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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269화


그로부터 하루가 지났다. 인적이 뜸한 산길에 십수 명의 사내들이 나란히 도열해 있었는데, 그들 뒤에는 어디에서 준비했는지 고급 의자 위에 앉아있는 사내가 거만한 폼으로 자신의 수하에게 상황 설명을 듣고 있었다.

“손을 타고 올라온 독이 일정 시간 동안 몸에 퍼지다가 효과를 발휘해 즉사한 듯싶습니다.”

다리를 꼬고 앉아 느긋하게 전방의 시체들을 주시하던 그는 갑자기 질문을 꺼냈다.

“독은?”

무슨 독이냐는 뜻이리라. 수하는 질문의 요지를 정확히 집어내어 즉각 답해주었다.

“미분독(尾粉毒)입니다.”

사내는 네 구의 시신에서 시선을 거두곤 흥미로운 표정으로 반문했다.

“미분독?”

“그렇사옵니다.”

사내가 갑자기 크게 웃어 제꼈다.

“크하핫! 그놈이 생각해낸 것만큼 조잡한 독이군. 그래, 만들 독이 없어서 가축의 털이나 꼬리들을 삭혀 주성분으로 만든 그런 독을 사용한다는 말인가? 으하하하!”

허리를 굽히고 있던 수하는 하나도 안 웃겼지만 상관이 좋다고 웃는데 뭐라 할 수가 없어 조용히 듣기만 했다. 마침내 사내의 웃음이 멈추었다.

“크흠. 그렇단 말이지? 헌데 네가 키운 놈들은 뭐 하는 것들이냐.”

싸늘해진 뒷말에는 진한 살기가 배어 있었다. 창백해진 수하는 무릎을 꿇고 재빨리 자신의 잘못을 빌었다.

“용서해주십시오! 그놈이 설마 처음부터 흔적을 지우며 갈 줄 몰랐었습니다! 제 죄가 크나 며칠 말미를 주시면 꼭 그놈의 흔적을 잡아내겠사옵니다!”

빌고 있는 이 사내의 말이 약간 이해가 안 가리라. 자세히 설명해주자면 이들은 감송을 쫓아오고 있었는데 출발 당시부터, 아니 그전부터 감송이 흔적을 지울 줄 몰랐다는 것이다. 그러니 추적자들은 당연히 네 개의 흔적 중에 감송이 끼어 있는 줄 알고 열심히 추적을 했었는데 오늘 죽어 나자빠진 네 명의 약초꾼 중에 감송이 없자 무척이나 당황했고, 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했던 것이다. 그러나 수하가 잘못을 빌고 있음에도 그의 상관은 쉽사리 용서할 기세가 아니었다.

“네놈이 적어도 감시소에서 빠져나간 놈들이 몇 명이었는지 물어만 봤어도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 아니냐!”

죽음을 감지한 수하는 부르르 떨었다. 한 번의 실수로 허무하게 죽는 것이다.

‘제길, 끝인가?’

그런데 그때 그에게 구세주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군. 잘해본다고 한 것이니 이번만큼은 용서해주시지요. 그러면 저 녀석도 충심을 다해 더욱 열심히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주군의 넓은 아량으로 이번 한 번만 용서해주심이 어떻겠습니까.”

지금 그 목소리는 전리염(電利炎)이란 자의 목소리였다. 바로 독전의 전주인 혼독마예(混毒魔藝) 광예(胱刈)의 충실한 심복인 전리염 말이다. 심복의 말이라서 그럴까? 당장 쳐 죽일 것 같던 광예의 음성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래, 네 말에도 일리가 있다. 좋아 좋아. 공영(空營).”

무릎을 꿇고 죽음을 각오하던 공영은 희망이 보이자 바닥에 급히 머리를 찧으며 대답했다.

“예, 전주님!”

의미 없이 손아귀를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던 광예는 잠깐 뜸을 들인 후 그 손을 의자의 팔걸이에 올려놓았다.

푸시시시.

팔걸이가 녹아버린 것은 순식간이었다. 광예는 겁에 질린 공영에게 웃는 낯으로 말했다.

“3일. 그 이상을 넘기면 네놈은 이렇게 될 것이야.”

“존명!”

급하다고 생각한 공영은 그 즉시 수하들을 이끌고 감송에 대한 추적을 나섰다. 예닐곱 명이 빠져나가고 네 구의 시체들 앞에는 광예를 비롯한 몇몇의 초고수들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의자에서 일어난 광예는 이미 의자 구실에서 멀어진 물건을 내려다보며 안쓰러운 얼굴을 했다.

“쯧쯧, 꽤나 비싼 건데 하찮은 놈 때문에 아깝게 녹여버렸군. 차라리 그놈의 대가리를 녹이는 건데 말야.”

전리염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끼여들었다.

“주군, 뭘 그리 심려하십니까. 이번 달 그놈의 급료에서 까면 되는 것인데.”

광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호탕하게 웃었다.

“으응? 푸하하!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너는 정말로 똑똑하구나.”

전리염의 고개가 직각으로 숙여졌다.

“송구스럽습니다.”

“아니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니 너무 빼지 말라고. 크크, 그럼 우리도 천천히 가볼까나?”

“명을 받듭니다.”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신형을 날린 광예의 머릿속에는 어제의 일이 떠오르고 있었다. 평소에 암실에 파묻혀 독의 배합에만 열심이었던 광예에게 살각의 각주인 신휘(呻徽)가 찾아왔던 것이다.

“놀랍군. 자네가 여기까지 직접 찾아오다니.”

이제 갓 사십을 넘긴 신휘는 차가운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부드럽게 말했다.

“제가 온 목적을 아신다면 더욱 놀라실 겁니다.”

순간 광예의 눈빛이 호기심을 발했다.

“자네가 찾아온 것보다 더욱 놀랄 일이 있다는 것인가?”

신휘는 낮게 웃었다.

“후후, 왜 없겠습니까.”

신분상으로는 맞먹는 관계이지만 광예가 연장자인 탓에 신휘를 낮춰 부르는 경향이 있었지만 신휘는 별로 괘념치 않는 듯했다.

“뜸들이지 말아줬으면 하네.”

광예는 자신이 놀림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다소 굳어진 얼굴이었다. 덕분에 좀 더 끌고 싶었던 신휘는 어쩔 수 없이 본론을 꺼내야 했다.

“광예님께서 그렇게 고대하시던 순간이 왔습니다.”

“고대했던 순간? 그렇다면 역천이 죽었다는 소리인가?”

신휘는 내심 실소를 했지만 겉으로는 놀라는 척했다.

“생각보다 직선적이시군요.”

한 번 굳어졌던 광예의 얼굴은 쉽사리 펴질 생각을 안 했다.

“그것도 아니라면 나는 더 이상 자네와 농담 따먹기 할 시간이 없으니, 이곳에 찾아온 용건만 간단히 말하고 가주시게.”

신휘는 자신에게서 신형을 돌리려는 광예를 향해 힘주어 말했다.

“감송이 외부로 나갔소.”

흠칫!

약간 틀어졌던 광예의 신형이 재빨리 원위치 했다.

“언제 말인가.”

그의 두 눈은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진한 광망(光芒)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 기세가 어찌나 대단했던지 신휘조차 거리를 두고 물러설 정도였다.

“하하, 고대하시던 순간이 맞지 않습니까.”

“인정한다. 그게 언제냐.”

어느새 반말이 되어버렸다. 신휘도 그것만큼은 용납해줄 수 없었던지 살각의 각주답게 자세를 바로잡고 전신에 살기를 흘렸다.

“저를 누구로 알고 계시는 겁니까. 뭔가 착각하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광예는 더럽고 아니꼽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했다.

“미안하네. 내 잘못을 인정하지.”

신휘의 살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셨다니 됐습니다. 그렇다면 본론으로 넘어가죠. 감송이 사라진 것은 저조차 몰랐는데 한식경 전에 의외의 인물이 찾아왔더군요. 그 인물은 방금 광예님께서 언급한 자이기도 합니다.”

잠시 골똘히 생각하던 광예는 낮게 이를 갈았다.

“으득, 역천이란 말인가?”

맞았음인지 신휘의 입이 열렸다.

“그가 찾아와 이렇게 말하더군요. ‘감송이 방금 본교를 떠났는데 각주께선 그 사실을 아시오?’ 라고 말입니다.”

“계속 말해보게.”

신휘는 고개를 끄덕이곤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의 진의를 알 수 없었던 제가 왜 그 사실을 가르쳐주냐고 물었더니, 그는 얼버무린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에헴! 어쨌든 그렇다는 것만 알려준 거요. 각주가 그에 관해 궁금해하는 것 같기에 가르쳐준 거니까 알아서 하쇼. 아? 감송의 거처 부근에서 각주의 수하로 추정되는 놈이 죽어있더라고? 그래서 부전주에게 보냈는데, 이의 없지?'”

광예의 눈썹이 지렁이처럼 심한 굴곡을 보였다.

“역천의 말투까지는 따라 하지 말게. 심히 기분이 나쁘니까.”

“아? 하하, 죄송합니다. 어쨌든 그가 그러고 나간 후 제가 직접 감송을 처리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광예님이 떠올라 시간이 촉박함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찾아 뵌 겁니다. 예전에 감송과 꼭 손속을 겨루어보고 싶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었다. 원래는 항광과 겨루어보고 싶었으나 그가 만독문으로 도망친 후 감송이 나타나자 꿩 대신 닭이었지만 상대를 바꾼 것이다. 만독문과 자신의 독공을 비교해보고 싶었던 그는 예전부터 감송과 싸워보고 싶다는 의사를 종종 표시하곤 했는데 마침내 오늘 그 기회가 찾아오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흐흐흐, 좋아. 아주 좋네. 헌데 자네가 나에게 이런 건수를 양보해주다니 의외일세.”

신휘는 그 무슨 말이냐는 듯 정색을 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너무 추켜세워주지 마십시오.”

그러겠다고 대꾸는 했지만 광예의 속마음은 달랐다.

‘간사한 놈. 손 하나 안 대고 코를 풀 작정이군. 흥, 어쨌든 거부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저놈이 이것을 빌미로 나중에 뭘 요구할지…….’

이런 은밀한 거래에는 오는 게 있으면 당연히 가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이기에 그런 생각을 한 것이었다. 화통한 성격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쪼잔한 성격 또한 아니었던 광예는 우선 당면한 문제부터 처리하리라 마음먹었다.

“이 일은 내가 맡겠네.”

신휘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부드럽게 풀렸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광예님께서 손수 맡겠다고 하시니 마음이 놓이는군요.”

용무가 끝났으면 나가달라고 말하려던 광예는 갑자기 다른 곳에 생각이 미쳤다.

“독살은 그렇다 치고, 단묘는 어찌할 것인가?”

신휘도 그것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처럼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아아, 그렇군요. 갑자기 감송이 떠나는 바람에 그녀에 관해서 약간 소홀했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모든 준비가 정리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광예였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신휘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

“지금 그녀의 내공은 거의 소실된 상태입니다. 간간이 소연이란 아이가 건네주는 피를 마시며 내공을 끌어올리고는 있지만 오십보 백보지요. 남편이 도망갔는데 그 몸으로 혼자 도망갈 리 만무하지만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그녀의 명성을 고려해 제가 직접 나설 생각입니다.”

“그녀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으니 상관은 않겠네. 그럼.”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신휘는 멋쩍은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조용히 사라졌고 광예의 생각도 거기에서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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