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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313화


소 장로는 일단 고개를 끄덕이곤 본가와 아주 관계없는 사람들이 아니기에 자신을 뒤따르고 있는 중년인들 중 한 명을 동천 일행에게 보냈다. 그러자 사각 턱에 강인한 인상을 풍기는 중년인이 중소구에게 다가왔다.

“따라오시오.”

중소구는 당당하게 대꾸했다.

“거, 그럽시다!”

중년인은 중소구의 말투가 시비조로 들렸는지 미미하게 안색을 굳혔다. 허나, 곧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눈에서 힘을 풀었다.

“본인은 소강(燒康) 장로님 휘하의 부진한(不振翰)이라 하오이다.”

동천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푸웃! 부, 부진한 놈이라고? 으히히히!’

아무리 동천이 속으로 웃는다 하여 쉽사리 숨길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자신의 이름에 한(恨)이 맺혀 있는 부진한의 시야에는 말이다. 그는 싸늘한 눈초리로 동천을 지적했다.

“거기 너.”

자신을 부르는 것도 모르고 계속 배꼽을 부여잡던 동천은 누군가 자신의 옆구리를 찌르자 귀찮다는 얼굴로 째려보았다. 자신을 찌른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도연에게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에이 씨, 왜 그래.”

도연은 턱짓으로 부진한을 가리켰다.

“도련님을 부르십니다.”

동천은 눈을 똥그랗게 떴다.

“응? 나를? 왜?”

그가 전혀 모르겠다는 시선으로 부진한을 바라보자 화를 내려던 부진한의 입장에서는 한순간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의 눈에는 동천이 그저 호기심 많은 어린아이로밖에 안 보였던 것이다.

‘잘못 보았는가?’

그런 이유로 화를 내야 할 시기를 놓쳐버린 그는 어정쩡하게 입을 열었다.

“흐음, 뒤떨어지지 않게 잘 따라오너라.”

“아아, 그 말씀을 하시려고 했군요? 말씀 감사합니다.”

얼마나 예의 바른 행동이던가. 부진한은 그제야 완전히 의심을 풀고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생글거리는 동천의 이면에서는 사악한 웃음이 뛰놀아 다녔다.

‘부진한 새끼. 히히히!’

부진한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도심지에서도 보기 힘든 사층으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아마도 이 마을에서 제일 잘 나가는 객점인 듯싶었다. 부진한은 객점의 주인과 잘 아는 사이였는지 간단한 눈인사만을 나누고 거침없이 들어가 귀한 손님들만 모신다는 후원으로 그들을 데려다주었다.

“원래 이곳은 황룡세가의 분들과 더불어 본가의 가주님께서 만나실 장소였는데 가주님께서 부득이하게 다른 곳에 머물고 계시는지라 형씨는 편히 쉬도록 하시오.”

중소구는 자신을 형씨라고 부르자 기분이 무척이나 상했다.

“형씨? 본 대인은 중소구라는 엄연한 이름 석 자가 있으니 다음부터는 제대로 말씀해주셨으면 하오.”

부진한은 떨거지들 주제에 바라는 것도 참 많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좋소, 중소구. 이젠 됐소이까?”

중소구의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안 되었소! 본 대인을 부를 때는 중 대인이라고 하시기 바라오!”

마침내 부진한도 참을 수 없었던지 대놓고 인상을 구겼다.

“너무 억지가 아니오?”

“뭐? 억지이이? 그럼, 본 대인이 네놈에게 ‘이 부진한 놈아!’라고 말하면 네놈이라고 기분이 좋겠느냐?”

중소구의 막무가내 행동에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된 부진한.

“이, 이놈이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해보자는 거냐?”

중소구는 냅다 검을 뽑았다. 그러자 설마 검까지 뽑을 줄 몰랐던 듯 부진한이 흠칫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내 그도 정신을 차리고 검을 빼들었다.

촤앙!

맑은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뒤로 흘러나온 부진한의 살기 어린 목소리는 차디차게 방안을 채워갔다.

“이제야 보니, 네가 바로 광객 중소구로구나.”

광객이라는 소리를 제일 듣기 싫어했던 중소구는 대뜸 노호성을 터트렸다.

“으득! 감히 본 대인을 광객이라 불러? 죽고 싶은 모양이로다!”

일이 살벌하게 진행되자 겁먹은 추연이 본능적으로 쪼그려 앉았고, 이것을 기회라고 생각한 동천은 부진한을 열렬히 응원했다.

‘그래! 확 베어버려! 넌 할 수 있어!’

정말로 피 튀기는 혈전이 벌어지는가 싶더니, 그들의 대치는 어이없게도 무너지고야 말았다. 바로 도연으로 인해서 말이다.

“그만들 두시지요. 누구의 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무력으로서 일을 해결하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 중소구와 부진한이 주춤거렸고, 뒤이어 자신들이 너무 성급하게 행동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로서 해결해도 될 것을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하여 검을 빼들었으니 어찌 잘했다 하겠는가. 모두들 수긍하는 가운데 정 반대의 눈빛을 보내고 있는 인간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동천이었다. 다 된 밥에 코 빠뜨려도 분수가 있지. 이건 코 빠뜨리는 차원을 넘어 밥상 푸짐하게 차려놓고 거기다 코를 푼 격이 아니던가.

‘저런 썅!’

내심 절로 욕이 나왔다. 평소 욕으로 먹고 사는 놈이라 한번 더 욕한다고 별로 새로울 것도 없었지만 정작 동천은 나날이 발전하는 자신의 욕 솜씨에 흡족해하고 있는 추세였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길게 늘어 서서 욕할 필요도 없이 자신의 심정을 ‘저런 썅!’이라는 말로 간단하게 함축시킨 놀라운 어휘 구사력! 그것을 생각하자 금세 기분이 풀어졌고, 그는 끝을 알 수 없는 자신의 한계에 치를 떨어야만 했다.

‘쳇, 하는 수 없군. 도연이란 변수를 예측하지 못한 이 몸의 실수도 있었으니 일단 대세에 편승하는 척이라도 해야겠다.’

동천은 서로들 어정쩡하게 검을 거두는 상황이자 재빨리 나서서 해결사를 자청했다.

“도연의 말이 맞습니다. 중 대인 어르신과 명문 정파인 제갈세가의 진한님이라면 충분히 대화로 좋게 마무리지을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아이들이 나서서 사태를 종결시켜주자 괜히 무안스러워진 부진한은 동천의 말처럼 명문 정파의 사람답게 먼저 사과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이거, 내가 너무 성급했소이다. 평소에 수양이 모자란지라 욱하는 마음에 그만 참지를 못했으니 다 이 몸의 잘못이라 하겠소.”

단순한 면이 있었던 중소구도 이렇게 상대가 저자세로 나오자 급히 따라 사과했다.

“아니오. 본 대인이 참을 인(忍)자를 두어 번만 더 세었더라도 일이 이 지경까지 안 갔을 텐데 광객이란 말을 죽기보다 싫어하다 보니, 인자를 셀 여유도 없이 폭발하고야 말았소이다. 더군다나 검을 먼저 뽑은 것도 나였소. 그러니까 본 대인의 잘못이 크오.”

방금 전까지 서로들 죽이네 또 죽이네 하던 것들이 이제는 지들 잘못이라고 나서는 꼴을 보자 배알이 뒤틀린 동천. 그는 내심 하늘님을 외치며 분노를 가라앉혀야만 했고, 그가 그러는 사이 누군가 감지력에 잡혀들었다.

“응?”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동천은 하마터면 대놓고 욕설을 지껄일 뻔했다. 언젠가 나타날 줄 알았지만 막상 지금에야 나타나자 기분이 더러웠던 것이다.

“아가씨! 흑흑, 아가씨!”

황룡미미의 등장으로 숨통이 트인 추연은 울먹이며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미미는 싸늘한 눈을 하곤 추연의 머리에 꿀밤을 매겼다.

“으윽! 왜, 왜 그러세요.”

내색은 안 했지만 황룡미미의 내면 깊숙한 곳에 분노가 자리 잡고 있음을 동천은 깨달았다. 예전에 심한 구박을 받았던 경험 때문인지 그에겐 척! 보고도 한눈에 간파할 수 있는 눈썰미가 있었던 것이다.

‘저년이 뭐 때문에 열받아 있는 거지?’

동천의 그런 궁금증은 금방 풀릴 수 있었다.

“따로 떨어질 때 분명히 돈주머니를 건네 달라고 했었지.”

“아? 그, 그건…….”

추연이 창백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하자 황룡미미가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네가 그것을 가지고 도망가는 바람에 나는 그동안 여비가 없어서 아끼던 금팔찌를 팔아야만 했잖아!”

추연은 재빨리 엎드려 빌었다.

“잘못했어요, 아가씨. 그, 그때는 너무도 경황이 없어서 말씀을 듣고도 실천하지 못했던 거예요.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용서? 네가 감히 용서를 바라는 것이냐?”

사태가 중소구와 부진한에서 황룡미미와 추연으로 넘어가는 가운데 또다시 도연이 나서려 하자 그에게 경쟁심을 가지고 있었던 동천은 한 발 앞서 끼어들었다.

“잠깐!”

황룡미미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지요? 이건 엄연히 주종간의 일이에요. 동 공자가 참견할 일이 아니라고 보는데요?”

‘으잉? 그, 그런가?’

동천은 아차 했다. 도연을 의식해 대책 없이 끼어들긴 했는데 황룡미미의 말을 듣고 보니 나설 자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심하게 매질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꿀밤 한 대와 분노에 찬 질책뿐이었는지라 더더욱 그랬다. 동천으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에…, 그러니까 설라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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