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490화
상당히 흥분한 왕비를 가까스로 궁에 돌려보낸 청성제는 이제 좀 편해졌다는 듯 한숨을 돌리며 케이에게 말했다.
“너무 속상해 하지 말거라 가희 공주야. 왕비이기 이전에 너의 어머니인 사람이 다. 공주 네가 환궁하자마자 이상한 일에 휘말린 탓에 생긴 심한 걱정에 오히려 화를 내는 것 같구나.”
“‥소녀도 알고 있사옵니다 아바마마‥.”
케이는 고개를 들며 애써 미소를 지은 채 말했고, 청성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케이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때, 창밖 밤하늘을 바라보던 휀은 고개를 돌려 케이를 잠깐 동안 바라보았다. 휀의 그 시선을 느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가 왜 케이를 바라보았는지 이유를 아는 사람은 휀 자신뿐이었다.
※
조커 나이트는 악마왕 중 한 명인 메피스토의 앞에 거의 엎드리다시피 한 상태로 꿇어앉았다. 악마들의 세계에선 극형을 내려달라는 표시였다. 붉은 피부의 악마왕 메피스토는 주먹으로 자신의 각진 턱을 괴며 조커 나이트에게 물었다.
「‥무얼 잘못했느냐? 넌 지금 린라우 녀석의 일을 보좌하고 있어야 하지 않느냐? 상당히 들어보고 싶군‥」
메피스토의 음산할만치 웅장한 목소리에, 조커 나이트는 몸을 움찔거리다가 가까스로 대답을 했다.
「‥인간에게 압도를 당했습니다‥. 우리들의 위대하신 악마왕 메피스토님께서 소인에게 내려주신 조커 나이트라는 명예를 실추시켰습니다‥. 저 자신이 저를 용서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부디 저에게 극형을‥.」
그러자, 메피스토는 재미있다는 듯 황색으로 빛나는 눈을 살짝 움찔거리며 물었다.
「호오‥그래? 이번 일에는 정보만 주고 간섭하지는 않으려 했는데‥어떤 인간인지 보고는 싶군. 네 기억을 꺼내 보거라.」
「예, 기꺼이‥.」
곧, 조커 나이트의 눈에서는 한 사나이의 영상이 비춰졌다. 금발에, 흰색 배틀 코트를 입고 있는 무감정한 눈초리의 사나이‥. 그 사나이를 본 메피스토는 싱긋 웃으며 중얼거렸다.
「‥후후훗. 휀·라디언트였군‥.」
그러자, 조커 나이트는 깜짝 놀라며 메피스토를 바라보았다.
「아, 아니‥왕이시여, 설마 저자를‥?」
메피스토는 의자에 바로 앉은 후 조커 나이트에게 자신이 입고 있는 붉은색 상의를 들춰 보이며 말했다. 조커 나이트는 메피스토의 넓은 가슴에 십자 모양의 흉터가 나 있는 것을 보고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메피스토는 다시 상의를 내린 후 미소를 지은 채 중얼거렸다.
「알다마다‥. 나에게 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최강의 가즈 나이트, 휀 라디언트‥. 그 녀석의 살신기, [레퀴엠]을 맞고 난 300년 만에 의식을 회복했다. 대신 맨 처음 충격 때 입은 이 십자 모양의 상처는 회복되지 않았지. 난 신이 아니라 레퀴엠을 맞고 살 수 있었다. 물론 그 녀석도 큰 상처를 입긴 했지만‥. 결국 손해 본 건 나지. 옛날 얘기는 관두고‥휀 녀석과 마주쳐서 멀쩡히 살아온 너에게 상을 내리겠다.」
조커 나이트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 없었다. 살아왔다고 해서 상을 받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메피스토는 마기가 가득한 한숨을 뿜어내며 중얼거렸다.
「1000년 전‥아니 수만 년 전이라 해야 하나? 그 바보 같은 린라우 녀석의 계획을 아스타로트 등과 협의해 지원해 주지 않기로 했건만‥. 후후, 그 녀석 이번엔 혼이 좀 나겠군‥. 조커 나이트‥너의 힘을 약간 늘려주마. 아마 아직도 속고 있는 신장이라는 녀석들보다 두 배 정도는 강해질 거다.」
그 말에, 조커 나이트는 황공함을 감추지 못하고 지면을 이마로 받으며 감사를 표하였다.
「가, 감사합니다 왕이시여!! 그 힘으로 반드시 그 휀이라는 녀석을‥!!!」
「훗, 웃기고 있군‥.」
자신의 말을 메피스토가 갑자기 끊으며 비웃자, 조커 나이트는 깜짝 놀라며 말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들어 메피스토를 바라보았다. 메피스토는 불쌍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정도 강해져 봤자 넌 보통 상태의 휀조차 ‘절대’ 쓰러뜨리지 못한다. 명계에 가는 것이 정 소원이라면 다시 그 녀석과 싸워 봐라. 그 녀석의 검 플랙시온의 검광을 기억하고 죽는다면 켈베로스가 널 친절히 모실 거다. 그 힘으로 린라우의 명령이나 충실히 이행하라. 자, 이제 사라지도록. 서큐버스들‥몸이 달아있군‥후후‥.」
그 말을 남긴 메피스토는 조용히 어디론가 사라져 갔고,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던 조커 나이트는 몸을 벌벌 떨며 중얼거렸다.
「‥그, 그런 정도의 녀석‥이었나‥?」
※
“‥아직 몰랐나 보군.”
청성제까지 나간 상태에서 방의 주도권은 린스가 잡고 있었다. 하지만 오직 휀만은 그 주도권에서 제외된 상태였다. 가장 강한 가즈 나이트냐는 린스의 질문에 따른 휀의 대답을 들은 린스는 다시 흥분을 하며 휀에게 소리쳤다. 그러나 소리치는 동안에도 휀은 무시한 채 계속 밤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잘났길래 계속 말과 대답이 그런 거야!! 그리고 너라는 인간은 왜 허구한날 ‘하늘’만‥읍!!”
순간, 린스의 입을 사바신이 자신의 거친 손으로 덮었고, 뒤를 바라보려고 몸을 움찔 하던 휀은 다시 자세를 돌리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바신은 위기를 모면했다는 듯 한숨을 길게 쉬었고, 소리를 내며 사바신의 손을 떼어 내려던 린스는 사바신의 그런 반응을 보고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사바신은 린스의 입에서 손을 뗀 후 종이에 뭐라 써서 린스에게 보여주었다.
「다른 단어는 몰라도 ‘하늘’이라는 단어는 휀 앞에서 함부로 쓰지 말아요. 목숨 보장 못함.」
그러자, 슈렌과 사바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그 종이의 내용을 보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목숨을 보장 못할 정도로 하늘이라는 단어를 싫어하는 것인가? 린스는 곧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말했다.
“음‥뭐, 좋아. 저 왕비라는 분이 더 이상 케이에게 화를 내지 않게 우리가 처신을 바로 하자구. 만약 적이 쳐들어오면 깨끗이 처리하고. 누구처럼 문을 박살 내거나 숲을 통째로 날리거나 하지 말고 말이야.”
슈렌과 사바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휀이 뒤로 돌아서며 린스에게 말했다.
“‥애 같은 말만 하다니‥4년 전과 똑같군. 몸만 성장했나?”
그 순간‥노엘, 로드 덕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버렸고, 슈렌의 눈 역시 크게 떠지고 말았다. 그러나, 린스는 무슨 소리냐는 듯 인상을 쓴 채 휀에게 소리쳤다.
“무, 무슨 소리야!! 난 4년 전에 널 만난 기억이 없어!!”
그러자, 휀은 감정 없는 표정으로 린스에게 천천히 다가왔고 린스는 무언가 섬뜩한 기분이 들었는지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러나, 린스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휀은 린스가 목에 걸고 있는 은재 십자가–리오가 준 것–를 손으로 들어 올리며 말했다.
“‥목걸이가 안 됐군.”
“그, 그것 만지지 마!! 리오가 준 거란 말이야!!!”
순간, 휀은 린스가 걸고 있던 십자가를 잡아챘고, 오른손 안에 움켜쥔 후 차가운 눈으로 린스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기억 못하면 소용없는 물건이지.”
파앗–!!
그때, 십자가를 쥔 휀의 오른손 안에선 흰색의 빛이 번뜩였고, 휀의 손이 풀리자마자 그곳에선 은색의 가루가 날리기 시작했다. 슈렌과 사바신을 제외한 모두는 다시 한번 놀랐고, 린스는 멍한 상태에서 휀의 손에서 흩날리는 가루를 바라볼 뿐이었다. 휀이 돌아서자마자 린스는 방에서 뛰쳐나갔고, 곧 노엘이 급히 그녀를 뒤쫓아 달려나갔다. 그 모습을 본 케이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다시금 휀의 앞으로 돌아가 그의 옷자락을 잡아끌며 소리쳤다.
“너무 심하잖아 당신!! 좋아하는 사람과의 추억이 담긴 물건인데 그렇게 간단히 부서버리면‥부서버리면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그러자, 휀은 오른손을 다시 편 후 케이의 왼쪽 귀에 린스에게서 빼앗은 은재 십자가를 걸어주었고, 케이는 순간 휀의 옷자락을 잡은 손을 풀어버렸다. 휀은 구겨진 자신의 검은색 옷을 툭툭 턴 후 묵묵히 방을 나섰다. 슈렌은 머리 부분이 어느새 떨어져 나간 은수저를 손가락으로 빙빙 돌리며 중얼거렸다.
“‥[리카]를 알고 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