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들어라.
‘풍신(神)’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연을 인간의 몸으로 체현하는 것이다.
인간의 몸을 자연과 동조시켜 가장 강력한 힘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풍신은 기술의 범주를 초월한 기술이다.
그것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고 장대한 힘이다.
비뢰도(飛刀
최종비전오의(最終秘傳奧義)
풍신발(發動)!
그 순간 비류연의 눈이 번쩍 떠졌다.
비류연의 전신에서 엄청난 힘이 방출되면서
나선으로 얽혀 있던 기가 거대한 용권풍이 되어 포효하기 시작했다.
주위의 자갈과 먼지가 날뛰는 용권풍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 이것이 인간의 기술이란 말인가?”
노학 잠행
‘젠장! 젠장! 젠장!’
마음의 바닥[心底]을 뚫고 분출된 욕과 불평불만의 혼합 용천수는
멈출 기색이 일절 없는 모양이었다.
노학은 불같이 분노했다. 현 사태의 원인이자 결과인 ‘당사자 앞에서는 감히 기를 못 펴던 이 분노란 녀석은, 아무도 보지도 듣지도 않다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 지 않았다.
“크오오오오오! 이 소화자 님께서 전생(前生)에 무슨 업(業)을 쌓았기에 요딴 시각 이딴 장소에 덩그러니 방치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냐고! 왜!’
노학은 시랑(狼)처럼 그르렁거렸다.
어둠이 갈아먹다 남긴 ‘언월’의 편린(片鱗)과 별의 운행이 지금은 세상 사람 대부분이 감미로운 잠의 품에 안겨 있을 시각임을 간접적으로 지각시켜주고 있었다. 때를 놓치고 있다는 것, 일상(日常)이라 불리는 순환(循環)적 흐름에서 소외되어 있다는 것은 매우 큰 불행이었다. 특히 그것이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한 것일 때 는 더욱더!
‘왜?’
목이 쉬어도 좋았다. 찢어져도 상관없었다. 당연한 권리였다. 소리쳐 한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를 옭아맨 상황은 이런 미미한 자위(自慰)조차 허락지 않았다. 왜냐고? 제기랄! 이유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거지라는 신분의 소유자라서가 아니었다. 나이 때문도 아니었다. 퍼석퍼석하게 메마른 마음이 용기를 짜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대사형에게 덤벼들 용기, 거역하고 대항할 결의가 부족했던 것이다. 동료들이 들었다면 ‘만용(蠻勇)’이라 고개를 흔들었을 바로 그 용기 가!
‘하지만…….’
지난 삼 년 동안 이런 상념’을 품었던 이가 비단 자신만은 아니었음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대사형으로부터의 해방! 그로부터 발생하는 무한한 자유!
상상만으로도 뇌 속으로 마약이 분비되는 듯한 열락(悅樂)이 심신(心身)을 휘감는다. 허나 정신의 바닥 전면에 걸쳐 빈틈없이 적층되어 있는 이 앙금은 아직 한 번 도 수면 밖으로 나와 밝은 빛을 보지 못했다.
방법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날, 희생양을 선별(選別)하는 과정은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매우 경건하고 신중하게 진행되었다. 지옥의 문 앞에 빙 둘러 모인 주작단원들은 모두 침묵의 서원 을 세운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에 비장한 기운이 떠올랐다.
“그럼 시작할까?”
현운의 말이 시발점이 되었다.
“가위 바위 보!”
“가위 바위 보!”
“보!”
“보!”
“보!”
심혈을 기울인 서른여섯 번의 반복 작업 끝에 겨우 희생양이 탄생되었다. 지옥의 문을 가장 먼저 두드리고 염라왕의 분노를 제일 처음 맞닥뜨릴 사람으로 남궁상 이 정해졌다. 동료들은 친구를 애도하며 마음속으로 장문의 제문(祭文)을 낭독했고, 그의 봉분에 세울 비문(碑文)을 궁리했다.
“나쁜 놈들, 얼굴 관리들 좀 해라! 속 다 보인다!”
남궁상으로서는 안도감과 해방감에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실룩실룩한 친구들에게 지킬 의리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위가 뒤집혔는지 속이 쓰려왔다. 그는 매 우 못마땅한 시선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조금만 건드려도 화상을 입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배후(後)에서 친구의 가면을 쓴 배신자들은 눈빛으로 자 신의 등을 떠밀고 있었다.
똑똑똑!
마침내 용기를 쥐어짜낸 남궁상이 문을 두드렸다.
방 저편에서 대사형 비류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 화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마음은 천근 바위에 짓눌린 듯 무거웠다.
“들어와!”
“흐흠… 흐흠… 흐으음…. 재미있군, 아주 재미있어.”
비류연이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남궁상, 현운, 진령, 당삼, 당문혜, 일공, 청문, 조천우, 이자룡, 금영호, 단목수수, 화설옥, 황보우연, 노학, 남궁산산, 모용휘. 누구 하나 남 부럽지 않은 신분과 배경을 지닌 이들이었지만, 비류연을 앞에 둔 그들의 얼굴은 긴장으로 잔뜩 굳어져 있었다. 자칫 경계를 소홀히 했다가는 잡아먹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평소라면 비류연의 호출을 어떻게든 피해보려고 애쓰는 그들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자신들을 하나로 묶은 모종의 용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단체 방문한 터였다.
대표로 용건을 전한 사람은 남궁상이었고, 그 용건을 들은 후 비류연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자신이 전해들은 말을 음미하기라도 하듯.
“흐흠, 그러니깐 ‘간단히 말해 너희 자신이 독립된 하나의 자아임을 증명하고 싶다 이거지?”
‘어렵게를 잘못 말한 거겠지!’라고 생각했지만 현명하게들 그걸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예!”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던 주작단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천관도(天館徒)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면서도 대사형 비류연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고 마는 그 들이었기에, 그 괴리감을 끝내 견디지 못하고 드디어 나선 것이다. 자신들을 인정해달라! ‘그것이 이들이 함께 내건 조건이었다. 그런데 대표로 희생양 한 마리만 제단에 바치지 않고 열여섯 명 몽땅 온 것을 보면 아직 무의식적인 공포를 극복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흐, 흐으음…..”
비류연은 매우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주작단 열여섯 명의 면상을 두루 훑었다. 드디어 때가 된 것일까? 제대로 된 제자라면 스승의 품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본 능이 있어야 한다. 그 정도 기개도 지니지 못한 의지박약한 놈은 요절을 내든가 파문을 시킨든가 무슨 수를 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순순히 용납하지 않는 것 역시 사부된 자의 도리! 사부는 절벽에다 제자를 밀어 떨어뜨리는 존재지, 끌어 올려주는 존재가 아니다. 손이 없나 발이 없나! 초죽음이 되더라도, 엉망진창 누덕누덕 덕지덕지가 되더라도, 바락바락 기어 올라오는 것은 제자 본인의 몫이다. 물론 현재 비류연의 신분은 노사부가 아니었고, 이들의 숨겨진 진의 역시 그쪽 방면은 아 닌 듯하지만, 어쨌든 그는 제자이자 사제들인 이들의 의도에 적극적으로 동조해줄 의무가 있었다.
비류연은 예상외로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 해주지!”
순간 팽팽했던 긴장감이 폭발적인 기쁨의 탄성으로 화해 마구잡이로 분출되어 나왔다. 하지만 이들의 기쁨을 순간 이상으로 유지시켜줄 만큼 비류연은 자비롭지 않았다.
“단!”
한 마디의 단호한 목소리가 그들의 기쁨에 찬 환희를 단숨에 반 토막 냈다.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조건…이요?”
남궁상이 대표로 반문했다.
“물론! 이 세상에 공짜가 있다고 생각하냐? 뭔가를 얻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지. 그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因果)의 법칙(法 則)이자 등가교환(等價交換)의 법칙 아니겠느냐?”
씨익!
비류연의 입가에 불길한 기운이 풀풀 날리는 미소가 그려졌다.
남궁상을 위시한 열여섯 명의 주작단원은 ‘정말이지’, ‘될 수 있으면’, 그 조건이라는 것을 모르고 넘어갔으면 싶었다.
남궁상이 좋아서 대표역을 자처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서로가 대표직을 안 하겠다고 이리저리 미루다 보니 그 와중에 가위바위보 실력이 모자라 이렇게 된 것뿐 이었다. 다들 대표역을 무슨 저승행 일착 보증수표쯤으로 여기는 듯했다. 그리고 그것은 솔직히 현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자신과 같은 구룡의 한 명이자 책임분담의 미덕을 내팽개친 무당말코 현운을 향해 불만스런 시선으로 힘껏 한 번 째려봐주었다. 친구라는 말 앞에 ‘이전’이란 단어를 붙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면서…….
“무, 무슨 조건이죠?”
밀리는 기색이 역력한 ‘궁상’을 그의 연인 진령이 거들며 대신 물었다. 하지만 사랑의 힘으로 악(惡)을 물리치기엔 그 사악함이 너무나 거대했다.
“증거를 보여야지!”
당연한 걸 뭣 하러 물어보냐는 말투였다.
“증거요?”
“그래, 증거!”
웃고 있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구름처럼 가벼웠던 기풍이 느닷없이 바위처럼 무거워졌다. 비류연이 물었다.
“네가 너임을 너는 스스로 증명할 수 있겠느냐?”
제사(祭祀)를 집전하는 제사장 같은 깊은 울림을 지닌 목소리가 비류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의 평소 목소리로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장중한 목소리였다.
“너희 개인의 정체성을 확립確立)했다고 자신하느냐?”
다시 한 번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깊게 생각해본 뒤의 대답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그래도 그들은 젊었고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비류연은 이 뜨거운 젊음 의 열기에 찬물을 끼얹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자신도 마찬가지로 젊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대답은 잘하는구나! 하지만! 말은 목젖을 울리고 혀를 놀려 내뱉기만 하면 되는 덧없는 것! 반면 행동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좋다! 그렇게 자신 있다면 증명해 보여라. 너희가 스스로 자신을 확립했음을,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홀로 설[立] 수 있음을!”
증명(證明)!
매우 편리하게도 무인에게 있어 자기 증명 수단은 단 하나뿐이었다. 이쯤에서 주작단원들도 그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대사형! 그, 그 방식은 저희에게 너무 불리합니다!”
진령이 항의했다. 나머지도 그녀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있음이 확연했다. 사실 비류연을 무력으로 제압할 만한 능력이 있었다면 이런 상황까지 오지도 않 았다. 아무리 봐도 승산이 없었다.
“기회를 주지! 치사하다는 소린 듣기 싫으니깐.”
그럴 작정이라면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단지 그의 귀에 전해지지 않았을 뿐이지, 아마 수천 번도 더 사람들 입에 오르락내리락했으리라.
“기회요?”
“그래! 한꺼번에 덤벼도 좋다!”
“전부요?”
“그래, 전부!”
“열여섯 명 모두?”
“그래, 열여섯 명 모두. 아픈 사람 있으면 다 나은 다음에 해도 좋다. 일 끝난 다음에 시시한 변명 듣고 싶진 않거든.”
“진검(眞劍)으로요?”
그 질문에 대한 대가로 남궁상은 머리에 따끈따끈한 혹 하나를 달아야 했다.
“장난하냐? 당연히 진검 승부지. 장난감 가지고 어떻게 제 실력을 발휘해?”
아무래도 진심인 모양이었다. 남 보기에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는 저 터무니없는 자신감. 과연 안하무인의 화신 다웠다.
그렇다면 해볼 만했다. 나락까지 떨어졌던 절망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희망으로 변신해 다시 기어나왔다. 삼 년 전과는 틀렸다. 그들도 지난 삼 년 동안 막강한 타의와 적극적 자의를 통해 단련에 단련을 거듭해왔던 것이다. 무수한 사선도 거쳤다. 그때의 말랑말랑한 애송이들로 보면 곤란했다. 이제 그들이 얼마나 달라졌는 지를 보여줄 때였다. 약간의 쓴 맛과 함께!
“좋습니다, 대사형!”
그들이 동의했다. 그 정도 조건이라면 승산이 있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단, 조건이 있다.”
비류연이 다시 말했다.
“또 조건입니까?”
당장에 불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이미 불안에 휩싸인 채 오돌오돌 떨고 있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십육 대 일은 너무 불리하잖아. 그래서 나도 조력자를 하나쯤은 써야지. 게다가 그쪽 역시 너희들에게는 스승이나 마찬가지잖아. 그러니 그쪽 스승 역시도 뛰어 넘어야 하지 않겠어?”
“그, 그 말씀은…….
그 조력자라는 게, 설마 그 사람이란 게 염도 노사님을 가리키는 건 아니겠죠?”
불안과 초조가 한데 뒤섞인 남궁상의 질문에 나머지 단원들의 안색이 대변했다. 그런 최악의 전개는 사양이다.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음에 분명했다. 그딴 전개 는 상상만하는 것으로도 정력이 쇠잔하는 악몽(惡夢)이었다.
“아니, 그 사람 맞아.”
그러나 비류연은 서슴없이 순진무구하게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그들의 기대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어? 안 그래?”
‘차라리 입만 산 허풍쟁이였으면 좋았을 것을…….?
최저최악(最低最惡)을 날마다 갱신(更新)하는 학관 내의 평판과는 달리 그들의 대사형은 단순한 빈껍데기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더 큰 문 제였다. 그들은 소문의 허위성을 기뻐할 처지가 못 되었던 것이다.
자기증명(自己證明)!
그 결과에 대해서는 두 번 다시 떠올리는 것조차 끔찍했다.
‘대사형 비류연! 약관 이십일세! 무공 불명. 사문 불명. 내력 불명.’
알고 지낸 지 이 년이 넘었지만 알아낸 것은 거의 없었다. 터무니없이 위험한 남자라는 사실만 빼고. 그는 소문이란 게 얼마나 실체와 멀리 떨어질 수 있는지 보여 주는 좋은 예였다.
동료들이 손발을 봉하는 동안 궁상이와 말코도사 현운이 그동안 연마한 비장의 합격술을 펼친다고 달려들었다가 삼 주 반 동안 병상 신세를 져야 했다. 그나마 나 머지는 전치 이 주로 끝낼 수 있었다.
왜 귀찮다고 염도 노사까지 불러오는 거냔 말이다. 그러면 반칙 아닌가? 하지만 패자 유구무언이라 했으니, 그들은 감히 불평할 수 없었다.
증명 실패(證明失敗)! 인증 불가(認證不可)! 그리고……..
쫄따구 계속 결정!
결론은 그렇게 났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아직 한 번도 행동으로서 자신들을 증명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작은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다.
노학은 지금 자신의 처지와 길거리에 구르는 돌멩이 중 어느 것이 더 나은지 증명할 자신이 없었다. 그것은 매우 슬프고 비참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이 정 말 한심해졌다.
‘그 정도 기개도 능력도 없었으니 지금 이렇게 마천각 놈들 불침번이나 서주고 있는 거겠지.’
이 짓도 벌써 이 주일. 이때까지는 아무런 징후도 찾아볼 수 없었다.
딸깍!
그때 지극히 예민하게 개방되어진 그의 귀에 미약한 울림 하나가 감지되었다.
‘응? 이 소리는!’
노학은 얼른 상념을 끊고 다시 숙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끼이이이익!
이 주일 동안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문이 조심스레 비밀스런 신음을 토하고 있었다.
“드디어 움직였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두 사람이었다. 아마 대공자 비가 속한 1조의 조원이 분명하리라.
‘그러고 보니… 나도 1조였지…….?
새삼스럽게 그 사실을 상기하며 노학은 신경을 집중했다.
대공자 비, 확실히 그자는 괴물이었다. 어쩌면 비류연과 동류의 인간인지도 모른다. 뭐, 그래도 그쪽은 이쪽에 비해 실속이 있는 것 같지만… 속을 알 수 없다는 점 에서 둘은 똑같았다.
‘쳇, 너무 멀군.’
거리가 멀어 누구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알아낸 것이라고는 두 사람 다 남자라는 쓸데없는 정보뿐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부터 천천히 한 꺼풀씩 벗겨가며 알 아내면 될 일이었다.
“드디어 나도 따뜻한 방에서 잘 수 있게 되는 건가!’
지극히 소박한 소망을 꿈꾸며 노학은 밤의 그림자에 몸을 숨긴 채 조심스레 두 사람의 뒤를 밟았다.
“어디까지 가는 거지??
그들은 매우 용의주도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동 시 소음을 내는 따위의 짓을 할 만큼 그들이 어리석지 않다는 것은 분명했다. 이십 장씩 전진할 때마다 사방을 경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멈출 때는 주변으로부터 매우 효율적으로 몸을 숨길 수 있는 장소를 택해 머물렀다. 하루 이틀 해본 솜씨가 아님이 분명했다. 은신잠행 (隱身潛行)에 관해서는 항상 최고 학점을 받았던 노학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 두 사람은 전문적인 수업을 받은 숙련자였다.
“어라, 이쪽은?!”
그들은 멈출 기색이 없는 듯 계속 나아갔고, 건물이 밀집되어 있는 거주구를 지나 서쪽 숲 속으로 들어갔다. 밤의 숲은 장애물투성이였다. 노학은 소리를 내지 않 기 위해 엄청난 신경을 써야만 했다. 조금 만 방심해도 자신을 노출시킬 위험이 있었다.
만약의 사태에 노출된다면? 그는 전력의 세불리(勢不利)를 무시하고 싸울 만큼 무모하지는 않았다. 그의 임무는 적의 섬멸이 아니라 정찰이었다. 고양이처럼 살금 살금 다가갔다가 빼꼼 훔쳐보고 다시 살금살금 빠져나오는 것이 그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 이상의 일을 할 의무도 권한도 없었다.
만일 상대가 악의(惡意)로 무장하고 있을 경우 두 가지 결과를 가정할 수 있었다. 하나는 그의 발이 상대보다 빠른 경우, 그는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 째, 자신이 적보다 느릴 경우, 그는 아마 오늘 뜨는 해와 내일 지는 달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뜀박질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것이었다.
긴장으로 인해 심장이 격렬하게 날뛰고 있었다.
“이건, 새 등장인물인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지 않는 나쁜 어린이는 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이들이 도착한 장소에는 또 다른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잠룡물용(潛龍勿用).”(잠자는 용은 쓸모가 없다)
“후우승룡(後雨昇龍).”(비가 온 후에 용이 난다)
의심스럽기 짝이 없는 삼 인은 삼 장 거리를 두고 간단하게 암호를 주고받았고, 서로를 확인했다. 1조 조원으로 추측되는 둘은 홍매곡의 서쪽 외곽 숲으로 들어간 후 복면을 썼기 때문에 상대방으로서는 다른 확인 방법을 거쳐야 했던 것이다. 공평하게도 기다리고 있던 인물 역시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는 덩치가 곰 같았다. 1조 숙소에서 나온 둘도 다부진 체격에 작은 키가 아니었는데, 이 거인은 그들보다 머리 두 개 정도는 더 큰 듯했다.
‘저런 덩치가 홍매곡에 있었던가?
노학은 화산지회 참가자 전원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앞으로 강호 정보의 삼분의 일 이상을 총괄한다는 개방의 중책을 맡으려면 이 정도 재주는 기본 적으로 소지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기억의 편람을 뒤져 봐도 저 덩치는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설마 관리인?”
화산지회의 운영에 대한 모든 것을 담당 관리하며 이곳의 질서와 치안을 유지하는 관리자들, 그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율령자라 칭했다.
‘설마 내부와 선이 닿아 있었단 말인가? 아냐아냐.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장소가 장소니만큼, 그리고 그동안 입은 피해도 피해라 불확실한 신분을 지닌 사람 은 쓰는 법은 없어. 게다가 외부와의 접촉도 최소한으로 한정되어 있고……..
율령자 대부분은 이곳 화산에서 자라 화산에서 죽는다고 한다. 이곳이 그들의 고향이자 삶의 터전이었다. 짊어진 임무와 희망은 오직 하나, 진정한 무인의 탄생. 그들은 그 목적을 위해 유일한 생을 바친다.
하지만 만의 하나 그 설마가 사실이라면.
정말 위험한 일이 발생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꿀꺽! 이거 성가시게 될지도 모르겠는데…….’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미약한 달빛이 거의 쓸모없는 어두운 밤하늘만큼이나 예감이 좋지 않았다.
“나머지 하나는??
복면 쓴 덩치가 묻자 둘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오히려 반문했다.
“그건 이쪽 대사야! 약속 시간을 어기다니 어떻게 된 거지?”
둘 중 키가 큰 쪽이 불쾌감을 감추지 않은 채 물었다. 아무래도 신중과는 거리가 먼 다혈질적인 체질이 분명했다.
“또 한 명이 있었나?”
노학은 귀를 쫑긋 세운 채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덩치는 키 큰 사내의 무례한 물음에 약간 화가 난 듯했다. 그가 덩치의 질문에 대해 무척 퉁명스럽게 대꾸 했던 것이다.
“몰라. 우리 모두의 소속이 틀리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우리는 각자가 어느 쪽에 속해 있는지 대략적으로만 알 뿐, 누구인지 정확한 신분은 알지 못한다는 사 실을 벌써 잊은 건가? 때문에 임무 수행 시 각자의 지위도 동등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도록. 난 너희들에게 명령받는 존재가 아냐! 그러니 행여나 명령을 내릴 생각 은 하지 마. 내가 받는 것은 ‘혈옥패(血玉牌)’의 권위에 의거한 명령뿐, 새파란 애송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희언이 아니란 말야!”
“뭐라고! 지금 한판 떠보자는 거야?”
덩치의 대답은 그렇지 않아도 성격 급한 사내를 도발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다른 한쪽이 둘 사이의 험악한 분위기를 조정하지 않았다면 싸움으로까지 번졌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적어도 이들은 서로 다른 세 계통에 몸담고 있다는 거군. 도대체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 걸까? 그리고 이런 곳에 모여 무엇을 꾸미려는 거지? 왜?”
그러나 노학의 사고 활동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그때 숲 속에서 부스럭 하는 소리가 작게 울려 퍼졌던 것이다. 그것은 고수들의 단련된 청각을 곤두서게 하기에 충분했다.
쉬익!
곰 같은 체구의 덩치가 확인도 없이 어둠을 향해 즉시 암기를 뿌렸다. 뒤룩뒤룩한 몸집에 걸맞지 않은 재빠른 행동이었다. 게다가 한 발에 죽지 않으면 미안하다고 생각했는지 친절하게 다섯 개를 동시에 던졌다. 덩치는 분명 상당히 민첩한 곰임에 틀림없었다.
“누구냐?”
덩치가 어둠에 잠긴 풀숲을 향해 물었다. 목소리 역시 곰과 닮아 있었다. 그는 소리와 기척으로 어둠 속의 누군가가 아직 건재함을 확인한 듯했다. 세 사람이 잔뜩 긴장하고 있는 게 이십 장 너머까지도 전해지고 있었다.
부스럭부스럭!
다시 풀숲을 헤치는 소리와 함께 또 한 명의 복면인이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잔뜩 긴장하고 있는 세 명과 다르게 상당히 긴장감 없는 태도였다.
“환영 인사치고는 너무 화려하군요. 자칫 잘못했으면 죽을 뻔했습니다요.”
새로 나타난 사내의 음성은 남자임에도 간드러지는 목소리라 무척 징그럽게 들렸다.
“죽으라고 던진 거다.”
새로운 복면인의 너스레에 덩치는 당연하지 않냐는 투로 내뱉듯 말했다.
“네에, 그렇군요. 어쨌든 이건 돌려드리죠. 다음 요리할 때 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음부턴 조심하세요. 진짜로 죽을 뻔했으니깐.”
‘목소리’가 ‘곰’에게 손을 뻗어 뭔가를 전해주었다. 좀 전에 곰이 던진 암기가 분명했다. 덩치의 떨떠름한 얼굴로 미루어보아 다섯 개 모두 잡아낸 게 분명했다. 곰 이 패배감에 약간 부르르 떨었지만 포효하지는 않았다.
“늦었군.”
작은 쪽이 말했다.
“지금까지 붙잡혀 있었답니다. 일 때문에 말이죠. 이 야심한 밤에 말입니다. 너무하지 않아요? 이런 꼭두새벽까지 초과 근무라니… 정말 사람을 너무 부려먹는다 니깐요. 녹봉(祿俸)도 올려주지 않으면서 말이죠.”
그가 이런저런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참으로 속 편한 사람이 분명했다. 노학은 나머지 세 명이 이 말 많은 마지막 남자를 절대로 좋아할 리 없다는 데 전 재산을 걸 용의가 있었다. 그의 넋두리는 지겹도록 계속되고 있었다.
“정말 심하다니깐요. 진짜 너무하죠? 이런 야심한 밤에 누가 야습 따위를 하겠어요? 그런데도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은 관도들의 안전을 위해 야간 순찰을 돌지 않으면 안 된다니, 누가 그들의 생명을 노리고 있기라도 한답니까?”
“너희들은 빼고 말이지…….’
“정말이지 그 얼음땡이 아저씨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처럼 냉정하다니깐요. 사람을 너무 마구 부려먹어요.”
‘헉! 얼음땡이?!!’
노학은 그 말을 결코 가볍게 흘려 들을 수 없었다.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쫘악 돋았다. 오한이 들기 시작했다. 이 경우 ‘얼음땡이’란 별명이 가리킬 만한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얼음땡이, 야간 순찰, 책임 있는 지위… 이런 단서들을 미루어 추정해볼 때 그것이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명백했다.
‘서, 설마… 우리 일행 안에?!’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노학은 그가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귀를 바짝 세웠다. 그가 지금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저 작자가 천무학관 일행 오십여 명 중 빙 검관철수는 아니라는 사실뿐이었다. 그것만이라도 알아낸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지만……. 맙소사! 적과의 동침(同寢)이라니! 좋은 기분일 리 없었다. ‘그렇다면 누구지? 명문 정파 출신의 늑기한 아저씨? 아니면 한때 흑도 출신이었던 과거가 있는 성깔 나쁜 고독한??
어느 쪽이든 재미없는 이야기가 될 터였다.
“아아, 싫다. 이야기가 점점 더 위험해지고 있잖아!’
위험한 일을 너무 많이 아는 것은 그만큼 생명에 대한 위협도 더불어 증가한다는 것을 뜻한다.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에휴, 내 팔자야. 아무래도 이제 와서 발을 뺀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 같군!’
마지막에 온 네 번째 남자는 이런 일에 종사하는 사람치고 무척 말이 많은 편이었다. 그는 업계의 중요 가치인 침묵의 무게에 대해 그다지 신경쓰고 있지 않은 듯 행동하고 있었다. 그래서 노학은 그를 편의상 ‘수다쟁이’라고 칭하기로 했다. 멀리서 귀만 쫑긋거려야 하는 자신에게 그는 매우 고마운 존재였다. 그리고 덩치 큰 쪽은 ‘곰’, 자신이 쫓아온 둘은 키 차이에 따라 ‘큰 놈’과 ‘작은 놈’으로 구분하기로 했다.
수다쟁이를 제외한 나머지 셋이 수다쟁이의 입을 틀어막는 가장 효과적이고 간단한 방법에 대해 암묵적 동의가 끝났을 무렵, 그 작자가 입놀림을 멈췄다. 한마디 만 더 했어도 그의 이빨은 남아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인내의 한계를 느낀 나머지 세 명이 어떻게든 그의 아구창을 아작냈을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수다쟁이가 입을 멈추자 드디어 그들은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주인님께서 알고 싶어하신다. 용은 언제쯤 날아오를 수 있단 말인가?”
“비가 폭포가 되면.”
‘곰’이 대답했다. 선문답 같은 알쏭달쏭한 대답이었다.
자신들이 꾸미고 있는 음모가 무엇인지 단순명쾌하게 설명해주면 얼마나 좋은가! 그러면 자신 같은 정탐병들이 훨씬 수월하게 일할 수 있지 않겠는가. 친절 봉사 정신이 결여되어 있는 그들에 대화에 노학은 투덜거릴 수밖에 없었다.
“비는 순조롭게 내리고 있나?”
노학이 쫓아온 두 놈 중 ‘작은 놈’ 쪽이 ‘곰’에게 물었다.
“곧 폭포가 될 걸세.”
“시일은?”
“앞으로 삼 주일 정도?”
“너무 길어. 좀 더 단축시킬 수는 없어? 그런 땅 파는 일에 뭔 놈의 시간이 그렇게 많이 걸린단 말야?”
‘큰 놈’ 쪽이 불평을 토했다.
“함부로 나서지 마라!”
놀랍게도 작은 놈 쪽이 제지하는 한마디에 건들건들하던 큰 놈 쪽이 금세 얌전해졌다. 덩치는 커도 권위는 작은 놈보다 못한 모양이었다.
“재촉하지 마. 은밀함을 요하는 일이라 쉽지 않다구.”
“그쪽 상황은 어떤가?”
이번에는 작은 놈이 수다쟁이에게 물었다.
“좋은 도구가 하나 생겼죠. 저번에도 한 번 썼던 중고품이긴 하지만 쓸모가 있을 겁니다.”
“중고품이란 건 이미 한 번 실패한 것 아닌가?”
수다쟁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증오를 품고 있는 사람만큼 이용하기 편리한 것도 드물죠. 게다가 질투에 눈이 먼 자라면 더더욱 금상첨화. 전 정말 감정에 휩쓸려 이성이 마비된 사람이 사랑스럽다니깐요.”
“하긴 그렇군.”
작은 놈이 동의했다.
“하여튼 일을 서두르도록. 아직 특별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지만 기밀 유지에 만전을 기해야 하는 것을 잊지 말고. 이것은 그분의 뜻이기도 해.”
‘그분’이란 단어가 나오자 제멋대로 안하무인이던 곰과 수다쟁이가 갑자기 순한 양처럼 양순해졌다. 그 말이 지닌 힘 때문이리라.
“그분의 의지대로!”
두 사람이 합창하듯 동시에 대답했다.
“그럼 다음번 접선 일을…….”
“아, 잠깐! 그 전에…….”
작은 놈이 두 사람을 제지했다.
“무슨 일인가?”
“아, 별건 아니고, 그냥 쥐새끼가 한 마리 숨어 있는 듯해서!”
작은 놈이 옆에 있던 큰 놈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거기 누구냐!”
촤라라라락!
‘큰 놈’이 허리에 손을 대는가 싶더니 무언가를 휘두르자 은빛 사슬이 노학이 숨어 있는 곳을 향해 매서운 속도로 날아갔다.
쇠사슬은 은빛 뱀처럼 요사한 빛을 발하며 허공을 꿰뚫었다. 은빛 뱀은 끝이 없는 실타래처럼 주욱 늘어났다. 차가운 은빛의 강철 비늘을 전신에 두른 잔혹한 뱀은 날카로운 이빨에 독기를 품고 사악하고 격렬하게, 그리고 그보다 더 흉폭하게 노학이 있는 나무를 향해 매섭게 날아갔다.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재빨랐 고, 밤의 공기를 진동시킬 만큼 위력적이었다.
‘헉!’
노학은 다급하게 숨을 삼키며 기겁했다. ‘아차’ 하는 사이에 쇠사슬이 그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쉭쉭,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쇠사슬은 영민하게 움직였 다. 스스로의 의지를 지닌 존재처럼.
촤라라라락!
길게 늘어난 쇠사슬이 거대한 이무기처럼 나무 전체를 휘감았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노학은 쇠사슬의 차가운 감촉을 느끼며 몸을 떨어야 했다. “합!”
쇠사슬을 부리던 ‘큰 놈’이 짧은 기합 소리와 함께 쇠사슬을 잡아당겼다.
촤라라라락! 휘리리리릭! 쉬리리리릭!
콰지지직!
맹렬한 마찰음을 내며 은빛 사슬은 자신이 구속하고 있던 아름드리나무를 단숨에 갈아먹었다. 야수의 이빨처럼 날카롭고 흉폭하게! 그와 함께 산산이 부서진 나 뭇조각들이 후두둑 비처럼 바닥에 떨어졌고, 고이는 대신 수북이 쌓여갔다.
철썩!
요란한 타격음과 함께 남자의 뺨이 크게 왼쪽으로 돌아갔다.
‘작은 놈’이 ‘큰 놈’의 뺨을 갈긴 것이다. 무인에게는 죽음보다 더한 수치였지만 큰 놈’은 감히 반항하지 못했다.
“조심스럽지 못하구나, 다섯째! 우리의 일이 얼마만큼 은밀함을 요구하는 것인지 벌써 망각했느냐? 이래서는 율령자들의 시선을 끌 수도 있어. 그들이 천둥보다 더 큰 소리를 듣고도 잠을 깨지 않을 만큼 게으르고 무능력한 자들이라고 난 믿지 않는다.”
작은 놈은 큰 놈의 부주의함을 매섭게 힐문했다. 쥐새끼를 잡으라고 했지, 덤으로 잠자던 온 산의 사람들을 몽땅 두들겨 깨우라고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래서 는 이곳 관리자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을 피할 수가 없다.
“죄, 죄송합니다, 대형.”
이 사람 앞에서는 야생마 같던 그의 거친 기질도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는 온순하고 헌신적인 조랑말로 전변하는 것이다.
“그럼 이제 어쩌죠, 대형?”
큰 놈이 물었다.
“만일 들킨다면 무공 수련을 한 것으로 얼버무려야지. 그럴싸한 변명을 찾을 수 없다면 말이야. 하지만 그 전에 이 자리를 빠져나가는 것을 더 추천하고 싶군.”
곰의 말이었다.
“다음부턴 조심해라. 다음엔 뺨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큰 놈은 감히 대꾸하지 못했다.
“그건 그렇고, 어떤 쥐새끼였는지 면상이나 좀 볼까?”
곰이 파괴된 생명의 잔해 더미 위로 걸어가며 말했다.
“흥, 소용없어. 이미 가루가 되어버렸을걸?”
큰 놈이 우쭐거리며 말했다.
“그래요, 정말 소용없게 됐군요.”
잔해를 살피던 수다쟁이가 한숨을 내쉬며 비웃듯 말했다. 하지만 그도 마냥 비아냥대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빗나갔군.”
작은 놈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 설마!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제 일격이 실패로 끝날 리가…….”
“그럼 저 텅 빈 사슬은 어떻게 설명할 거냐?”
작은 놈이 한 곳을 가리켰다. 은빛 사슬이 콱 물고 놓아주지 않고 있는 그것은 너덜너덜해진 웃옷이었다. 하지만 그 안의 내용물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 이럴 수가…….”
큰 놈의 입에서 망연자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휴우, 뭔 놈의 자식들이 저리도 흉폭하다냐…….”
노학은 한시라도 빨리 그곳으로부터 떨어지기 위해 열심히 발을 놀렸다.
하마터면 잘 다져진 고깃덩이 신세로 전락할 뻔했다. 구사일생이었다. 조금 전을 생각하면 간담이 서늘했다. 아직도 그 충격의 여파로 몸의 여기저기가 불에 덴 듯 화끈화끈했다.
거지들은 구걸을 한다거나 정보 수집을 하다 보면 종종 잡혀서 묶이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개방 내에서는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기술이 자연스럽게 발달했 는데, 이번에 그 해박(解縛) 수법이 빛을 발한 것이다. 노학은 절체절명의 순간, 번개처럼 스스로의 어깨 관절을 뽑아 몸을 축소시킨 다음 사슬의 구속에서 빠져나 와 그 위기를 모면했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그의 생명은 이미 윤회의 수레바퀴 속으로 굴러 떨어졌을 것이다.
에취!
반라의 몸에 찬바람을 맞자 자연스럽게 재채기가 터져 나왔다. 한시라도 빨리 따뜻한 방 안으로 들어가 몸을 녹이고 싶었다. 감기는 질색이었다.
“이제 어쩌지?”
나무의 시체가 쌓여진 무덤 위에서 곰이 물었다. 집회가 새어나갔다. 쥐새끼가 어디까지 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또 어디까지 알아냈는지 알 수 없지만, 입을 막 아야 했다. 이번 일에 보안은 생명이었다.
“십 년에 걸쳐 계획한 대사다! 이런 일로 중도하차하는 건 용납할 수 없어!”
곰의 목소리는 자연 거칠어져 있었다.
“쥐새끼를 놓쳐버린 책임도 있고 하니 이번 건은 우리들이 책임을 지도록 하지.”
“어떻게 말인가? 이미 쫓아가기는 늦었을 텐데?”
작은 놈은 차가운 시선으로 너덜너덜해진 웃옷을 바라보았다. 여기저기 기워진 누더기. 하지만 옷이 그렇게 된 것은 사슬의 책임이 아니었다. 사슬의 폭풍에 갈갈
이 찢겨 나가기 전에도 그 옷은 덕지덕지 기워진 누더기였음에 틀림없었다. 작은 놈은 그 걸레 조각을 조심스레 들어올렸다. 여기저기 거칠게 찢겨 나가긴 했지만 곳곳의 불규칙한 누빔들은 분명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이런 구걸하기 딱 좋은 걸레를 걸치고 있는 자들은 극히 드물지!”
작은 놈의 눈이 어둠 속에서 차가운 단도처럼 빛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