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211화
동천은 약재 창고를 나옴과 동시에 요림 쪽으로 마차를 몰았다. 매화약주를 가져오기 위해서였다. 물론, 다른 사람을 시켜도 되는 일이었으나 예전에 금요랑이 한번 놀러오라고 했던 적이 있었기에 맛있는 것을 얻어먹으려고 겸사겸사 직접 찾아갔다. 동천이 요림에 도착해서 내리고 보니, 호화찬란하기 그지없었다. 바닥의 벽돌조차 진기한 대리석을 사용한 것 같았으며 주위를 형형색색 꾸며 놓은 것이 동천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그리고 정면으로 보이는 거대한 누각은 입이 쩍 벌어지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햐, 요랑이가 꽤 잘 사네?’
동천은 속으로 생각할 때 사부와 사비혼을 빼고, 나머지는 다 지 친구나 아랫것들이었는데 여기에는 금요랑도 예외가 아니었다. 동천이 시골에서 갓 상경한 사람처럼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을 때 안에서 볼일을 보고있던 여자가 재빨리 달려왔다. 때마침 문지기들이 시간 교대를 하느라 자리를 비워둬서 어쩔 수 없이 그녀가 나서게 된 것이었다.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동천은 그녀의 질문 덕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 지금 림주님 계신가?”
단박에 동천의 신분을 알아챈 여자는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소전주님 죄송합니다. 지금 림주님께서는 태상림주님과 잠시 외부에 나가셨습니다. 아마도 저녁쯤에 오실 것 같사옵니다.”
태상림주라면 전대의 림주. 즉, 금요랑의 사부라는 소리였다. 동천은 갑자기 켈켈켈 거리며 재수 없게 웃어대는 할망구가 생각나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으으, 그러고 보니, 이곳이 그 할망구의 소굴이었지? 휴우. 그래도 그 할망구 없을 때 왔으니 다행이다.’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한 동천은 얻어먹을 생각이 싹 가셨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이곳에 온 용건을 꺼내들었다.
“그래? 그렇다면 림주님은 나중에 뵙기로 하고, 지금 바쁘니까 매화약주 백년 근 남는 거 있으면 빨리 가져다 줘.”
“예? 아, 그게.”
동천은 인상을 찌푸렸다.
“문제 있어?”
여인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어댔다.
“무례를 범했사옵니다. 실은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그렇게 귀한 술은 천한 제가 알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잠시 당황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라면 시간이 좀 걸릴 테니 여기에서 이러 지 마시고 안으로 드시지요.”
여인은 예의 바르고 절제된 행동을 보여주었다. 사실 요림은 천박한 여자들의 집단이라고 널리 인식되어 왔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물론,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안 날리 없듯 소문들이 모두 거짓이라고는 할 순 없었다. 이곳 요림은 크게 두 군데로 나뉘어 있었는데 한쪽은 하급 무사들이나 상대하는 곳이었고 다른 한쪽은 고위 인사들을 상대하는 곳이었다. 이렇게 간단히 설명을 해줘도 소문의 진위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 대충 짐작들을 했으리라. 질 낮은 소문의 근원은 바로 하급 무사들을 맡고있는 쪽에서 비롯한 것이다. 허나 이곳은 림주가 거처하는 곳이니 만큼 거주하는 여인들 치고 헤픈 여인들은 없었다. 뭐 소문의 진상이 어떠하든 별 관심이 없었던 동천은 휘황찬란한 주위를 감상하며 여인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안으로 따라 들어간 동천은 내실에 들어가 앉기 무섭게 자신이 원하던 여인과 만날 수 있었다. 여인의 나이는 30대 후반 가량이었는데 그녀는 동천을 대하자마자 다소곳이 인사를 올렸다.
“제가 미주고(美酒庫)를 맡고있는 종요(鍾樂)입니다. 매화약주를 찾으셨다고요.”
기품 있는 아줌마(?)의 행동 가짐에 동천은 섣불리 행동할 수 없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생각과는 달리 동천의 몸은 점잖게 자세를 잡고있었다.
“험! 그렇다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백년 근일세. 있는가?”
우선 고개를 끄덕여준 종요는 좋아라 웃음 짓는 동천에게 말했다.
“있기는 하나 백년 근 매화약주는 아주 귀한 술이옵니다. 아무리 소전주님께서 필요하신다 하여도 림주님의 허락이 있어야만 드릴 수 있을 정도지요. 그러하니 필요하신 사유를 설명해 주시지요. 그 사유를 알면 매화약주를 드리는데 더욱 용이할 것입니다.”
림주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는 소리에 금요랑보다 지위가 낮은 동천은 따지듯이 강하게 밀어 부칠 수 없었다. 또한 이곳은 약왕전이 아닌 요림이었으므로 더욱이 그러했다. 그리고 단환을 만드는 일을 떠벌리면 소문이 돌고 돌아 사부의 귀에까지 들어갈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귀찮아 지는 것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어떻게 그런 비법을 알아냈느냐?’로 시작해서 다 만들면 ‘나 한 개만.’ 까지 이만저만 손해 보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동천의 잔머리에 첫 번째 질문은 따로 생각해 놓은 게 있었으나 문제는 역천이 완성된 단환을 달라는 데에 있었다. 아무리 동천이 사부를 존경한다 해도 존경은 존경이고 단환은 단환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동천은 입안에서 빙빙 맴도는 진실을 뱉어내지도 못하고 삼키지도 못하는 형국에 놓여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런데 그런 그를 살려 준 것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호호호! 약왕전의 동생이 찾아왔다고?”
‘어? 이 목소리는?’
동천은 긴가 민가 하고있었으나 종요는 누군지 알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오는 눈부신 미모의 여인에게 동천 때보다 더욱 고개를 수그렸다.
“림주님을 뵈옵니다.”
뜻밖에 나타난 금요랑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종요의 인사를 받았다.
“됐으니 이만 나가보거라.”
“예.”
금요랑은 종요가 나가자마자 동천의 옆에 앉아 굉장히 친한 척을 했다.
“동생이 이곳에는 웬일이지? 호호, 이 누님이 다 영광인걸?”
금요랑이 이야기를 꺼내며 살며시 움직일 때마다 그녀의 몸에서 야릇한 향기가 풍겼다. 치장을 안 하는 밋밋한 화정이와는 완전히 색다른 향기였다. 생소함 때문인지 동천은 무엇에 홀린 양 그 향기를 깊게 들이 마셨다. 그것을 본 금요랑은 까르르 웃어댔다.
“호호호! 내 몸에서 무슨 냄새라도 나나보지? 이상하다. 나는 매일 목욕을 하는데. 호호호호!”
능청을 떠는 금요랑의 행동에 동천은 뭔지 몰라도 자신이 쪽팔린 짓을 했다고 생각했다.
“헤헤, 향기가 너무도 좋아서요.”
금요랑은 눈을 반짝였다.
“정말?”
이 상황에서 동천이 미쳤다고 반박을 하겠는가? 동천은 사근사근하게 대답했다.
“그럼요. 아아, 너무도 황홀해요.”
“호호, 동생이 그렇게까지 말해주니 나쁘진 않는데? 아참! 백년 근 매화약주가 필요하다고?”
그새 까먹고 있었던 동천은 그제야 제정신을 차렸다.
“예. 제가 그걸 꼭 써먹을 데가 있어서요.”
금요랑은 코맹맹이 먹은 소리로 물었다.
“흐응, 그래? 어디에 사용할 건데?”
사소한 것이면 몰라도 이런 문제는 나중에 진실이 드러났을 때 참으로 난감할 여지가 있었다. 생각해 보라. 값어치의 고하를 제켜두고라도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화가 나겠는가? 그래서 이런 때에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은근히 넘어가는 게 최고였다. 이에 동천은 비 맞은 새처럼 애처롭게 말했다.
“누님. 그런 게 있는데, 어떻게 안될까요?”
금요랑에게 제일 듣고 싶은 말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그녀는 서슴없이 누님이라고 듣고싶다 말할 정도로 누님이란 말을 듣고싶어했다. 나이에 비해 그녀가 엄청나게 젊어 보이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성숙해지다 못해 노화로 접어들어가는 사고방식에는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누님 소리를 듣고싶어하는 이유는 마음까지도 젊어지려는 욕망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연하의 사내들하고 종종 어울렸는데 그들이 누님이라 말해주는 것과는 달리, 오늘 어린 동천의 누님이란 소리가 그녀에겐 색다르게 들려왔다. 금요랑은 누님이란 소리를 들어 기쁘면서도 야릇한 느낌에 어쩔 줄을 몰라했다.
‘어라? 이년이 왜 끈적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지?’
뭔지는 잘 몰랐지만 화정이의 맑은 눈빛과는 아주 대조적인 눈빛이었다. 동천이 본 금요랑의 눈빛은 욕망에 젖어 있으면서도 아쉬움에 떨고있는 그러한 눈빛이었다.
“왜, 왜 그러세요? 꼭 이유를 설명해야 하나요?”
어느새 제정신을 돌아온 금요랑은 속으로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으응, 괜찮아. 말 안 해도 돼.”
“정말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누님!”
금요랑은 또다시 은근히 들뜨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도저히 그냥 보낼 수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이왕지사 이렇게 된 김에 동천을 좀더 잡아두고 누님 소리나 실컷 듣기로 마음먹었다.
“호호! 하지만 공짜로는 어림없어. 매화약주를 주는 대신 이 누나와 술 한잔 하고 가야 해. 어때? 자신 있어?”
여기에서 자신 있냐는 말의 의미는 술을 잘 마실 수 있냐는 뜻과 동일했다. 금새 그 뜻을 파악한 동천은 예전에 술을 거나하게 마시고 고생한 적이 있었기에 순간적으로 멈칫했으나 오래 된 일들은 그 당시 아무리 고통스러웠다 하여도 희미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더군다나 오늘 술만 마셔주면 매화약주 한 병이 자신의 수중에 떨어지는데 동천이 이런 제의를 마다할 리 있겠는가?
“그럼요! 아실 지 모르지만 저 술 잘 마셔요!”
금요랑은 짐짓 깜짝 놀란 척을 했다.
“어머? 정말이야? 호호, 그럼 낮술은 금물이니까 저녁에 다시 오겠어?”
동천은 당장 술판을 벌리고 저녁때쯤 가져가고 싶었으나 칼자루는 금요랑이 쥐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동천은 그녀의 제의에 따라야만 했다.
“누님 마음대로 하세요. 헤헤, 그러면 저녁에 올게요. 이따가 뵈요!”
“그래. 꼭 오늘 와. 이 누나가 맛있는 거 많이 줄게.”
맛있는 것을 준다는 얘기에 동천은 은근히 기대감을 가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다친 발가락을 의식해서인지 동천의 발길은 조심스럽기에 여념이 없었다. 동천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녀의 안내를 받아 마차를 타고 약왕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점잖게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동천은 언제 그랬냐는 듯 바닥에 누워 떼굴떼굴 굴렀다.
“우와, 땡 잡았다. 이게 다 하늘님 덕분이라니까? 히히히!”
글세. 땡 잡은 건지 아닌지는 두고봐야 할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