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6권 22화 – 새로운 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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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6권 22화 – 새로운 재생

새로운 재생

-파괴와 재생-

“자, 이제 전말을 다 알았으니 하고 싶은 말 있나요?”

비류연이 물었다.

“아니, 하지 않도록 하지. 귀찮기도 하고, 구차하기도 하고.”

대공자 비는 의외로 순순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들켜버린 것 같군. 여기서 변명해봤자 안 믿어주겠지?”

그가 싱거울 정도로 간단하게 인정했다. 여기저기서 경악이 뒤섞인 웅성거림이 전해졌다.

“그럼 안명후를 죽인 것도 역시 당신 짓?”

“그 일은 내가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무관하지 않다고 해두지. 뭐, 내가 한 걸로 쳐도 좋아. 어차피 도구를 이용했다 해도 내 도구였으니 말이야.”

“이런 짓을 하는 이유는? 그리고 목적은?”

“이유가 듣고 싶나?”

“물론!”

비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낡은 관습 타파! 그리고 강호의 새로운 재생!”

신념에 가득 찬 눈빛을 칼날처럼 날카롭게 빛내며 비가 대답했다.

“새로운 재생? 어째서?”

비류연이 의아한 얼굴로 반문했다. 무슨 이유로 현재의 강호란 틀을 파괴하려 한단 말인가?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건가?”

“몰라서 묻는 거 아니냐니? 설마 자기가 알고 있는 건 남도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죠? 그건 이 세상에 내가 모르는 건 없다고 착각하는 것만큼이나 바보 같은 짓이라구요!”

긴장감 없는 목소리로 비류연이 말했다.

“그렇다면 확실히 말해주지! 현재 이 무림이 썩어빠진 웅덩이이기 때문이다. 염오(染汚된 호수, 그것이 현재 강호의 진실한 모습이다. 누구나 들춰보기 꺼려 하는 진면목! 과거로부터 대대로 전해져 오는 권위와 기득권에 안이하게 빠져들어, 그 단물만을 마셔대고 있는 구더기들이 들끓는 썩은 웅덩이!”

더러운 것을 내뱉기라도 하듯 대공자가 외쳤다.

“규격화된 교육의 틀, 권위에 대한 맹종을 조장하는 통념, 전통의 수호라는 이름하에 교사되는 가르침에 대한 의문은 용납되지도 않지! 시조로부터 내려오는 가르 침을 단지 답습하고 모방하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족속들! 정형화된, 형식화된 가르침을 답습하는 것에서 무슨 새로운 창조가 탄생된다는 말인가? 참된 무리(理)를 터득하기 위해서는 아직 가야 할 길이 까마득한데 겨우 이런 곳에서 ‘전통의 보존’이라는 명목하에 주저앉아야 하는가? 자신의 기득권을 잃어버 리는 것이 그렇게도 두려운가? 그런 틀 따위는 파괴해버리는 게 더 나아! 파괴만이 새로운 재생을 가져온다.”

“진보와 발전을 위해서 전통은 쓸모가 없다는 이야기?”

“그것은 너의 말이지 내 말이 아니다. 난 전통이 쓸모없다고 말한 적이 없다. 다만 전통의 모방은 오히려 전통을, 진리를 훼손시키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옛 가르침을 본받고 계승하는 것과 모방하는 것은 전혀 다른 세계의 이야기다. 이 둘을 같은 것으로 본다면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경멸뿐이다.”

불을 토하는 듯한 웅변은 계속되었다.

“조사(祖師)의 진의보다 조사가 전해준 한낱 문자에 집착하는 족속들! 부분만 보고 전체를 말하려는 족속들! 지난 백 년간 이 강호에 얼마만큼의 변화가 있었다는 것인가? 얼마만한 진보가 있었는가?”

“천무학관과 마천각의 탄생은 진보의 대가가 아니었다는 뜻?”

“그 시도는 상당히 쓸 만했다고 본다. 하지만 그 체계 역시 완벽하지 못했다. 너희들은 참된 무리를 탐구하는 대신 그 안에서 세력 싸움을 되풀이하지 않았나? ‘우 리’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너희들은 다른 잡무에 신경을 소모했다. 강호의 평화 따위는 상관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애당초 그런 것이 있다는 것 을 너희들은 믿지 않았으니깐. 어떻게 자신이 믿지도 않는 것을 목표로 진심으로 추구할 수 있겠는가?”

뜨거운 열변이 돌연 차가운 냉소로 돌변했다.

“흥, 전통을 수호한다고? 단지 선지자들의 위업을 훼손시킬 뿐이 아닌가? 이 버러지만도 못한 것들은! 양 떼밖에 길러내지 못하는 목장은 부숴버리는 게 나아! 강

호에 필요한 건, 진정한 무를 구하고자 하는 용과 범뿐!”

자신이 믿고 있는 정의에 한 치의 의심도 품고 있지 않은 듯 그의 목소리는 일말의 망설임도, 의문도 깃들여 있지 않았다.

“짝짝짝!”

느닷없이 박수 소리가 났다.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박수를 친 사람은, 다름 아닌 비류연이었다.

“그건 참 옳은 말이군요. 자신을 얽매고 있는 틀을 부수지 못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지요. 과거를 뛰어넘는 것에 현재의 가치가 있으니깐.”

“그자식 이야기에 동조해서 어쩌자는 거야?”

장홍이 버럭 화를 냈다.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건지 일부러 안 하는 건지 상당히 수상쩍은 비류연이 그에게 마땅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비류연이 잠시 말을 끊었다.

“이론이 맞다고 해서, 그 말이 옳다고 해서 그 행동이 모두 용납되는 것은 아니지요.”

비류연의 눈에 기광이 번뜩였다.

“옳은 말은 옳은 행동을 만났을 때 그 가치를 지니는 법. 그 전에는 그저 혹세무민하는 헛소리일 뿐이지요. 지금 내가 보기엔 그다지 옳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것 같 지는 않군요. 중도(中道)를 버리고 극단을 향해 치닫는 것은 균형을 무너뜨릴 뿐, 새로운 창조를 이룩할 수 없어요. 중용을 모르고 극단으로 치닫는 행위는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파괴만을 주관하는 법. 새로운 창조를 위한 파괴가 아니라, 파괴를 위한 파괴가 되어버리고 말아요. 그런 건 별로 재미있는 일이 아니라구!”

웬일로 저녀석의 입에서 저런 바른 소리가? 그를 아는 사람들은 다들 놀라 자빠지고 말았다.

“그렇소. 게다가 당신의 계획은 이미 발각되었소! 창고에 있던 염우도 우리들이 모두 확보했소. 그만 포기하시오! 당신에겐 이미 그럴 힘이 없소!”

장홍이 외쳤다.

“힘이 없다고? 크크크큭!”

갑자기 비의 입에서 음산한 괴소가 흘러나왔다.

“계획을 막았다고? 어딜 막았다는 건가? 이런 피라미를 하나 잡았다고? 너희들이 찾아낸 건 미끼일 뿐이야. 다 쓰고 남은 찌꺼기 같은 거지. 이미 늦었다! 어리석 은 구더기들! 강호를 좀먹는 좀벌레들아! 이미 모든 준비는 끝마쳤다. 계획은 예정대로다!”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소름끼치는 목소리였다. 평소의 대공자 비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그런 목소리였다.

“뭐, 뭐, 뭐라고!!!”

사람들 사이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아깝군! 여기에 무림맹주까지 왔으면 좋았을 것을… 한꺼번에 쓸어버릴 수 있었을 텐데……. 지금부터 그 증거를 보여주지.”

대공자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우르릉 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뭐, 뭐지? 지진인가?”

계곡 안이 지진이라도 만난 것처럼 심하게 흔들렸다. 대공자와 그의 부하들이 일제히 합창했다.

“고인 물은 썩고 쓰지 않는 검은 녹슨다! 화룡이 날아오르고 불의 홍수가 산을 뒤덮으리라! 그리고 재 속에서 불사조는 날아오른다!”

마치 주문을 외우는 사람처럼 비와 그의 추종자들이 외쳤다.

“나, 불꽃의 봉화로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고하노라!”

천겁혈세 혈신재림!

그리고 진이 발동되었다.

원형을 이루고 있는 계곡의 열두 방위에서 불꽃 기둥이 치솟아올랐다. 마치 역류하는 폭포처럼.

역류하는 불꽃은, 폭포는 잠자는 용의 각성을 고하는 시초에 불과했다.

“어서 멈춰라! 우리 셋의 손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검성이 고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 불꽃은 위험했다. 그의 본능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소용없습니다.”

“뭐라고?”

“한 번 발동한 화룡멸겁대진은 아무리 저라도 멈출 수 없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불의 용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 전에는 그 분노를 풀지 않지요. 그리고 전 잡히지

않을 겁니다.”

비가 순간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엄청난 속도로 몸을 뒤로 뺐다.

콰콰쾅!

그 순간 단상이 엄청난 굉음과 함께 폭발했다. 가설해놓았던 염마뢰가 신호에 맞춰 폭발한 것이다. 엄청난 충격파와 폭풍이 사람들을 덮쳤다. 그것을 신호로 홍매 곡 여기저기에서 연쇄 폭발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곳을 가루로 만들려고 작정을 한 듯했다.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으냐?”

비뢰도 오의 검기 사살기

유성호접검

비류연의 양팔에서 뻗어나온 수십 개의 칼날 그림자가 유성처럼 대공자의 몸에 쇄도했다. 당장에라도 그의 몸은 예리한 유성우에 관통당할 것 같았다. 그런데 갑 자기 대공자의 몸이 세 겹으로 분리되었다. 유성 같은 검류는 허무하게 비의 첫 번째 그림자와 두 번째 그림자를 훑고 지나갔다.

‘설마, 삼첩영(三疊影)?”

비뢰문의 독문신법인 삼첩영. 방금 비가 펼친 것은 그것과 똑같지는 않았지만 매우 닮은 기술이었다. 대공자는 비류연의 공격을 피해 착지하자마자 바로 손을 뿌 렸다. 틈을 줘서 다시 공격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곤란했다.

영뢰(影) 잔흔(殘痕)

보이지 않는 칼날이 비류연의 전신을 향해 살의를 번뜩이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당한 대로 갚아준다. 등가교환의 법칙에 충실한 비류연답게 그는 전방위로 휩쓸고 들어오는 비의 공세를 모조리 피해냈다.

“설마, 모조리 피해내다니… 그때보다 세 배는 더 강력한 공격이었는데!”

대공자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한 번 본 기술에 또 당할 거라고 생각했나? 이 기술, 역시 그때 어둠 저편의 존재는 당신이었던 모양이군. 설마하고 긴가민가했었는데.

자신의 감이 맞았던 모양이다.

“그럼 이제 방화, 폭파, 살인 교사에 납치까지 죄목을 추가해야겠네요.”

손가락으로 하나하나씩 일일이 죄상을 꼽으며 비류연이 말했다. 불쾌해진 대공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두 번째 신호가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더 이상 놀아줄 수 없겠군. 시간이 다 됐거든! 용이 날아오를 시간이다!”

더 이상 지체하면 자신과 부하들마저 화룡의 제물이 될 수 있었다. 잿더미가 된 몸으로 대업을 이룰 수는 없는 일, 비는 신속하게 몸을 뺐다.

육십사괘(六十四卦)의 방위에 따라 매설되어 있던 ‘강룡(降龍)’이란 이름의 특수 장치에서 염우와 함께 먼지처럼 미세한 화약인 용린이 뿜어져 나왔다. 용린은 공 기의 흐림을 타고 퍼져 나가더니 거대한 하나의 띠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 검은 띠 위를 불꽃이 포효하며 달리기 시작했다.

화룡멸겁대진(龍滅劫陣) 제이 단계 발동!

잠자고 있던 화룡이 눈을 떴다. 화룡이 분노의 불꽃을 토하며 대지를 불꽃의 강으로 뒤덮었다. 타오르는 불꽃이 화룡의 비늘처럼 일렁이는 몸통을 이끌며 질주했 다. 검은 연기가 공간을 한순간에 집어삼켰다. 후끈거리는 열기가 대기를 끓어오르게 하고 있었다. 급속도로 가열된 대기가 폭발할 듯 거세게 요동쳤다. 화르르르르륵!

화룡의 입이 꼬리를 물자 거대한 불꽃의 성벽이 세워지며 그들을 가두었다.

무시무시한 열기에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혼란에 빠진 중인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홍매곡에 입구는 하나뿐이었다. 화룡멸겁대진이 일 단계에서 이 단계로 전위되는 순간 잠시 동안 생로가 열린다. 그 생로를 놓치면 지옥의 겁화는 모든 것을 싸그 리 쓸어버릴 것이다.

대공자는 순식간에 독고령을 제압한 뒤 부하들을 이끌고 생로를 빠져나갔다. 뒤쫓으려던 비류연은 마천칠걸의 저지에 발이 묶여 추적을 포기해야만 했다.

한 여인을 들쳐멘 비와 그의 수하들이 찰나의 생로를 지나 입구를 통과하자 홍매곡의 입구가 천둥 신의 북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렸다. 더 이상 이곳은 사람이 드나 들 수 없었다. 홍매곡은 완전히 고립된 것이다.

준동하는 열화가 초열지옥을 현세로 끌어들였다. 불의 홍수가 그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었다. 천무삼성과 혁중이 기를 모아 불꽃을 어찌해보려 했지만 속수무책 이었다. 염마뢰가 그들을 어찌하지 못했듯 그들 역시 화룡멸겁대진을 어찌하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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