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357화
TV 코미디물을 보던 티베는 가끔씩 웃을 뿐이었다. 솔직히 재미가 없었다. 결국 티베는 얼마 가지 않아 TV를 끄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힐린이 조금 후에 보자는 것도 잊어 먹을 정도로 그 코미디는 재미가 없던 모양이었다.
편의점에서 마실 것 위주의 식료품을 산 후 다시 집으로 돌아오던 티베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공원으로 가 보았다. 공원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의 표정에서 전쟁에 대한 공포 등은 찾을 수 없었다. 티베는 며칠 전 당한 그 무서운 기억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드래곤만큼은 다시 보고 싶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공원을 걷던 티베는 비둘기에 둘러싸인 한 노인을 볼 수 있었다. 털털한 미소를 지은 채 여행용 모자를 쓰고 벤치에 앉아 비둘기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 그 노인의 모습은 정말 한 폭의 수채화와도 같았다. 티베가 한 걸음 그 노인에게 다가서자 비둘기들이 갑자기 공중으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비둘기들이 모두 날아가 버리자 노인은 티베를 바라보았고, 티베는 미안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버리고 말았다.
그 수채화를 찢어버린 듯한 생각도 들어 버렸다. 그러나 노인은 껄껄 웃으며 괜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티베는 참으로 괜찮은 노인이구나 생각하며 시간도 보낼 겸 그의 곁에 앉았다. 앉고 보니 그 노인의 덩치는 상상 외로 컸다. 젊었을 적에는 꽤나 멋진 몸을 하고 있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저어‥이 공원에 자주 오세요?”
노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그렇진 않소, 원래 영국 런던에서 살고 있었는데 며칠 전 프랑스로 건너왔다오. 저기 보이는 저 에펠탑이 얼마 있으면 폐기 처분된다는 말을 듣고 마지막으로 볼 겸 왔구려. 아가씨도 여기 출신이 아닌 것 같은데‥맞소?”
티베는 깜짝 놀랐다. 상상 외로 눈이 정확한 노인이었다. 사실 그녀는 이곳 프랑스 출신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미국이나 아시아권 출신도 아니었다. 그녀는 이곳과는 다른 차원에서 날려와 버린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런 중대한 사실을 아무에게나 밝힐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적당히 둘러대었다.
“하, 하하‥여기 출신은 아니고 음음‥어디였지‥? 아, 미국 출신이에요!”
노인은 그녀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쿡쿡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그랬구려. 하긴, 미국이란 나라는 다인종 국가라 아가씨와 같은 특이한 얼굴형과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도 충분히 있을 수 있겠구려. 음‥남자 친구는 있소? 아, 실례가 되었을지 모르겠소. 아직 나이가 어린 것 같은데‥.”
티베는 그 말에 약간 그늘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다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음‥없어요 아직. 할아버지 말씀대로 아직 나이가 어린걸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순간 자신의 시계를 바라보았다. 꽤 낡은 손목 시계였다. 뒷판이 검은색이어서 잘만 각도를 조절하면 선명한 거울과도 같은 효과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스위치만 누르면 레이저 그래픽의 진짜 거울이 알맞은 크기로 떠오르는 최신형 시계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 노인은 시계를 보고 허허 웃으며 티베에게 머리를 가까이하고 중얼거렸다.
“아가씨 무슨 범인이오? 왜 뒤에서 검은 선글라스의 남자들이 아가씰 지켜보고 있소? 난 그냥 떠돌이일 뿐이라 걸릴 건 없지만‥.”
티베는 순간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나무 사이사이에서 그녀를 지켜보던 검은 선글라스의 사나이들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가 있는 장소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그것도 총을 꺼내 들고‥.
“죄, 죄송해요 할아버지!!!!”
티베는 급히 어디론가 뛰기 시작했고 노인은 티베가 놓고 간 식료품이 담긴 종이봉투를 들고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허허헛‥역시 저 아가씨였군‥.”
티베는 정신없이 뛰었다. 분명 잡히게 되면 생체 실험실로 끌려갈 것이 뻔했다. 그때도 가까스로 도망쳤던 기억이 생생한 티베였다.
“시, 싫어! 이런 건 더 이상 싫어‥!”
탕탕–!!
두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고 티베는 순간 발을 멈췄다. 그리고 나서 자신의 몸을 더듬어 보았다. 아무 이상은 없었다. 총상도 없었고 고통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쯤 자신과 거리를 매우 좁혀야 할 그 사나이들의 모습도 아직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생각한 티베는 뒤로 보이는 굽어진 길을 역으로 돌아가 보았다.
“어, 어머!?”
자신을 추격하던 세 명의 사나이는 비둘기의 똥으로 보이는 흰색 물체를 가득 뒤집어쓴 채 악취를 풍기며 쓰러져 있었다. 그 순간, 누군가가 티베의 어깨를 툭 쳤고 티베는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누, 누구야!! 아, 아니 할아버지?”
노인은 숨을 헐떡거리며 자신의 여행용 모자를 벗어 그 안에 흐르는 땀을 닦은 후 손에 들린 종이봉투를 건네주었다. 티베가 놓고 간 식료품이 든 봉투였다.
“이건 들고 가야지 아가씨, 음식을 버리면 못써요, 허허헛‥.”
티베는 다행이라는 듯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티베의 뒤를 바라보고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허‥참 잔인하구려 아가씨는. 아무리 저 남자들이 마음에 안 들었다고 해도 비둘기 똥으로 범벅을 만들다니‥.”
“아, 아니에요 저는! 전 절대로‥!”
티베는 아니라고 말했지만 노인은 귀가 좀 안 좋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자자, 나중에 또 만나면 좋을 것 같소 아가씨‥허허헛. 그럼 난 이만‥.”
티베는 참으로 이상한 노인이라 생각하다가 결국 피식 웃어버리며 소리쳤다.
“안녕히 가세요 할아버지–!!”
그 인사말을 들은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거의 들리지 않게 중얼거렸다.
“‥조심하시오 아가씨‥허헛.”
집으로 돌아온 티베는 다시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30분 후, 힐린이 자신의 방에서 나와 티베에게 물었다.
“어머, 많이 기다렸어?”
티베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일주일 만에 방송국에 복귀한 티베는 동료들에게 인사를 하며 비디오 편집실로 향하였다. 엄청난 정보가 있다는 베셀의 말을 전화로 들었기 때문이었다.
편집실 안에 노크도 티베가 들이닥치자 베셀은 껄껄 웃으며 옆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베셀은 옆에 앉은 티베에게 방송용 편집 드라이버를 돌리며 단도직입적으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자, 이건 저번에 우리가 블랙 프라임 군대에게 공격을 당했을 때 근처 산에 있던 어떤 조류 사진 작가가 우연히 찍은 비디오야. 작가라서 그런지 꽤 잘 찍었지. 게다가 비디오 카메라도 상당히 좋은 것이라 화질도 선명해. 구하기 꽤 힘들었어. 자아‥잘 보라구.”
그러나 잘 볼 것이 없었다. 새들이 날아가는 모습이 아름답구나 생각이 들 뿐이었다. 그러던 순간, 화면이 치직거리며 한 검은 물체가 고속으로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 잠깐만요!”
베셀은 웃으며 그 장면을 특수 캡션 드라이버로 돌려 보았다. 정지 화면을 본 티베는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드래곤! 그 드래곤이군요!!! 우와‥정말 선배 대단해요!!”
베셀은 빙긋 웃으며 샤프로 화면에 나타난 드래곤의 머리와 끝을 찍으며 말했다.
“건축 전공을 했다는 닉에게 이 화면을 주며 분석해 보라고 했지. 이 드래곤의 전신 길이는 약 39m 정도야. 그리고 또 계속 보라고.”
계속 돌아가던 화면에선 또 한 번 검은 물체가 휙 지나갔다. 다시 돌리고 돌려본 그 장면은 드래곤의 아래 방향에서 찍은 것이었다. 베셀은 드래곤의 양 날개 끝을 찍으며 말했다.
“날개를 최대한 펼쳤을 때는 약 43m‥정말 돌연변이 새 치고는 커.”
티베는 놀라움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베셀은 샤프로 키를 두드리며 계속 말했다.
“자아‥다음엔 더 놀라운 장면이라구. 기대해.”
계속 진행되던 화면에선 대공포의 사격 장면이 시작되었다. 그 순간 또다시 검은 물체가 지나갔고 이번엔 흰색의 빛이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것이었다. 베셀은 멈춘 후 침을 꿀꺽 삼키며 캡션 드라이버를 돌려 보았다.
“여지껏 아무도 보지 못했던 드래곤의 등판이야. 나도 이걸 본 후 집에서 아들하고 같이 몸을 떠느라 정신이 없었다구. 아, 여기군.”
티베는 베셀이 멈춰준 장면을 보고서 손에 들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 드래곤의 어깨 부분에 한 인간의 모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빛덩이를 휘두르고 있는‥.
“세, 세상에 이건‥!?”
베셀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 사나이는 분명 무언가를 휘두르고 있어. 내 생각엔 검 아니면 창 같은데 지금 이 화면에서 빛덩이로 보이는 이유는‥너무 빨라서야. 시속으로 치면 숫자가 너무 커. 초속으로 치자면 약 5km 정도? 아니 그 이상이겠지. 그것도 한 번 휘두른 게 아니야. 계속 봐.”
베셀은 조심스럽게 캡션 드라이버를 돌렸다. 그러자 사나이의 동작이 갑자기 바뀌어 버렸다. 그것도 검광의 잔상과 함께. 티베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화면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했다.
“이, 이것은‥?”
“그래, 검광의 잔상 곡선으로 봐서 다섯 번 정도 휘둘렀어. 캡션 드라이버를 최대한 정밀하게 돌렸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지. 정말 인간 이상의 스피드야. 일본의 옛날 무술인 검도를 하는 사람 중에서도 칼을 이 정도로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은 현재 없어. 전 세계의 BSP 중에 한 명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건 잘 모르겠고, 어쨌든 보통 인간 중에선 순간 시속 600km로 날으는 드래곤 위에서 검을 초속 5km로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티베는 긴장된 표정으로 드래곤 위에 올라타 대공포탑에 검을 휘두르고 있는 그 사나이를 확대해 보았다. 그의 얼굴을 확인할 방도는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이 있었다.
붉은 장발의 사나이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