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후의 인증(認證)
“불초제자 독고령과 나예린이 삼가 사부님의 존안을 뵙습니다.
건강해 보이셔서 무엇보다 다행입니다.”
독고령과 나예린이 땅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최상의 공경을 담아 검후 앞에 부복했다.
“저런 아이였더냐, 네가 선택한 사람은?”
검후의 고요한 목소리는 나예린을 향한 것이었다.
“사, 사부님… 저, 저는…….”
나예린은 근엄한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부를 앞에 두고 해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어떤 이유로든 자신이 검각의 제자로서의 자각을 망각했다는 사 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어떤 호된 꾸지람도 비난도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녀가 받아야 했던 것은 뺨 맞기가 아니라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는 부드러 운 손이었다.
움찔 놀랐던 나예린이 시선을 들어 검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부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어려서부터 항상 보아오던 어머니 같은 자애로운 미소 였다.
“그동안 많이 변했구나. 너도 이제 너의 마음에 솔직해져야 하지 않겠니?”
검후가 인자함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나예린의 전신을 포근히 감싸주는 따뜻함과 자애로움이 그 안에 깃들여 있었다.
“그… 그런가요? 그다지 변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당황해서 대답하는 나예린의 얼굴은 약간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목소리는 기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검후는 피식 웃었고, 그 다음으로는 고개를 흔들 었다.
“아니다! 예전에 너는 사람의 마음을 닫고 인형처럼 있었지. 세상이 무서워서 자꾸만 안으로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외부 세계와 접촉을 끊은 채 너는 차가운 얼음 인형이 되기로 결정했지. 더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았으니깐. 외부 세계와 소통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으니깐. 그런 네가 다시 사람의 마음에 눈을 뜬 것 같구나. 좋은 표정이 되었다. 이제 너도 막혀 있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사… 사부님……..”
검후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울상이 되어 있는 나예린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오냐오냐! 겨울 들판에 봄을 돌려준 그에게 예를 표하며 감사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검후의 시선이 잠시 비류연을 향했다. 비류연은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녀의 얼굴에서 조금 전 그를 두 동강 내려 했던 살기는 씻은 듯 사라지고 없었 다. 대신 그 자리에 온후함이 들어와 자리를 틀고 있었다.
“너도 그쪽 방면으로는 거의 무방비라 걱정했는데, 날 닮아 그런지 남자 보는 눈이 있구나. 안심했다!”
검후의 말에 나예린은 수줍은 듯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달아오른 양쪽 볼에서 김이라도 피어오를 기세였다.
“오호호호, 그러니 영락없는 보통의 여자애로구나!”
검후는 제자의 보기 드문 귀엽고 깜찍한 모습에 유쾌한 듯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노, 놀리지 마세요, 사부님!”
이제 나예린의 얼굴은 잘 익은 홍시처럼 새빨갛게 변해 사부의 눈을 더욱 즐겁게 해주고 있었다.
옆에서 함께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독고령은 부러운 눈으로 잠시 자신의 사매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누군가의 그림자를 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소스라 치게 놀랐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일까? 그녀의 시선에 그 남자가 포착되었다. 그는 자신의 부하들과 무언가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는 충격의 도가니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 하는 중인 속을 빠져나갔다.
‘대공자 비… 내가 왜 그 남자에게 신경을 쓰고 있는 거지…….”
그녀는 이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마치 그의 인상을 떨쳐버리기라도 하듯이. 안대를 한 왼쪽 눈이 다시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꺅!”
관설지가 짧게 비명을 질렀다. 빙옥선녀라는 별호보다 빙검의 딸로 더 잘 알려진 그녀는 스스로 빛나기엔 아버지의 명성이 너무 밝았다. 그래도 그녀 역시 엄연한 칠봉(鳳)의 일인이었다. 칠봉이라고 해서 모두 별호에 봉이 들어가야 한다는 편견은 버려야 한다고 그녀는 항상 생각하고 있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
다. 장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던 그녀의 어깨를 거칠게 치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사과도 한마디 없었다. 정말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이, 이봐요! 왜…….?
고개를 홱 돌려 항의하려던 그녀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 한 남자의 눈과 순간적으로 마주쳤다가 떨어졌던 것이다. 방금 그녀와 부딪쳤던 바로 그 남자의 눈이었 다.
“설지, 무슨 일이오? 무슨 일 있었소? 안색이 좋지 않구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함께 있었던 삼절검 청흔이 이상을 눈치채고 다가와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창백한 안색으로 물끄러미 멀어져 가는 사내의 등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어라? 저 친구는?!”
잊을 수 없는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금방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한때 절친한 친구였던 이의 뒷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거짓말처럼 서 먹해진이의 뒷모습이기도 했다. 그것은 바로 위지천의 뒷모습이었다.
“설지, 왜 그러시오? 안색이 좋지 않은데?”
“저 사람… 분명히 당신 친구였죠? 빙봉영화수호대의 대주를 맡고 있다던?”
“그렇소만? 무슨 문제라도 있소?”
관설지의 곱던 미간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그자의 전신에서 방출되는 살기에 모두들 길을 비켜주고 있었다. 자초지종은 알 수 없지만, 지금 저 모습은 정상이 아니었다. 식은땀이 손바닥을 축축하게 적신다. 그녀의 몸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귀신과도 같은 얼굴이었어요. 전 태어나서 그렇게 짙은 증오와 분노로 점철된 얼굴은 본 적이 없어요. 그것은 정말이지… 끔찍했어요.”
그녀의 얼굴은 정말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창백해져 있었고,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끝없는 어둠이었어요.”
빛이 보이지 않는……. 무척이나 위험한 느낌을 들게 하는 불길한 눈이었다.
두 번 다시 그 눈빛을 떠올리기 싫은지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청흔은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자신이 기억하던 과거의 모습을 던져버린 친구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의 뒷모습은 점점 더 멀어지더니 이윽고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 다. 지금 벌어진 거리가 두 번 다시 좁혀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갑자기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슬퍼지는 청흔이었다.
“애석하게 됐소, 검후. 큰일날 뻔했소이다!”
사람들이 모두 물러나고 다시 세 사람만 남자 검성이 검후를 향해 말했다.
“후후, 그래요. 설마 날 거기까지 몰아붙일 줄이야… 하마터면 진심이 될 뻔했어요.”
“그래도 혼자서만 기분 좋은 모양이구려?”
도성의 말에 그녀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예, 이렇게 땀 흘려보는 것도 정말 오래간만이니깐요. 솔직히 부럽죠?”
그녀는 정말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 오래간만에 흘려보는 기분 좋은 땀이었다. 평소에는 전혀 그럴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섬에 있을 때 는 자신이 땀을 흘려가며 싸워야 할 상대 따위가 아무 데도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쾌한 기분은 정말 오래간만이었다. 그녀는 일종의 해방감 같은 것을 만끽한 것이 었다.
“아니… 뭐 부럽다기보다는…….”
도성이 말끝을 흐렸다. 아무래도 진짜 부러웠던 모양이다.
“어쨌든 이번 결과는 나 역시 예상치 못한 결과였소. 잘 참은 거요. 자칫하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 일 아니겠소.”
“저 나이에 저 정도 경지라… 내가 비록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저 정도 실력을 발휘하다니… 도대체 누구 키운 걸까요?”
검후는 지금 분명 자신의 본신 진력을 모두 드러내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직 그의 계보를 밝혀내지 못했소.”
“검성의 안목으로도 파악하지 못한 계보라니… 정말 비밀에 똘똘 싸여 있는 모양이군요.”
“아직 누구에게 사사했는지, 그 사문이 어딘지는 잘 모르겠소. 하지만 그 강함만은 진짜배기요.”
“동감일세!”
“동감이에요.”
“그럼 이제 허락한 거요?”
“일단은 인정해야겠죠. 천무삼성의 이름을 걸고 한 약속인데 어기면 천하의 웃음거리 아니겠어요?”
그런 일이 일어나게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일단은’이라니… 그럼 그 다음도 있다는 거요?”
“물론이죠. 아직 이 정도로 내가 가장 아끼는 제자를 멀뚱하니 넘겨줄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럼 어느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거요?”
“으음… 글쎄요? 적어도 날 이길 정도는 되야 하지 않을까요?”
절대 ‘적어도’란 표현이 쓰여서는 안 되는 곳에 그 표현을 쓰고서 천진난만하게 웃어버리는 검후를 검성은 약간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 아이… 비류연이라 했던가? 별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왜 그러나 검성? 무슨 걱정이라도 있나?”
“아니, 이 정도까지 주목을 받게 되면 좋든 싫든 시기하는 자가 생기게 마련이지. 게다가 검후의 제자 나예린이라면 백천의 금지옥엽인 그 아이 아닌가? 미모로 소 문이 자자한?”
“그래요, 그 아이죠. 그 미모와 천상의 매력 덕분에 어린 나이에 불행을 부르고만……. 아마 맹주가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었을 거예요.” 그 일을 떠올리자 검후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소. 시기와 질투는 때때로 화를 부르곤 하니깐 말이오. 나의 걱정이 한낱 기우이길 바랄 뿐이오.”
“동감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