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200화
혈귀옹은 이왕 체력단련을 하는 김에 백 번 더 왕복을 요구했다. 동천은 울며 겨자 먹기로 실실거리며 뛰었음은 자명한 일. 아침에 일어나니 수전증에 걸린 노인처럼 팔다리가 덜덜 떨렸다. 힘차게 일어나니 허리에서 뼈마디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렸다.
“커허? 주, 죽인다!”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주저앉은 동천은 자신의 몸을 생각해서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온몸이 쑤셔서 그런지 정신의 집중이 현저히 떨어졌지만 점차 평온해지는 느낌에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귀의흡수신공을 운용할 수 있었다. 한데, 어느 순간 동천의 의식이 하늘로 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무언가에 이끌려가듯 지붕 위를 뚫고 하늘로 치솟았다.
‘뭐, 뭐야!’
당황한 동천은 밑으로의 하강을 시도했으나 한번 떠오른 동천의 의식은 쉽사리 내려갈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았다. 고통이나 다른 이상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느낌 때문에 동천이 발버둥을 치고 있을 때, 어디선가 두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천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뒷간 쪽이었는데 그곳에는 혈귀옹과 한심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맞죠? 제 말이 맞죠?”
혈귀옹은 만족의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한심은 멋쩍은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아버님께 도움이 됐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네요. 헤헤.”
혈귀옹은 몸을 꼬아가며 슬금슬금 손을 내미는 아들의 요구를 충족해주었다.
“옛다. 받아라.”
한심은 아버님께 은 덩어리를 받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러시지 않아도 되는데요.”
혈귀옹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 돈으로 가서 몸보신 좀 해라.”
한심은 은 덩어리를 얼른 품속에 집어넣었다.
“아버님,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소전주님이 낌새를 보이면 재깍 가르쳐드릴게요. 헤헤.”
“그러도록 해라.”
이들의 대화로 인해 그 동안 동천의 탈출이 실패한 이유가 명확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럴 수가. 범인은 한심한 자식이었던 말인가? 아아, 내가 그 동안 저 새끼의 농간에 놀아났다는 말인가? 이름 그대로 한심한 자식이라 생각해서 방심했더니, 그 사이를 놓치지 않고 파고들 줄이야… 내가 너무 방심했어. 그래. 그랬던 거야. 핏줄이 어디 가겠는가?’
심한 충격을 받은지라 의식 내부에 큰 혼란이 일어났다. 동천은 두통이 엄습해오는 가운데 눈을 떴다. 몸을 움직여보니 정상이었다.
“방금 내가 봤던 게 뭐였지?”
동천은 문을 박차고 나왔다. 마침 한심은 반짝이는 은 덩어리를 어루만지며 오다가 난데없이 뛰쳐나온 동천을 보고 재빨리 은 덩어리를 숨겼다.
“소전주님, 일찍 깨어나셨네요?”
동천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신발을 신었다.
“오늘은 일찍 깨어나더군. 그런데 뒤에 감추고 있는 게 뭔가?”
한심은 뜨끔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헤헤, 아무것도 아닌데요.”
“아무것도 아니긴. 그럼 두 손을 앞으로 펴보게.”
한심은 긴장 탓에 코까지 벌렁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자신이 한 짓을 소전주가 알 리 없었지만 괜히 뒤가 구려서 그러는 것이다.
“그, 그러니까. 제 뒤, 뒤에는 아무것도 없는데요.”
동천은 주먹을 말아 쥐고 차분히 말했다.
“그러니까 손을 앞으로 내밀라는 게 아닌가. 내가 뭘 좀 주려고 그러네.”
솔깃한 말이었지만 한심은 자신의 느낌을 믿고 있어서 동천의 꼬임에 쉽사리 넘어올 생각을 안 했다. 그런 그를 살려준 것은 혈귀옹이었다.
“거기서 뭣들하고 있느냐?”
한심은 그제야 살았다는 표정을 하고, 마음을 놓았다. 동천으로서는 아까운 순간이었다. 할 수 없이 동천은 다음 기회를 노리기로 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밖으로 나오다 한 당주하고 우연히 마주쳐서 아침 인사를 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혈귀옹은 자신의 아들에게 눈짓을 했다. 얼른 가보라는 것이었다. 그는 한심이 물러나는 것을 끝까지 지켜본 후 동천에게 말했다.
“거기에서 멀뚱히 서있지만 말고, 밥이나 차려라.”
“예, 어르신.”
동천은 주먹이 우는 것을 달래며 부엌에 들어가 밥을 얹혔다.
“뒈지지 않으려고 아침은 꼭 챙겨 먹는 것 좀 봐. 그렇게 오래 살고 싶어? 쳇! 늙으면 빨리 죽어야 한다고 장 할아버지가 그랬는데, 쯧쯧.”
그 옛날, 황룡세가에서도 얻어먹기만 하던 동천이 지금의 신분에서 밥을 지으리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노는 것만 빼고 모든 것에 형편없는 실력을 자랑하는 동천은 밥을 짓는 데에도 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러나 의외로 그 기간은 단 하루뿐이었는데, 이유는 자신도 먹어야 하는 밥이기 때문이었다. 당장 먹어야 하는 밥인데 동천이 건성으로 만들 리 만무했던 것이다. 단시간에 밥 짓기를 성공한 동천은 식단에 대충 나물 무침을 만들어서 올렸다. 혈귀옹은 원래부터 채식주의자였기에 한 가지 반찬이라도 먹을 만하면 군말 않고 넘어갔다. 물론 동천이 그 식단으로 나물만 먹고살았을 리 만무했고, 가끔 고기에 목마를 때면 한심을 시켜서 밤에 몰래 먹으며 여지껏 버텨왔다. 오랜만에 국을 끓인 동천은 수저로 내용물을 휘젓다 말고 음흉한 미소를 흘렸다.
“카악~! 퉤! 퉤퉤!”
동천의 가래침이 나물국 속으로 첨벙대며 빠져 들어갔다.
“히히! 이게 바로 노란 굴 국이라는 거다. 자, 이제 가 볼까나?”
조촐한 반찬과 굴(?) 국을 준비한 동천은 신나는 마음으로 상을 들고 갔다. 한심은 방안에서 뒹굴 거리고 있다가 동천이 들어오자 마지못해 일어나서 상을 받았다.
“이야! 간만에 국이라니. 맛있겠네요. 후루룩~! 으음. 맛도 괜찮네요.”
아들내미의 합격점에 혈귀옹도 국을 떠먹었다. 혀끝이 예민했던 혈귀옹은 국 속에 전혀 새로운 맛을 느끼곤 알쏭달쏭한 얼굴을 했다. 몇 번 더 떠먹어 보아도 결국 허사였다. 그는 할 수 없이 이 국을 만든 임자에게 물어보았다.
“푸르딩딩아, 여기에 뭔가 새로운 것을 추가시켰냐?”
동천은 그것을 알아낸 혈귀옹의 혓바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제법 깜찍한 표정을 지으며 검지 손가락을 흔들었다.
“비밀입니다.”
혈귀옹은 하마터면 곰방대를 집을 뻔했다. 푸르딩딩의 역겨운 표정 때문이었다. 그는 부들거리는 손아귀를 멈추고 식사에 들어갔다. 한심은 옆에서 떠들건 말건 밥 처먹기에 여념이 없었다. 동천보다 먼저 먹고 난 한심은 느긋하게 이를 쑤시다가 국을 전혀 안 마시는 동천을 발견하였다.
“어? 소전주님은 어째서 국을 안 드십니까?”
혈귀옹도 그제야 느꼈는지 날카로운 눈으로 동천을 노려보았다.
“그렇구나. 왜 안 먹지?”
두 부자가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천은 자신만만했다. 다 한 수를 남겨두고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헤헤, 저는 못 먹어요. 국 속의 나물을 먹으면 두드러기가 돋거든요. 이 국은 두 분 드시라고 만든 거니까 다 드세요.”
두드러기가 돋는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둘은 수긍하는 눈치였다.
‘히히히! 잘도 처먹는다.’
동천은 식사를 끝마치고 상을 내가다 물었다.
“나중에 또 만들어 드릴까요?”
“예, 부탁드립니다.”
“맘대로 하거라.”
한심과 혈귀옹은 먹을 만했던 모양이다. 설거지도 동천의 몫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군말 없이 그릇들을 닦았다.
“또 해달라고? 아암. 또 해주고 말고. 히히히!”
마냥 좋은 동천이었다.
동천이 열심히(?) 도를 만드는 사이 어느새 첫눈이 만검전 위로 떨어져 내렸다. 제법 매서운 추위에 몸을 사리는 계절이 시작된 것이다. 한심은 좋아라 뛰어다녔지만 가뜩이나 엉성한 도를 만들었던 동천의 마음에는 차가운 눈이 덩달아 내리고 있었다.
“…”
이제 동천에게 희망은 없었다. 혈귀옹도 저런 놈은 처음이라고 등을 돌린 지 오래였다.
“제길!”
동천은 다 죽어가는 사람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다 부질없는 짓이야. 1년? 2년? 아니야. 3년이 넘어도 내 솜씨로는 어림없어.’
자신만만하던 동천의 의지는 땅에 떨어진 지 오래였다. 의미 없는 나날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아무래도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저번처럼 맛이 갈 것 같았다. 그때,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눈송이를 쫓아가던 한심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소전주님. 빨리 도를 만드셔야죠. 그러다가 아버님께 또 맞으시면 어떻게 해요.”
듣기 싫은 소리에 동천은 얼굴을 구겼다. 대답 없이 대장간으로 들어간 동천은 쇠를 달구기에 앞서 화력을 높이기 위해 풀무질을 했다.
‘재미없다. 지겹다. 늙은이에게 굴 국을 먹이는 것도 이제는 귀찮다. 그거 먹인다고 이곳을 벗어나겠는가? 아니다. 내 인생은 이제 종친 거나 다름없다.’
동천의 눈동자는 점점 풀려갔다. 무심코 망치를 든 동천은 달구어진 쇠를 끄집어내어 혼신의 힘을 다해 두들기기 시작했고 얼마 안가 한쪽 면이 곱게 펴졌다. 동천은 집게로 집어서 날 부분에 약간의 물을 적셨다.
치이이이!
쇳덩이를 다시 불 더미 속에 던져 넣었다.
‘세가가 그립다. 장 할아버지도 그렇고, 강표사 아저씨도 보고싶고, 추연이도 보고싶다. 아아, 즐거웠던 나의 어린 시절이여.’
쇠가 달궈질 때를 정확히 집어낸 동천은 꺼낸 후 불똥을 맞아가며 망치를 두들겼다. 평소와 다른 소전주의 행동에 한심은 긴장을 했다. 동천은 특이한 행동 없이 수순에 맞게 쇠를 내려치고 담금질과 풀무질을 반복하며 도를 만들어갔다. 동천이 하는 짓을 뚫어져라 보고 있던 한심은 어느 순간 눈을 똥그랗게 떴다. 놀라서 그런지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 이럴 수가! 도, 도, 도가 만들어지고 있다!’
그렇다. 동천은 무의식적으로 움직이고 있으나 엄연히 도는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너무도 놀란 나머지 한심이 뒤로 자빠지자 이를 이상히 여긴 여러 장인들이 한심의 눈을 따라 동천에게로 향했다가 덩달아 경악을 했다.
‘앗? 저것은?’
‘미, 믿을 수 없다!’
‘저건 소전주가 아니다!’
대충 이런 반응들을 보였다. 어느새 장내에 움직이는 사람은 동천 하나밖에 없었다. 그에 따라 맑은 쇳소리가 대장간 안을 우렁차게 울렸다. 조용하면 할수록 사람은 더욱 깊이 몰입할 수 있는 법. 동천은 미세한 부분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날을 다듬었다. 허무한 눈빛의 동천은 마침내 모든 과정을 끝내고 찌든 소매로 얼굴의 땀을 닦았다. 동천은 정신력 소모를 느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 그의 눈빛 사이로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으윽! 도저히 마주 대할 수 없는 저 기운은 뭐지? 누, 눈부셔!’
동천이 눈부심에 눈살을 찌푸릴 때 한심과 여러 장인들이 박수를 치며 다가왔다.
“소전주님! 축하드립니다!”
“하하! 드디어 결실을 맺으셨군요!”
“십 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멋진 도입니다!”
“그런 실력이 있으시면서 어찌하여 숨기셨는지요. 하하하!”
동천이 아직도 사태 파악을 못하고 어리둥절해하는 사이에 한심이 아직도 뜨거운 도를 집게로 집어서 가까이 살펴보았다.
“대단하십니다! 이 정도면 아버님도 나무라시지 못하실 겁니다! 어떻게 이런 훌륭한 도를 만드셨는지요!”
동천이 손가락으로 도를 가리키며 ‘저게 내가 만든 거야?’라고 묻자 한심과 여러 장인들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주며 ‘그래, 네가 만든 거야.’라고 답해주었다. 아직도 믿기지 않았지만 어쨌든 자신이 만들었다고 하니, 새삼스레 눈물이 샘솟았다. 찰나간 고난과 역경의 순간들이 아련하게 스쳐 지나갔다. 잠시의 침묵 끝에 동천은 평소대로 행동했다.
“오오, 놀라워라! 봐! 서기가 감도는 저 명도를!”
한심은 동천의 과장 섞인 감탄에 긴급 수정을 요구했다.
“그건 햇빛에 비춰서 그러는 건데요.”
아무래도 좋았다. 한심한 새끼가 뭐라고 지껄이던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동천은 흥분을 금치 못하며 소리를 질렀다.
“누가 어르신을 불러와!”
혈귀옹을 불러오는 건 한심의 담당이었다. 마침 무료함을 달래려 밖을 거닐고 있던 혈귀옹은 아들놈에게 믿기 힘든 소리를 듣고, 직접 찾아왔다. 동천의 도를 받아든 그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정말로 네가 이것을 만들었단 말이냐?”
동천은 만면에 미소를 띄우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물론이죠! 여기 모든 사람들이 증인이니까 물어보세요!”
혈귀옹은 동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렇다고 아우성을 치는 장인들의 말을 듣고 믿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다.
“으음. 그 동안 수고했다.”
“이얏호! 그럼, 전 돌아갈 수 있는 건가요?”
혈귀옹은 다소 아쉬운 얼굴을 하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렇다. 만검전의 전주인 내가 어찌 거짓말을 하겠느냐.”
너무나도 기쁜 소리에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동천은 그런 충동을 용케 참았다.
“그 동안 많은 가르침 감사했습니다. 당장 가도 되나요?”
혈귀옹은 도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것의 이름은 지었느냐?”
동천은 늙다리가 당연한 걸 물어본다고 생각했다.
“그럼요! 이름은 혈천도(血天刀)예요. 헤헤, 멋지죠?”
제법 괜찮은 이름이었으나 혈귀옹은 인정하기 싫은 듯했다.
“같잖은 이름이구나.”
좋았던 기분이 한순간에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윽! 가, 같잖은 이름? 이 씨발아! 그래도 네 이름보다야 천 배는 낫다!’
동천이 마음속으로 방방 뛰고 있을 때 혈귀옹이 직접 도구를 잡았다.
“나머지 마무리는 내가 해주마. 네놈이 여기에 더 머물다 갈 리는 없을 테니, 거기에서 잠시 기다려라.”
혈귀옹은 도를 손잡이에 맞춰 끼우기 위해 끝 부분을 손질한 후 제 기능을 갖춘 도를 만들어냈다. 그는 혈천도라 지어진 도를 도집에 넣고 동천에게 내밀었다.
“네놈에겐 뜻깊은 도일 터이니, 날이 상하거나 부러지면 가져오너라. 내가 손수 다듬어 주마.”
동천은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는 혈귀옹을 경계하며 얼른 혈천도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정말로 가보겠습니다. 한 당주. 자네도 잘 있게.”
“어이구, 그 동안 정도 많이 들었는데 이렇게 가신다니 섭섭하네요.”
한심은 너무나도 아쉬웠는지 쉽사리 동천의 손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이는 동천이 바라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 씨발 놈이 끝까지 늘고 물어지네? 놔! 놔, 이 인간아!’
동천이 한심의 손을 겨우겨우 뿌리치고 보니, 혈귀옹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동천으로서는 더 좋은 상황이었다. 동천은 만검전 앞까지 자신을 마중 나온 사람들에게 예의상 손을 흔들어주었다.
“모두들 잘 있어!”
동천은 벅차오르는 감동을 억누르며 마차에 올라탔다.
“이랴!”
말들은 동천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전속력으로 치달렸다. 창밖에는 그새 그쳤던 눈송이가 다시금 내리기 시작했다. 기분이 좋으면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는 법이었다. 바람결에 스쳐 내리는 눈들을 바라보니 갑자기 시상(詩想)이 떠올랐다. 동천은 온몸을 푹신한 받침대에 맡기며 낭랑한(?) 목소리로 즉흥시를 불렀다.
지나간 일들을 난 오늘 생각해본다.
돌이켜보니 아름다웠던 기억들은 없구나.
약속되었던 헤어짐을 알고서 귀옹이는 그렇게
나를 괴롭혔나보나.
그런 귀옹이의 곁을 난 오늘 훌쩍 떠나려 한다.
지옥 같은 시간이 영원할 듯 했지만, 지금 내게
남은 건 혈천도(血天刀)의 깊은 마음뿐이로다.
생각 없이 지껄인 시였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끝내주는 시였다. 동천은 기분 좋게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푸하하하! 자유다! 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