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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276화


눈을 감긴 감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각까지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분명히 그 철경에는 심법 하나하고 도법 하나가 들어 있었는데? 그럼, 뭐지? 도연이 말한 그놈은 심법만 익혔다는 건가?’

자신의 한계치까지 머리를 굴리던 동천은 이내 알게 뭐냐는 식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늘 그렇듯 짜증이 나서 포기한 것이다. 등을 돌려 옆으로 돌아누운 동천은 잠시 후 품속을 뒤적여 제법 깨끗해 보이는 양피지를 몰래 꺼내 보았다. 천마도해였다.

‘이건 그 외팔이 놈이 황룡세가에 건네주라고 한 건데 갔다 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엄청 고민되네?’

방대하고 정교한 지도를 보는 것 같은 붉은 선들의 얽힘과 선들을 따라 주기적으로 찍혀있는 검은 점들. 그리고 그것들 중 확연히 튀어 보이는 네 개의 푸른 선들이 동천의 눈알을 핑핑 돌게 만들었다. 머리를 긁적이려던 동천은 어깨의 상처가 아프자 천마도해를 숨기고 다른 손을 시켰다.

“야, 나 머리 가려워.”

도연은 군말 없이 다가와 머리를 긁어주었다.

“여기입니까?”

“아니, 좀 더. 좀 더… 옳지! 거기야 거기. 어이, 시원하다.”

한참을 긁어준 도연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긁어주었던 오른손을 멀거니 쳐다봤다.

‘…….’

벌떡 일어난 그는 손을 씻으러 밖으로 나갔다. 이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동천은 얼른 숨겨두었던 철경을 꺼내들었다. 이런 때가 아니면 몰래 볼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철경의 글씨는 고대어라서 해석이 불가능했지만 착하게도 선대의 어느 기인이 주석을 달아놓았는지라 읽는 것에는 그리 큰 문제가 없었다. 그동안 심법의 해석에 열심이었던 동천은 대충 그 의미만을 외우고 두 번째 장에서 인체도해를 살펴보았다. 실질적인 사람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하진 않지만 혈도의 위치라든가 흐름의 구조가 놀랍도록 정확한 이 도해는 신기하게도 모든 기의 흐름을 반으로 나누어 각기 역행시켜놓고 합쳐지는 부분을 단전으로 설정해 놓고 있었다. 동천이 그거 하나만 놓고 보았다면 분명히 내던졌을 것이다. 하지만 인체도해의 마지막 부분에 ‘첫 장의 역심무극결(逆心無極缺)을 토대로 운기하라.’는 글귀가 있어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그 밑으로 계속 쓰여 있었으나 아쉽게도 너무도 흐릿해 육안으로는 확인할 방도가 없었다.

“뭐가 이따위로 어려워?”

말은 그렇게 했어도 예전에 용독경을 읽을 때와 같이 다음을 기약하는 일은 없었다. 그만큼 자주 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도연이 다시 돌아오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봐둬야 했던 동천은 정신을 집중해 진기의 흐름과정을 하나하나 외워갔다. 그러나 완전히 상식을 깨트리는 도해 덕분에 상당한 시간을 지체하고도 외운 것은 얼마 없었다. 외우는 것만큼은 자신 있었던 동천이 말이다. 그래 놓고 혼자 변명하듯 중얼거린 말이 ‘아아, 내 이렇게 무공을 배우니 어찌 하늘조차 감동하지 않으리오.’였다. 이해를 돋구기 위해 다시 첫 장을 펼쳐든 동천은 자신의 방 쪽으로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곤 얼른 철경을 깔고 누웠다. 덕분에 상처 부위가 쓰라렸지만 동천은 꾹꾹 참았다. 곧이어 방문이 열렸다.

“험, 깨어났느냐?”

어디를 갔다 왔는지 이제야 어슬렁 기어들어 온 중소구였다. 돌아누워 무시하려던 동천은 이내 그럴 수 없는 자신을 깨달았다. 중소구의 오른손에 찐빵 한 개가 들려 있었던 것이다.

“그거 혹시 찐빵 아니에요?”

중소구는 호탕하게 말했다.

“왜 아니겠느냐. 혼자 밤낮으로 누워있어 얼마나 고생이 많지?”

하는 짓을 보아하니 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동천은 얼른 중소구의 비위를 맞춰주었다.

“헤헤, 고생은 무슨……. 대인께서 걱정을 해주셔서 그런지 날로 좋아지고 있는 걸요.”

크게 흡족해한 중소구는 미련 없이 새하얀 찐빵을 건네주었다.

“크하하, 옛다! 이거 먹고 힘내거라!”

희색이 만면한 얼굴로 재빨리 받아 든 동천은 게 눈 감추듯 씹어먹기 시작했다.

“와구와구, 쩝쩝!”

“맛있냐?”

“무로이지요!(물론이지요)”

찐빵 하나로 중소구를 다시 보게 된 동천은 눈웃음까지 쳐주는 친근함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먹고 있을 때 손을 씻고 돌아온 도연은 찐빵이 얼마 없어 조금씩 아껴 먹고 있는 동천에게 다가왔다.

“그 찐빵 맛있지요?”

동천은 보란 듯이 남은 찐빵을 들어 올렸다.

“물론이지! 바로 중 대인께서…….”

동천의 뒷말이 갑자기 뚝 끊어졌다. 다름이 아니라 도연도 찐빵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도연이 먹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도연이 들고 있는 찐빵의 개수였다.

“왜 그러십니까?”

도연은 찐빵을 적당히 뜯어먹으며 주군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퍼뜩, 정신을 차린 동천은 급히 당황함을 감추었다.

“아무것도 아냐. 헌데 중 대인께서 두 개나 준 거야?”

“예, 요 근처에서 사 오셨다고 했는데 정말 맛있지 않습니까?”

이야기를 듣고 난 동천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중소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중소구는 동천을 보고 있지 않았다. 도연이 들어오자 동천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하하, 도 소형제가 그렇게 맛있다고 하니 이따가 한번 더 사 오겠네.”

그제야 주군의 심상치 않은 눈빛을 발견한 도연은 조용히 사양했다.

“괜찮습니다. 저는 이것으로 족합니다.”

중소구는 크게 감탄해하며 즐거워했다.

“역시, 도 소형제는 다르구만! 으하하!”

혼자 소외가 된 동천은 내심 눈물을 머금고 마지막 남은 찐빵 조각을 꿀꺽 삼켰다.

‘눈물 젖은 찐빵을 먹지 않고서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했다. 크흐흑, 내 오늘의 일은 절대로 잊지 않겠다!’

고개를 살짝 돌려 눈물을 삼킨 동천은 찐빵 하나 가지고 이를 바득바득 갈아대며 복수를 다짐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흘렀다. 귀의흡수신공 덕택에 말끔히 상처가 아문 동천은 본능적으로 중소구가 이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계속 아픈 척했다. 그러나 중소구는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이놈아. 보아하니 멀쩡한데 아직도 아프다는 게 말이 돼?”

동천은 극구 부인했다.

“대인께서 몰라서 그렇지 겉은 멀쩡하지만 상한 근육은 아직도 아프다고요. 보실래요? 팔을 이렇게 들면, 아야야! 봤죠?”

중소구는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달리 확인할 길이 없었던 그는 대신 다른 질문을 토해냈다.

“그래? 그렇다면 이제 그때의 상황에 대해 말해줄 때가 됐지 않았냐? 오락가락하던 것도 멈춘 지 오래고 말야.”

동천은 그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락가락하던 것이 멈췄다니요. 바로 엊그제만 해도 그 꿈에 시달렸는데.”

폐혈서생에게 머리가 터져 죽는 꿈을 두 번째 꾸었던 동천은 그때의 꿈이 너무도 생생해 대화 도중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적어도 몸을 떤 부분만큼은 가식이 없기에 중소구가 뭐라 할 명분이 없었지만 더 이상 궁금증을 참고 있다가는 답답한 마음에 심장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래서 아직까지 그 주둥이를 다물고 있겠다는 것이냐? 그런 것이냐?”

오늘따라 중소구가 너무도 과격하자 쫄아버린 동천은 마침내 실토를 하고야 말았다.

“누, 누가 말 안 한다고 했나요? 그러니까 그때 심신을 단련할 서적을 구입하러 갔었는데 갑자기 들이닥친 놈들이 외팔이하고 싸우더라고요. 그놈들은 제가 그 안에 있는 걸 발견하자 입막음을 하려고 패거리를 나누어 덤볐는데 제가 누굽니까. 헤헤, 요리조리 잘도 피했죠.”

중소구는 과장이 섞였다고 생각했는지 살며시 으름장을 놓았다.

“그렇게 잘도 피한 놈이 칼침 몇 대를 맞았냐?”

이야기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동천은 약간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모름지기 사람의 말은 끝까지 잘 들어야 분란의 소지가 없다고 했는데, 어찌 중간에 끊고 들어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시는 겁니까.”

추궁하듯 물었다가 되려 혼나게 된 중소구는 얼떨떨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 득의양양해진 동천은 ‘까불고 있어.’ 라는 눈빛으로 중소구를 깔아뭉갰다.

“에헴! 제가 그렇게 잘 피하자 허파에 피 묻은 놈이 놀라 지껄이기를 ‘아니? 어디에서 저런 신진고수가!’ 그러더라고요. 그리곤 상대하던 외팔이를 부하들에게 맡겨놓고 저에게 일대일 승부를 요청했는데, 당연히 저는 싸우기 싫다고 말했죠. 헌데, 그놈이 제 말을 더럽게 안 듣데요? 어쩌겠어요. 맞짱 떴지. 그래서 거의 막상막하였는데 아쉽게도 제 손에는 아무것도 없어서 부상을 입었던 거예요.”

대충 알아서 상황을 재구성한 중소구는 그 다음 이야기를 물었다.

“그래서 그 폐혈서생을 네놈이 해치웠다는 말이냐?”

동천은 다소 놀란 기색을 보였다.

“어? 그놈의 외호가 폐혈서생인 줄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언제 말씀을 드린 적이 있었던가요?”

기울었던 기세를 약간이나마 펼 기회가 오자 중소구는 은근히 미소를 머금었다.

“흘흘, 본 대인을 뭘로 보고 그러느냐.”

동천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뭘로 보긴 뭘로 봐 임마. 소구(昭狗)로 보지. ……응? 소구? 으히히, 그거 정답일세?’

중소구(仲昭龜)의 구(龜)자를 개 구(狗)자로 바꿔버린 동천은 무심코 중얼거렸다가 너무도 마음에 들어 했다. 동천이 말한 소구는 ‘빛나는 개’ 정도로 해석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본의 아니게 개새끼가 되어버린 중소구는 아무것도 모른 채 말을 이어나갔다.

“네놈의 이야기도중 허파에 피 묻은 놈이라는 대목과 그 서점을 직접 살펴보며 관찰한 결과 본 대인 스스로 깨달은 것이다. 잘 알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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