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248화
또 한 번의 깨달음.
“이러신다고 없어진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에 와서 그들을 찾는다는 게 어불성설이지 않습니까.”
동천은 자신의 허리를 붙잡고 있는 도연의 손가락을 잡아 풀고 획 돌아서서 소리쳤다.
“나도 알아! 아는데, 열받는 건 열받는 거야! 너 같으면 뒤간에서 일 보고 밑을 닦으려는데 닦을 게 없으면 열 안 받겠어?”
“그건 황당한 겁니다.”
동천은 붉어진 얼굴을 했다.
“어, 어쨌든!”
말발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그는 도저히 분노를 억제할 길이 없어 바닥을 향해 마구 발을 내리쳤다.
쿵쿵쿵쿵!
“으아아악! 다 죽여버릴 거야!”
도연은 이런 상황이 더 이상 지속되면 위험하다는 것을 알기에, 단번에 동천의 행동을 잠재웠다.
“아무래도 빨리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주군께서 고함을 지르시는 바람에 추적대가 들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동천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언제 발광을 했냐는 듯 얼른 가던 쪽으로 튀었다.
“흑흑, 청산에 땔나무가 존재하는 한……. 흑흑, 어쨌든.”
어디서 주워듣긴 했는데 뒤가 생각이 안 나는 모양이었다.
“주군, 가시는 방향이 약간 바뀌었습니다. 왼쪽으로 트시기 바랍니다.”
짜증이 난 동천은 버럭버럭 화를 냈다.
“됐어 이 자식아! 지금 상황에 방향 좀 바뀐다고 뭐 대수냐? 넌 오줌 누다가 방향 좀 바꾼다고 일 나는 거 봤어?”
도연은 어이없는 말투로 대꾸했다.
“아직 못 봤습니다.”
동천의 안색이 약간 펴졌다. 제가 말 해놓고도 또 말발에서 지면 어쩌나 은근히 걱정했던 것이다. 덕분에 도둑맞았던 돈 생각을 약간 희석시킬 수 있었다.
“그럼, 아가리나 다물어!”
때마침 더 할 말도 없었던 도연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헌데 너무 잘 따라도 문제인가 보다. 동천은 옆에서 나란히 달리고 있는 도연에게 넌지시 말했다.
“야.”
한 식경가량 입을 다물고 있었던 도연은 한 일자로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왜 그러십니까?”
“심심해서……. 히히!”
이런 말장난을 2년여 동안 수없이 들었음에도 아직 적응이 안 되는지 도연의 얼굴에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동천이 그것을 못 봤을 리 없었다.
“뭐야. 꼽냐?”
도연은 표정을 풀고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까불고 있……어?”
동천은 다소 의미가 어긋나는 말을 늘어놓고 신형을 멈추었다. 그에 따라 도연도 멈춰야만 했다.
“왜 그러십니까?”
물어보는 도연의 내면 깊은 곳에는 ‘또 심심해서?’라고 묻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동천은 불안한 눈을 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누가 따라오는 것 같지 않냐?”
주군의 감지력을 대충 알고 있었던 도연은 어지러이 이어져있는 골목의 담들을 주의 깊게 살폈다. 그렇지만 여태 추적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는데 지금에 와서 둘러본다고 상대가 들킬 성싶은가? 그의 무능함을 알기라도 하듯 동천이 나서서 일을 해결해주었다.
“안 나오면 개새끼고 나오면 정상인이다!”
효과는 만점이었다.
“이런 고얀 놈을 봤나? 생긴 것 답지 않게 입버릇이 고약한 놈이로다!”
어둠 속이라 색깔이 불분명했지만 황의를 입고 있는 중년의 사내가 두 눈에 화광(火光)을 밝힌 듯 동천의 앞으로 쏘아져 나왔다. 실로 눈부신 속도였다. 깜짝 놀란 동천은, 달려오는 중년인보다는 못해도 그에 비슷한 신법을 발휘해 도망쳤다.
“윽? 튀, 튀어!”
형식적이지만 도연에게 말을 건네는 것을 보니 그래도 완전히 싸가지 없는 놈은 아닌 듯했다. 물론, 혼자 도망가지만 말이다. 그것을 알기라도 하는 것일까? 중년인은 도연을 무시하고 그대로 동천을 쫓아갔다.
“으하하! 어린놈이 제법이로다!”
처음 나타났을 때 혼신의 힘을 다하지 않았던지 갑자기 속도를 배로 높였다. 서로 비슷한 속도에서 쫓는 쪽이 두 배나 빨라졌다면 단번에 꽁무니를 잡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잘하면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동천은 대경했다.
“으악? 왜 쫓아오는 거야!”
자세히 보니 머리까지 산발한 중년인은 기분 좋다는 표현을 음침함으로 대신했다.
“으흐……. 개새끼가 안되기 위해서다.”
동천은 곧바로 소리쳤다.
“어르신은 개새끼가 아니다! 돼, 됐어?”
중년인은 대번에 묘한 얼굴을 했다.
“이놈아, 앞말은 들어주겠는데 뒷말의 ‘됐어?’는 뭐냐!”
잘 나가다가 왜 뒤에서 반말을 하냐는 뜻이다. 동천은 바로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소름이 쭈뼛 돌았다. 그리고 그냥 평소대로 나온 말인데 어쩌라는 것인가.
“아, 알았어요. 됐어요? 됐죠? 예?”
바로 그 순간, 솥뚜껑 같은 손이 동천의 뒷덜미를 잡았다.
“드디어 잡았다! 으하하하!”
“으악? 사, 살려주세요! 흑흑,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혼자 이 거친 세상을 견디며 살아왔는데 이렇게 죽기에는 너무 억울하다고요!”
“으응?”
중년인은 어린놈을 잡아놓긴 했는데 이놈이 너무도 간절히 비는지라, 아까의 되먹지 않은 욕에 관해서는 잊어버리게 되었다.
“누가 죽인다고 했더냐? 사내자식이 울긴 왜 울어.”
동천이 보기에 잘하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더욱 애절한 표정을 짓고 중년인의 비위를 맞추려 노력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실은 너무 무서워서 죽는 줄 알았어요. 근데 알고 보니 마음이 너그러우신 대인이셨군요.”
대인이란 소리에 중년인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네놈이 뭘 좀 아는구나. 그렇지. 과연 나 중소구(仲昭龜)는 대인이었노라!”
동천은 상대가 웃는 것을 보고 따라 웃었다.
“히히히!”
그때, 마주 웃던 중소구가 갑자기 웃음을 뚝 그쳤다. 그는 동천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어린놈의 웃음이 어찌 그리도 요사스럽더냐!”
동천은 당황해서 되물었다.
“예?”
이런 동천의 행동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요 몇 년 사이, 자신의 웃음소리를 가지고 화를 내는 인간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역천조차 복스럽다며 좋아했는데 그 누가 소전주인 동천의 웃음소리를 가지고 뭐라 하겠는가. 물론, 도연이나 소연. 그리고 수련과 사정화만 빼고 말이다.
“못 들었느냐? 왜 그 따위로 웃느냐는 말이다!”
“그, 그러니까 그게…….”
다그치는 중소구의 기세는 가히 산 하나를 허물 만한 것이었다. 동천의 웃음소리가 어지간히도 기분 상했던 모양이다. 그 때문인지 기세에 눌린 동천은 입이 얼어붙어 우물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감히 본 대인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이냐?”
동천의 아부로 인해 졸지에 대인이 되어버린 중소구는 꽤나 마음에 들었던 듯 대인이라는 부분을 특히 강조하며 말했다.
‘으으으. 이 미친놈이 별걸 다 가지고 시비네.’
자신은 더했으면 더 했지 못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생각일까? 이런 걸 가지고 상대가 미친놈이라면, 그러는 동천은 뭐가 되는 것인지 상당히 궁금할 따름이었다.
“주군! 무사하십니까?”
동천은 상황이 어려울 때 도연이 도착하자 천군만마가 도착한 듯한 안도감을 느꼈다.
“여기야! 빠, 빨리 와!”
도연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 동안 왜 자신이 도연을 구박하며 살았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였다. 초조한 기색으로 달려왔던 도연은 주군이 무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내심 가슴을 쓸고 중소구와 동천의 사이로 끼어들었다. 도연의 입에서 싸늘한 음성이 흘러나온 것도 그때였다.
“누구십니까. 어째서 숨어있었던 겁니까.”
도연의 싸늘한 목소리를 듣고 중소구는 다소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그의 표정은 마치 ‘제법인데?’하는 것만 같았다. 허나, 곧 그런 기색을 지우고 근엄하게 입을 열었다.
“내 질문을 받았으니, 대인으로서 답변을 해주겠다. 나는 협객(俠客) 중소구라 한다. 그러나 나는 오늘 부로 대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부터는 내 호를 협객에서 대인으로 바꾸었으니 너는 그리 알아라. 또한 숨어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어찌 대인 체면에 담벼락 밑에서 숨어있었겠느냐? 그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잠시 쉬고 있었는데 되먹지 못한 이 어린놈이 안 나오면 개자식이라는 바……. 가만? 내 잠시 그것을 까먹었었구나!”
중소구는 도연과 대화를 나누다 잠시 잊고 있었던 기억을 되살릴 수 있었다. 그는 재빨리 도연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대신 누구에게로 시선을 옮겼는지는 말 안 해도 알리라.
“이놈! 주둥이가 개놈의 주둥이가 아니고서야 어찌 그런 욕된 말을 지껄였느냐!”
동천은 당황해하면서도 도연을 노려보았다.
‘씨발 놈, 도움은커녕 짐만 지어주다니! 차라리 오지나 말지…….’
매 순간순간마다 뒤바뀌는 동천의 마음. 그러고 보면 그를 옆에서 보필하는 도연이 용할 따름이었다. 동천의 그런 눈빛을 도와달라는 뜻으로 착각한 도연은 살짝 몸을 움직여 다시 중소구와 눈을 맞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