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저물사(物事)
-이일분수(理一分殊)-
위지천은 자신의 손에 들린 ‘혈폭환’이란 섬뜩한 이름을 지닌 환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붉은 종이 안에 싸여 있던 그 안의 내용물은 마치 사람의 피를 응고시켜 만든 것처럼 요사스러운 붉은 기운을 띠고 있었다.
“밖으로부터의 공격은 강해도 안으로부터의 공격은 약한 법, 이 약의 쓰임은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복면인은 분명히 그렇게 말하며 이 환약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증오해 마지않는 비류 연의 뒤를 자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약의 효과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삼 단계에 걸쳐 나뉘어 발휘됩니다. 특히 마지막 삼 단계에서는 엄청난 기가 체내에서 소용돌이치는 걸 느끼게 되죠. 그것은 자신의 생명이 모조리 불살라지는 듯한 느낌이라고 합니다. 그때 그것을 제대로 방출하지 못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으니 주의하시기를.’
아직도 복면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남아 쟁쟁하게 울리고 있었다.
‘이제 와서 망설일 건 없잖아? 나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어!’
이미 돌아갈 길은 없었다. 자신은 하늘을 대신해 천벌을 내려야 하는 막중한 사명을 받은 선택된 자였다. 그는 자기 암시와 착각을 통해 공포를 극복했다. ‘좋아!’
그는 눈을 질끈 감았고 입 안으로 피처럼 붉은 그 약을 털어넣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의 내부에서 불덩어리가 폭발하는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동시에 엄청난 살 의가 솟구쳐왔다. 그 폭발할 듯한 주체할 수 없는 살의 역시 약효의 일부일지도 몰랐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단전에서 용암 끓듯 하던 힘이 사지백해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무소불위의 신이라도 된 듯한 묘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으하하하! 일 단계 약효만으로도 이 정도란 말인가!”
지금 상태만으로도 충분히 비류연이란 놈을 박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류연, 이놈! 기다려라! 오늘 이 몸이 너에게 하늘을 대신해 정의의 이름으로 천벌을 내리겠다!”
“자, 그럼 슬슬 우리도 준비를 해볼까?”
“오우!”
비류연의 말에 힘찬 대답이 돌아왔다.
순서는 비류연, 위지천, 오비완, 장홍, 효룡, 윤준호, 나예린, 교옥, 이진설 순이었다. 여성들이 뒤를 맡은 것은 뒤로 갈수록 위험이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이 일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를 조심하게, 류연!”
여전히 걱정이 가시지 않은 얼굴을 한 채 효룡이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비류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걱정 마! 아무 일 없을 테니깐!”
저쪽에서 볼일 보러 갔다 오겠다던 위지천이 오고 있었다. 안 그래도 재수 없던 얼굴이 그 위에 떠오른 기이한 미소와 눈빛 때문에 더 재수 없게 보였다. “자, 그럼 마지막 7조! 시작해주시기 바랍니다!”
진행을 맡은 네 줄짜리 율령자의 구령과 함께 시험이 시작되었다.
이 내공합격의 핵심은 사람들로부터 전해받은 기를 얼마나 오랫동안 모았다가 일순간 방출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개의 다른 성질을 가 진 기를 얼마나 오랫동안 한곳에 묶어놓고 제어할 수 있느냐가 최우선 관건이었다. 그 때문에 ‘집()’과 ‘발(發)’의 두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첫 번째 사람 의 역할이 가장 중요했다.
이런 내공합격의 경우 사람들이 지닌 능력의 총합이 반드시 그에 정비례하는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었다. 선두의 능력 정도에 따라 얼마든지 큰 차이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류연은 평균 이상으로 오랫동안 기를 모으고 있었다. 반 각이 지났는데도 그는 기를 발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동안 뒤에서 기가 전해져 오고 있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기에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에 대해 가장 놀라고 있는 사람은 바로 위지천이었다. 그는 아까부터 비류연의 단전에 엄청난 양의 기를 쏟아붓고 있었다. 뒤쪽에서 전해져 오는 강물처럼 방대한 양의 기와 합치면 엄청난 양일 터였다. 그러나 비류연은 그리 힘든 기색 없이 그 기를 받아들이 고 있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비류연의 진기 제어력이 자신보다 월등히 높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위지천은 인정할 수 없었다.
“좋아, 그렇다면!’
마침 혈폭환의 약효가 이 단계로 접어들려 하고 있었다. 갑자기 진기가 샘솟듯 솟아나고 있었다. 마치 진기가 그의 단전으로부터 끊임없이 생성되는 듯했다. 그의 얼굴과 전신이 붉게 변했다.
“아무리 네놈의 그릇이 크다 해도 그릇인 이상 언젠가는 차는 법! 누가 이기나 한번 해보자!’
그는 자신의 몸에서 생성되는 어마어마한 양의 기를 비류연의 몸속으로 억지로 밀어넣었다. 그리고 그 성질을 약간 난폭하게 변환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흘러 가는 강물의 양이 많고 격렬할수록 치수가 어렵듯 사람의 몸속을 흐르는 기도 마찬가지였다.
“어, 이상한데??
위지천의 등 뒤에 위치하고 있던 오비완은 금세 이변을 알아챘다. 장심을 통해 느껴지는 위지천의 기운이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그의 몸이 지금 온통 붉은 색으로 변하고 있는 게 아닌가!
자신한테 반발 작용을 통해 느껴지는 기의 양만 해도 이 정도인데, 비류연의 몸으로 흘러 들어가는 기의 양은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이대로 두면 위험해! 분명 사고가 터질 거야! 이미 반 각 이상이 지났어! 기를 방출해야 될 때라고! 인간의 몸으로 더 이상 버티는 것은 불가능해! 이대로는 분명 히 몸이 망가지고 말아!’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이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목덜미와 겨드랑이도 이미 흥건한 상태였다. 마음이 조급해지자 정신이 흐트러져 기의 제어가 갑자기 힘겹게 느껴졌다. 순간 오비완의 몸속에서 기의 강물이 거세게 일렁거렸다.
“아차차! 정신 집중! 정신 집중!’
자칫 잘못하면 자신은 물론 나머지 모두를 위기에 빠트릴 수도 있었다.
‘일단 그를 믿는 수밖에!’
현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와서 중단시키는 것도 불가능했다. 함부로 중단시켰다가는 아홉 명 모두 주화입마에 빠질 위험도 있었다. 그 런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끈질긴 놈!’
위지천도 그 나름대로 초조해하고 있었다. 아직도 버티다니! 그래도 그는 손바닥을 통해 약간이나마 비류연의 몸의 떨림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슬슬 놈의 몸도 한계에 가까워지고 있는 게 분명해. 하지만 몸 안에서 날뛰는 기의 야생마들을 과연 다스릴 수 있을까? 자자, 빨리 방출하시지그 래? 그 순간이 바로 너의 최후의 순간이다.’
모았던 기를 체외로 내보내는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하면서도 가장 큰 허점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자칫 잘못되었을 때 가장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순간이 었다. 위지천은 그 기회를 보고 있었다. 비류연이 집약한 기를 방출하려는 그 순간 그의 기맥을 틀어막는다. 그럼 출구를 찾지 못한 기의 덩어리는 갈 곳을 찾지 못 하고 갈팡질팡하다가 펑! 그러고는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장마철의 급류처럼 난폭한 기류가 그의 내부를 망치고 말 것이다.
“어느 쪽으로든 끝장이다, 비류연! 더 이상 도망갈 곳은 어디에도 없다!’
위지천은 이를 악물고 비류연의 몸 안으로 기의 강물을 우겨넣었다. 비류연의 몸이 세차게 떨렸고, 그의 이마로부터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어, 이상한데?”
7조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도대체 무슨 짓거릴 하고 있길래 이 정도로 강력한 기세를 내뿜을 수 있는 거지?”
격체진력을 시전 중인 7조로부터 전해지는 압력은 앞의 조와 비교했을 때 엄청난 것이었다. 현재 이 기운에 맞먹은 것은 1조 정도뿐이었다.
“안 좋아, 이대로는.”
심각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청흔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자네도 역시 그렇게 생각하나?”
어느새 다가온 문절 백무영이 물었다.
“그래! 게다가 천아 녀석의 모습이 이상하군!”
“그래… 나도 그렇게… 음!”
그 순간 청흔과 백무영의 눈이 부릅떠졌다.
투둑!
위지천의 관자놀이 부근에서 지렁이 같은 굵고 푸른 핏줄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양쪽 관자놀이 부근에서 시작한 핏줄들은 여기저기 가리 지 않고 툭툭 불거지기 시작하더니 마치 거미줄처럼 얼굴 전체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핏줄들은 금세 터져 나오 기라도 할 듯 사납게 맥동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하는 거지, 무영?”
“나도 몰라! 지룡이란 별호는 오늘부로 반납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터무니없이 나쁜 예감이 드는군!”
펑!
마침내 위지천의 안에서 무언가 거대한 힘이 폭발했다. 그것은 복면인의 말대로 생명을 몽땅 불사르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후천지기는 물론이고 단전 안에 자 리한 원정까지 모두 끄집어내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크앙아아아아아아!”
더 이상 고통을 참을 수 없었는지 위지천의 입에서 엄청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진기 운공 도중 입을 벌리는 것은 거의 금기시되는 일이었음에도 그는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생명마저 불태운 어마어마한 양의 진기가 유한한 인간의 몸 안으로 몰아쳐 들어갔다. 비류연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그의 정신 또한 아득해지고 있었다.
“류연아, 너는 기를 받아들이는 가장 최상의 상태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글쎄요…….”
사부의 질문에 비류연은 말끝을 흐렸다.
“그럼 질문을 바꾸도록 하마! 그릇은 그것이 아무리 큰 대기(大器)라 해도 한계가 있다. 너는 한계가 있는 그릇이 되고 싶으냐?”
“아니요, 그건 싫죠.”
“싫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자신이 만든 틀 안에 자신을 가둔 상태로는 비뢰도를 극성으로 연마할 수 없다. 한계 따위에 갇히려고 무공을 배우는 게 아니란 말이지. 때문에 비뢰문의 제자는 ‘무기(無器)’가 되기 위해 자신을 단련해야 한다.”
이번에도 또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자존심 문제였다. 그래서 그는 필사적으로 답을 떠올렸다.
“무기가 된다는 것은 틀을 깬다는 것, 그것은 그릇의 형(形)을 깬다는 뜻, 그렇다면 자신을 무형(無形)의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는 뜻인가요?”
“반만 맞았다. 하지만 어떻게 무형이 될 테냐? 너의 손발, 눈, 코, 입 역시도 인간을 이루는 형이 아니냐? 그걸 없앨 거냐?”
“그건 아니죠.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은데요. 으음… 그렇다면 마음을 텅 비우는 것?”
“그것 역시 반만 맞았다!”
“반반씩 맞았으니 다 맞은 것 아닌가요?”
딱!
비류연은 이마를 움켜쥐었다.
“우쒸! 또 때려!”
그의 입술이 댓발이나 튀어나왔다.
“잘려진 쟁반 두 개를 가져다 댄다고 온 쟁반이 된다더냐? 뭘로 나누어진 두 개를 붙일 거냐? 두 개의 나누어진 원리를 하나로 이을 또 하나의 연결점이 필요한 것 이다.”
“연결점이오?”
이마에 난 혹을 문지르며 비류연이 말했다.
“그래, 연결점! 그것이야말로 서 말의 구슬을 꿸 수 있는 실과 같은 것이다. 세상에 흩어진 진리를 묶을 수 있는 하나의 리(理)다.”
“결론만 말해주세요.”
비류연이 약간 짜증스럽게 말했다.
“자신을 공저물사(空底物事)로 만들어야 한다.”
“공… 뭐라구요?”
“공저물사(空底物事), 텅 비어 있는 물건이란 뜻이다. 자신을 공(空)의 상태로 만들라는 뜻이지.”
“아까 얘기했던 거잖아요?”
“틀려!”
“눈곱만큼요?”
“진리에 세계에선 그만큼이면 하늘과 땅 차이야!”
‘텅 비어 있다고 해서, 공(空)이라 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공이기 때문에 어떤 것으로든 변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성질을 가지든 모든 물(物)은 하나로부터 나왔기에… 기(氣) 역시 마찬가지다!”
“분명히 그렇게 말했겠다!’
아무리 그 형질이 달라 보여도 그것은 하나의 리(理)에서 분유되어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이치를 깨닫는 것으로 모든 것을 통합할 수 있다. 공(空)의 용광로는 어떠한 것이든 받아들이고 어떠한 것이든 모조리 녹여서 하나로 만든다.
공저물사…….
공(空)이기 때문에 무한(無限)하다. 공(空)이기 때문에 무상(無常)하다. 그는 자신을 비우고 자신의 내우주를 공의 상태로 만들었다. 원래 우주란 태초부터 공이었 지만, 인간은 그 사실을 망각하고 자신을 틀 속에 규정했다. 그 사실을 깨닫는 것만으로 그는 ‘공’의 상태로 회귀할 수 있었다.
여덟 가닥의 각기 다른 성질을 지닌 기가 그의 몸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이미 공의 상태가 된 비류연의 몸은 어떤 것도 거부할 필요가 없었다. 텅 비어버린 공간을 향해 공력이 강물처럼 흘러 들어간다.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영혼처럼 흡수된 여덟 개의 기는 그 안에서 하나로 조화를 이루었다. 그런데 갑가지 그중 하나의 기가 미친 듯이 날뛰며 그의 내부를 파괴하려고 날뛰었다. 사나운 용은 그의 내부를 부수기 위해 미친 듯이 날뛰었지만, 부술 틀이 존재하는 않은 곳을 부수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침내 그 사나운 용조차도 그의 안에서 하나를 이루었다.
마침내 그의 내부에서 아홉 개의 힘이 하나로 조화를 이루었고, 밖을 향해 날아갔다.
그 순간 눈부신 빛이 비류연의 몸으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마치 대일여래의 광휘처럼 눈부신 빛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소리도 울려 퍼지지 않았다. 오로지 큰 고요 [大寂]만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어라? 방금 그게 뭐였지?”
철옥잠 마하령이 눈을 껌벅이며 중얼거렸다.
“글쎄… 꾸, 꿈이라도 꾼 건가?”
옆에 있던 용천명 역시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순간 장내를 감싸던 따뜻하고 포근했던 빛이 사라지자 사람들은 눈을 껌벅였다. 한바탕 꿈을 꾸고 자리에서 일어난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너무도 고요해졌기에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고요 안에서 머무르는 게 그토록 황홀한 일이었던가? 아직도 잠이 덜 깬 듯한 몽롱한 상태에서 사람들은 멍하니 생각했다. 입맛 을 다시며… 가능하다면 다시 한 번 그런 상태로 머물고 싶었다.
“아참, 그러고 보니 결과! 결과는 어떻게 됐지?”
잠시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나자 마하령은 현실로 돌아온 시선으로 7조를 향했다. 7조에는 그녀가 매우 싫어하는 한 남자가 속해 있었다. 하지만 7조 역시 그들을 지 켜보던 중인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그들도 아직 꿈에서 덜 깬 듯 멍한 상태였고, 서로의 등에 대고 있던 손은 떨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암벽은? 그 결과를 보기 위해 그녀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마하령의 눈이 크게 떠졌다.
“푸하하하하하하!”
마하령은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크게 웃었다. 체면 따위에 상관치 않고 그녀는 통쾌하게 웃었다. 온 산이 떠나갈 듯 미친 듯이 웃었다. 함께 있던 용천명은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자신의 처지에 절망을 맛봐야 했다.
“푸하하하하! 저게 뭐야, 저게! 말짱하잖아! 말짱해!”
그녀는 허리를 반으로 꺾은 채 배꼽을 잡고 웃고 있었다. 너무 웃었더니 눈물이 다 나려고 했다. 어안이 벙벙하기는 7조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암벽은 흠 하나 없이 깔끔했다. 단일 촌의 구멍도 나 있지 않았다.
“호호호, 이래서는 꼴찌 결정이로군! 꼴찌 결정! 아무리 무능해도 그렇지, 흠 하나 없다니!”
마하령은 정말 통쾌한 모양이었다. 그동안 쌓였던 울분이 이번 삽질을 통해 좀 풀리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비류연은 마하령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계속해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는 아직도 잠이 떨 깬 듯한 그런 모습이었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내부 세계와 외 부 세계가 일순간에 반전하는 듯한 그 느낌.
그 느낌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것은 진짜 있었던 일이었다.
비류연은 자신의 두 손을 한 번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다시 검은 광택이 도는 벽을 향해 뻗어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마하령이 여전히 유쾌한 듯 웃고 있었 다. 그에 동조해 다른 사람들도 함께 웃기 시작했다. 웃음은 화선지에 떨어진 묽은 먹물처럼 대중을 향해 번져 나갔다. 그러나 비류연의 귀에는 어떤 웃음소리도 들 리지 않았다. 그가 지금 관심 있는 것은 자신과 이 세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뿐이었다.
툭!
어느새 가까워진 비류연의 손가락이 암벽과 살짝 맞닿았다.
그 순간 웃음소리가 씻은 듯 사라지고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아무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비류연은 약간 멍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뿐만 아니라 모 두가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사르르르륵!
그의 눈앞을 가로막고 있던 암벽이 애초에 먼지로 쌓아올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먼지가 되어 바람에 흩어졌고, 일부는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마치 신기루처 럼…….
그리고 지름이 오 장은 족히 되어 보이는 거대한 동굴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도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풀썩!
최초로 적막을 깬 이는 마하령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통쾌하게 웃어젖히던 마하령이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던 것이다.
위지천 역시 더 이상 서 있을 힘이 없었다. 그래서 주저앉았다.
놀랍게도 그의 머리는 다 타버린 재처럼 하얗게 변해 있었다. 과도한 양의 진기를 일시에 방출했기 때문에 생겨난 현상이었다. 그의 피부 역시 고목 껍질처럼 메말 라 있었다. 도저히 관문 시작 전의 그 사람이라고 볼 수가 없었다. 그는 지금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그 기적은 조금 전 비류연이 보여주었던 신비로운 현상과 연관이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건 이제 그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또… 또다시 실패하고 말았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그 생각만이 가득 차 있었다. 다시 일어날 힘은 이제 그에겐 남아 있지 않았다. 무의미하게 불타버린 생명의 잔해만이 그곳에 남아 있을 뿐 이었다. 거기에 남은 것은 더 이상 위지천이 아니었다. 위지천이라 불리던 생명의 찌꺼기일 뿐이었다. 아무도 그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해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비 류연은 한때 위지천이라 불렸던 그 잿더미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마침내 그에게 다가갔다.
방심 상태에 빠져든 위지천의 어깨에 손을 얹은 비류연은 자신의 입을 그의 귓가에 가져다대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상냥하게 말했다.
“아깝네요, 조금 더 했으면 소원을 성취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래, 소원을 이루는 대가로 무엇을 지불했나요? 자신의 영혼?”
위지천은 석상처럼 몸을 굳혔다. 그의 얼굴은 석고를 바른 듯 창백하고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비류연이 다시 말했다.
“과연 다음번에도 지불할 만한 대가가 남아 있을지 모르겠군요.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 안 그러면 본인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테니깐요. 모든 것을 버렸다 고 해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시길.”
위지천은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삼켰다. 울분을 삭히기 위해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게 수화관은 끝났다.
그리고 이번 관문의 일 위는 7조에게로 돌아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