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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 나이트 – 231화


리오와 레이는 서로가 아무 말 없이 거리만 구경하며 나란히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하아아암… 아, 죄송.”

말이 없자 지루함을 느낀 듯, 리오는 하품을 연발하고 있었고 레이는 그때마다 고개를 숙였다. 표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내심 리오에게 미안해하고 있는 것이었다.

“… 돌아가시겠습니까 리오·스나이퍼 씨?”

레이는 결국 돌아가자는 말을 했고 리오는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레이에게 말했다.

“이 도시의 반도 아직 보지 못했잖아요. 그리고 한 가지 말씀드리겠는데요, 여긴 동방이 아니에요. 그러니 ‘외간 남자’인 저에 대해서 그렇게 불편함을 느끼실 건 없어요 레이 양. 만난 지 하루 이틀도 아닌데 제 마음이 어떻고 하는 재미없는 얘기만 하면 어떻합니까. 그냥 친구처럼 대해주세요. 케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도요.”

레이는 가만히 리오를 바라보다가 눈을 지그시 감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 리오·스나이퍼 씨는 바람둥이 기질이 있으시군요.”

레이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튀어나오자 리오는 깜짝 놀라며 레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약간 발그레해진 얼굴로 계속 말을 이었다.

“… 여자의 마음을 너무 쉽게 감동시키시니까요.”

리오는 멋쩍은 듯 머리를 긁다가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레이는 총총걸음으로 리오의 옆에 아까보다 더 가까이 붙어 같이 길을 걸었다.

“… 가족은 없으십니까, 리오·스나이퍼 씨?”

“가족은… 남자 형제 둘이랑 여동생 한 명이 있어요. 레이 양은요?”

“저와 언니, 물론 케이 언니입니다. 그리고 오빠 한 분과 부모님 두 분 모두 계십니다.”

부모님이라는 말을 들은 리오는 먼 하늘을 잠시 바라보다가 아무 생각 없이 레이에게 물었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건… 좋은가요?”

레이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리오를 바라보았다. 쓸쓸한 웃음을 지은 채 자신의 앞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레이는 다시 미안함을 느꼈다. 레이는 고개를 숙이고서 나지막이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리오·스나이퍼 씨… 제가 괜한 질문들 드렸군요.”

리오는 의아한 표정으로 지으며 레이를 바라보았다.

“예? 미안하실 건 없어요 레이 양. 전 오히려 좋았는걸요, 꽤 오래간만에 부모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어요. 거의 잊고 있었는데… 후훗.”

리오는 자신의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어 보았다. 그때마다 그의 긴 머리가 파도처럼 출렁거렸고 그로 인해 그의 붉은 머리색은 더욱 돋보였다. 하지만 레이에겐 리오의 그 모습이 지금까지 본 어떤 사람의 모습보다 쓸쓸하고 슬퍼 보일 수가 없었다. 그녀의 직업이 무녀인 탓인지, 아니면 모성 본능에서 나오는 측은함인지….

“제가 열세 살 때인가…? 아버님께서 어떤 악인들에게 목숨을 잃으셨고 어머님은 노동에 시달리시다가 절 만나신 후 바로 숨을 거두셨죠.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땐 그분의 복수에 감정을 누그러뜨릴 수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어머니께서 돌아가실 때 전 그리 슬퍼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전에 저와 알고 지내던 사람들의 죽음을 너무 많이 보아와서 그런진 몰라도…. 그분들의 죽음 사이에 저와 꽤 친했던 또 한 명의 죽음이 있었죠. 요정족 중 일부인 엘프족의 여자였는데 굶어 죽을 뻔한 절 살려준 은인이었고 저 대신 목숨을 잃었죠. 후훗… 다 지나간 일이 되었지만 아직도 후회가 되는 일이죠.”

“… 그 여자분을 사랑하셨나요?”

계속되는 리오의 옛날 얘기에 레이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덧붙였다. 리오는 한숨을 길게 쉬어본 후 고개를 살짝 저어 보였다.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저에게 사랑이란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요.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언제까지고. 그런 탓인지 기억이 잘 안 나는군요.”

그러나 레이는 읽을 수 있었다. 방금 전의 대답 한마디 한마디엔 누군가에 대한 미안함이 깃들어져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일부러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는 리오의 노력을.

“… 알겠습니다 리오·스나이퍼 씨.”

리오와 레이는 한 시간 후 일행이 자고 있을 여관으로 돌아갔다.

리오에겐 안으로나 밖으로 변한 점을 찾아볼 수 없었으나 레이는 달랐다. 린스 공주가 어째서 리오·스나이퍼란 사나이에게 잠꼬대를 할 정도로 푹 빠져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밤, 레이는 자신을 겨우겨우 진정시키고 나서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가슴이 두근거린 날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속에 있는 케이는 목석인 네가 웬일이냐고 빈정댈 정도였다.

그런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오는 일주일 만에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그가 아무리 전투에 관해서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더라도 그도 잠은 자야 했다.

일주일간의 숲속 강행군은 모두에게 힘든 일이었다. 오늘 아침 부로 끝나긴 했지만 린스와 노엘은 꿈속에서 아직 숲을 헤매고 있는 듯,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었다.

붉은 머리 남자와 검은 생머리의 여자가 여관 안으로 들어간 것을 본 리마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알긴 알았는데, 다음에 어떻게 할 거지? 가브를 힘으로 이긴 남자에게 어떻게 이긴다고 그러는 거야, 말도 안 돼.”

테크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리마였다. 그녀 자신도 처음엔 믿지 않았지만 강철제 건틀릿의 파편을 본 후로 그녀의 생각은 싹 바뀌어졌다. 로드 덕 노인이 말한 그대로, 붉은 머리의 사내가 입신의 경지에 들어선 전사나 기사일 것 같은 생각이 그녀에게도 들었다.

“… 알아서 하겠지 뭐. 우리 아르센 지방에선 현자라고 칭해지는 할아버지이고 테크 역시 머리가 잘 돌아가는 녀석이니까. 나보다 나이는 어린데 꽤 똑똑하단 말이야?”

그래봤자 한 살 차이였지만, 리마는 테크를 무엇이거나 이기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직접 전투는 결국 따라가지 못했지만 미행술이나 함정 설치, 날으는 도구의 사용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자신있는 이유는 아르센에서 최고라 칭해지는 전설적인 암살자의 제자 중 한 사람이라는 것 하나였다. 물론 암살자의 마지막 수업을 성공하지 못해서 쫓겨나긴 했지만, 그녀는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여신들을 물리칠 용사를 뽑는다는 로드 덕의 말을 듣고 제일 처음 지원했다. 그녀의 목적은 사실 여신의 처단 같은 거국적인 것이 아니었고, 로드 덕이란 현자를 따라 레프리컨트 왕국뿐만 아닌 많은 지역을 돌아보고 싶은 충동에서였다.

“아아… 늦었네, 그 남자하고 여자는 괜히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만 하고 말이야, 힘 빠지게… 빌어먹을.”

리마는 이리저리 투덜대며 자신의 일행이 묵고 있는 여관에 당도했다. 붉은 머리의 남자가 있는 여관과는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는 여관이었다.

“헤헹, 내일은 재미있어지겠는걸? 기대기대… 호호호홋!”

리마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여관 안에 뛰어들어갔다. 다음날은 진짜로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느낌이 그녀에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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