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205화
그날 밤.
긴장과 피로가 겹친 탓이었는지 노엘은 레이에게 저녁을 부탁하고는 그대로 침대에 엎드려 골아 떨어졌고 케톤은 정신이 사나운 듯 거실의 소파에 누워 몸을 뒤척거렸다. 리오는 레이가 차려준 음식으로 배를 채우며 오늘의 소모량을 보충했고 레이는 아침과는 다른 눈으로 리오의 먹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단, 린스만은 마음 편하게 샤워를 끝내고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와, 잘 먹었습니다 레이양. 이 요리 꽤 맛있는데요?”
리오는 만족한 듯 입을 닦으며 레이를 바라보았다. 레이는 고개를 굽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리오·스나이퍼 씨.”
오후보다는 듣기 좋아진 어투였다. 리오는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으음… 오래간만에 목욕이나 해볼까? 여기 욕실이 어디 있어요?”
레이 역시 일어서며 손으로 욕실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곳입니다 리오·스나이퍼 씨. 제가 등을 밀어 드릴까요?”
리오는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레이를 향해 손을 저어 보였다.
“무, 무슨 말씀을!! 저 혼자 해도 상관없어요!”
레이는 약간 빨갛게 달아오른 리오의 얼굴을 보며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이상하군요… 노엘 선생님은 등을 밀어 드린다고 말씀 드리면 굉장히 좋아하셨습니다. 저는 이곳 풍습을 따르려는 것뿐입니다 리오·스나이퍼 씨.”
리오는 한숨을 푸욱 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휴… 그거야 노엘 아줌마는 여자니까 그렇지요. 동방에서도 어른 남자와 여자가 같이 욕실을 쓰는 건 부부가 아닌 이상 뭐라고 할 텐데요…?”
“아, 그렇습니다. 제가 실례했습니다 리오·스나이퍼 씨.”
리오는 레이에게서 큰 수건을 받은 후 자신의 머리를 묶은 끈을 풀면서 욕실로 향했다. 여자들만이 사용했던 욕실이라 그런지 자신이 지금껏 사용해 왔던 천연 온천과는 다른 기분이 들었다. 목욕을 끝낸 리오는 아까부터 곤히 자고 있는 케톤의 옆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였다. 요즘 들어 제대로 된 침대를 자주 사용한다고 생각하며 리오 역시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3장 <이중 인격>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리오는 자신의 머리를 다시 묶고 거실로 나가 보았다. 어젯밤 사이 아무 일도 없었는 듯, 부엌에선 노엘의 흥겨운 콧노래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어딘가의 민속 노래겠지 생각하며 리오는 부엌 안에 살짝 들어가 보았다. 앞치마를 두르고 손수 발명한 듯한 증기 렌지 앞에서 활발히 움직이는 노엘과 조용히 앉아서 야채를 썰고 있는 레이의 모습이 꽤나 대조적으로 보였다.
“아침 준비 일찍들 하시네요? 두 잠꾼들은 두 시간 후에나 일어날 텐데요.”
뒤에서 들려온 리오의 목소리에 노엘은 꽤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어제 리오의 활약상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노엘이어서 그런지 그녀의 태도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많이 친근해져 있었다.
“어머, 스나이퍼 씨! 일찍 일어나셨군요. 근데 공주님하고 케톤이 그렇게 늦게 일어나나요? 케톤은 몰라도 예전에 제가 왕궁을 떠날 때 일찍 일어나셔야 한다고 공주님께 그렇게 당부를 했었는데….”
리오는 노엘의 입에서 왕궁이란 단어가 나오자 궁금한 듯 턱을 쓰다듬으며 의자에 앉아 노엘에게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공주님을 가르치셨다고 하셨지요? 고생이 심하셨겠네요…?”
노엘은 리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쿡쿡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훗, 공주님과 오래 있어 보신 것 같군요. 처음 한 달간은 그랬지만 공주님이 어떤 분이라는 걸 안 다음부터 굉장히 편하더군요. 때론 제가 공주님께 가르침 받은 적도 있었지요. 굉장한 말괄량이 에 거친 말투를 쓰시니 성격도 안 좋을 거라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공주님은 절대 그런 분이 아니세요. 전 그분이 레프리컨트 여왕님 이상의 큰 그릇이 되실 게 확실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리오는 의외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가만히 자신과 노엘을 바라보고 있는 레이를 흘끔 볼 수 있었다. 리오는 잘 되었다는 듯 다시 노엘에게 물었다.
“레이양과는 어떻게 만나셨어요? 처음엔 말도 안 통했을 텐데….”
레이는 자신의 이야기가 리오의 입에서 나오자 다시 칼을 들고 야채를 썰기 시작했다. 노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진 않았어요. 동방의 언어를 왕립 아카데미에 있을 때 간단히 배운 적이 있었거든요. 처음 레이·첸양은 상선 근처에서 불량스러운 선원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어요. 제가 늦었더라면 큰일 날뻔했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서방의 지식을 배우러 온 첸양과 함께 살게 되었죠. 벌써 몇 달 전의 이야기군요. 우리말도 많이 늘었어요 첸양은, 후훗….”
리오는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노엘 역시 기회라는 듯 리오에게 자신이 궁금했던 일을 묻기 시작했다.
“스나이퍼 씨는… 어떻게 그런 고위급의 검술들을 익히셨죠? 제가 아는 바로 `마법검’ 기술은 전사 혼자서 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라기아란 마녀와 대결하실 때 보여주신 검술은 레프리컨트 왕국 제일의 검술사라 불리는 <그레이> 공작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검술이었어요.”
리오는 올 것이 왔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살아남기 위해 배운 검술입니다. 제 몸으로 익혔지요. 누구에게 보고 배운 것이 아닌 저만의… 그 정도가 되기까지 많은 일이 있었으니 물어보시려면 다른 걸 부탁합니다 선생님.”
그때 리오의 표정을 본 노엘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자신이 지금까지 만나본 어느 누구보다 어두운 그늘이 그의 얼굴에 나타난 탓이었다. 침을 꿀꺽 삼킨 후, 노엘은 다른 것을 묻기 시작했다.
“…공주님과는 언제 만나셨지요?”
“어… 일주일 안되었을걸요? 됐나? 그리 오래되진 않았어요.”
노엘은 이 사나이가 린스 공주에 대해 그렇게 말한 것이 당연하다 생각했다. 린스가 어떤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지 노엘 자신이 안 것도 한 달이 넘은 후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이야기가 길어질 무렵, 케톤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집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고 그 모습을 본 노엘과 레이는 다시 서둘러 아침 식사를 만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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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날 기다리게 하다니, 역시 당신은 대단한 사람이에요 마동왕….”
씁쓸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라기아는 자신의 앞에 조용히 앉아있는 벨로크 공국의 젊은 국왕, 일명 마동왕이라 불리는 사나이에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마동왕은 얼굴색 하나 변치 않고 라기아를 바라보았다.
“…왜 노엘을 죽이지 못했나… 내 용건은 그것이다.”
라기아는 마동왕의 나지막한 말을 듣자마자 피식 웃고 어깨를 으쓱였다.
“후훗, 그럼 당신이 직접 노엘을 죽여보지 그래요? 난 당신과 계약한 일은 없으니 당신의 말을 절대적으로 따르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게다가, 그곳엔 노엘 한 명만 있는 게 아니었어요.”
마동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더한 마법사라도 있었나? 마녀 중에서 고위 직책인 너라면 노엘 따윈 몇 명이고 없앨 수 있다 생각하는데.”
그 질문을 들은 라기아는 그 말 꺼내기를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손에서 약간 큰 수정 구슬을 만들어낸 후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전투 장면을 영사기처럼 마동왕 앞에 비춰주었다. 곧, 그 구슬에선 붉은 장발을 묶어 올린 한 사나이의 모습이 나타났다. 마동왕은 의문스러운 눈동자로 비춰진 사나이와 라기아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뭔가 이 건달은…? 설마 이 녀석에게 당하진 않았겠지?”
라기아는 조소하듯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호호홋!! 당하진 않았어요, 저 사나이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몰랐을 뿐이지요. 아직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굉장한 사람이에요. 검술로서 나의 마법 공격을 깨뜨린 사람은 흔하지 않거든요. 얼굴도 꽤 잘생겼고… 호호홋.”
마동왕은 그녀의 말을 들으며 수정 구슬을 들여다보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의 솜씨를 붉은 머리의 사나이는 보여주고 있었다. 곧 마동왕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군, 후후후… 이 녀석의 이름은 알고 있나? 한 번 더 이 녀석의 솜씨를 보고 싶군… 레프리컨트 왕국을 단 혼자서 방어해낸 그 미치광이와 맞먹을까 궁금해….”
라기아는 오래간만에 웃음 짓고 있는 마동왕을 바라보며 자신의 수정 구슬을 어딘가로 사라지게 만든 후 고개를 끄덕였다.
“리오·스나이퍼라 하더군요. 호호호호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