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285화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일어나자 기겁을 한 동천은 저도 모르게 반발자국 물러섰다. 그 모습에 더욱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동천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는 추연과 황룡미미. 동천은 호흡이 가빠지고 지 맘대로 뛰놀고 있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에 따라 온몸의 피가 역류하듯 거꾸로 치솟기 시작했다. 그러나 황룡미미는 동천의 상태가 어찌되든 알 바가 아니었다. 자신이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한 것이 아니고, 뭔가 켕기는 게 있어 스스로 당황해하는 것이니 말이다. 확실히 수상하다고 생각한 그녀는 추연에게 눈짓을 보내며 추궁하듯 강하게 내뱉었다.
“동천이라고 하는 아이가 있었지, 아마?”
아가씨의 생각을 눈치챈 추연은 재빨리 동의했다.
“마, 맞아요! 동천이 있었어요. 동천!”
두 여인네들의 공세에 극히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된 동천이었지만 그것보다 더욱 긴박한 상황은 들이켰던 숨이 도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흐윽, 스, 숨이!’
두 손으로 목을 감싼 채 허리를 잔뜩 구부린 동천은 어떻게든 숨을 내뱉어 보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끄으으으!”
전신이 달아오르고 실핏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버티는 것이 극에 달한 동천은 본능적으로 가슴을 두들기며 다리에 내공을 실어 바닥을 내리쳤다.
쿠웅!
묵직한 진각 소리가 울려 퍼지는 동시에 막혔던 숨결이 탁 트인 동천은 기다렸다는 듯 산소를 받아들였다.
“푸하아! 헉헉, 허억 헉. 아이고 죽는 줄 알았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동천이 맞다고 확신하고 있던 황룡미미였지만 그녀는 자신의 시선이 점점 밑으로 내려감에 따라 그 확신이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느꼈다.
‘저럴 수가! 다리가 발목까지 땅속에 박히려면 적어도 30년에서 40년의 내공이 있어야 하는데……. 저렇게 어린 나이로 그 정도의 내공을 지녔다는 건가?’
무공에 대해 백지상태나 다름이 없던 추연은 다그쳐야 할 아가씨가 복잡한 시선으로 가만히 서 있자 왜 저러나 했다. 잠시 의아해하던 그녀는 이내 자신이 나서기로 했다.
“너 동천 맞지? 그지!”
살았다는 안도감도 잠시. 추연의 직접적인 질문에 즉각 고개를 저으려던 동천은 황룡미미의 시선이 땅속에 박힌 자신의 오른발로 향해 있자 같은 무인(?)으로서 퍼뜩 깨닫는 것이 있었다.
‘가만, 추연하고 같이 추궁해야 할 미미년이 이 몸의 다리를 보고 있다는 것은 이 몸의 내공에 놀랐다는 뜻이니까…….’
동천은 대충 황룡미미가 나서지 못한 이유와 비슷한 결론을 내린 다음 추연의 질문을 무시한 채 황룡미미에게 불쾌한 어조로 소리쳤다.
“손님을 세워놓고 물건을 감정하듯 보시는 것은 무슨 경우입니까!”
갑자기 뒤바뀐 동천의 기도에 찔끔한 추연은 삿대질하듯 쳐들고 있던 손가락을 황급히 내린 후 아랫것들의 습성상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한껏 조아렸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제가 좀 착각을 했나 봐요.”
동천은 고작 추연에게 사과를 받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받아봤자 무의미하니까. 황룡미미에게 사과를 받아야 속이 후련할 것만 같았던 동천은 이번 역시 황룡미미에게 말했다.
“선동한 분께선 시치미 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황룡미미는 그 사이 생각을 추스르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사실 동 공자님이 예전에 제가 알던 어떤 아이와 너무 비슷하셔서 착각을 한 나머지 무례를 범했군요. 그 점에 대해선 사과를 드리지요. 하지만 모든 것에는 확실한 것이 좋지 않겠어요?”
동천은 황룡미미에게 사과를 받아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으나, 그녀의 끝말이 의미심장하자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입니까?”
그녀는 보란 듯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살짝 입 꼬리를 말았다.
“그 머리카락을 올려 주시면 확실히 제 잘못을 인정하겠다는 소리예요.”
동천은 씨익 웃었다.
‘미친년! 너 같으면 올리겠냐?’
동천의 웃음을 허락의 뜻으로 오해한 황룡미미는 부드럽게 재촉했다.
“그 머리카락이 올려지면 어떠한 모습일지 참으로 궁금하군요.”
“이런? 뭔가 오해를 하셨나 봅니다. 저는 사연이 있어 이 머리카락을 올릴 수가 없습니다.”
황룡미미는 사교성이 부족한 듯 금세 얼굴을 굳혔다.
“뭐라고요?”
예전의 매 맞던 습관이 남아있어 찔끔한 동천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내 저럴 줄 알았어. 2년이 지났어도 저년 성질이 어디 가?’
비록, 미미의 표독한 기세에 찔끔하기는 했지만 지금 동천은 예전의 동천이 아니었다.
“아버님과의 약조가 있어 3년 안에는 절대로 타인에게 제 본모습을 보여드릴 수가 없습니다.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앵두 같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황룡미미는 분노한 것만큼 가라앉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호호, 어쩔 수가 없군요. 전 비밀이 많은 분과는 대화를 지속시킬 수가 없으니 이만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그녀는 자신 있게 동천을 내쳤다. 자신을 흠모하여 보고자 왔으니 이렇게 하면 동천의 진면목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한 것이다. 그러나 미미에게서 빠져나오는 것은 동천이 바라고 원하던 바였다.
“그래요? 실례했습니다.”
동천은 무성의하게 고개를 까딱이곤 신형을 돌렸다. 그러자 황룡미미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지는 것은 불문가지. 동천이 보았다면 속이 다 후련할 만큼 일그러진 표정이었으나 아쉽게도 빠져나가기에만 바빴던 동천은 그런 행운을 누리지 못했다. 겉으론 여유롭게 용연각을 벗어난 동천은 조용한 곳으로 접어들자 벽에 신형을 기대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미미년 때문에 진땀을 다 뺐네.’
황룡미미와 대등하게 맞먹어서 기분은 좋았지만 아무래도 이곳은 오래 머물 곳이 아니라고 거듭 확신했다. 두 주먹을 불끈 쥔 동천은 새롭게 의지를 불태웠다.
“그래! 이 몸께서는 하늘님의 가호를 받고 있어. 어딘들 찾지 못하랴!”
새롭게 다진 각오로 힘차게 출발한 동천은 결국 지나가던 순찰 무사에게 도움을 받아 휴룡각에 도착했다.
따악!
당도하자마자 동천을 반긴 것은 꿀밤이었다.
“으윽, 아파요!”
중소구는 괘씸했는지 한 대 더 먹였다.
“이놈아, 네놈이 사라져서 본 대인이나 도 소형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
맞은 곳을 또 맞은 동천은 예전의 혈귀옹을 떠올리며 그보단 덜 아프다는 것에 스스로를 위로했다.
“알았어요. 잘못했어요.”
중소구는 잘못했다고 시인하자 손을 거두고 앞장을 섰다.
“네놈 때문에 한참을 기다렸으니 얼른 따라오거라.”
동천은 괜히 중소구에게 질문을 했다가 안 좋은 소리를 들을까 봐 질문의 대상자를 도연으로 바꾸었다.
“이제 가는 거냐?”
도연은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아닙니다. 그 도해가 상상 외로 엄청난 물건이어서 소지하고 있던 우리들은 투명성이 확인될 때까지 이곳에 잠시 머물러 있어야 한답니다. 그래서 나가는 것은 조금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도연의 대답은 동천이 펄쩍 뛰기에 충분했다.
“뭐어? 그렇게 귀한 것을 줬으면 고맙다고 절을 하지 못할망정 감금시키겠다고?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어디 있어!”
앞서가던 중소구는 듣다듣다 못 참겠는지 획 신형을 돌려 동천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이놈! 누가 그따위 쌍스러운 단어들을 나열하라고 했더냐! 본 대인이 그렇게 가르쳤더냐?”
동천은 이럴 때 대들면 저만 손해라는 것을 알기에 급히 저자세로 나갔다.
“헤헤, 죄송합니다. 하도 화가 나고 억울해서 그만 중 대인의 가르침을 잊고 예전의 버릇을 잠깐 되살렸네요. 한 번만 봐주세요. 예?”
한심해서 때릴 가치도 못 느낀 중소구는 ‘흥!’ 하고 콧방귀를 내뿜은 뒤 신경을 끊었다. 그러자 실실거리던 동천은 안면을 몰수하고 중소구의 등 뒤를 죽일 듯이 쳐다봤다.
‘개새끼, 지가 가르쳐준 게 뭐 있다고…….’
위험했던 고비들을 가까스로 넘긴 동천은 2년 2개월 만에 되돌아온 황룡세가에서 편한 마음이 아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하루를 지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