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275화
황룡세가(黃龍世家).
동천은 꿈을 꾸었다. 알록달록한 작은 꽃무늬 집에서 뒹굴었고, 동천은 그 꿈속에서 화정이와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이히히! 이쁘고 이쁜 우리 화정이.”
“아이, 정말?”
화정이가 꿈속에는 애교까지 떨었다. 하긴, 꿈인데 그보다 더한 것도 못할까. 동천은 자신의 가슴을 탕탕 쳐댔다.
“정말이지! 히히, 오랜만에 만났는데 우리 화정이 찌찌 좀 만져볼까?”
화정이는 살짝 눈을 흘기며 몸을 빼냈다.
“부끄러워. 남들이 보면 어떻게 해.”
잽싸게 달려든 동천은 화정이의 가슴을 풀어헤치고 마음껏 주물렀다.
“히히, 보긴 누가 봐. 여긴 우리밖에 없는데.”
교태를 부리던 화정이는 희고 고운 손가락을 들어 동천의 뒤쪽을 가리켰다.
“조오기. 조오기 보고 있잖아.”
그제야 낌새를 느낀 동천은 눈알을 부라리며 고개를 돌렸다.
“응? 언놈이야! 언놈이 감히 우리 사이(?)를 방해해?”
뒤쪽 어둠 속에서 사람의 신형이 어른거렸다. 가만히 그들을 주시하고 있던 인영은 음습한 분위기를 조장하며 천천히 동천 쪽으로 걸어왔다.
“으흐흐. 누구 긴 누구이겠느냐. 네 친구인 폐혈서생이지. 크하하핫!”
“히익?”
너무도 놀라 털썩 주저앉은 동천은 온몸에 피 칠을 한 폐혈서생이 어슬렁어슬렁 걸어와 자신의 앞에 설 때까지도 옴짝달싹 못했다. 폐혈서생은 씨익 웃더니 들고 있던 새하얀 부채로 동천의 머리를 빠개버렸다.
퍼억!
“켁?”
“으아아악! 동천 살려! 으악! 으악!”
동천은 석실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자 곧바로 반응이 왔다.
“시끄러워, 이 녀석아!”
중소구였다. 잠시 숨을 몰아쉬고 있던 동천은 언제 울부짖었냐는 듯 중소구를 향해 두 눈을 치켜떴다.
“에이 씨, 꿈꾸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냐! 댁은 꿈도 안 꿔?”
한두 번 들어본 소리도 아니었건만 중소구는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뭐야? 저, 저런 되먹지 못한 말종을 봤나?”
동천은 같잖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흥! 말종 같은 소리하고 매달려있네. 이 미친 중늙은이야! 너나 잘해! 오광(五光)? 똥광이다 이 씨필아!”
그들 사이에 끼여 양쪽에서 소음을 듣고 있던 도연은 잠에서 깨어나 언제나 그렇듯 중재를 해주었다.
“모두들 그만하시지요.”
그러자 두 사람은 뭐라고 조그맣게 중얼거리기만 할 뿐 특별한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한숨을 내쉰 도연은 중소구에게 말했다.
“주군께서 한두 번 이러시는 것도 아니고, 2년 전 그때의 일 때문에 간혹 악몽을 꾸신다는 걸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중소구는 멋쩍은 표정으로 변명을 해댔다.
“그게 말일세. 며칠을 시달리다 겨우 잠이 들었는데 저놈이 갑자기 소리를 질러 나 나도 모르게 욱하는 성질에 그랬던 걸세. 하하, 다음부터는 자중하도록 노력하겠네.”
중소구는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지금과 비슷한 말들로 약조를 했었지만 지켜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도연도 그것을 알지만 우선 지금 상황을 잠재워놓는 것이 우선이기에 별말 없이 주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중 대인께서 화를 내시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겨우 잠이 드셨는데 주군께서 그렇게 소리를 내지르시니 어찌 편안한 마음이시겠습니까. 주군께서도 잘못을 인정하실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물론, 동천은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잘 안다. 오늘 자신이 다른 때보다 중소구에게 더욱 개겼다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오늘은 좀 특별했다. 바로 자신의 꿈에 화정이가 나타났던 것이다. 뒤에 가서 폐혈서생이 등장해 다 망쳐놨지만 그놈의 꿈은 이력이 난지라 이제 와서는 별로 상관하지도 않았다. 어쨌든 그 한때의 즐거움과 찌찌의 감촉을 음미할 새도 없이 중소구가 소리쳐버리자 엄청 화가 났던 것이다.
“알았어. 결국에는 너 잘났다는 거잖아. 이 몸이 조용히 계시면 된다 이거지?”
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짜증 섞인 얼굴을 하고 있던 동천은 제약을 받고 있는 두 손을 좌우로 미약하게 흔들어댔다. 그냥 무의미하게 손을 흔든 것뿐이었다.
“나 이제 자도 되지?”
가만히 듣고 있던 중소구는 어이가 없었다. 악몽을 꾼 뒤 저렇게 쉽사리 잠들 수 있다는 것이 부럽기조차 했다. 사람의 체질상 그럴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깨운 놈과 깨어진 분의 차이였다. 겨우 잠들었던 자신은 언놈 덕분에 말똥말똥 깨어났는데 그 언놈이 금세 잔다고 하니 수그러졌던 분노가 다시 치미는 것이다.
“대가리가 빈 놈이로다!”
동천은 용케 자신을 지칭한 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반쯤 감았던 눈을 부릅떴다.
“뭐야? 이런 씨파……. 잠깐! 오, 온다!”
상단전인 감지력으로 무언가 낌새를 느낀 동천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두려운 듯 눈알을 떼굴떼굴 굴리기만 했다. 동천과 같지는 않았지만 다른 이들도 조용히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멀리서 끼이이이,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저벅저벅.
발소리만 무정하게 울리고, 동천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던 사람은 거의 도달한 부분에서 잠시 멈춰 섰다. 들어올까 말까를 생각하는지 침묵으로 일관하던 사람은 마침내 결정을 내려 동천이 머물고 있는 곳을 지나쳤다. 그 사람은 다른 곳의 문을 열고 들어가 한참 만에 나온 뒤 자신이 기거하는 곳으로 사라져버렸다. 거의 숨을 멈추고 쥐죽은 듯이 쪼그라져 있던 동천은 안전해졌다는 것을 깨닫자 참고 있던 숨을 거세게 내쉬었다.
“푸하! 헥헥, 숨막혀 죽는 줄 알았네.”
중소구와 도연도 표현은 안 했지만 모두들 안도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그들에게 동천이 우쭐대며 말했다.
“이게 다 이 몸의 감지력 때문인 줄 알라고.”
도연은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고, 중소구는 ‘잘났다 임마.’ 라고 대꾸해주었는데 당연히 두 번째 대답에 불만을 품게 된 동천은 저걸 가만히 놔둬야 하는지에 대해 심각한 고찰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화정이의 꿈을 꾸어 그런지 오늘따라 옛날의 그 찬란하고 풍족했던 때가 그리워졌다.
“도연아.”
“예, 주군.”
동천은 약간 서글픈 눈으로 도연을 응시했다.
“너 옛날이 그립지 않냐?”
도연은 씁쓸히 웃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말로나마 위안을 받고 싶었던 동천은 질문한 자신이 병신이라고 생각했다.
‘눈치도 없는 새끼…….’
위안을 못 받아서일까? 동천은 그리운 역천을 목놓아 불러보았다.
“싸부우우!”
중소구가 시끄럽다고 다시 난리를 피우는 가운데 동천의 머릿속에는 2년 전 그때의 일부터 지금까지 겪었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이고 동천 죽네.”
옆구리와 어깨 쪽에 상처를 입고 꿰매기까지 한 동천은 사흘 내내 그 주둥이에서 ‘동천 죽네’ 라는 소리를 달고 다녔다. 오죽했으면 중소구가 다시 의원을 불러와 저 주둥이도 꿰매달라고 했을까. 조금씩 움직이기라도 해야 빨리 낫는다고 의원이 당부해주었건만 동천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였다.
‘으으, 옆으로 돌아눕는 것도 죽을 지경인데 심심하면 뛰어다니라고 하다니……. 그 새끼 의원 맞아?’
의원의 당부를 왜곡하는 동천이었다. 도연도 처음에는 ‘아직도 아프십니까?’ 정도의 관심을 보여줬으나 지금은 무덤덤해져 조용히 옆자리를 지켜주었다. 꾸물꾸물 옆으로 돌아누워 한참을 끙끙 앓던 동천은 심심해졌는지 넌지시 도연에게 말을 걸었다.
“야.”
명상에 잠기듯 눈을 감고 앉아있던 도연은 주군의 부름에 살며시 눈을 떴다.
“부르셨습니까.”
“부르셨으니까 네가 이 몸에게 물어본 거 아냐.”
다분히 시비조였으나 원래 그런 말투라는 것을 알기에 그 부분에 관해서는 상관하지 않았다.
“말씀하시지요.”
동천은 이리저리 둘러본 후 말했다.
“소구는 어디 갔냐?”
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뭐하러?”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기회라고 생각한 동천은 조용히 소곤거렸다.
“너 말야. 그 구결을 분명히 실눈한테 들었다고 했지?”
도연은 칫 거렸다.
“그렇습니다만…….”
이제 와서 왜 또 그 이야기를 거론하냐는 뜻이리라. 동천은 그것을 거론할 충분한 명분이 있었으나 숨겨두고 말을 안 했다. 은근히 경쟁심을 가지고 있던 동천이 누구 좋으라고 철경에 관해 털어놓겠는가. 절대로 안 가르쳐주리라 다짐한 동천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 실눈이 도 같은 걸 허리에 차고 있었나 해서.”
도연은 구결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내심 안도해하며 그때 정인의 옷차림을 떠올려보았다.
“글쎄요. 확실히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검을 차고 있던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동천이 의외의 표정을 지었다.
“검? 도가 아니고?”
계속 생각하다 확연히 떠올린 도연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예, 검이 맞습니다. 분명히 오른쪽 허리에 매달려 있는 장검을 보았습니다. 헌데 무엇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동천은 더 이상 거론할 필요성을 못 느끼고 손을 휘휘 저어댔다.
“알 거 없어. 어린놈이 뭘 그렇게 알고 싶어 해? 정 궁금하면 지나가는 아가씨를 붙잡고 물어봐. 아가씨, 한 달에 한 번은 그거 한다면서요? 라고 말야. 알겠어?”
“예?”
“에이 씨! 그렇다는 얘기야!”
황당한 이야기로 도연의 심기를 어지럽힌 동천은 되려 짜증을 내곤 눈을 감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