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271화
소연은 화정이의 손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빨리 온다고 왔는데 기다리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소연이 사부에게 무릎을 꿇고 앉자 멀뚱히 서있던 화정이는 작은 주인의 행동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자신도 따라 주저앉았다. 그녀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민소희는 희미한 웃음을 동반한 채 말문을 열었다.
“떠나기에 앞서 우리가 지금 떠나는 이유를 간략히 설명해주마. 먼저 우리가 밤을 택하지 않은 것은 이곳의 지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너도 그렇고 이 사부도 그렇고, 밖에서 생활해 본 적이 없지 않느냐.”
소연이 알아듣는 듯 하자 민소희가 다음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부수적인 이유이고 진정한 목적은 바로 마차를 타고 가야 하기 때문이란다. 마차를 타고 안내자 없이 모르는 지역을 가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러나 그 어리석음을 완화하는 방법이 바로 대낮에 가는 것이지. 낮에는 대충이나마 지세(地勢)를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니까. 호호, 소연아. 마지막으로 이 사부와 함께 잠깐 밖을 거닐지 않겠니?”
뜬금없이 왜 나가자고 하는지 몰랐지만 이곳에서의 마지막이란 단어가 절로 소연의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그녀는 화정이를 남겨두고 앞서 걸어가는 사부의 뒤를 따랐다.
“영감이 떠나고 혼자 있으니 심심하구나. 너도 그렇지 않니?”
소연은 밖에서 몇몇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대답에 조심을 했다.
“예, 할머님.”
암한문 내부의 담 길은 군데군데 수십 그루의 나무들이 심어져 있었는데 그곳들 중 한 곳으로 천천히 걸어가던 민소희는 낮게 웃었다.
“호호호. 이 할미라면 모를까 네가 참 심심하기도 하겠구나.”
소연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 그렇게 말씀하시면 소녀는…….”
다시 낮게 웃어댄 민소희는 자신의 목표 지점에 도착하자 그 누구도 모르게 황토색 분말 가루를 바닥에 뿌렸다. 바닥과 같은 색이어서 그런지 분말 가루는 땅에 닿자마자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이곳에서의 할 일을 모두 끝마친 그녀는 제자를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헌데 우연인지 몰라도 그녀와 소연이 멈춘 곳은 담을 사이에 두고 아까 분말을 뿌렸던 반대쪽이었다.
“할머님, 왜 이런 곳까지 오셨어요?”
스치듯 벽면을 주시하던 민소희는 약간 소리를 높여 말했다.
“이 할미가 긴히 해줄 말이 있기 때문이지. 귀를 좀 빌려주겠니?”
현재 민소희의 키는 소연보다 한 뼘이나 작은 상태였기에 귓속말을 나누려면 소연이 상체를 숙여야만 했다.
“말씀하세요.”
민소희가 소연의 귀로 입을 가져대는 그 순간, 건너편 벽 쪽으로 한 사내가 최대한 기척을 죽이고 다가왔다.
‘늙은 꼬마 년이 잘 나가다가 왜 저기까지 가서 귀엣말을 주고받는 거지?’
사내는 의혹이 솟아올랐지만 민소희의 내공을 가늠해 자신의 힘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청력을 높여가며 들릴 때까지 다가갔다. 사내도 사람인 이상 점점 다가갈수록 초조했다. 그러나 성인의 두 배만한 담벼락이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만큼 간도 커져있는 상태였다.
‘으음, 이제야 들리는군. 어디 보자……. 마차를 타고 도망가는데 자신은 큰 짐짝 안에 숨어있겠다고? 흐흐, 늙은 꼬마 년이 제법 대가리를 굴리는데? 좋았어! 이 사실을 알아냈으니 승진은 문제가 없겠어! 크흐흐흐.’
좀 더 듣다가 그 내용이 그 내용인지라 조용히 일어선 사내는 지면에서 몇 발자국 떼기도 전에 풀썩 쓰러졌다.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세상과 작별한 것이다. 사내의 코와 입에서는 검은 피가 미세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편, 사부의 귓속말을 열심히 듣고 있던 소연은 벽 너머에서 들린 소리에 깜짝 놀랐다.
“아? 사부…, 아니 할머님. 저기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어요.”
민소희는 손으로 벽 쪽을 가리키는 소연에게 별것 아니라고 말한 뒤 다시 방으로 돌아가자고 말했다. 어쩔 수 없었던 소연은 자신이 잘못 듣거나 사부님의 말씀처럼 정말로 별것 아닐 것이라 생각해버렸다. 방안으로 돌아온 민소희는 침대 밑에서 아까 말해두었던 짐짝을 꺼내들었다. 그녀가 몸을 웅크리고 옆으로 눕는다면 정확할 정도의 크기와 높이였다.
“이것이 그것이다. 보기보다 들어가는 것이 많으니 이 사부가 여러 가지 생필품과 같이 이곳에 들어가겠다.”
소연의 표정을 보니 내키지 않는 듯했다.
“정말 괜찮겠어요?”
민소희는 대답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 두껑을 닫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이제 이것을 보자기로 한 겹 싸고, 화정이가 들게 하거라.”
바삐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소연은 급히 사부의 말을 따른 후 어깨끈을 마련해 화정이가 메도록 했다. 그녀는 화정이의 등 쪽에 가서 말했다.
“사부님, 이제 나갈게요.”
“그렇게 직접 대고 말하지 않아도 잘 들리니 다음부터는 조심하거라.”
“예, 사부님.”
앞으로 나서 화정이를 이끈 그녀는 마차에 당도한 후 마부를 찾아 데려왔다.
“아저씨, 본교의 밖으로 나들이를 갈 테니까 그리 알고 몰아주세요.”
“그럽죠. 헌데 전주님의 허락이 계셨습니까?”
“다, 당연하지요.”
마부는 소연의 행동이 미심쩍어 보였지만 자신이 추궁할 위치에 없거니와 지금 소연의 지위는 당주급과 맞먹기에 군말 없이 마차를 몰았다. 소연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돌렸고 화정이는 지금의 상황을 모두 알고 있는 것마냥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위험했다.”
놀란 소연은 더듬거리며 물어보았다.
“뭐, 뭐가? 뭐가 위, 위험했다는 거니?”
화정이는 먹을 것을 감춘 어린애처럼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나는 몰라.”
“…….”
소연은 이 시점에서 화를 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깐 고민을 하다 어물쩍 넘어가게 되었다. 대신 그녀는 고개를 숙여 짐짝 안에 갇혀있는 사부에게 모기 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부님, 불편하신 거 없어요?”
민소희의 답변은 금방 들려왔다.
“나는 괜찮으니 이곳을 벗어날 때까지는 관심을 끊거라.”
“알겠습니다.”
자세를 꼿꼿이 세운 소연은 한동안 그러고 있다가 주위의 풍경에 눈을 돌렸다. 똑바로 볼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일부러 초점을 흐리게 했다. 그러자 마차의 빠른 속도와 멈추어 있는 것들이 스쳐 지나가면서 묘한 그림을 그려내고 있었다. 갑자기 수련이 떠올랐다.
‘만일 그 아이가 곁에 있었다면 뭐라고 재잘댈까? 아아, 그 재잘거림을 언제나 다시 들어볼 수 있을까?’
답답한 심정이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 그때 화정이의 손길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아? 왜 그래? 뭐가 묻었니?”
화정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상해 보여서.”
무슨 소리인지 몰랐던 소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너야말로 이상한 소리 말고 조용히 있어. 알겠지?”
화정이는 알아들었는지 그 뒤로 입을 다물고 죽은 듯이 앉아 있었다. 소연은 자신이 너무했나 생각도 해봤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화정이기에 밖으로 빠져나갈 때까지는 차라리 저러고 있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감송 때와는 달리, 그들이 검문소에 당도한 것은 두 시진 만이었다. 마차를 이리저리 훑어보던 검시관은 마부와 몇 마디 주고받더니 스스로를 낮추며 소연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가씨, 잠깐 나들이를 가신다고요?”
소연은 일부러 거만하게 행동했다.
“그래요. 잘못된 점이라도 있나요?”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놀랍도록 침착한 행동이었지만 손아귀가 점점 축축해 지는 것만큼은 막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행동이 먹혀 들어갔는지 검시관은 잠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허나, 그렇게 녹록한 자는 아닌 듯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럴 리가요! 아가씨의 나들이를 제가 어찌 감히 막겠습니까. 하지만 예전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은 후로는 누구를 막론하고 동반한 물품을 검사하는 게 관례가 된지라 그 안에 있는 짐짝을 조사하겠습니다.”
그 불미스러운 일은 동남당주 만추가 천마삼해를 들고 도망쳤을 때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것을 모르고 있던 소연은 내심 당황했지만 어찌 짐짝 속에 누워있는 민소희보다 당황했겠는가.
‘그런 규칙이 새로 생겼을 줄이야. 으음, 내 불찰이로다.’
사부 못지않게 당황했던 소연은 이내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다.
“그런, 그, 그런 규칙이 정말로 있는 건가요?”
무언가 낌새를 챈 검시관은 보란 듯이 마부에게 물었다.
“이보게. 내 말이 틀렸는가?”
이 상황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 마부로서는 당연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 규칙이 생긴 지 한 육칠 년 됐지요?”
검시관은 씨익 웃고 소연에게 묘한 웃음을 띄웠다.
“자, 확인이 됐지요?”
“그, 그것은…….”
“알아들으셨다 생각하고 그럼 확인해 보겠습니다.”
검시관은 한 건 걸렸다는 모습을 하곤 조용히 마차의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