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281화
“어디 갔다 왔어? 꽤 오래 나간 것 같은데….”
마키는 침대에 털썩 쓰러진 지크에게 넌지시 물어보았고 지크는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왕궁에 갔다 왔지… 가서 고생만 바가지로 하고 왔단다. 젠장… 괜히 힘만 뺐잖아?”
마키는 머리에 감고 있던 터번을 다시 풀며 자신의 침대에 누웠다. 둘은 가만히 누워 시간만 보내기 시작했다.
“…너, 누구 좋아해 본 적 있냐?”
지크는 앞으로 누운 상태로 마키에게 물었고 마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아니, 내 나이가 몇인데… 좋아하는 여자 따윈 없어.”
“…푸훗!”
그 말을 들은 지크는 피식 웃어 버렸고 그 웃음 소리를 들은 마키는 지크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이봐! 사람이 진지하게 대답했으면 진지하게 받아줘야지! 네가 그럴 때마다 난 싫어!!!”
그 말을 계속 듣고 있던 지크는 고개를 돌려 마키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미안해 그럼.”
마키는 지크가 갑자기 의외의 말을 하고 나오자 깜짝 놀란 눈으로 지크를 바라보았고 지크는 다시 얼굴을 묻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난… 한 4개월 전인가? 여자애 하나를 알고 있었어. 파란 머리에 순진한 얼굴을 한 애였지. 내가 애라고 해서 날 이상한 녀석으로 보진 마. 그 앤 열아홉쯤 되었으니까. 하긴… 어떤 나라에선 미성년자라고 하긴 하지만. 어쨌든… 그 앤 속사정이 좀 있는 녀석이었지. 결국 할아버지 뻘 되는 사람에게 예전에 지은 죄의 용서를 빌러 가버렸어. 오랜 시간 동안 외롭게 지내온 녀석이었지… 다시 만나려면… 꽤… 오래 있어야 할 거야… 헤헷.”
지크의 말을 다 들을 동안 마키는 측은한 얼굴로 지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이 이렇게 이상한 일 역시 처음이었다.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야, 그만 불 끄고 자자….”
“아, 알았어.”
마키는 방 안에 켜져 있는 모든 등불을 끄고 다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였다. 불이 꺼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마키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지크가 누워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지크가 지금 같이 약해 보이는 적은 처음이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 아냐. 암살자에겐 정이란 필요 없어. 냉정해라 마키…!’
“…너 가족 있냐?”
“으응!?”
생각하는 도중이었던 마키는 지크가 조용히 물어오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큰 소리를 냈고 지크는 다시 마키에게 물었다.
“…가족이 없다면, 너 암살자 되는 거 포기해.”
“뭐? 어째서!”
부스럭 소리와 함께 지크가 돌아눕는 소리가 마키의 귀에 들려왔다. 곧 지크는 말을 이었다.
“가족이 없는 사람은 마음 깊은 곳에서 ‘정’이란 감정을 끝없이 요구하게 되어 있어. 정작 정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래서 가족이 있는 사람을 죽이려고 하면 그 가족의 모습을 보고 정신이 흐트러져 결국 임무를 실패하게 되지. 정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만이 거부를 하고 자신의 마음속에서 정을 지울 수 있는 거야. 내 형제 중에 그런 녀석이 있지. 들려줄까?”
“으응….”
후우 하는 한숨 소리와 함께 지크의 긴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그 녀석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여자들과 상대를 했지만 정작 마음을 준 여자는 딱 두 명이었어. 어린 그 녀석을 살려준 엘프족인가… 하는 요정족의 여자와 어떤 나라에서 우연히 만난… 이름이 뭐였더라? 레… 뭐였는데, 하여튼 그렇게 두 명의 여자와 사랑에 빠질 뻔했지. 그런데… 그 여자 중 처음 한 명은 그 녀석 대신 죽었고 다른 한 명은 그 녀석이 직접 죽였지. 그 정도면 아마 사랑이란 감정은 꼴도 보기 싫어졌을 거야. 근데… 네가 믿을지 모르겠지만 두 번째 여자가 환생을 한 거야. 그러나 그 녀석은 정작 누군지 몰랐지. 결국 그 여자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버렸고 그 녀석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어. 하지만 그 대가로 그 녀석은 더욱 강해진 것 같아. 마음속에 둘 것이 없어졌으니 그런 거겠지. 너에게 그 녀석 같은 경험을 요구할 수는 없을 거야, 어떠한 스승이라도… 하지만 너 스스로 정이 무엇인지 깨달으면 자신의 감정을 언제나 냉정히 할 수 있을 거야. 물론 머리 좋은 녀석에 한해서인 방법이지만. 에휴… 더 이상 말할 힘도 없다. 나 내일 아침에 깨우지 마, 알았지?”
어두워서 보일 턱은 없었지만 마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크의 숨소리는 어느샌가 조용해졌고 마키는 눈을 반짝이며 새벽까지 계속 어떤 생각을 곰곰이 하였다.
다음날 아침, 루이체는 지크가 늦게까지 일어나지 않자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지크의 방으로 가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지크는 어제 잠든 모습 그대로 자고 있었고 마키는 누에고치처럼 이불을 몸에 두른 채 계속 잠에 빠져 있었다.
“치잇, 오늘은 봐 주지. 근데 마키 씨도 왜 이렇게 늦게까지 자는 거지? 이상하네?”
루이체는 조용히 문을 닫고 방을 나섰다.
13장 [귀환]
린스의 길 안내에 따라 리오 일행은 생각 외로 길이 잘 닦인 숲 안쪽을 걷고 있었다. 린스의 말에 따르면 그들이 걷고 있는 길은 왕실 사람들만이 알고 있는 왕국 지름길이라는 것이었다.
리오 일행은 많이 줄어 있었다. 로드 덕 일행이 빠져 있는 탓이었다. 그들은 수도로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리오 일행과는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만 했다.
“…테크 녀석, 괜찮을지….”
케톤은 걱정 어린 표정으로 가브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망연자실해하는 테크의 모습을 떠올리며 한숨을 지어 보았고 그 중얼거림을 들은 리오는 아무 말 없이 린스의 곁에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이 길에선 마력은 느껴지지만 괴물들의 살기는 느껴지지 않는군요. 꽤 강력한 마력 결계가 쳐져 있는 것 같은데요?”
“응, 옛날 옛날에 어떤 대마도사가 이 길을 만들면서 길 주위에 아무도 보지 못하고 들어올 수 없는 결계를 쳐놓았대. 뭔 결계인지는 모르겠지만.”
린스의 말을 들은 리오는 턱에 손을 가져가며 놀랍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야… 그런 것도 알고 계셨네요?”
린스는 인상을 팍 찡그린 채 리오를 바라보며 말했다.
“날 바보 취급하는 거지?”
그렇게 계속 걷던 일행 앞에 길의 끝이 나타났고 린스는 숲 안으로 들어가며 일행에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어서 들어와. 이 숲 건너편에 마을이 있으니 거기서 쉬어 가자구.”
린스의 안내로 숲을 빠져나간 일행은 어떤 언덕에 서게 되었고 각자 언덕 아래에 보이는 작은 마을을 바라보며 감탄을 연발했다. 단, 리오만 제외하고.
“…리, 린스 공주님. 다, 다른 마을로 가시죠… 시간도 아직 많은데….”
“웃기지 마! 내가 쉬자면 쉬는 거야!! 자, 어서 내려가자구!”
리오는 계속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가기를 꺼려했다.
“그, 그러면 전 다른 곳에서 노숙을 할 테니….”
“안 돼!! 도망가려고 그러지!”
린스와 리오가 그렇게 실랑이를 할 무렵, 동네 아이들로 보이는 여럿이 언덕에 놀러 올라오다가 리오 일행이 있는 것을 보고 잠시 주춤했다. 아이들의 얼굴을 잠깐 둘러본 리오는 침을 꿀꺽 삼키며 뒤로 돌아섰고 다른 일행들은 리오의 행동이 오늘따라 이상하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표 격으로 노엘이 그에게 물었다.
“스나이퍼 씨, 왜 그러세요 오늘? 어디 열이라도 있으신가요?”
우물쭈물하고 있던 아이들 중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14세 정도의 여자아이가 저쪽 일행에서 ‘리오’란 말이 나오자 깜짝 놀라며 리오에게로 뛰어가기 시작했고 리오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 내리며 다 끝났다는 표정을 지었다.
“리오 기사님!! 역시 돌아와 주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