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7권 3화 – 등가(價)의 잣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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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7권 3화 – 등가(價)의 잣대

등가(價)의 잣대

-손가락으로 가리키다

“아차, 내가 너무 심했나?”

혁중은 조금 곤란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두 사람의 마음속에 가장 깊숙이 새겨진 상처를 건드리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었지만, 눈물 까지 쥐어짜낼 생각은 애당초 있지도 않았다. 이대로 그냥 내버려 뒀다가는 동시에 눈물이라도 콸콸 쏟을 분위기였다. 마흔이 넘은 남정네의 눈에서 쏟아지는 눈물 의 폭포수를 본다는 것은 그리 썩 행복한 경험은 아니었다.

“자자, 분위기가 너무 침울해졌군 그래. 가볍게 기분 전환이라도 하는 게 어떻겠나?”

“기분 전환이라시면……?”

“일단 자네들이 그 친구한테서 얼마만큼이나 뽑아냈는지 그 성취를 한번 보도록 할까? 미리 알아둘 필요도 있고. 어라? 자네들 표정이 왜 그런가? 꼭 소태 씹은 표 정 같지 않은가? 설마 싫다는 건가? 아, 거부하는 건 아니라고? 아, 미안하네. 난 또 자네들이 반항(反抗)하는 줄 알았지. 그렇게 식은땀 흘릴 필요는 없다네. 좀 덥 나? 괜찮다고? 그럼 다행이고. 환절기 때는 특히 더 건강에 신경 쓰게나. 감기도 조심하고.”

염도와 빙검은 거부를 표명할 기회조차 없었다. 강호에서 공히 일가를 이루었다 평가되는 두 사람이었지만, 혁중 노인 앞에서는 아장아장 이제 막 걸음마를 떼는 어린애나 다름없었다.

“어흠, 뭐, 자네들도 흔쾌히 동의했으니 잠시 잠깐 간단한 시험을 해보도록 하겠네. 그러니 그리 긴장하지들 말게나. 별거 아니니까. 내가 자네들을 튀겨 먹기를 하 겠나, 찜쪄 먹기를 하겠나, 아님 볶아 먹기를 하겠나? 그래도 최소한 누군가를 가르치고자 한다면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해 제대로 파악해야 하지 않겠나?”

“누굴 가르치다니요? 누구를 말씀하시는지……?”

“그 아이 말일세. 왜 있잖나. 굉장히 깨끗한 거 좋아할 것 같고 먼지 한 톨, 머리카락 한 올도 싫어할 것 같은 바른생활 결벽증 아이 말일세. 아마 정천의 손자 녀석 이었지?”

“그걸 어떻게……?”

물론 두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알다 뿐인가. 그들 역시 삼 년 전 있었던 삼성대전 준결승전에서 삼절검 청흔을 향해 펼쳐진 ‘은하류(銀河流) 개벽검 (開闢劍)’의 최종비의(最終秘義)인 은하성시(銀河星始)를 본 이후로 그를 눈여겨보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양패구상해 결승전에 올라가지 못하고 비류연에게 어부 지리를 안겨주기는 했지만, 두 가지 서로 다른 기운을 다루는 그 능력의 특출남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노인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뭘 그 정도 가지고 놀라나? 겨우 그 정도 가지고.”

자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이 노인의 손바닥 안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니, 사실 저 노인이 자신의 운명을 의도적으로 조작하고 있는 건 아 닌지, 자신들은 사실 저 노인이 쓴 각본에 따라 연기하고 있는 일개 배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혁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음, 시험을 하긴 해야겠고… 그러려면 잣대가 필요하겠지?”

잣대란 대상에 대한 판단의 도구를 말한다. 두말할 필요 없이 거대한 신상을 재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큰 자[尺]가 필요하고 큰 무게를 달기 위해서는 등가(等 價)의 추가 필요한 법이다.

소 잡는 데는 소 잡는 칼이, 닭 잡는 데는 닭 잡는 칼이, 용 잡는 데는 용린(龍鱗)도 뚫을 만한 신검(神劍)이 필요한 법. 반대로 닭 잡는 데 용 사냥용 신검을 쓸 필요 는 없는 것이다. 그건 지독한 낭비일 뿐이기에.

꿀꺽!

긴장으로 염도와 빙검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마른침이 넘어갔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만큼은 수행했다고 자부했건만, 지금 그들이 연마했다 여긴 부동심은 찻집 이층에서 떨어진 유리로 만든 다기(茶器)처럼 산산조각난 후 이리저리 흩어져 버려 그 형체조차 찾을 수 없었다.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감각이 그들의 심령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묻어두었던, 두 번 다시 떠오르지 않으리라 여겼던 감정의 편린, 내 면의 명경지수를 사정없이 휘젓고 호수의 물빛을 탁하게 흐려 버리는 그것의 이름은 바로 ‘공포(恐怖)’였다.

“그럼 일단 이걸로 해볼까?”

잠시 매우 심각하고 진지한 고려를 마친 노인은 많이 생각해 줬다는 얼굴로 검지 하나를 치켜들었다.

띵!

“에게? 겨우 그거 하나로 말입니까?”

갑자기 팽팽하게 당겨졌던 활시위가 활에서 홀라당 벗겨져 버린 듯한 느낌에 두 사람은 당황했다. 팽팽히 긴장됐던 시위는 흐느적 풀려 버렸고, 당연히 화살은 날 아가지 않았다.

“이거 하나라니? 아직 자네들에게는 좀 과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옛 친구의 체면도 무시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 친구 얼굴도 생각해 줘야지. 새끼손가 락이 아닌 걸 영광으로 여기게.”

아무리 상대가 상대라 해도 이건 역시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에게는 비록 서로 사이가 나쁘고 견원지간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으르렁거리지만 한 가지 공통 적으로 동의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 공유는 절대적인 것이라 모든 인과 관계와 감정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바로 무신(武神)의 유일무이한 제자라는 자부심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긍지만은 항상 잊지 않고 살아왔다. 재수없어 묻 지는 않더라도 저쪽 역시 필경 그리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그들이 또 언제 이런 취급을 받아보았겠는가? 이런 취급은 무려 그 비류연에게서조차도 받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노인이 넌지시 물었다.

“왜, 불만인가?”

“…예, 불만입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염도가 마침내 입을 열어 대답했다. 아무리 작고하신 사부님의 맹우라 해도, 아무리 두 개의 하늘 중 하나라 해도 불가한 것은 불가한 것이고 납 득할 수 없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적어도 권위에 억눌려 할 말도 주워 삼킬 만큼 한심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어르신의 말씀이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저희 두 사람이 겨우 그 쪼그마한 검지손가락 달랑 하나만으로 잴 수 있는 그릇밖에 안 된 다면 하늘에 계신 사부님을 뵐 면목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잠자코 침묵을 지키고 있던 빙검이 나서서 말을 거들었다.

“전 이 친구 말에 동의하거나 긍정하거나 동조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할 생각 따윈 눈곱만큼도 없었습니다만…

“뭐야? 이 망할 얼음땡이가!”

발끈하는 염도의 성질머리를 빙검이 손을 들어 저지했다. 그리고는 못다 한 말을 계속했다.

말투도 바뀌었다. 차가운 회색빛 북풍처럼 감정이 느껴지지 않던 그의 목소리가 한여름의 열풍처럼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오늘 그 예상을 깨뜨려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지금 이 친구의 말에 타당성을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이리저리 다각도로 숙고해 봐도 평소 감정에만 휩싸여 욱욱거리던 이 불덩어리 친구의 말이 옳은 듯하니 말입니다. 거참,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저 자신도 놀라고 있습니다.”

“누가 네놈 친구야!”

평소대로라면 절대로 입이 찢어져도 쓰지 않았을 소름 끼치도록 닭살스런 표현에 염도가 발끈했다. 그래야 멋쩍은 표정을 감출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 틀림없었 다.

함께 호흡을 맞추고 더불어 검을 들 일은 없을 거라 여겼는데 자신의 생각도 틀렸던 모양이다.

“호오, 그 친구가 심심풀이로 가르친 것은 아닌 것 같구먼. 제자를 잘못 가르치진 않은 모양이야. 좋아, 좋아! 아무리 반쪽짜리라도 합치면 하나라 이건가? 자네들 의 그 단순한 덧셈 도식이 얼마나 잘못된 오산인지를 내 몸소 가르쳐 주겠네.”

오만한 표정으로 노인은 태산처럼 우뚝 솟아 나온 검지를 까딱거렸다. 그 의미는 명명백백했다.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게 아니지. 자신들의 가치를 재평가받고 싶다면 어디 한번 보여줘 보게. 자네들의 진가를 말일세.”

“바라던 바입니다!”

사양과 겸양의 절차 따위는 생략되었다. 구태여 본론 진입을 늦추고 싶은 생각 따위는 양쪽 모두 없었다. 어느 쪽 할 것 없이 모두들 의외로 성질이 급했다. 지금 이 들이 바라는 것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뿐이었다.

필요한 건 말이 아니라 행동이었다. 언제나 세상이 가르쳐 주는 그 진실대로.

염도는 홍염을, 빙검은 빙백을 빼 들었다. 이 두 사람이 하나의 대상을 상대로 함께 어깨를 맞대고 검과 도를 뽑는 것은 이십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 의 미에서 오늘은 기념비적인 날이었지만 두 사람의 머리 속에 그런 달콤한 낭만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맹렬히 끓어오르는 붉은 용암 같은 투 쟁심뿐이었다.

무림 최강의 강자라 칭송받는 강호무림의 신화, 이 두 개의 신화 모두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사람이 지난 백 년 동안 누가 있었을까? 정답은 전무(全無).

이제 자신들이 바로 최초이자 최후가 될 것이다. 하나의 신화는 이미 전설이 되어 하늘에 묻혔기 때문에.

“자네들은 방금 이걸로는 좀 부족한 게 아닌가 걱정했네만…….”

검지 하나를 오롯이 치켜든 채 노인이 말했다.

“부족하다라……. 과연 그럴까?”

말보다는 몸소 보여주는 것이 빠르다고 생각한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즉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두 사람을 가리켰다. 다음 순간 미처 대비하기도 전에 무시무시 한 도기의 물결이 해일이 되어 하찮은 그들의 존재를 집어삼켰다.

“헉!”

염도와 빙검은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을 가리키고 있는 손가락은 이미 손가락이 아니었다. 단 한 개의 손가락은 이미 손가락이라 부를 수 없는 손가락으로

화(化)해 있었다. 그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적절한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무시무시한 힘으로 그들을 억압하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이, 이럴 수가……??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한겨울에 빙류천에 들어갔다 나왔다 해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염도는 눈을 부릅떴다. 허공도 잘라 버릴 것만 같은 날카롭고 차가운 칼날의 끝이 그의 미간을 겨누고 있는 듯한 오싹한 느낌에 그는 전율했다. 모골이 송연해졌 다. 죽음이 그와 찰나의 간격에서 춤추고 있었다.

빙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날카로운 검날의 끝이 그를 노리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목젖 위에서 싸늘한 혀를 날름거리며 무시무시한 살기를 방출했다.

그들을 향한 검지는 단지 하나뿐이었지만 두 사람이 인지한 감각은 각기 달랐다. 하나의 사태를 직면했으면서도 두 가지 다른 해석과 이해가 생겨난 것이다. 하지 만 그 서로 다른 두 가지 인식은 그들이 상정하고 있는 가장 두려운 사태와 맞물려 있었다. 그들을 겨누고 있고, 그들을 옭아매고 있는 것은 그 둘 자신의 마음속에 서 자라난 공포였다.

‘이런, 맙소사!’

그제야 둘은 자신들이 얼마나 잘못 생각하고 있었는지 그들이 저지른 단순 사고의 치명적인 결함을 몸서리치게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잘못된 사고의 거대한 틈새를.

그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우뚝 서 있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본 모습은 맛보기도 보여주지 않았는데 물 위로 드 러난 빙산의 일각을 보고 그 크기를 가늠하려 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잣대로 측량할 수 없는 존재를 앞에 두고 그딴 식으로 안이함의 극치 를 달리는 생각을 했었다니…….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눈앞에 태산처럼 버티고 있는 존재를 겨우 하찮은 도구 따위로 우위를 점하려 하다니. 이 얼마나 오만하고 무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인가. 애당초 칼이나 도 같은 쇠쪼가리를 깨작깨작 휘두르며 재롱 부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들을 억압하고 있는 것은 칼이나 검 따위의 도구가 아니었다. 자신들의 양 어깨를 천근만근 짓누르고 있는 중압감은 바로 절대적인 존재 우위에서 오는 압박감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마침내 죽음의 문턱에 서서야 그 사실을 깨달 을 수 있었다. 자신들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도.

사방이 단 하나의 손가락으로 제압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큰 손가락을 보지 못했다. 부처님의 손바닥에 갇힌 제천대성 손오공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그래도 그 원숭이는 오줌이라도 갈겼으니 인간보다 나은 셈이었다. 그들은 오줌은커녕 손가락 하나도 까닥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속박당한 채 석상처럼 미동도 없이 굳 어 있었다. 그나마 아직 심장이 뛰고 있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아니, 심장조차도 애초에 멈춰져 있었는지 모른다. 호흡과 마찬가지로. 아직 살아 있다는 것조차 착각일지 몰랐다.

마치 자신들이 날개가 잘리고 다리가 떼인 채 노인의 손가락 위에 올려진 파리처럼 느껴졌다. 살기 위한 발버둥조차 치지 못하는 모든 가능성을 빼앗긴 가련하고 미력하고 하찮은 벌레. 이대로 조용히 운명을 받아들이는 게 편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해도 정말 좋은가?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염도와 빙검은 속으로 자문해 보았다. 그러자 사부님의 마지막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나는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 그러니 너희들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무언가를 하고자 한다면, 무언가를 이룩하고자 한다면 결코… 결코 포기하지 말아 라.”

그러자 눈이 번쩍 뜨였다. 사지에 감각이 돌아왔다. 그들에게도 단 한 가지 장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 감각이 미지의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압도적인 존재감, 그리고 그 존재의 내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릿발 같은 살기! 한때 수십, 수백 번 체험해 봤던 바로 그 감각이었다. 비록 그때 는 시야가 좁아 그 전체를 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그 압도적인 거대함을 절감하는 데 부족함은 없었다.

그렇다. 그들에게는 면역이 있었다. 과거의 시련에서 얻은 내성이 그들의 심신에 각인되어 있었다. 여기서 한 발짝도 떼지 못한다면 사부님을 뵐 면목이 없었다. “하아아아압!”

사자의 포효 같은 기합이 터져 나왔다. 공기가 쩌렁쩌렁 울리는 우렁찬 외침 속에서 그들은 억압의 타파와 자유를 선언했다.

마침내 그들은 자신들을 옭아매고 있던 거미줄 같은 주박을 떨쳐 버릴 수 있었다.

까닥!

손이 움직였다.

움찔!

손가락 끝에서 시작된 미세한 움직임은 손목을 지나 팔꿈치를 넘어 어깨의 근육을 요동치게 하고, 가슴을 통해 내려가 허리를 지난 다음 허벅지를 두들기고 무릎 을 친 다음 정강이뼈를 타고 발목을 지난 용천혈을 통해 빠져나갔다.

정이 동으로 변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 뒤로는 일사천리인 법이다. 한 번 구르기 시작한 돌은 멈추지 않는다.

“호오, 과연! 이대로 끝나면 재미없지. 아직 자네들이 보여준 건 하나도 없으니까 말일세. 그렇지 않나?”

***

윤준호는 요즘 그를 둘러싼 세계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완전히 변했다는 사실을 피부를 통해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길을 걸어갈 때면 언제나 그를 향하던 멸시 의 시선도, 조롱의 말도, 가벼운 시비거리도 지금은 찾아볼 수 없었다. 모두 화산규약지회에서 생환한 이후였다. 화산지회는 비록 흉사로 끝을 맺었지만 오히려 그 시련을 치러낸 그의 성격은 많이 밝아져 있었다. 그것은 아마 자신감과 긍지라는 것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싹튼 때문인 듯했다. 허리는 소나무처럼 꼿꼿해지고, 가슴 은 대지를 품을 만큼 넓어졌으며, 눈동자에서 탁한 기운이 가시고 맑아졌으며, 걸음걸이 역시 당당해졌다. 조급한 마음이 사라지고 여유가 생기자 매사를 긍정적으 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변한 것일까, 아니면 세계가 변한 것일까? 그 자신이 변했기에 그에 감응하여 세계가 변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요즘 꽤 바빴다. 그는 한 노인의 시중을 명받고 있었다. 그 노인은 화산지회 시험관들의 장을 맡고 있는 혁중이라는 이름을 지닌 사람이었는데 그 무서운 염 도 노사와 빙검 노사조차도 그분 앞에서는 언행을 조심, 또 조심하는 것을 보니 보통 거물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지금 그가 이렇듯 발걸음을 재빨리 옮기고 있는 것 도 다 심부름을 위해 그 노인이 머물고 있는 숙사로 가기 위해서였다.

똑똑.

“저 왔습니다, 노사님!”

몇 번 더 문을 두드려 봤지만 안에서는 응답이 없었다. 혹시 오수를 즐기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기에 다시 한 번 조심스레 두드려 본다.

똑똑.

역시 반응이 없었다.

“들어가겠습니다.”

고개를 갸우뚱거린 후 윤준호는 ‘들어가겠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 순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투둑투둑, 온몸에서 소름이 돋아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 왜 이러지?”

마음과 따로 노는 몸의 이상 반응에 잠시 의문이 들긴 했지만 그의 오감에 딱히 따로 잡히는 것은 없었다. 윤준호는 그냥 문을 열어젖혔다.

안에는 노인이 있었다. 자고 있지도 않았다. 게다가 염도 노사와 빙검 노사까지 와 있었다.

“모두들 계시잖아? 게다가 염, 빙 두 노사님까지. 그런데 왜 반응이 없었지??

희한한 것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그가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있었다.

세 사람 모두 가라앉은 침묵 속에서 묵묵히 서 있기만 할 뿐 아무 말도 주고받고 있지 않았다. 누구도 자리에 앉으려 하지 않고 있었다. 잠시 공기가 무겁다는 생각 이 들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 외에는 겉보기에 그다지 위험성을 느낄 수 없었기에 윤준호는 무심결에 디뎌서는 안 될 선을 넘어가고 말았다. 다음 순간, 그의 발이 문지방을 넘어섰다.

“어?”

순간 그는 자기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태가 그가 인지할 수 있는 가능 영역을 한참 벗어나 버렸던 것이다. 모든 감각이 갑작스레 사 라졌다.

그는 갑자기 자기가 어디에 서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마수에 공간 감각이 몽땅 박탈당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시간 감각도 정상적으로 작동 되고 있는지 장담할 수 없었다. 모든 감각이 빈대떡 반죽처럼 뒤죽박죽 뒤엉켜 있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 거지? 지금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하는 걸까?

역시 알 수가 없었다. 일찍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사태에 그는 직면해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그것은 한 번 느껴본 적이 있는 감각이었다.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나 느낄 수 있는 살기 어린 칼날의 감촉, 죽음의 기운이었다. 그 러나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멍하니 서 있는 것뿐이었다.

“이 바보 멍텅구리가!”

사나운 일갈(喝)과 함께 어떤 손 하나가 그의 뒷덜미를 잡아챈 후 사정없이 힘껏 뒤로 홱 잡아당겼다. 질식하는 게 아닌가 느껴질 정도로 거친 행동에 그는 아무 런 저항도 할 수 없었다.

슈욱, 어떤 결계 안에서 강제로 끌어내어진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돌연 모든 감각이 원상태로 돌아왔다. 먹먹했던 청각이 회복됨과 동시에 호통 소리가 들려왔 다.

“야, 이 얼간이 화상아! 죽고 싶어 환장했냐? 환장했어?”

들은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아니, 귀에 인이 박힐 정도로 자주 들은 목소리였다. 저 성질머리 나쁜 목소리. 저런 싸가지없는 목소리의 소유자가 여럿일 리 없었다. 그건 사회를 위해서도 안 될 말이었다. 그는 불안한 마음으로 목소리 주인의 이름을 불렀다.

“류, 류연…….”

그의 또 하나의 변화는 동기에게 존칭이 아니라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친구는 왜 이렇게 불같이 화를 내고 있는 걸까?

“이 바보 멍충아! 의지력의 집합체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의형살인(意形殺人)의 경지, 즉 심검의 경지에 오른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격돌에 휘말렸다가 무 슨 꼴을 당하려고? 뭐?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서 있었기 때문에 위험하지 않은 줄 알았다고? 아이구, 골치야! 넌 아직도 눈에 보이는 겉모습이 전부라고 생각하 는 거야? 조용하다고? 가만히 있다고? 어디가? 내가 보기에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화약고나 장마철에 금 간 둑처럼 보이는데? 저건 정중동(靜中動)이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일견 조용하고 얌전해 보이지만 그 정숙의 이면(裏面)에서는 무수한 격돌이 치열하게 반복되고 있다고! 지금은 저렇게 이마에 핏대나 올리며 교 착 상태에 빠져 있지만 그것도 잠시 잠깐, 곧 ‘뻥!’하고 폭발해 버린다고! 그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다간 어떻게 되는지 알아?”

비류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팽팽하게 줄다리기하던 교착 상태가 무너졌다. 장마철 둑이 터지기라도 한 듯 강제로 고여 있던 기의 홍수(洪水)가 폭발적으로 분출되어 나왔다.

촤라라라락!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검기(劍氣)가 윤준호가 서 있던 자리의 기물들을 갈가리 찢어발겼다. 토막 냈다라는 표현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광경이었다. 세밀하게 분쇄했 다는 표현이 보다 정확했다.

그가 서 있던 자리뿐만이 아니었다. 방 안의 기물 모두가 보이지 않는 칼날의 사나운 회오리에 휩쓸려 사정없이 난도질당하고 있었다.

멍하니 정신을 빼앗기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면 자신 역시도 어김없이 같은 처지가 되어 지금쯤 볶음용 돼지고기보다 더 잔잔하게 수천 조각으로 나뉘어져 있었을 것이다. 심장을 얼어붙게 하는 섬뜩한 전율 속에서 윤준호는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서리 낀 심장으로부터 내보내진 식은 피가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번져 나갔다. 너무나 현실감이 없는 일이었기에 그 사실을 실감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털썩!

다리의 맥이 풀리고 만 윤준호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예전의 자신과는 다르게 바뀌었다고는 생각했는데 아직 수행이 한참 부족한 모양이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서는 일찍이 본 적은커녕,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고도의 경지가 서로 격돌하고 있었다.

만 근의 암석이 짓누르는 듯한 엄청난 압력 속에서 염도는 침음성을 삼켜야만 했다.

“이, 이럴 수가? 모든 수가 낱낱이 읽히고 있다니.”

태산처럼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자그만 체구의 노인은 그들이 펼치고자 하는 기의 모든 기조(機兆)를 읽어내고 있었다. 초식을 펼쳐 봤자 파훼당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역습이나 당하지 않으면 행운이리라. 동등한 조건이라면 승산이 있을지 모르나 노인과 그들의 실력 차는 천양지차(天壤之差)라 해도 과언이 아니 었다. 이 정도 실력 차에서 운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빙검 역시 그 사실을 깨닫고 있는지 계속해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둘 모두 왜 가만히 있나? 게다가 그 볼썽사나운 모습은 또 뭔가?”

혁중이 땀으로 흥건한 두 사람의 몰골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런 어마어마한 압력 속에서도 노인의 신색은 태연하기만 했다.

“쯧쯧, 음과 양은 서로서로 상쟁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어야 하거늘… 도대체 뭔가, 자네들의 그 꼴불견은? 그 친구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나? 양과 음, 수와 화가 서로 앞으로 나가려고 다투다니? 자네들은 조화가 뭔지도 모르나?”

혁중이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조화를 깨뜨리는 변화가 변화라 할 수 있나? 상생을 거부하고 상쟁에 몸을 맡기면서 어떻게 변화를 입에 담을 수 있겠나? 호위기근(互爲其根), 서로가 서로의 근 원이 되어주어야 하거늘, 자네들처럼 음과 양의 기운이 서로를 거부하며 저 혼자 잘났다고 막 나가는 것은 그저 보는 이로 하여금 역겨움만 안겨줄 뿐이네. 그것은 추(醜)함, 그 자체일세.”

비수 같은 말이 그들의 가슴속에 푹 섬뜩한 소리를 내며 박혔다.

“자네들의 지금 그 꼴을 보면 먼저 간 그 친구가 참으로 기뻐하겠구먼, 참으로 기뻐하겠어. 이런 늙어빠진 노인네의 손가락 하나 감당하지 못하니 말일세. 너무 기 뻐서 눈물까지 흘리겠군 그래. 안 그런가? 더 이상 해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 같네. 이만 끝내는 게 좋을 것 같군.”

혁중이 나직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직입니다!”

염도와 빙검이 동시에 외쳤다. 평소 으르렁대기만 하던 그들의 목소리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완벽한 하나의 화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직 끝이 아닙니다. 저희들의 한계는 여기까지가 아닙니다.”

염도와 빙검은 잠시 자신들을 잊기로 했다. 그리고 기의 흐름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아직 끝이 아니라 했나?”

“이제 시작입니다.”

염도와 빙검이 한마음으로 대답했다.

“류연, 이제 저걸 어쩌나?”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기의 폭풍에 휩쓸릴 위험 때문에 조금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비류연과 함께 세 사람의 힘 겨루기를 지켜보고 있던 윤준호가 안절부절못하 며 물었다. 너무나 엄청난 일이기에 그로서는 감당이 되지 않아 조언을 구했던 것이었는데 그 조언을 구하는 대상에 문제가 있었다.

“뭘 어쩌긴 어째, 노인네들이 지칠 때까지 기다려야지. 뭐, 곧 결판이 날 거야. 저 할아버지가 그렇게 무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거든.”

비류연이 별거 아니라는 어조로 퉁명스레 대답했다.

“그러지 말고 좀 멈춰보면 안 될까?”

그러자 비류연이 터무니없다는 표정으로 피식 헛웃음을 터뜨렸다.

“멈춰? 어떻게? 저 안에 들어가서? 이보게, 윤준호 군. 그런 걸 우아한 말로 자발적인 생명 납세 행위’라고 하는 거야. 그걸 네 자로 줄이면 자살 행위가 되지. 그 럼 세 자로 줄이면 뭐가 될 것 같나?”

“그… 글쎄…….?”

“뭐긴 뭐야, ‘개죽음’이지!”

일말의 의구심도 섞여 있지 않은 단호한 대답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떡하긴 뭘 어떻게 해? 앉아서 구경이나 해야지. 상대가 도와달라고 요청도 안 하는데 도움을 주려고 애쓰는 건 오만의 소산이라구.”

그러면서 비류연은 땅바닥에 털퍼덕 주저앉더니만 느긋한 자세로 대전을 관전하기 시작했다.

“뭘 해? 댁도 앉아!”

옆 자리를 호쾌하게 팡팡 두드리는 태도에 윤준호는 얼떨결에 ‘그… 그래’라고 대답하고 따라 앉고 말았다.

“우리 이래도 괜찮은 걸까?”

일단 앉고 보긴 했는데 마음은 여전히 빨다 만 속옷처럼 찝찝했다.

“물론 괜찮고말고! 게다가 난 입장이란 게 있어서 말이야.”

“입장?”

윤준호가 되물었다.

“사부는 제자들의 싸움을 그윽한 눈으로 지켜봐 줄 의무가 있다 이 말이지.”

어깨와 가슴을 펴며 비류연이 대답했다.

“어? 사부와 제자를 순서 바꿔 말한 것 같은데?”

윤준호가 말끝을 흐렸다.

“글쎄? 어떨까?”

씨익, 비류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만 지어 보일 뿐 더 이상 부연 설명하지는 않았다.

“두 눈 부릅뜨고 잘 보라구!”

비류연이 말했다.

“원래 이런 건 돈 주고도 못하는 구경거리라고.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야. 게다가 가장 멋진 점은 이 희대의 볼거리가 공짜라는 거지. 이런 큰 유희를 땡전 한 푼 내지 않고 특등석에서 관람할 수 있는데 그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야 없잖아? 너도 잘 봐둬, 도움이 될 테니.”

“어… 알았어.”

개미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윤준호가 대답했다.

“쯧쯧, 좀 더 허리를 세우고 가슴을 활짝 펴고 눈을 부릅뜨라고. 마음을 가두지 말고 넓게 확장시켜. 이런 볼거리를 구경할 때는 그 정도 자세는 가지고 있어야 하 지 않겠어? 아무리 대단한 고수들의 수준 높은 대결이라고 해도 지켜보는 당사자 쪽에서 제대로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아무것도 훔쳐 배울 수 없다고. 그러니 일단 마음의 준비를 갖춰. 저건 너한테 그만한 가치가 있을 거야. 누가 뭐라 그래도 천하에서 강하기로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사람들의 대결이니까 말이야. 아무에게나 찾아오는 행운은 절대 아닐걸?”

비류연이 윤준호를 보며 말했다.

“자넨 한마디로 ‘심’ 본 거야.”

비류연은 한때 자신도 입원한 전적이 있는 천무학관의 건강과 치료를 전담하고 있는 ‘의약전’ 입원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는 자칭 환자였지만, 지금 은 문병객의 입장이었다. 그의 나이 많은 제자 둘이 이곳에 입원해 있었던 것이다. 인체 실험이 특기이자 취미라는 소문이 자자한 의약전주 천수신의 허주운의 모습 은 보이지 않았다. 또 어디선가 특이한 증상의 환자를 주물럭거리고 있는 모양이다. 전에 입원했을 때 안면을 터둔 의원 한 명이 염도와 빙검 모두 천무학관에서 꽤 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인지라 안쪽에 있는 이 인용 특실에 누워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고맙다고 말하고 특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문 앞에 덩그러니 걸려 있는 ‘면회 사절’이라는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문 저편은 죽음이 내려앉기라도 한 듯 침묵으로 감싸여 있었다. 비류연은 기별도 없이 문을 열었다. ‘면회 사절’이라 적힌 흰 팻말이 힘없이 덜렁거렸다.

“몸들은 좀 어때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염도와 빙검은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기 때문에 피 묻은 붕대가 그들의 입까지 몽땅 뒤덮고 있는 그런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부러진 사지에 부목을 대고 있는지라 그 고통 때문에 이를 악물고 있었기 때문에 입을 열 수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단지 두 사람은 의무실 침상에 흰 이 불을 덮은 채 서로 등을 돌리고 누워 있을 뿐이었다.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은 채. 무거운 침묵이 그들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비류연이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말했다.

“방금 부전주가 그러는데 가벼운 내상이라더군요. 외상은 긁힌 것 정도고. 내공을 한순간에 급격히 소비하는 바람에 일어나는 일종의 탈기(氣) 현상이라고 하더 군요. 단순한 탈력 상태일 뿐이니 빈혈로 쓰러진 것이랑 비슷하다고. 한 이틀 정도만 잘 정양하면 거뜬하다고 하데요.”

“그분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먼저 입을 뗀 것은 염도 쪽이었다. 빙검의 입은 여전히 얼어붙어 있는 그대로였다.

“아, 그 할배요? 아참, 두 사람은 그때 기절했기 때문에 그 이후의 일을 알 수 없겠군요. 깨어났을 때는 이미 침상 위였을 테니.”

염도와 빙검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물들었다.

“그래서 어찌 되었습니까?”

겨우겨우 빙검의 입도 열렸다.

“쌩쌩하던데요.”

달리 표현할 말도 없었고, 굳이 숨길 일도 아니었다.

“그 할배가 세긴 세던 모양이데요. 보통 할배가 아닌 줄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나의 최정예 제자 두 명을 이 모양 요 꼴로 만들 줄이야. 솔직히 의외였어요. 도대체 그 할배 정체가 뭐죠?”

“…….”

또다시 이중의 침묵이 돌아왔다.

“말하기 싫다… 이런 뜻인가요?”

사실 아무리 명색만 사부인 비류연에게라지만 그 노인의 정체에 대해 함부로 발설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두 사람으로서도 무척이나 곤란했다.

“뭐, 좋아요. 억지로 입을 열게 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뭐, 차차 알게 되겠지요. 일단 정체를 알 수 없는 할아버지로 해두죠. 그건 그렇고, 왜 그렇게 둘 다 뚱해 있어

요?”

“둘 다 벌집이라도 잡수셨나… 웬 꿀 먹은 벙어리 행셉니까? 오늘은 괜히 온 모양이군요. 제자 두 사람이 걱정돼서 들렀더니…….”

“그건 고맙습니다.”

염도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빨리 나가줬으면 하는 게 분명했다.

“알았어요, 알았어. 가면 되잖아요, 가면. 내가 나간 뒤 둘이서 무슨 재미를 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뭐, 이틀이면 나갈 수 있다니까 편안히 누워서 그동안 밀 린 회포라도 풀어요. 평소에 이렇게 차분히 대화할 일이라도 있겠어요?”

비류연이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누가 저런 놈이랑!”

“누가 저딴 놈이랑!”

염도와 빙검이 서로를 향해 세차게 몸을 돌리며 외쳤다.

““따라하지 마!”

“따라 하지 마!”

둘이 동시에 발끈하며 외쳤다.

“너야말로!”

“너야말로!”

비류연이 서로 물어뜯을 듯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 사이를 밀치며 외쳤다.

“그만!”

계속 그냥 뒀다가는 영원히 끝이 안 나거나 아니면 곧바로 둘 다 끝장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런이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면서도 비류연은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애들도 아니고. 왜 그렇게 사이가 안 좋아서 맨날 싸워요? 물과 기름처럼. 아니, 얼음과 불인가?”

또 그렇게 보면 맨날 티격태격 으르렁거리는 것도 이해가 갔다.

“그래도 그건 멋졌어요. 마지막의 그 기술? 이름이 뭐였죠?”

비류연이 당시의 염도의 붉은 도와 빙검의 푸른 검이 마치 음양이 조화를 이루듯 한데 어울리며 혁 노인이 만들어낸 기의 장벽을 뚫고 노인을 향해 돌진하던 그 긴 박했던 상황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때만큼은 두 사람의 도와 검이 한마음 한뜻 아래 모여 있었다. 비록 끝나고 쓰러지긴 했지만 말이다. 비류연이 묻는 것은 바로 그 합격술의 명(名)이었다.

“빙염양의귀원합격(氷炎兩義歸元合擊)!”

“염빙양의귀원합격(炎氷兩義歸元合擊)!”

빙검과 염도의 입에서 동시에 한 가지 이름이 두 가지 방식으로 튀어나왔다. 떨어진 침대 틈바구니 위에서 두 사람의 눈이 격돌하며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었다. “흥!”

“헹!”

염도와 빙검은 서로의 낯짝이 안 보이는 안식처를 찾아 동시에 고개를 홱하고 돌렸다. 결국 또다시 등과 등이 서로를 마주 보게 되는 형국이 되었다.

“이런이런!”

갑자기 두 사람의 정신 연령이 급전직하한 듯한 그 모습에 비류연은 졌다는 듯 양손으로 허공을 받치기라도 하듯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 다.

“정말 어린애들이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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