부님하고 말이 다 끝난 거야?”
한심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예. 그럼요. 아버님 말씀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동천은 한심의 애비가 누구인지 궁금했으나 체면도 있고 해서 물어보지 않았다.
“알았어. 그럼, 갈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
“감사합니다. 소전주님!”
방에 들어간 동천은 한심과 관련된 서류들을 뒤지다가 귀찮은 나머지 침대 옆의 줄을 잡아당겨 소연을 불렀다. 소연은 재빨리 달려왔다.
“부르셨어요?”
“그래. 너 혹시, 밖에 있는 한 당주의 애비가 누구인지 아냐?”
“한 당주님 아버님이요?”
“응. 알아?”
소연은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곧이어 슬슬 동천의 눈치를 보았다. 동천은 그녀의 표정에서 모든 것을 읽어낸 후 손을 저어댔다.
“야, 널 부른 내가 잘못했으니까 모르면 꺼져.”
만족할 대답을 못 해드려 죄송스러웠던 소연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아마 도연이는 알고 있을지도…”
동천도 그럴 거라 생각했지만 자존심 상하게 그런 걸 도연에게까지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동천은 히죽 웃었다.
“소연아. 너 맞고 나갈래 아니면, 그냥 나갈래?”
소연이 전자를 택할 리 없었다.
“또 부르세요. 그럼.”
소연은 기분 좋게 왔다가 쫓기듯이 도망쳐 나갔다. 동천은 모든 것이 마음에 안 들어 울화가 치밀었지만 밖의 한 당주 때문에 자중했다.
“으음. 당주가 있는데 추태를 부리면 그 무슨 망신인가? 자자, 동천아. 저 계집애는 원래 저랬으니 마음 넓은 네가 참으려무나. 오오! 알겠다고? 역시, 너는 큰 인물이로구나! 하늘이 내린 재목이로다! 얼씨구~!”
그렇게 떠드는 것으로 반각여를 소비한 동천은 자신의 헛소리에 만족해하며 기분 좋게 밖으로 나갔다.
“히히, 좀 늦었지?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