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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288화


“먼저 바쁘신 와중에도 비합전서를 받고 타지에서 부랴부랴 모이신 장로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총관이 나서서 회의의 출발선을 끊자 좌우로 도열해 앉아 있던 장로들이 간단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좌측 제일 첫 번째 자리에 앉아 있던 좌태상(左太上)은 성질이 급했던지 황룡굉이 말하기에 앞서 질문을 꺼냈다.

“전서구의 하단 부에 혈룡 인장이 찍혀 있어 본가 최대의 위기가 닥친 줄 알고 달려왔는데 평화롭기만 하니 이게 어찌된 일이오?”

좌태상은 총관에게 물었지만 정작 총관은 황룡굉에게 대답을 양보했다. 황룡굉은 옆에서 시립해있는 총관의 눈짓을 받고 굵직한 말문을 텄다.

“본가가 어언 오백 년의 세월을 지켜나가며 그 동안 수 없는 싸움과 전투를 치렀습니다. 허나, 단연코 작금의 상황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겠습니다.”

장내에 작은 동요가 일어났다. 비록 지금은 안휘 일대에서 알아주는 무가(武家)로 자리 매김을 했지만 초기만 해도 가문의 존망을 걸고 싸웠던 전투가 얼마나 무수했던가. 심지어는 가손들이 뿔뿔이 흩어졌다가 오십 년 만에 다시 일으켜 세웠을 만큼 힘든 투쟁을 벌였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것들이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이유에 비하면 단연코 조족지혈이라니. 장로들은 가주의 표현이 너무 가벼운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좌태상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던 삼장로는 은근히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었다.

“비록 가주이시나 선대의 노력을 너무 낮게 보시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소이다.”

삼장로를 위시한 몇몇 장로들은 초창기에 기반을 다질 때부터 함께 견뎌온 가복들의 자손이었다. 그들은 충분히 언짢아할 명분이 있었던 것이다.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 황룡굉은 결코 거북한 표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군요.”

가주가 너무도 공손히 나오자 괜히 무안해진 삼장로는 헛기침으로 작은 분란을 종식시켰다. 어찌되었든 가주에게 따지고 든 것이니까. 이제야 조용해졌다고 생각한 황룡굉은 심각한 얼굴로 운을 띄웠다.

“사실, 어제 광인 중소구가 두 아이를 이끌고 본가에 찾아왔습니다.”

장로들 중 그나마 연령이 낮아 제일 끝 쪽에 앉아있던 육장로는 심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중소구? 천하사광(天下四狂) 중 하나인 그 중소구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육장로는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팩 돌렸다.

“에잉, 그런 질 낮은 인간이 들어왔으니 한 삼 년은 재수가 없겠구려.”

황룡굉은 잠시 육장로의 말을 곱씹어보다 희미하게 웃었다.

“그럴 수도……있겠지요. 그가 문제의 그것을 본가로 가져왔으니까.”

오른쪽의 일장로가 물었다.

“그것?”

황룡굉은 대답 대신 곱게 접혀있던 양피지를 품속에서 꺼내들었다. 문제의 그것을 보여줄 테니까 각자 알아서 확인하라는 뜻이었다. 그의 의도대로 안력을 집중시켜 자세히 들여다본 장로들은 거의 같은 순간 일제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말도 안 돼!”

“흐윽? 천마도해라니!”

모두들 정신을 못 차리는 가운데 그나마 제일 먼저 안정을 취한 사람은 좌태상이었다. 그는 돌처럼 딱딱한 얼굴로 황룡굉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진본이오?”

황룡굉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확실하진 않습니다. 만들어진 것은 불과 삼 개월 전쯤으로 예상되지만 정교함은 결코 무시할 수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무시할 수 없다 함은?”

“내용상 불완전한 부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좌태상은 돌연 침음을 터뜨렸다.

“으음, 확실히 대단한 문제구료.”

가만히 듣고 있던 일장로가 손을 들었다.

“아무리 내용상 문제가 없다 해도 그것이 진짜 천마도해라는 증거가 없지 않소이까.”

자신이 나설 때라고 생각한 총관은 장로들의 신분을 고려해 가능한 한 공손히 말문을 열었다.

“오늘 바쁘신 장로님들을 이 자리에 모신 것은 이번 사태를 알리는 것과 동시에 바로 그 문제를 거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천마도해의 내용이 진본이냐, 아니냐를 확인하기 위해서 말이죠.”

장로들은 그 무슨 말이냐는 듯 의아한 얼굴로 총관과 가주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무슨 실마리가 있다고 확인한다는 말인가. 내부 설계도와 고작 천마도해라는 네 글자가 전부인 것을 가지고. 장로들이 어리둥절해하자 하는 수없이 총관이 그들의 무지를 일깨워줘야만 했다.

“도자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시대는 달라도 같은 양식으로 제작된 것들을 살펴보면 한두 군데쯤은 다르게 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은 굽이 높거나 낮고, 어떤 것은 주둥이가 작거나 넓게 퍼졌거나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기관 토목의 기술도 똑같습니다. 그곳에 정통한 장인을 초청한다면 이것이 과연 천마 시대에 만들어진 것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가 있다는 거죠.”

“오오, 그렇구나.”

“그런……. 허허허.”

장로들은 그제야 이해를 한 듯 서로들 마주 보며 ‘그런 방법이 있었군.’ 하고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황룡굉은 그런 장로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보안 유지상 아무 장인을 데려올 수가 없는 관계로 여러분들께서 우리 오련 중 기관 토목에 정통한 제갈세가나 모용세가로 가주셨으면 합니다.”

좌태상은 서슴없이 허락했다.

“물론이오. 이것이 어디 마다할 일이겠소?”

황룡굉은 좌태상이 허락했으니 모두의 허락이라 믿고 흐뭇하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비록, 우태상께서 자리하시지 못했지만 기밀유지가 튼튼한 지금 별 탈은 없으리라고 봅니다.”

묵묵히 사태를 주시하고 있던 오장로는 잠시 밖으로 밀려난 이를 다시 끄집어냈다.

“그 중소구는 어떻게 그 물건을 입수했으며 왜 이리로 가져온 것입니까.”

마침 그것을 논하려 했던 황룡굉은 총관을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그자가 얻은 경위가 확실한지는 어제 부로 조사 착수에 들어갔습니다. 곧 확인이 될 것이라 사료되고, 나머지 자세한 부분은 그 당시 저와 같이 있었던 총관에게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장로들의 시선이 모이자 총관은 그때의 일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때…….”


졸음이 와 오전 내내 자빠져 잤던 동천은 점심을 먹기 정확히 일각 전에 일어나 목 언저리를 벅벅 긁었다.

“하암, 먹은 게 없으니까 자도 잔 것 같지가 않네.”

옆에서 책을 읽고 있던 도연은 주군이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정확히 집어냈다.

“곧 점심을 내오라고 시키겠습니다.”

졸린 듯 게슴츠레 뜨고 있던 동천은 갑자기 눈을 부라렸다.

“이씨, 눈 뜨자마자 무슨 밥맛이 있다고 벌써부터 밥이야!”

도연은 의외의 대답을 들었음인지 놀라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내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가 나가려던 것을 멈추었다.

“생각이 있으시면 말씀 주십시오.”

도연이 다시 자리에 앉아 책을 펴들자 불만스러운 얼굴로 일어난 동천은 간단하게 몸을 풀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아홉.”

가만히 듣고 있던 도연은 뭔가 이상했는지 책에서 눈을 뗐다.

“왜 여덟이 아니라 끝이 아홉입니까?”

도연의 질문에 동천은 참으로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바보 아냐? 그거야 내 마음이지!”

“…….”

할 말이 없어진 도연은 다시는 이런 문제로 질문을 안 하리라 속으로 다짐했다. 그새 운동을 끝마친 동천은 뭐 씹은 얼굴의 도연에게 명했다.

“이제 이 몸의 식욕이 돌아왔으니까, 가서 거기에 땀나도록 가능한 빨리 대령하라고 해.”

도연은 불만 없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도연이 책을 잘 덮고 문가로 걸어갈 때였다.

똑똑!

무의식적으로 멈칫했던 도연은 곧이어 문을 열어주었다.

“무슨 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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