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242화
작전을 세우다.
두 소년이 거친 산길을 뛰고 있었다. 둘 다 오랫동안 뛰고 있는 중이었다. 정말로 오랫동안 말이다.
“헥헥, 더, 더 이상은 못 가! 가려면 차라리 나를 밟고 지나가!”
육체적 피로가 극에 달아 악에 받힌 소리였다. 물론 이렇게 땡깡을 부리는 소년은 동천이었다. 힘에 부쳐 고통스러운 얼굴. 비록 주군 때문에 멈춰선 도연도 같은 표정이었으나 그는 사뭇 다른 정신적 고통까지 겪고 있는 것 같았다.
“후우. 후. 그럼 조금 쉬다 가겠습니다.”
그답지 않게 걸고넘어지는 것도 없었다. 그래서 동천은 안면을 구겼다.
‘에이 씨팔! 진작에 못 간다고 말할걸.’
어지간히도 억울했나보다. 이대로 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 동천은 못된 심보를 동원해 새삼 도연의 아픈 곳을 찔렀다.
“야, 너무 걱정하지 마. 칼 좀 찔렸다고 다 죽는 건 아니니까. 더군다나 내가 전 내공을 써서까지 치료를 해줬잖아. 덕분에 숨결도 돌아왔고.”
동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연의 눈가에 흔들림이 있었다. 숨결이 되돌아온 것만 확인하고 도망치듯 달려온 도연은 이미 치료가 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치료가 된 것은 우연이라기보다도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다. 그때 상부의 상태는 복부에 찬 죽은 피를 제거해야 하는 상태였다. 그러나 몸이 허약해져있어 치료를 하고도 제거하는 즉시 죽게 될 운명이었는데 기절했다가 깨어난 동천이 전 내공을 사용해 귀의흡수신공을 운용한 탓에 운 좋게 숨결이 되돌아왔고, 그런 이유로 해서 요양만 잘하면 예전처럼 정상인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하긴, 정작 치료를 해준 놈도 모르는데 제삼자가 그것을 어찌 알겠는가.
“다 저 때문에…….”
순간 힘들다고 자빠져 있던 동천이 벌떡 일어나 도연의 따귀를 힘껏 후려쳤다.
“크윽!”
허리띠를 차고 있지 않은지라 도연이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그 즉시 피를 토하고 사나흘 누워있어야 할 정도였다.
“아가리 닥쳐! 누군 힘들지 않은 줄 알아? 비록, 일이 이렇게 됐지만 너도 그 병든 놈의 죽은 피를 봤잖아! 어차피 죽을 놈이었어! 잊어버리란 말야! 흥, 죄를 짓는 것 같아? 그럼 평생 살면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선행을 베풀어! 알았어?”
도연은 핏물을 게워내며 주군의 말씀을 잠자코 들었다. 채 대비도 못하고 맞아서 정신이 혼미했지만 희한하게도 들릴 건 다 들렸다. 이가 부러지거나 흔들리지도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그는 그 이빨을 악다물었다.
‘그래. 이미 지나간 일이다. 내 잘못이라는 것만 잊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언젠가는!’
굳은 결심을 한 도연은 동천에게 넙죽 엎드렸다.
“주군! 제 잘못을 꾸짖어주어 감사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로 심기를 어지럽혀드리지 않겠습니다!”
동천은 그제야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런 마음이야. 하하하!”
이렇게 동천이 호탕하게 웃고는 있지만 그 웃음의 내면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으니.
‘한 대 때렸더니 속이다 시원하네! 이히히!’
그런 이유로 어울리지 않게 웃어댄 동천은 마냥 이러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운기조식을 취했다. 이 갑자에서 20년 정도가 모자란 공력. 동천의 나이에서는 절대로 이룩할 수가 없는 경지였다. 그래서일까? 동천이 부르짖는 하늘은 그에게 내공과 경공 외에는 달리 부여한 것이 없었다. 나름대로 공평한 하늘이었다. 동천은 일단 운기조식을 취하고 나자 습관처럼 보따리 속에 넣어둔 허리띠를 찾아 다시 매었다. 허리띠를 맬 당시 절반 이상의 내공이 흡수되었지만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러지는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것도 만성이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 하여간 묘한 물건이었다.
“자! 이제 빨리 가자!”
옆에서 동천보다 약간 일찍 운기조식을 끝마친 도연은 더 이상 고뇌하는 얼굴이 아닌 예전의 차분한 얼굴로 돌아와 고개를 끄덕였다.
“앞서가겠습니다.”
“오냐.”
다시 원기를 되찾은 동천은 그를 여유롭게 뒤따랐다.
“우걱, 우걱!”
동천은 근 2주일 만에 식사다운 식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동안 몇 개의 마을을 거치긴 했어도 객점이 없어 얼마나 고통을 겪었는지는 말로 다 못하리라. 물론, 이곳의 요리도 고급에 길들여진 동천에게는 택도 없었지만 시장이 반찬이라지 않는가.
“냠냠, 이봐! 여기 내가 먹고 있는 게 뭐라고?”
동천은 젓가락에 들려있는 고기의 이름을 점소이에게 물어보았다. 옆에서 묵묵히 먹고 있던 도연은 점원이 다가오기 전에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노루 고기입니다.”
동천은 기분이 잡친 얼굴로 소리쳤다.
“그건 나도 알아 임마!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이 노루 고기 앞에 천(天) 무슨 뭐라는 이름이 있었잖아.”
그것에 관해 도연이 입을 열려는 찰나 습관적으로 자신을 낮추는 목소리가 들렸다.
“헤헤, 천옥향(天玉香) 말씀입니까 손님?”
동천은 반색을 했다.
“맞아 맞아! 히히, 너 참 똑똑하다.”
“아이구, 이 생활 몇 년인데 그것조차 모르겠습니까. 이 정도는 기본이죠.”
“그것도 그러네? 쳇!”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동천은 금세 점원을 깔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점원 입장에서는 엄청 기분 나쁜 순간이었다. 허나, 그가 누구인가. 5년 동안 눈칫밥을 먹으며 이 생활을 해오고 있는 자가 아닌가.
“헌데 그것을 물어보시려고 찾으셨습니까?”
동천은 툭 쏘아붙였다.
“그럼, 뭐 더 있겠어? 이제 됐으니까 네 할 일이나 해.”
“예예.”
점원은 동천에게서 멀어지며 이를 바득 갈았다.
‘으으으. 이놈이 돈 많은 갑부집 아들놈만 아니었어도 손 좀 봐주는 건데.’
그렇다. 한 시진 전 돈을 퍼부어 비단 청삼을 사 입고 온 동천은 보란 듯이 금 1냥을 내비친 후, 흥청망청 처먹고 놀고 있는 중이었다. 그놈의 돈이 뭔지.
“꺼억! 맛은 그다지 없었지만 그래도 배는 채웠네.”
누가 들으면 겨우 먹어줬다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식탁 위의 음식이 깨끗이 비어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누구든 눈알을 치켜뜨리라.
“이제 가시지요.”
도연이 일어나며 주군을 재촉했지만 정작 동천은 뚱한 기색이었다.
“뭐? 가다니? 어딜 간다는 거냐?”
도연은 미간의 주름을 모았다.
“당연히 추적대를 피해 다른 곳으로 가야지요.”
동천은 예전과는 다르게 감흥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야, 자그마치 20일 이상이나 다녔는데 코빼기도 안 비추었다면 우릴 놓친 걸 거야. 분명하다구.”
동천이라는 아이의 성격을 비추어볼 때 20일이면 충분히 위기감을 잊고도 남을 게 분명했다. 도리어 아직까지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면 그게 이상한 거였다. 도연은 충분히 주군의 생각을 이해하고도 남았다. 자신도 어느 정도 긴장이 풀려있는 상태인 것은 마찬가지니까. 하지만 모든 일에 완벽이라는 것은 없는 법. 그것이 피해 다니는 입장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도련님, 한 일주일만 더 고생하면 됩니다. 일주일이 넘어가면 저도 아무 말 않겠습니다. 한 번만 제 의견을 따라 주십시오.”
도연은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 동천의 몸종을 자처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동천을 대하는 태도는 여전했다. 전혀 몸종이라고 생각하기 힘든 당당함이 보였다. 그것이 옥에 티라면 티였지만 누구 하나 이들을 주시하는 자가 없었던 관계로 아직까지는 별문제 될 것이 없어 보였다.
“에이 씨! 괜찮다니까? 어이! 여기 방 하나만 잡아줘!”
동천의 부름에 방금 전까지 동천과 대화를 나누고 내려가던 점원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요! 헤헤.”
도연은 고개를 절레 내두르며 팔자로 걸어가는 동천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동천은 그런 도연의 모습을 흘긋 훔쳐보고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 사이 그들은 계산대에 당도했다.
“히히, 모두 다 얼마지?”
주인장은 계산이 모두 되어 있으면서도 간사한 웃음을 짓고 셈을 하는 척했다.
“어디 보자. 불도장 2인분에 천옥향 노루 고기 4인분에 소향장육 한 접시. 으잉? 어린분들이 귀한 옥매주(玉梅酒)까지 시키셨네? 헤헤, 이미 값은 나왔는데 며칠을 주무실 건지요?”
얘기를 들어보니 방값도 합쳐 계산할 모양이었다. 그러자 도연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하루면 됩니다. 그리고 그 옥매주는 시키기는 했지만 입도 안 댔으니 계산에서 빼주십시오.”
도연의 말이 끝나는 순간 두 쌍의 눈매가 급격히 찌푸려졌다. 한 쌍은 객점 주인이었다.
“그건 좀 곤란합니다. 마개가 따져있는 상태라서 이미 진정한 술맛의 향이 달아난지라 아무리 안 드셨다고 해도 도로 무르실 수는 없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동천이 끼어들었다.
“하루? 누가 하루를 잔다고 했어. 이봐 주인장. 한 사흘 잘 테니까 그리 알아. 아? 그리고 옥메주인지 떡메주인지 그것도 값을 치든지 알아서 해.”
“역시, 품격이 높으신 분입니다! 헤헤, 그럼 그것까지 합쳐서 은자 9냥입니다.”
도연이 의심에 찬 눈으로 물어보았다.
“어떻게 해서 그런 셈이 나온 겁니까?”
허나 객점 주인은 태연한 신색으로 간만에 굴러들어온 봉(鳳)들에게 하나하나 나열해주었다.
“원 참 손님도. 그러니까 불도장이 모두 은자 1냥, 천옥향 노루 고기가 모두 은자 2냥, 옥매주가 은자 1냥. 그리고 마지막으로 방값이 은자 5냥입니다. 헤헤, 제가 아무렴 그냥 지어냈겠습니까?”
아무리 돈 개념이 모자란 동천이라 해도 자신이 바가지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인상을 팍팍 쓰고 소리쳤다.
“뭐야? 이 양반이 누굴 호구로 아나. 방 하나에 은자 5냥이라니! 내가 그것에 속아 넘어갈 정도로 병신인 줄 알아?”
동천이 홧김에 소리쳤다면 객점 주인은 치밀한 계산 하에 셈을 마친 것이었다. 그렇다면 누가 입씨름에서 이기겠는가.
“아이구,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렇게 장사하면 우리 객점은 망해도 예전에 망했을 겁니다. 사실 제가 보기에 도련님께서 귀하신 분 같아 저희 객점에서 제일 비싼 방을 마련해드린 겁니다. 그래서 값이 좀 나갔던 거고요. 물론 미흡하시겠지만 적어도 그 정도는 되는 곳에서 주무실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닙니까?”
동천은 언제 그랬냐는 듯 헤벌레 웃었다.
“헤에, 그런 거였어? 참나 진작 말하지. 얼마라고 은자 9냥? 자! 그리고 나머진 필요 없으니까 가져. 으히히!”
객점 주인이 웬 떡이냐 하고 얼른 금 1냥을 받아 챙겼다.
“역시, 제가 제대로 봤습니다! 저기 저 놈을 따라가시지요. 잘 안내해드릴 겁니다.”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점원은 동천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하자 굽실거렸다.
“따라오십시오!”
동천은 자연스레 뒷짐을 졌다.
“오냐.”
한숨을 내쉰 도연은 안내하는 점원을 따라가며 물었다.
“3일을 묵는데 어떻게 은자 5냥이 성립되는 겁니까?”
점원은 도연의 질문을 받고 잠시 어린 꼬마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는 자신의 뒤에서 실없이 따라오는 정신 나간 어린놈에 비해 이 아이는 참 꼼꼼하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잠시, 그는 자신의 본분에 따라 손님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제가 안내하는 곳은 이곳의 특실로 하루에 은자 1냥입니다. 그리고 식대가 사흘 동안 2냥이 들어가죠. 그래서 은자 5냥이 되는 것입니다.”
도연은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 고맙습니다.”
“뭘요. 아? 바로 저기입니다.”
점원이 가리킨 곳은 이층의 끝 쪽 통로에 자리한 마지막 방이었다. 그가 말하는 특실답게 그 방의 크기는 다른 방들에 비해 거진 2배에 달하는 것 같았다. 점원은 그들을 안내해주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며 말했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침대 옆의 밧줄을 잡아당기시면 됩니다. 그럼.”
둘만이 남게 되자 도연은 억눌려있던 불만을 토로했다.
“어쩌자고 그렇게 돈을 물 쓰듯 낭비하시는 겁니까! 음식값이야 그렇다 치고 3일 숙식에 은자 5냥이라니요!”
동천은 어디서 개가 짖냐는 듯 못 들은 척했다.
“오랜만에 목욕이나 해볼까? 히히!”
“주군!”
옷을 벗던 동천은 약간 짜증 섞인 어조로 말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나불거려. 짜식이 더럽게 쫑알거리네. 네가 수련이냐? 그리고 목욕물이 필요하니까 내려가서 물이나 받아와.”
도연은 주군이 그냥 하는 말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다짐을 받으려 했다.
“정말입니까.”
동천은 바지 한 개만을 남겨놓은 상태에서 마저 벗다 말고 고함을 내질렀다.
“에이 씨! 정말이야! 됐어? 거 참 목욕하기 되게 힘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