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193화
한 시진 전.
“헤헤, 부르셨어요?”
혈귀옹은 고개를 끄덕이고 얇고 길다란 장검을 건네주었다.
“바람 좀 쐬고 오라는 뜻으로 주는 거다. 그걸 사 아가씨께 드리거라.”
마지못해 건네받은 동천은 장검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꼭, 제가 가야하나요?”
“싫으면 말아라. 다른 이를 보낼 테니.”
잠시 머리를 굴려본 동천은 사정화를 만날 일이 없었기에 놀다 오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아니에요. 제가 갔다오죠.”
혈귀옹은 동천에게서 검을 빼앗으려다 그만두었다.
“그릇을 만들어야 하니까 빨리 갔다 오거라.”
‘이거 하나 가지고 거참 드럽게 말 많네.’
속으로 시부렁거린 동천은 헤헤 웃으면서 만검전을 나왔다. 혈귀옹은 마차를 타고 가라 했지만 동천은 극구 사양하고 걸어가기로 했다. 동천은 방향치였지만 그렇다고 바보는 아니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특징들만 잘 가르쳐주면 묻고 물어서 도착할 수는 있다는 소리였다. 동천은 만일을 위해 혈귀옹이 덤으로 준 간단한 약도를 들여다보았다.
“어디 보자. 오른쪽으로 쭈욱 가다가 샛길은 무시하고 큰 바위 옆에서 꺾어 들어가라고? 히히. 쉽지 뭐.”
여유가 한껏 배어난 동천은 팔자걸음으로 천천히 갔다. 정말로 오랜만의 자유이기도 했으니 그럴 만도 하리라.
“히히, 이 기회에 아주 톡 튀어 버릴까? 아냐. 그랬다가는 귀옹이가 분명히 쫓아올 거야. 그 늙은이 성격이 어디 가겠어? 할 수 없지. 며칠이면 그릇 만드는 것도 끝날 테니까 자중하자.”
약도에서 말하는 큰 바위는 보일 생각도 안 했지만 그래도 동천은 좋았다.
“랄라라! 언젠가는 나오겠지. 지가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한낮의 태양은 살인적인 더위를 자랑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기세가 한 꺼풀 꺾일 시간대. 서서히 짜증 나기는 했지만 견딜 정도는 되었다.
“쪼까 덥네? 먼저 빨리 당도한 다음 푹 쉬다가 올까? 그래, 그래야겠다.”
동천은 내공을 사용해 경공을 시전했다. 허리띠를 매고서도 말이다. 아마도 예전에 역천이 말한 대로 시간이 흐르자 허리띠를 매고 있어도 내공이 조금씩 살아나는 것이리라. 동천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혈귀옹이 하도 성질을 긁어서 애꿎은 담벼락에 화풀이를 하다가 금이 가는 것을 보고 알게 되었다. 귀영분광(鬼影分光)을 사용하면 순식간에 뻗어나가겠지만 내공이 한참 모자란 지금 그 신법을 썼다가는 자빠지기에 딱 알맞았다. 그래서 동천은 기본적인 원리만을 이용해서 달려갔다. 일직선으로 가는 것도 못 찾으면 등신이었다. 다행히 동천은 등신을 면했다.
“역시! 나는 천재라니까? 히히히! 자, 다음은 어디지?”
바위에 몸을 기댄 동천은 약도를 펴들고 다음 부분을 읽었다. 잠시 후 동천은 약도를 소중히 갈무리했다. 그리고 그곳을 향하던 동천은 얼마 안 가 정면에서 달려오는 묵 빛 마차를 볼 수 있었다.
“응? 햐아! 저 마차 때깔 한번 좋네? 어느 놈의 마차지?”
먼지를 뿌리며 동천을 스쳐 지나간 마차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얼마 안 가 그 움직임을 멈추었다.
‘왜 멈추었지? 혹시, 말 다리가 부러졌나?’
동천다운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차에서 내린 한 사내가 동천 쪽으로 걸어왔다. 묵직한 표정의 사내는 동천에게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소전주님.”
보아하니 자신을 아는 것 같은데 동천은 남자 새끼를 눈여겨볼 시간이 없었던지라 한참을 노려보다 말을 꺼냈다.
“누군가?”
사내는 자신이 누구인지 다시 한번 인식시켜주었다.
“철소라 합니다.”
동천은 가물가물한 기억을 끄집어내어 결국에는 알아낼 수 있었다.
“오오, 철소! 소교주님의 부하였지?”
“알아주시니 황송하옵니다.”
동천은 역시 뭘 좀 아는 놈이라고 생각했다.
‘히히! 도연이 자식이 쟤를 보고 좀 배워야 할 텐데 말야. 응? 가만. 얘가 마차에서 내렸다는 것은 저 안에 있는 새끼가 바로…’
어느 놈의 마차인지는 금세 드러났다. 바로 소교주의 마차였던 것이다. 동천은 갑자기 왕 소름이 쫙 돋았다.
“그런데 저 안에 소교주님이 타고 계신가?”
철소는 지긋이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저와 같이 가보시지요. 소교주님께서 부르십니다.”
동천은 은근히 경계를 하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한 척 했다.
“나를 부르셨다고? 왜 나를 부르셨어? 지금 바쁜 일 때문에 가시는 게 아니셨어?”
철소는 동천의 질문을 교묘히 회피했다.
“거기까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의문은 소교주님께 물어보시지요.”
꼼짝없이 소교주에게 가야 하는 처지에 몰린 동천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떼어내며 철소의 뒤를 따라갔다.
‘제길! 혈변 영감이 쉬운 심부름 시킬 때 알아봤어야 했어. 봐! 이렇게 재수 없는 일이 생겼잖아?’
우연히 걸린 것 가지고 그 모든 책임을 혈귀옹에게 떠넘긴 동천은 마차에 올라 소교주인 냉현을 대하고 환하게 웃으며 포권을 취했다.
“소교주님,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여전히 눈꼬리가 재수 없게 찢어져 있는 냉현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반갑기 그지없군.”
동천은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았다.
‘어라? 이 변태 새끼 보게? 지가 아무리 높아도 그렇지. 어따 대고 말을 놓고 지랄이야? 내가 그렇게 만만히 보여?’
바로 냉현을 씹느라 그랬던 것이다. 그러나 냉현은 쉽사리 고개를 못 드는 동천의 태도에 극히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하하. 어서 자리에 앉게.”
아랫사람을 대하는 냉현의 태도는 틀이 잡혀있어서 나무랄 데가 없었다. 비록, 그것이 위선이고 거짓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 영향 탓인지 동천은 순순히 냉현과 마주 앉았다. 동천은 철소 외에 변태 새끼를 보좌하는 또 다른 놈이 어디 갔나 했는데 가만히 보니까 밖에서 마차를 모는 녀석인 것 같았다.
“밖에 있는 사람이 혈살 같은데, 어찌하여 마차를 몰고 있는지요.”
“으음? 어떻게 알았는가?”
평소 같으면 이럴 때 신이 나서 할 말 못 할 말 떠들어댔겠지만 동천도 가릴 건 가릴 줄 아는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 동천은 들뜨려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별거 아닙니다. 흑혈 이살은 꼭 붙어 다니며 소교주님을 호위하는 걸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때려 맞춘 겁니다.”
냉현은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동천을 직시했다.
“잘 알고 있군. 혈살이 밖에서 마차를 모는 건 다름이 아니라 밖을 경계하기 위해서이네.”
“예? 왜요? 험. 왜 그런지요? 암흑마교 내에서까지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동천은 저도 모르게 본연의 말투가 나왔다가 급히 폼을 유지했다. 냉현은 금세 본바탕을 드러낸 동천에게 실실 미소를 쪼갰다.
“만일을 위해서도 있지만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서이네. 나중에 내가 커서 외부로 나가게 되었을 때, 철소나 산관이 마차 밖을 삼엄히 보호한다면 편하지 않겠는가.”
“아아! 그게 또 그렇군요.”
냉현이 변태라는 인식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지금 만큼은 내심 감탄하고 있었다.
‘역시, 씨가 굵은 자식은 생각의 전환에도 이렇게 차이가 나는구나. 물론 나보다는 떨어지지만 말야.’
“자네는 솔직해서 좋군.”
동천이 냉현의 말을 이해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아니, 상당한 시간이 걸려도 뭔 소리인지 몰랐다. 어쩔 수 없이 냉현은 쉽게 말해주었다.
“자네의 속마음이 순간순간마다 얼굴 표정에 드러난다는 말일세.”
매서운 바늘이 동천의 가슴을 콕! 찍고 도망쳐버렸다. 동천은 아픈 가슴을 부여잡을 새도 없이 되도록 순진한 표정을 지었다.
“송구스럽습니다. 제가 아직도 미진한 점이 많습니다.”
냉현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린 후 곁눈질로 창밖을 보았다.
“괜찮네. 그보다 어디로 가는가? 지금, 이 마차는 내 처소로 가고 있는데 말이야.”
동천은 벌떡 일어섰다.
“앗? 여기가 어디입니까?”
냉현의 눈짓에 철소가 입을 열었다.
“조금만 더 가면 혼천부를 지나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이름은 들어봤어도 가보지는 못했던 곳. 가보았어도 다시 찾아가라면 못 찾아가는 곳. 동천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런, 씨발! 그걸 지금 가르쳐주면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