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206화
정오가 가까워질 무렵, 린스는 노엘과 함께 레프리컨트 왕국의 수도로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무수한 그녀의 발명품과 짐을 정리하는 데엔 꽤나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리오는 리오대로 무거운 발명품들을 잔뜩 지고 노엘이 말해 둔 창고에 가져다 놓았고 케톤과 레이는 간단한 짐들을 노엘과 함께 정리하였다.
“빨리빨리 하자구 노엘. 엄마가 걱정된단 말이야.”
린스는 긴 의자에 눕다시피 한 채 노엘에게 투정을 부렸고 노엘은 공손히 고개를 끄덕이며 일을 더욱 빨리하기 시작했다. 케톤과 레이는 왕가에 대한 예의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의 생각은 린스의 행동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리오만은 달랐다. 오른쪽 어깨에 중형 증기 기관을 지고 있는 리오는 땀을 닦으며 힘든 표정으로 린스를 바라보았다.
“공주님이 도와주시면 더 빨리 끝날 거예요, 휴지통 하나라도 좀 옮겨 주세요.”
그러나 린스의 대답은 단호했다.
“싫어.”
리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창고로 향하였다. 그가 창고 안으로 사라지는 걸 본 노엘은 혀를 내두르며 케톤에게 속삭였다.
“저 사람 진짜 괴물인데? 저런 중형 기관들을 열 개가 넘게 옮겼는데 전혀 지친 표정을 안 지으니 말이야. 게다가 보통 장정 둘이 함께 들어야 할 정도의 무게인데…. 케톤도 저 나이가 되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하핫, 설마요….”
케톤은 어깨를 으쓱인 후 다시 짐을 옮기기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트립톤의 거리는 다른 어떤 도시보다 활발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항구 도시라서 당연할지 모르지만 트립톤은 달랐다. 바로 동방 사람들과 그들의 물건들이 있는 탓이었다. 처음에 트립톤 사람들은 그들을 기피하고 거리를 두려 했으나 동방 사람들의 호쾌한 성격과 서방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예절’이라는 것이 두 대륙 사람들을 친숙하게 만들어 주었다. 십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트립톤에서 동방 사람들을 뺀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 분명할 것이다.
작고 통통한 몸집에 약간 배가 죄는 듯한 푸른색 옷을 입은 동방 사람이 헐레벌떡 거리를 달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지서에 뛰어 들어가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 남자는 흥분한 탓에 동방 언어와 서방 언어를 동시에 썼고 경관들은 인상을 찡그리며 그 남자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여 경관이 냉수 한잔을 그 사나이에게 주었고, 그것을 받아 마신 그 남자는 입을 닦을 틈도 없이 또렷한 서방 언어로 소리쳤다.
“괴물이에요! 시장에 괴물들이 떼로 나타나 사람을 무차별 학살하고 있습니다! 빨리 도와주세요!!!”
그 사나이의 말 그대로 트립톤의 중앙 시장은 괴물들에 의해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산에서 코볼트 수백 마리들이 완전 군장을 한 상태로 내려와 미친듯이 사람들을 찔러댔고 거인족 몇 명이 무지막지한 몽둥이로 사람들의 머리를 쳐 한 명씩 즉사시키고 있었다. 판매용 무기를 들고 싸우는 무기상도 있었지만 수가 절대 역부족이어서 그들도 맥을 못 추는 상태였다.
거리에서 그런 심각한 일이 일어나는 것도 모른 채, 레이는 시장에 물건을 사기 위해 총총걸음으로 항구를 빠져나가 거리로 향했다.
“…?”
몇 분간 거리를 걷던 레이는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동방인의 직감은 서방인보다 빠르다는 것은 항해할 때 폭풍을 예측하는 확률로 확인되어 있었다. 레이는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며 약간 불안감이 섞인 표정을 짓고 뒤로 돌아섰다.
“키키키키킷–!!!”
그 순간, 그녀의 뒤쪽에서 코볼트들의 째지는 듯한 괴성이 들려왔고 십여 마리의 코볼트들이 피가 묻은 검을 든 채 레이를 향해 달려왔다. 레이는 곧바로 항구 쪽을 향해 뛰기 시작했으나 산이나 들판에서 뛰어만 다니는 코볼트들을 떨어뜨리기는 매우 힘들었다.
“키이이잇!!!”
계속 도망치던 레이의 하얀 옷의 뒤쪽을 코볼트의 검이 스치고 지나갔고 레이는 순간 섬찟함을 느꼈다. 코볼트들은 검을 휘두르는 것으로 끝내지는 않았다. 긴 장대를 손에 든 코볼트는 장대를 이용해 레이의 다리를 걸었고 결국 레이는 바닥에 쓰러져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
코볼트들의 비릿한 털 냄새가 레이의 코를 자극해 왔다. 코볼트들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레이를 둘러싼 채 내려다보았고 곧 검을 치켜 올리며 레이를 조각낼 것만 같은 자세를 취하였다.
“키이이이잇–!!!!!”
자신이 옮길 큰 물건들을 거의 다 처리한 리오는 수건으로 자신의 얼굴과 목을 닦으며 바람이 불어오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오래간만에 이런 `평화로운’ 분위기를 느껴보는 듯했다. 한참 분위기를 잡고 있을 무렵, 노엘이 안경을 닦으며 리오에게 다가와 불안한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스나이퍼 씨, 뭔가 이상한 느낌 들지 않아요?”
한참 노동에 몰두하던 리오라서 그 질문엔 확실히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몸을 닦던 수건을 목에 걸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시장 쪽에 시선을 잠시 멈춘 리오는 어깨를 살짝 으쓱이며 말했다.
“글쎄요… 전 잘….”
그때, 누군가의 고함 소리와 사람들이 몰려드는 소리가 둘의 귀에 들려왔고 노엘은 안경을 바로 쓰고서 사람들이 웅성이고 있는 장소로 말도 없이 달려갔다. 그녀가 멀리 사라지자 리오는 곧 정색을 하며 검을 놔둔 노엘의 집으로 뛰어갔다.
“레이양이 위험할지도… 모르겠는데?”
집의 문을 열자마자 소파에 앉아있던 린스가 들어오는 리오를 보고 잘 됐다는 듯 그를 불러 세웠다.
“앗, 마침 잘 왔어 꺽다리. 방 안에 있는 베개 좀 꺼내다 줘. 너무 지루해서 말이야, 아하암….”
리오는 씁쓸히 웃으며 근처 벽에 기대어 놓은 자신의 검을 슬쩍 바라본 후 침실로 들어가 베개를 찾아가지고 나와 린스에게 두 손으로 공손히 건네준 후 검을 가지고 집 밖으로 나섰다.
“어디 가는 거야 꺽다리? 그것도 검을 가지고….”
베개에 머리를 대고 편한 자세로 리오를 바라보고 있는 린스를 보며 리오는 한쪽 눈을 찡긋 감아 보이며 대답했다.
“운동 좀 하게요. 공주님은 여기 편안히 계세요, 다녀오겠습니다.”
리오가 문을 닫고 나간 후 갑자기 집안이 조용해지자 린스는 괜히 눈살을 찌푸리며 짜증을 부렸다.
“쳇, 조용한 건 싫어!!”
“키…키킷…!?”
코볼트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서있는 진홍색 머리의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에 의해 동료들의 목숨이 벌써 일곱 개가 날아가 버린 탓이었다. 그녀-뚜렷한 이목구비에 검붉은색이 도는 눈동자, 그리고 뒤로 한 번 묶어 내린 진홍색 머리채를 가진 그 미인은 일부러 짧게 찢은 듯한 흰색 치마에 소매가 떨어져 나간 넓은 상의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굳게 거머쥔 자신의 주먹을 코볼트들에게 향하며 입을 열었다.
“어서 와!! 감히 내 동생을 괴롭히려 하다니!!!”
꽤나 거친 말투였다. 코볼트들은 빠르게 이동하여 그녀를 넓게 포위하였고 점점 그 간격을 좁히기 시작했다.
“치잇! 포위한다고 날 이길 것 같아!! 미안하지만 그렇게는 안 돼!!!”
그녀의 외침과 동시에 코볼트들은 괴성을 지르며 그녀에게 달려들었고 거의 녹슬다시피 한 코볼트들의 검이 몸에 닿기 직전 그녀는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코볼트들의 검은 모조리 빗나가 버렸고 코볼트 한 마리의 머리 위로 그녀의 무릎 찍기가 작렬했다. 급소를 정통으로 가격당한 코볼트는 입과 코, 그리고 귀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져갔다. 곧이어 그녀의 날카로운 발차기가 코볼트들의 정수리를 노리고 허공을 갈랐고 가격당한 코볼트들은 하나둘씩 바닥으로 나자빠졌다.
건물 창문에 숨어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꽤 잘 다듬어진 그 수수께끼 미녀의 몸매와 무술을 감상하며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 보았다.
쿠우우웅–!!!
그때, 지축을 울리는 발자국 소리가 거리 저편에서 들려왔고 주민들과 수수께끼 미녀는 그쪽을 바라보았다. 곧 거대한 그림자가 사람들의 피를 몸 여기저기에 묻힌 채 걸어왔고 모든 사람들은 경악에 찬 표정을 지었다.
“사, 사이클롭스!?”
이야기책에서만 등장한다고 모든 사람들이 생각해 왔던 난폭한 거인족, 1000년 전에 사라졌다 생각한 외눈박이 거인 사이클롭스는 괴이한 형태의 거대한 곤봉을 들고 자신의 앞에서 무술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진홍색 머리 여자를 내려다보며 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크우우… 마동왕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자… 죽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