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6권 24화 –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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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6권 24화 – 에필로그

에필로그

검은 폐허의 한 켠.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대비되는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었다.

하지만 둘 다 불에 그을리고 재를 뒤집어쓴 터라 거의 비슷하게 거무스름했다.

그들은 황량해진 대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일단 목숨은 건지긴 했다. 하지만 이토록 살아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괴롭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한심하군. 정말 한심해. 나 자신이 이렇게 한심할 줄이야…….”

염도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아, 정말 자기 자신이 미웠다.

“그래, 맞네. 자네는 한심해.”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빙검이 말했다. 여전히 염도의 속을 박박 긁는 소리만 골라 하는 것도 재능이었다.

“이자식이, 뭐라.. .!”

울컥한 염도가 불같이 벌컥 화를 냈지만 이내 거두어들여야 했다. 그 친구는 그가 알던 그 재수 없는 얼음땡이가 아니었다. 그는 부르르 떨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으스러질 정도로 꽉 쥔 주먹에서는 핏방울이 낙숫물처럼 점점이 떨어지고 있었다. 악 깨문 입술 끝으로도 붉은 피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이봐… 얼음땡이……?”

항상 재수 없을 정도로 무감정한 놈이었다. 빈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냉철함, 흔들림 없는 부동심, 자신과는 정반대의 속성을 지닌, 그래서 매번 부딪칠 수밖 에 없었던 이 빙검이란 인간이 이토록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고통을 삭히는 것을 그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내 책임이야. 내가 무의미한 희생을 만들었어. 죽어간 아이들을 볼 면목이 없군. 모두 나의 탓일세. 천무학관의 대무사부로서, 그리고 그들의 인솔 담당 노사로서, 화산지회 대표단의 총 책임자로서 나는 모든 책임을 완수하지 못했어. 그 아이들이 죽은 것은 모두 내 탓일세. 날 비웃어도 좋아, 염도. 이번만은 그것을 허락하지. 자신의 의무를 완수하지 못한 자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자가 무슨 낯짝으로 변명을 늘어놓을 수 있겠는가. 마음껏 비웃어도 좋네.”

역시 희생자는 피할 수가 없었다. 중상자도 있었다. 미처 화마를 피하지 못한 몇 명의 학생이 화룡멸겁대진이라는 공포스러운 이름을 지닌 불꽃의 진에 휩싸여 죽 거나 크게 다친 것이다.

사망 세 명, 중상 열세 명, 경상 스물다섯 명……. 이 숫자의 무게와 그 의미가 그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다. 물론 몰살당했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이 정 도 피해는 정말 감지덕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셋이라 해서 그 생명의 무게가 줄어드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염도는 갑자기 속이 뒤집힐 만큼 화가 났다. 저런 꼴불견은 차마 봐줄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 역시 책임의 한 켠을 맡고 여기까지 오지 않았던가. 때때로 잊고 있지만 그 역시 천무학관의 무사부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아이들의 인솔자였다.

“이… 바보 자식이! 그게 어떻게 자네 탓뿐인가? 네놈이 그렇게 대단한 놈인 줄 알아? 착각하지 말라고. 인솔 노사는 자네 혼자만이 아니었어! 나도 인솔 노사였 다구! 그런데 이게 뭔가? 일이 왜 이렇게 된 거야, 엉? 모든 걸 혼자서 짊어지려 하지 마! 자넨 그렇게까지 대단한 놈이 못 되니깐! 나도 책임을 나눠 질 권리가 있다 구! 아니지, 이 몸이 자네보다 더 뛰어나니 더 많은 책임을 져야겠지. 안 그래? 뭐야 그 다 죽은 개구리 같은 표정은? 전혀 안 어울린다구! 으이구, 열받아!”

염도가 소나기처럼 빙검을 향해 퍼부었다. 빙검은 잠시 염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얼굴은 좀 펴며 염도가 결코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을 했다. 그리고 그 말은 들은 순간, 염도는 벙찐 표정이 되고 말았다. 충격으로 멍한 상태가 된 염도가 물었다.

“뭐? 지금 뭐라고 했나? 내가 잘못 들었나? 고마… 뭐라고, 엉?”

빙검의 표정이 금세 예의 그 무뚝뚝하고 싸늘한 표정으로 변했다. 기적 같은 일이지만 내심 부끄러워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두 번은 말 안 해! 잊어버려. 환청이었으니깐!”

정이 뚝 떨어질 만큼 싸늘한 목소리였다. 염도는 왠지 이 말 쪽이 더 납득이 가는 모양이었다.

“그, 그렇지? 자네가 나한테 고마… 뭐시기란 부끄러운 말은 할 리가 없겠지?”

그럼 그렇지…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지. 염도는 내심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언어도단스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피곤한 일의 연속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농담 같은 상황은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수면 부족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딴 소름끼치는 환청이라니… 그런 닭살스런 말을 들 었다가는 밤에 무서워서 제대로 잠들 수도 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아무 데나 엎어져 잠부터 청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도 그 전에 확인 절차는 한 번 더 거치는 게 좋 을지도 모른다. 오늘은 정말 피곤한 날이다.

그런 염도의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빙검으로서는 저 불타는 개차반 녀석이 바보짓을 하고 있을 때가 기회였다. 그는 재빨리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네! 아무래도 그때가 온 것 같아! 사부님이 예견하신 그때가… 악몽의 부활이……. 그것이 필요한 때라는 예감이 드네.”

염도의 표정이 다시 진지해졌다. 확인 작업만큼 이것도 이것 나름대로 중대한 문제였다.

“그것 말인가?”

빙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두 개로 나뉘어졌던 거울이 다시 하나로 합쳐져야 할 때가 온 것 같네!”

“건곤조화신경(乾坤造化神鏡)……. 사부님께서 남기신 마지막 최후의 비전… 마지막 유작..

“그것을 계승할 자를 찾아야 하네.”

빙검의 말에 염도는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보이는 동의의 표시였다. 물과 불처럼 떨어져 있던 두 사람의 뜻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 기도 했다. 드디어 이십 년을 떨어져 있던 거울이, 나뉘어졌던 반 토막의 비전이 하나로 합쳐지려 하고 있었다.

“봐둔 사람은 있나?”

이 두 사람 모두 티격태격하기는 해도 사부님의 유언을 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난 두 사람이 떠오르는군. 하나는 재수 없고, 하나는 듬직하고.”

“우연이군. 나도 마찬가지일세.”

“하지만 한 명은, 그 빌어먹을 사부는 이런 걸 필요로 하지 않을지도 몰라. 제대로 익히기나 할지도 의문이고. 분명 귀찮다고 회피할 게 분명해. 전설의 무공인데 말야…….”

두 사람만이 아는 전설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남긴 장본인은 이미 전설이었다. 태극신군 무신 혁월린…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이 강호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머지 쪽을 공략하는 게 어떨까? 어르신의 보장도 있고…….”

“그게 좋겠네. 가망이 없는 쪽보다 있는 쪽이 훨씬 낫겠지. 게다가 조금 전 ‘그 사람’이 보인 불가사의한 기술, 그것은 인간의 기술이 아니었어. 어쩌면 그에게는 이 미 이런 것이 필요 없을지도 몰라.”

조금 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도 아직도 믿겨지지 않는 그 신위는 분명 인간의 것이라 보기 힘든 것이었다. 그것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그것은 염도도 마찬가지였다.

“이봐, 얼음땡이… 아까 그런 걸 봤더니 말야… 갑자기 드는 기분 나쁜 예감이 있는데 말야…….”

“뭔가?”

“우리 둘 다 과연 그 사부의 제자라는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자칫 잘못하면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아주 안 좋은 예감이 드는데 말야…….” 염도의 얼굴은 정말로 심각해 보였다.

“그, 그런 불길한 생각은 하지 말게. 진짜가 될까 무섭네.”

빙검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검게 불타버린 홍매곡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은 씁쓸함과 처연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자신의 탓이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모든 것을 관장하고 주재한 사람 은 바로 자신이었다. 그러나 틈을 보이고 말았다. 우려했던 대로 적들은 놓치지 않고 그 틈을 파고들었다.

만일 이 함정에 빠져 자신과 천무삼성이 죽었다면 그 후 강호는 어찌 되었을까? 그들의 발호를 억누르고 있는 마지막 구속력이 일순간에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설마 이 정도까지 세력을 회복하고 있었을 줄이야.. 그들의 핵심 세력이 아직도 건재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강호의 최요충지라 할 수 있는 천무봉 안에 까지 침투되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렇게 되기 전에 막았어야 했다. 그러나 실패하고 말았다. 적보다 먼저 한 수 앞을 내다보지 못한 자신의 실수였다. 죄였다. 책망의 가시 채찍이 그의 심장을 후려갈기고 있었다. 친구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뭐가 무림의 신화고 강호의 전설이란 말인 가? 십만 명을 상대할 무력이 있으면 뭐 하는가? 이제 저들은 다시 일어나리라. 천겁의 후예를 깨우는 봉화가 올려진 것이다. 잠자고 있던 거대한 악이 눈을 떴다. 그 악에 대항할 새로운 힘이 필요했다.

앞으로의 싸움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한 가지 다행스런 점은 아직 희망은 남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젊음이란 이름의 희망이.

“드디어 왔군.”

혁중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누가 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이 순간을 고대하고 있었다.

“이제 결심이 섰느냐?”

혁중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모용휘였다. 그의 얼굴은 굳건한 결의에 가득 차 있었고, 두 눈은 투지에 불타고 있었다. 이제 예전의 고민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 았다.

“좋은 얼굴이다. 이제 더 이상 헤매는 것은 그만둔 모양이구나! 방황은 끝났느냐?”

“예, 어르신! 제가 가야 할 길을 찾았습니다. 이제 두 번 다시 헤매지 않을 것입니다.”

수려한 용모의 청년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이제 갈 길은 명확했다. 그러기 위해 치른 희생은 컸다. 미숙한 자신을 좀 더 단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는 말도 있다.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들인 시간과 희생이 쓸모없었던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것은 비난받아야 할 일 이 아니야. 비난은 엄청난 시간을 소비하고 그만한 희생을 치르고서도 자신의 길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을 위한 것이지.”

우선 선방을 먹었다. 심상치 않은 치명타였다. 하지만 여기서 전의가 꺾여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곧 종말을 의미하기에.

모용휘 역시 매듭지어야만 하는 목표가 있었다.

“제 자신이 얼마나 미숙한지 이번 기회를 통해 다시 한 번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이기고 싶은 두 사람이 있습니다.”

“두 사람?”

“예, 하나는 어떻게 해서든 이기고 싶은 친구고, 다른 한 사람은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이기지 않으면 안 되는 적입니다. 저는 그자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혁중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앞으로 각오해야 할 거다. 일단 전설로 남은 무공이니깐, 쉽지 않을 거야.”

“예, 어르신.”

모용휘의 목소리는 확고부동한 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왜 날 구했죠?”

독고령이 독기 어린 외눈을 번뜩이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냥 단순한 변덕이오.”

강철 같은 의지를 지닌 남자, 대공자 비가 무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런 그도 단 한 사람만은 재로 만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를 구했다. 인간의 마음을 완전히 버린 줄 알았던 자신인데 아직도 그 조각이 남겨져 있었던 모양이다. 우스운 일이었다.

“난 당신을 증오해요!”

표독한 목소리로 독고령이 외쳤다.

“그건 당연하오. 당신은 날 증오할 자격이 충분하오.”

비가 대답했다. 독고령은 충격을 받은 얼굴이 되었다.

“여… 역시 당신은… 그 사람이 맞군요.”

순간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지진 듯 잃어버린 왼쪽 눈이 아파왔다. 폭우가 쏟아지던 날 울려 퍼지던 악몽 같은 목소리가 귓가에 다시 울리는 듯했다. 대공자는 묵묵부답 말이 없었다.

“그런데 왜? 왜 날 구했죠? 그때 나를 한 번 죽였으면서 왜 이번에는 살린 거죠?”

독고령이 필사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거의 울 것 같은 목소리였다.

“나도 모르겠소.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때의 죄책감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오.”

이제 그는 완전히 자기 자신을 인정하고 있었다. 자신이 그녀의 한쪽 눈을 빼앗아간 장본인이라는 것을.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 잔인하군요…….”

독고령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날 어쩔 셈이죠? 이제 하나 남은 오른쪽 눈마저 빼앗아갈 건가요? 그렇다면 좋아요! 빨랑 가져가세요! 가져가라구요!”

그녀는 이제 울부짖고 있었다.

“그러지 않을 것이오. 그때의 그런 더러운 느낌은 한 번으로 족하니깐 그냥 기분이 내켜서 구한 것뿐이오. 하지만 당신을 지금 당장은 돌려보내줄 수가 없소. 아직 나에게는 해야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오.”

“당신을 반드시 죽이고야 말겠어요!”

독고령의 외눈이 증오로 번뜩였다.

“언제라도 가능하다면 시도해도 좋소!”

대공자 비, 한때 은명(隱名)이라 불렸던 남자가 대답했다.

처음 이곳에 발을 디뎠을 때, 계곡은 절기를 잊고 핀 고고한 붉은 매화와 높이 뻗고 넓게 펼쳐진 녹옥빛 나뭇잎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삼면의 절 벽에서는 맑고 푸른 옥수(玉水)가 떨어지고, 새하얀 물안개는 현세와 이계의 경계를 허물었다.

꽃, 나무, 나비, 벌, 새, 어느 것 하나 자연의 은택을 누리지 않는 것이 없었고, 그것은 진한 향기와 싱그러운 울음소리로 차가운 마음을 녹여주었다.

이곳이 진정 현실의 세계인가 감탄하며 혹시나 도원경에 발을 잘못 들인 건 아닌지 걱정했고, 시간을 잃어버린 칼자루가 썩지 않을까, 검이 녹슬지 않을까 주의를 기울였었다.

그러나 가을의 보석을 그러모아놓았던 별천지가 지금은 어떠한가? 붉은 꽃은 검게 물들고, 푸른 수목은 생명을 노래하는 대신 사람을 태우기 위한 장작이 되었다. 화룡의 마수가 휩쓸고 간 이 자리에 생명의 편린은 느낄 수 없고, 통곡하고픈 슬픔만이 절절하다.

누가 어디서 자격을 받아 이런 참혹한 일을 저지른 것인가? 인간 역시도 자연의 일부, 자연과 떨어져 살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어찌하여 스스로 자신의 일부를 파괴 하는 것인가?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스스로를 자해하는 일, 그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버리는 것은 오로지 인간뿐이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군요. 불의 겁란 후에 남은 어둠의 부토와도 같은 검은 재뿐… 여기서 다시 화산규약지회가 열릴 수 있을까요, 류연?”

타다 남은 서까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문짝, 산산조각 부서진 지붕, 아직도 피어오르는 연기, 하늘을 덮고 바람을 타고 전해져 오는 재의 쓴 냄새, 인과 황의 매 캐한 냄새……. 삶이 번창하던 자리에 갑작스레 끼어들어온 죽음은 포악하기 짝이 없었다.

계절을 잊고 피어 있던 붉은 매화가 아름다웠던 홍매곡은 이제 회색빛으로 변해 있었다. 재의 색깔이었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듯한 절망의 잿빛. 수목이, 꽃이, 곤 충이, 동물이, 자연이 지른 단말마가, 비명이 아직도 귀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비류연이 조용히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귀밑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걱정 말아요. 그 비란 녀석이 한마디만은 옳은 소리를 했으니깐요.”

한숨 푹 자고 일어난 탓인지, 미인의 무릎베개를 한 탓인지 그의 목소리엔 다시 활기가 돌아와 있었다.

이 참혹한 절망 속에 남겨진 것이 있단 말인가?

“불사조는 재 속에서 되살아난다!”

비류연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태양처럼 환하게 빛나는 그의 얼굴 어디에도 절망의 그림자는 드리워져 있지 않았다. 그에게 감화되어서인지, 그의 빛나는 마음에 감응해서인지 나예린도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는 것 같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이제 시작이죠. 우리는 아직 멀쩡하게 두 발로 걷고 있으니, 이런 짓을 한 놈들은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거예요. 희망은 아직 죽지 않았어요. 다만 다시 부활하기 위한 잠시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있을 뿐. 그 부활의 전조는 바로 인간의 마음, 마음이 꺾이지 않는 한 인간도, 희망도 꺾이지 않아요.” 비류연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말했다.

“아직 되갚아줘야 할 게 많이 남았잖아요. 빚지고는 찜찜해서 잠을 못 자죠.”

“그렇군요. 빚을 지고 그냥 있으면 안 되겠죠. 백 배로 되갚아주지 않으면!”

나예린이 힘을 내어 살짝 웃어 보였다.

“아뇨! 만 배예요! 이자는 복리에 복리에 복리가 붙어서 비싸다구요!”

비류연이 화답하듯 활짝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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