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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255화


“험, 그러도록 하마.”

중소구는 혼자 먹는 것이 싫었으나 배우고 오겠다는 아이를 차마 잡을 수가 없었다. 다만 그는 방금 전 차 맛이 참으로 얄딱꾸리 했다는 것을 상기시킬 뿐이었다. 그때 재빨리 빠져나온 동천은 방으로 향하면서 기어코 불만을 터뜨렸다.

“도연을 보고 배워? 지랄하네. 걔한테 배울 게 뭐가 있는데? 그놈이 나보다 내공이 높아, 아니면 나보다 빠르기를 해? 그래, 다 제쳐두자고. 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기초적인 외모에서부터 이 몸에게 딸린다는 거야. 그런고로 내가 그놈 보고 배우느니 지나가는 똥개한테 배우겠다 이거야. 안 그래요?”

아무것도 모르고 지나가던 한 사내는 얼떨떨한 얼굴로 말했다.

“뭔 소리냐?”

동천은 버럭 화를 냈다.

“에이 씨! 모르면 말이나 걸지 말지!”

황당한 일을 겪어 말조차 제대로 못 하는 사내를 제쳐두고 동천은 휑하니 사라졌다. 잠시 후 방안으로 들어간 동천은 식탁 위에 한 손을 괴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도연을 보게 되었다. 큰소리로 부르려고 했지만 너무도 심각하게 있는지라 섣불리 말을 걸기가 그랬다.

‘뭐가 저리 심각해?’

동천은 살금살금 걸어갔다. 헌데 자세히 보니 도연은 식탁에 글씨를 써 놓고 멀거니 보고 있는 상태였다. 먹으로 쓴 것이 아니라 찻물로 휘갈긴 것이었다. 동천은 더욱 기척을 죽이고 다가간 뒤 저도 모르게 쓰여진 내용을 읽었다.

“만물인 하나이고 나와 내가 그런데 기가 역행하는 상황에서 무슨 불만이 있냐고? 이게 뭐냐?”

도연은 화들짝 놀랐다. 그는 창백해진 기색으로 다급히 물었다.

“이, 읽으셨습니까?”

동천은 어이없다는 말투로 답했다.

“장난하냐? 읽었으니까 이 몸의 고결한 입에서 방금 전 내용이 흘러나온 거 아냐.”

도연은 단호하게 말했다.

“기억에서 지워버리십시오.”

“뭐?”

“그것을 기억하시면 큰일이 납니다.”

뭔지 모르지만 도연이 다급해 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장난이 발동한 동천은 절대 그럴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야, 나도 그러고 싶은데 이 몸께서 두뇌가 너무 좋으셔서 한 번 외운 건 잊어버릴 수 없어. 어떻게 하지?”

잠시 생각한 도연은 차선책을 내놓았다.

“그렇다면 제 말을 깊이 새겨들으시기 바랍니다. 운기조식 때 절대로 그것을 상기시키시면 안 됩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그때의 저와 같은 상황이 됩니다. 알겠습니까?”

코를 파며 짓을 하던 동천은 너무도 충격적인 소리를 듣고 저도 모르게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컥? 아이구, 아파라! 동천 죽네!”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사정화에게 얻어맞고 피를 흘린 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동천은 도연의 간섭이 귀찮아 손을 내저었다.

“됐어, 됐어. 누가 죽냐? 에이 씨.”

그는 품에서 수건을 꺼내 들어 코피를 닦아냈다. 방금 전 고통으로 정신적인 충격에서 다소 벗어난 동천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게 정말이야? 운기조식 할 때 그거 외우면 심마에 빠진다는 게?”

“그렇습니다.”

화가 난 동천은 대뜸 도연의 머리를 휘갈겼다.

“이 등신아! 그딴 건 네 대가리에서 해결해야지 왜 식탁 위에 써 놓고 지랄이야! 지금 나보고 그거 외우다 뒤지라는 거야 뭐야!”

할 말이 없었던 도연은 별다른 표정 없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모두 제가 모자란 탓입니다.”

“그건 당연한 거지 자식아!”

이 기회가 아니면 언제 때리겠는가. 동천은 그런 생각에 또다시 머리를 때렸다. 손에 쩍쩍 달라붙는 소리가 방안을 울려 퍼졌다. 이번 것은 충격이 꽤 컸던지 도연이 이를 악물었다. 동천은 더 때렸다가 티가 날까 싶어 그쯤에서 그만두었다. 만약 중소구가 눈치라도 채면 골치가 아파지기 때문이었다.

“에이 씨, 난 수하 복이 지지리도 없는 분이라니까?”

홧김에 들고 있던 손수건을 내던졌다. 그러나 촌각도 못 되어 던졌던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동천은 그것을 정성스레 털어 냈다. 도연의 시선을 느꼈음인가? 동천은 근엄하게 자세를 고쳐 잡고 손수건을 들어 보였다.

“너는 이것이 어떠한 손수건인지 아느냐?”

“모릅니다.”

동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당연히 모르겠지. 어찌 무지한 네가 이 손수건의 가치를 알겠느냐.”

거창하게 말하긴 했지만 코피가 묻은 것 빼면 별 특징이 없는 손수건이었다. 도연은 사연이 있는 손수건이라 생각하고 물었다.

“어떠한 가치가 있습니까.”

동천은 옛일을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 손수건은 이 몸을 사모하는 계집이 자신을 잊지 말라 하고 그 징표로 준 것이니라.”

도연은 알겠다는 얼굴을 했다.

“소연을 뜻하는 거군요.”

엉뚱한 대답을 듣게 된 동천은 뭔 개소리냐는 듯이 도연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곧 아련한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그 아이도 있었구나. 후후, 그 아이는 생각 외로 정열적이었지.”

도연은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알고 무척이나 놀라워했다.

“소연이 아니라는 말씀이십니까?”

동천은 히죽 웃었다.

“의외인가 보구나. 하긴 너에겐 조잘대는 년 하나뿐이니 이 몸께서 인기가 많은 것이 불만이겠지. 훗, 쪼잔한 놈 같으니라고.”

도연은 안색을 굳혔다.

“조잘대는 여자라니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동천은 근엄함을 풀고 원래의 그로 되돌아왔다.

“뭐? 너 정말 모르냐? 수련이 말야. 수련이.”

도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아이가 어찌하여 저와 연관이 있다는 겁니까.”

동천은 더 이상 말하기 귀찮아 도연에게서 신형을 돌렸다.

“아아, 모르면 됐어. 난 또 걔하고 네가 서로 짝짝꿍했는 줄 알았지 뭐냐? 히히, 그럼 한마디로 수련이 지 혼자 짝사랑을 했다는 거네? 으히히히! 쌤통이다.”

도연은 뜻밖의 말을 들어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마침 더 할 말도 없었던 동천은 수건을 빨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정화 년 꺼라 좀 찝찝하긴 하지만 지금은 엄연히 이 몸의 손수건이니 깨끗하게 빨아야겠지?”

말은 그렇게 해도 2년여 동안 사정화의 손수건을 품에 간직하고 있는 것을 보니 그녀에게 마음이 가 있는 듯했다. 문제는 어떠한 종류의 마음이냐는 것이지만.

“쳇, 핏물은 잘 안 빠지는데 이거 지우려면 좀 걸리겠잖아?”

뭔 놈의 불만이 그리도 많은지. 분명 동천은 극락에 가서도 불평불만을 입에 달고 살리라. 집게손가락으로 손수건을 돌리며 걸어가던 동천은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중소구와 마주치게 되었다.

“이놈아, 그 피 묻은 손수건은 뭐냐?”

재수 없는 놈을 다시 보게 된 동천은 더럽고 아니꼬웠지만 반기는 얼굴을 했다.

“헤헤, 벌써 식사하셨어요?”

그 사이 바로 앞까지 당도한 중소구는 가슴을 딱 피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렇다. 헌데 본 대인이 두 번 묻게 되는구나. 그 손수건은 뭐냐?”

‘씨발 놈, 세 번 물으면 아주 죽인다고 협박을 하지 그러냐?’

속으로 한 번 씹고 난 동천은 코피라고 말하면 자신의 위신(?)에 금이 갈까 봐 늘 하던 대로 둘러댔다.

“아, 이거요? 어떤 아저씨가 팔에 상처를 입으셨길래 제가 닦아준 거예요.”

중소구는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정말이더냐?”

동천은 분통이 터지는 얼굴로 소리쳤다.

“대인! 어찌 대인의 신분으로서 사람의 말을 그리도 못 믿는다는 말씀이십니까! 저는 대인의 아량이 그리도 좁은지 이제야 알았습니다!”

한 방 먹여놓은 동천은 길게 끌면 자신이 손해를 본다는 것을 알기에 이쯤에서 수그러지는 행동을 보였다.

“그런 거였어요? 에이, 그럼 진작에 그리 말씀하시지요. 저처럼 무지한 아이는 어렵게 말하면 못 알아듣는다고요.”

중소구는 뭔가 속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밀려왔지만 그도 동천과 마찬가지로 이쯤에서 그만두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알겠다. 그럼 그것을 빨고 곧바로 들어올 테냐?”

동천은 이 인간이 왜 그것을 물어보나 싶어 중소구의 눈치를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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