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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324화


제갈세가를 떠나온 지 나흘째 되던 날, 도연은 슬슬 그럴싸한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주위를 돌아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사전 지식도 없이 막상 그러한 곳을 찾으려다 보니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생각 없이 따라다니고 있는 중소구로서는 힘들 일이 전혀 없었지만 말이다.

“도 소형제. 잘 가고는 있는 것 같은데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가? 알고 간다면 무림 계의 마당발이라 불리는 본 대인께서 지름길을 알려주겠네.”

그간 마음이 가는 대로 걸어왔던 도연에게 최종 목적지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는 때늦은 감이 있는 중소구의 질문에 차분히 대꾸해주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이게 거의 다 왔으니까요.”

중소구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으응? 벌써? 자네 큰 주인의 거처가 이렇게나 가까웠단 말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런 먼 곳에서도 따로 연락을 취하는 방법이 있을 따름이죠.”

도연의 대답에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던 중소구가 말했다.

“거 뭐시기냐. 암호나 표식이라든가, 전서구 따위를 말하는 건가?”

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각 지역마다 정해진 곳에 서찰을 보관하면 절로 큰 주인님께 연락이 취해지도록 되어있습니다.”

중소구는 이해를 하면서도 내심 도연이 속한 곳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작은 무가의 소속으로 강호를 동경해 뛰쳐나온 아이들인 줄 알았는데, 오늘에야 듣고 보니 범상치가 않았던 것이다. 도연이 말한 각 지역이 어디까지 한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몇몇 지역에 연락처를 두고 있을 정도라면 한 지역의 패자라는 소리와 다름이 없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아무리 광객 중소구라 하여도 은근히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 못 배운 놈을 무던히도 괴롭혔는데 나중에 귀찮아지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구나.’

그는 나중에 돌아가면 조금 신경 써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막상 가서는 어떨지 몰라도 말이다.

‘응?’

이런저런 생각에 골몰을 싸매던 중소구는 갑자기 어깨를 움찔거렸다. 누군가 따라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무림에서 굴러먹던 자답게 성급한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다만 도연에게 전음으로 상황을 알려주고 평상시처럼 행동하라 일러주었을 따름이었다. 그 후 그는 짐짓 배고픈 척 말했다.

“도 소형제. 슬슬 배가 고프지 않은가?”

도연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 답했다.

“말씀을 듣고 보니, 저도 시장기가 느껴집니다.”

“하하, 그거 다행이군! 허면, 골라 찾을 것도 없이 저기 보이는 객점에서 간단히 요기나 때우고 가세.”

그들이 작은 객점에 들어가 식사를 시키자, 잠시의 간격을 두고 한 사내가 조용히 안으로 들어왔다. 도연과 중소구는 감으로 그라는 것을 눈치챘지만 시선을 끊고 간간이 대화를 주고받으며 먹는 것에만 열중했다. 워낙 먹는 속도가 빨랐던 중소구는 포만감을 느낀 듯 배를 두들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아, 잘 먹었다. 먼저 계산하고 나가 있을 터이니 천천히 먹고 나오게.”

아직 채 절반도 못 먹었던 도연은 중소구의 식성에 거듭 감탄하면서도 대답해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멀리 가시면 곤란합니다.”

“그야 이를 말인가.”

중소구가 계산을 하러 가는데 우연인지 몰라도 그가 가는 길목에 예의 그 사내가 간소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사내는 누군가 지나치려 하자 본능적으로 힐끗 쳐다봤을 뿐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그러나 사내가 긴장하고 있음을 중소구는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이놈이 맞긴 맞는 것 같은데 어떠한 목적으로 우리를 쫓는 것일까?’

중소구의 뇌리에 그런 생각이 이어지는 동안 낌새를 차린 사내가 나가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런 그를 중소구가 내보내줄 리 만무했다. 중소구는 날렵한 몸매에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청년에게 말을 걸었다.

“이보시게. 혹시, 나에게 볼일이 있는가?”

중소구는 자신을 먼저 물었다. 왜냐하면 예전에 원수진 인간들이 한둘이 아니었기에 그들의 자식 놈들이나 사문의 형제들 중 복수를 위해 찾아온 것이 아닐까 해서 물어봤던 것이다. 어쨌든, 질문을 받은 청년에게서 대답이 들려왔다.

“예? 그 무슨 말씀이신지…….”

청년은 보통 사람들처럼 당황한 듯 대답했다. 그러나 이미 의심을 굳히고 있는 중소구에겐 소용이 없었다. 중소구는 상대의 눈을 직시하며 눈매를 가늘게 모았다.

“그런가? 그럼, 저기 저 소년에게 볼일이 있나 보지?”

거듭되는 중소구의 질문에 안정을 되찾은 청년이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갑자기 시비십니까. 저는 아무에게도 볼일이 없으니 이만 가도 되겠는지요.”

“안돼.”

그러자 돌아서려던 청년이 주춤했다.

“정말 이상한 분이시…, 엇?”

예고도 없이 중소구의 주먹이 날아오자 청년은 깜짝 놀라 상체를 뒤로 젖혔다. 아슬아슬하게 정권을 피한 청년은 신속히 뒷걸음질을 쳐 수비 태세에 들어갔다. 그러자 여유 있게 지켜보고만 있던 중소구가 호탕하게 웃으며 달려들었다.

“으하하! 처음의 한 수는 장난이었다!”

매섭게 솟구쳐 다섯 번의 발길질을 한 중소구는 상대가 이번 것도 잘 피해내자 착지하는 즉시, 승선퇴(承宣腿)라는 각법을 시전 했다.

“어디, 이것도 막아 봐라!”

정신없이 방어만 하던 청년은 턱주가리에 서늘한 한기가 몰아치는 것을 감지하곤 급히 고개를 비틀었다.

‘티익!’

솟구치던 중소구의 신발 끝이 청년의 턱 끝을 종이 한 장 차이로 스치고 지나갔다. 남들이 보기엔 아쉽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으나 청년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충격이었다.

“크윽! 머, 멈추시오!”

“어림도 없지!”

중소구가 멈출 생각을 않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청년은 다급히 도연을 불러댔다.

“도연, 멈추게 해라!”

그러자 도연이 놀라는 사이, 중소구가 알아서 다음 공격을 멈추었다. 약간 거리를 둔 그는 도연을 향해 물었다.

“도 소형제, 이자가 자네의 이름을 부르는군. 어떻게 된 건가?”

그건 도연이 묻고 싶은 말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중소구의 곁으로 다가간 뒤 입을 열었다.

“어떻게 제 이름을 아십니까.”

얼얼한 턱을 쓰다듬던 청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품속에서 ‘역마(逆魔)’라고 쓰여진 작은 철패를 꺼내 보였다. 청년은 도연의 얼굴에 모르겠다는 기색이 역력하자 한숨을 내쉰 뒤 철패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약(藥)’이라는 글씨가 쓰여져 있었다.

“앗, 그것은?”

그제야 도연이 눈치챈 듯했다. 그 와중에 계산을 마친 청년은 차분하게 말했다.

“따라오너라.”

도연은 밖으로 걸어 나가는 청년을 침중한 안색으로 바라보다, 결심을 한 듯 중소구에게 양해를 구했다.

“중 대인님.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오니 여기서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중소구가 괜찮겠냐는 식으로 물었다.

“아무 문제도 없는 것인가?”

도연은 일부러 웃어 보였다.

“하하, 문제라니요. 제가 속한 곳에서 나오신 분인데.”

“아? 그랬었군. 그래, 그렇다면 별문제야 없겠지. 다녀오게.”

고개를 끄덕인 도연은 청년이 기다리는 곳으로 걸어갔다. 청년은 중소구가 마음에 걸리는지 조금 더 자리를 옮긴 뒤에야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전주님 휘하 역마대의 대원이다. 직책은 사조 조장을 맡고 있다.”

사조 조장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 도연은 긴장을 머금고 대답했다.

“다른 분들은 어디에 계신지요.”

“전주님의 명으로 대주님과 부대주님. 그리고 나를 포함해 총 3인이 파견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두 분들은 멀리서나마 소전주님을 지켜보고 계시다.”

도연이 차분하게 말했다.

“궁금하시겠지요?”

굳어있던 조장의 안색이 미약하게나마 풀려졌다.

“잘 아는구나.”

상대의 신분을 깨닫게 된 순간 도연은 이미 ‘사실대로 말해주리라.’하고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안심할 사람이 약왕전에서 한둘이 아니기에 더욱 그러했다.

“실은, 주군께서 떠나시던 날 ‘어느 날 깨닫기를 이 몸은 너무도 나태해져 있구나. 이렇게 약왕전에 머물고 있다간 풍족함에 물들어 내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1년간 세상의 거친 파도를 몸으로 부딪혀 보련다.’라고 말씀하시며 제게 동행을 권하셨습니다. 당연히 저는 말렸지만 혼자 가실 태세여서 ‘며칠 나가셨다가 마음을 돌리시겠지.’하는 마음에 그분의 곁을 모신 것인데, 어쩌다 보니 이제까지 온 것입니다.”

동천의 더러운 성질을 익히 알고 있었던 조장은 도연을 이해하는 눈치였다. 그래서 그는 분위기를 이끌어 차분한 질문을 이어나갔다.

“흐음, 소전주님께서 전주님께 기별도 없이 떠나신 것은, 전주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을 것 같아 그러셨다는 말이구나.”

“일맥상통합니다.”

그제야 의문점을 해결(?)한 조장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물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묻고 돌아가마. 너는 왜 따로 나온 것이며 소전주님께서는 어째서 제갈세가에 머물러 계시고 있는 것이냐.”

도연은 전자의 물음이 자칫 복잡해질 수도 있는 문제기에 그것은 적당히 둘러대기로 하고, 후자는 있는 그대로 말해주기로 했다.

“제가 따로 나온 이유는 지금의 일행 분과 일주일 동안 바람 좀 쐬다 오라는 명을 받았기에 그렇게 한 것이고, 주군께서 제갈세가에 머물게 된 이유는 우연히 고문서(古文書)를 구입하셨는데 제갈세가에 고 문자 해석에 능하신 분이 머물고 계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셨던 겁니다.”

마지막이라던 조장이 다시 물었다.

“어째서 저 미친 자와 만나게 되었느냐.”

이 질문 또한 복잡한 측에 속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니 주군을 욕되게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라. 도연의 성격에 ‘중 대인이 동행한 이유는 주군의 거친 입버릇과 요상한 웃음을 고치기 위해서였습니다.’라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는 곤혹스러워하며 대답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너무도 길어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기가 곤란합니다. 다만, 오다가다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인데 그 정도만 아셔도 무방하다는 겁니다.”

도연이 뭔가 숨기는 듯 보였지만 조장은 믿어주었다. 평소의 강직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좋다. 나는 이만 돌아갈 터이니 너는 맡은 바를 끝마치거라. 그리고 나중에 틈을 보아 제갈세가에서 조금 떨어진 보은루(寶銀樓)로 찾아오너라. 대로를 따라 걷다 보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3층 5호실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알겠습니다.”

도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볼일이 없어진 조장은 습관적으로 주위를 살펴보다 이내 행인들 사이로 유유히 사라졌다. 도연은 중소구에게 되돌아갔다.

“오오, 도 소형제. 잘 끝마치고 왔는가? 해코지 같은 건 없었고?”

도연은 웃음이 일었지만 차분하게 대답해주었다.

“물론, 잘 끝마쳤고 해코지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그것 참 다행이네. 헌데, 아까 그가 자네가 속한 곳의 인물이라면 이 부근이 바로 서찰을 전할 수 있다는 그곳이었단 말인가?”

틀림없는 중소구의 오해였다. 허나, 도연으로서는 아주 잘된 일이었다. 그래서 도연은 참았던 웃음을 터트리며 그렇다고 말해주었다. 중소구는 자신의 추리가 맞았다고 생각했는지 좋아라 껄껄거렸고, 할 일을 마치게 된 그들은 다시 제갈세가를 향해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면, 바로 조장과 도연과의 마지막 대화 부분이었다. 그때 조장은 제갈세가를 거론하기 이전에 황룡세가에 머물게 된 경우부터 물어봤어야 했는데, 그것을 간과했던 것이다. 그렇게만 되었다면 분명 ‘천마도해’가 거론되었을 것이고, 그 이야기는 역천을 거쳐 부교주인 사비혼에게로 넘어가게 되었을 것이지만, 아쉽게도 조장은 현재의 일에만 관심을 가졌고 황룡세가라는 발자취는 가볍게만 생각한 것이었다.

이 일은 땅을 치고 후회할 부분이었으며, 그 여파는 향후 암흑마교가 두 파로 갈라지는데 크나큰 힘을 실어주게 되지만 어쨌든 그것은 미래의 일. 그러나 그리 멀지만 않은 미래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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