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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337화


휘이이-잉. 부드럽긴 하나 차가움이 섞인 가을바람이었다.

“이제 여름도 다 가는가.”

노인의 머리칼은 흩날리는 가운데 햇살에 반사되어 아름다운 은백색을 자랑했다. 그런 노인의 시선이 문득 푸른 숲을 응시했다.

“그래, 돌이켜보면 긴 시간이었어.”

노인은 옛 생각에 물들어 주위를 천천히 걷다 방안으로 들어갔다. 차분한 마음가짐으로 차를 끓여 마신 노인은 서탁에 앉아 서적을 들췄다. 그러나 마음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정신은 고요했지만 어찌된 일인지 내용들이 머리에 들어차지 않았다.

“이런이런…, 이런 상태라면 읽으나마나겠군.”

고개를 절레절레 내두르며 책을 덮었다. 대신 먹과 화선지를 준비해 대나무를 그리고자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곧은 마디를 하나하나 정성스레 그려가던 노인은 자신의 작품이 마음에 안 드는지 냉큼 구겨버렸다. 다시 그렸다가 폐기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무의미한 짓이라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어질러진 방안을 대충 정리하고 점심을 준비한 노인은 입안이 깔깔함을 느끼면서도 몸을 생각해 거르거나하진 않았다. 늙은 나이에 식사까지 소홀히 하면 전적으로 자신만 손해이기 때문이다. 노인은 상을 치우며 중얼거렸다.

“물만 맛있구나.”

부엌에서 나와 가을의 오후를 감상하던 노인은 식후운동 겸 한 곳을 정해놓고 왔다갔다를 반복했다. 땀이 솟아오르고 전신에 따스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힘껏 기지개를 켠 노인은 어느 정도 가뿐해진 몸을 이끌고 우물가를 찾았다. 물을 퍼 올려 세수를 하고 난 노인은 대야에 비춰진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대야 속의 얼굴은 눈에 보이지 않는 파장에 의해 이지러져 보였다.

“거울로 보았다면 나이만을 따졌겠으나, 이놈으로 보니 세상 또한 이러할 것이라는 생각이 미치는구나. 그러한 의미에서 한 폭의 수중도(水中圖)라 한들 그 누가 욕하리요.”

쪼그리고 앉아 한참동안 대야 속을 바라보던 노인은 다리가 저리는 지 슬그머니 일어났다. 방안으로 들어가려던 노인은 집 주변에 잡초가 무성하게 자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의 고민 끝에 낫을 들었다.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으니 내친김에 해야겠군.”

이리저리 집 주위를 돌며 잡초들을 제거한 노인은 허리가 뻐근해지자 방안으로 들어가 잠시 휴식을 취했다. 반 시진이상을 노동에 투자했으니 그 나이에 힘들만도 하리라.

“이럴 때 무공을 익혔다면 고생할 필요가 없다던데 젊을 때 한 수 익혀둘 것을 괜시리 후회가 되는군.”

노인은 잠깐 쉰다는 것이 그만 잠이 들고야말았다. 해질 무렵에 깨어난 노인은 하품을 하고 난 뒤, 밖으로 나와 타는 듯한 노을하늘을 고요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뒷짐을 지고 한동안 전방을 응시하던 노인은 기어코 한소리 했다.

“동철, 내 이놈의 자식을…….”

다음날에야 한림서원을 찾아온 동천은 이마 한구석에 핏대를 세우고, 일그러진 얼굴로 뱁새 같은 두 눈을 치켜 뜬 한 노사의 꾸중을 듣게되었다.

“이놈! 방해되지 않게끔 보내라고 했더니, 왜 이제서야 온 것이냐!”

동천은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 그러니까 말이 좀 길어져서요.”

“네놈은 사람을 돌려보내는데 하루씩이나 걸리더냐!”

“죄송합니다. 처음엔 무슨 일로 오셨냐고 물어보기만 하려했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시간가는 줄 몰랐고, 그분 소저께서 제가 머무는 곳에 바래다 주신다기에 무심코 승낙하여 이곳으로 돌아오는 것을 그만…….”

한 노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물었다.

“적어도 생각이 있는 아이라면 누구를 시켰더라도 사람을 보내어 어찌된 일인지 설명을 해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너는 그것조차도 안 했다. 본 늙은이가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보거라. 만일 그렇지 않을 시엔 다시는 너를 대하지 않을 것이다.”

덜컥 겁이 난 동천은 울먹이는 표정으로 엎드려 빌었다.

“요, 용서해주십시오. 제가 너무도 멍청하여 오늘아침에서야 제 잘못을 깨닫게되었습니다. 흑흑, 다음부터는 절대 이런 일이 없을 것이니 이번 한번만…, 흑흑흑!”

한 노사는 이 말을 믿어야할지 말아야할지 난감한 표정이었다.

‘끄응, 몇 개월 전부터 갑자기 고분고분해져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날이 가면 갈수록 순해져 가는 것 같구나. 일부러 이러는 것 같진 않은데 여자에게 홀렸다고 이렇게까지 까먹고있었다는 것은 좀.’

다소 신경질적으로 턱수염을 잡아뜯던 한 노사는 결국 눈감아주기로 했다.

“그만하면 충분히 반성하는 것 같으니 이번만은 용서해주기로 하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노사님! 흐흐흑!”

한 노사는 감격한 듯 눈물을 흘리고있는 동천의 어깨를 살며시 집었다.

“그런데 말이다.”

“흑흑, 말씀하십시오.”

한 노사가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네 뒤쪽에서 서성이는 저 사내놈들은 또 어찌된 연유냐.”

“예?”

서너 명의 소년들은 들켰다는 것을 깨닫고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갔다. 동천이 돌아보았을 때는 모두 숨어버린 후였다.

“저, 저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또한 무슨 이유로 서성이는 것인지 물어보러 가지도 않을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한 노사는 피식 웃었다.

“걱정 말아라. 너를 탓하려고 물어본 것이 아니다.”

그리고는 직접 숲 속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되돌아온 그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몇 달 동안 개방을 안 했더니 그저 호기심에 보러온 녀석들인 모양이군. 너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듯 하니 마음놓고 수련에만 심혈을 쏟거라.”

내심 가슴을 졸이고있었던 동천은 가뿐해진 마음으로 크게 대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바로 앞에 있었던 한 노사는 귀를 틀어막았다.

“힘이 남아도는 것 같구나. 좋다, 이제 수련을 함에 앞서 명심해야할 것을 가르쳐주겠다. 그것은 치우도법을 행하고 익힘에 있어 무조건 역심무극결을 바탕으로 사용해야한다는 것이다.”

동천이 급히 물었다.

“그럼, 변형된 귀의흡수신공과 본래의 귀의흡수신공은 어떻게 하고요?”

한 노사는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얼굴엔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

“네가 묻지 않아도 다 말하려던 참이었다. 앞으로는 본 노사의 말이 다 끝나거든 그때서야 질문을 하거라.”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는지 동천의 고개가 자라목처럼 쏙 들어갔다.

“죄, 죄송합니다.”

한 노사는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와 말을 이었다.

“너의 변형된 귀의신공의 처리는…, 즉, 그 독공의 처리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니 잘 듣거라. 이제부터 너는 운기조식을 행함에 있어 독공의 존재여부를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안 된다. 그러나 아예 귀의신공을 운기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지금 네 몸 속의 내공들은 모두 귀의흡수신공이 모태이니까. 운기조식의 방법을 설명하자면 첫째, 역심무극결을 운기한다. 둘째, 귀의신공을 운용해 생성된 역심무극결을 흡수한다. 셋째, 명심할 것은 귀의신공을 운기할 때 오직 역심무극결만을 생각해야한다는 것이다. 알겠느냐.”

“예, 노사님. 그럼 순수하게 남아있는 귀의흡수신공의 처리여부는 언제 행해야합니까.”

“좋은 질문이다. 지금 너의 역심무극결은 순수한 귀의신공보다 그 세(勢)가 미약하여 따라잡을 때까지는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다. 오히려 잡혀 먹힐 가능성이 있으니까. 잡혀먹는다 함은 주화입마를 가리키는 것이니 혹여 치기 어린 생각으로 모험할 생각은 말거라.”

뜨끔한 동천은 가슴을 쓸어 내리며 재차 물었다.

“그럼 어느 정도가 적정 선입니까?”

“글세…, 반 배정도 우월할 때? 그 정도부터라면 차근차근 시도해보는 것이 좋겠지. 그러나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무리할 생각은 말거라.”

“명심하겠습니다.”

중요한 부분들의 설명을 다 끝마치자 한 노사의 얼굴이 평온해졌다. 그도 그 나름대로 긴장하고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됐다. 시작하자꾸나.”

그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듯 동천을 강하게 다루었다. 동천은 어제의 일을 의식했는지 그것을 만회하려는 생각에 더욱 열심이었다. 그러나 그게 뜻대로 되지만은 않았다.

“호흡이 흐트러지고 초식조차 엉망이다! 어찌된 일이냐!”

한 노사의 꾸지람을 듣자 동천은 창백해진 낯빛으로 힘겹게 대답했다.

“그, 그게 역심무극결로만 시전 하려니 내공이 모자라 호흡이 까빠지고 초식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가 않습니다.”

“뭐라고? 그런!”

그제야 한 노사의 꾸지람이 멈추었다. 이런 문제는 예상치 못했던 듯 그는 곤혹스런 표정으로 신음을 흘렸다.

“으으음, 내공의 모자람을 염두 하지 못했군.”

잠시 생각 후 결단을 내렸다.

“어쩔 수 없구나. 적어도 역심무극결이 반 갑자정도로 성장하지 않는 한 초식의 정교함만을 연습하도록 하자.”

하던 대로 계속하자고하면 어떻게 하나 조마조마했던 동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 하마터면 기혈이 역류해 주화입마에 걸릴 뻔했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노사님.”

그 뒤로 순수한 초식만을 사용해 연습을 계속하던 그는 날이 저물고 문정이 찾아오자 한 노사에게 인사를 마치고 한림서원을 나왔다.

“사부님, 안색이 좋으신 것을 보니 한 노사님께서 용서해주신 모양이죠?”

동천은 웃음을 머금고 대답했다.

“알면서도 물어보는 것은 무슨 심보냐. 하하, 아침에 갈 때만해도 지옥이 따로 없었는데 정작 용서를 구하고 나니 극락이 따로 없구나.”

문정은 머리를 긁적였다.

“헤헤, 전에도 말했듯 제자의 능력으로는 자세한 것까지 알 순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나저나 일이 잘 풀렸다니 이 제자도 기쁩니다.”

그 말에 동천은 따듯한 눈으로 문정을 응시했다.

“내가 용서를 받은 것은 멀리서나마 네가 걱정해준 부분도 작용했다고 본다. 제자란 것은 이래서 좋은가보구나.”

문정은 크게 감동했다.

‘그녀의 변신은 무죄라는 말이 있듯, 이분의 변신 또한 무죄다. 아아, 이분은 드디어 달라지신 거야.’

그는 앞으로 더욱 잘 모셔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사부님께 직접 자신의 마음을 전달해주고 싶었다. 입을 열려던 문정은 돌연 사부가 멈추자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안내해주는 자신이 멈추었으면 멈췄지 사부가 멈출 하등의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어? 사부님…….”

동천 또한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나에게 볼일이 있는 분들이 계신 것 같다.”

문정은 동천의 얼굴을 통해 우측 숲 속에서 살금살금 따라오고 있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급히 엉성한 방어자세를 취했다.

“거기 숨어있는 분들은 누, 누구이시오!”

네다섯의 소년들이 슬그머니 하나둘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소년들 중 가장 큰 영향력을 과시하는 공현과 강호영도 보였다. 앞서있는 자들을 헤치고 선두에 나선 공현은 짐짓 예의를 갖추었다.

“안녕하시오, 동 공자. 듣자하니 한 노사님의 밑에서 가르침을 받는다고요.”

동천은 순진하게 곧이곧대로 대답했다.

“예, 노사님께 무공수련을 받고있습니다.”

공현이 황당하듯 반문했다.

“에? 무공수련?”

이어 나머지 소년들이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큭큭, 그 힘드신 노구로 무공을 가르치신 단다.”

한 소년이 짓궂은 얼굴로 강호영에게 말했다.

“혹시, 속독법을 무공구결로 잘못 알고있는 것은 아닐까요?”

“푸하하! 말 한번 잘했다!”

그들과 따라 조용히 웃고있던 공현은 손을 들어 소란을 잠재웠다.

“양해해주시기 바라오. 여기 이 친구들이 웃은 이유는 그만큼 한 노사께서 무공과 거리가 먼 분이시라 그런 것이외다.”

이들이 왜 웃는지 이해를 못하고있었던 동천은 그제야 알겠다는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하하, 그러셨군요. 그럴 수도 있지요. 헌데, 제게 무슨 볼일로…….”

“그 전에 우리들의 소개를 해야겠군요. 저는 이곳 삼 장로님의 손자인 공현이라 하고 이쪽의 덩치큰 이 사람은 제 죽마고우 강호영이라 하외다. 오 장로님의 손자이죠. 그리고 나머지는 우리보다 한 살 어린 신송(申淞), 풍형우(風形雨), 장진(長進)이라 하오. 14세로 각각, 당주님들의 아들들입니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동천은 급히 저자세로 나갔다.

“아? 그렇게 높으신 자제 분들인 줄은 몰랐습니다. 나이도 제가 훨씬 어리고 하니 말씀을 낮추십시오.”

소년들을 서로 마주보며 득의의 웃음을 지었다. 공현은 껄끄러웠던 부분이 사라지자 당연하다는 듯 하대를 했다.

“그래, 네가 그렇게 원하고 나이도 우리가 위라는 점을 감안하여 동생처럼 대하마. 그러니 너도 우리를 형님처럼 모시거라.”

“예, 형님들.”

동천이 고분고분 하자 공현은 만족의 웃음을 지으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헌데, 소문을 듣자하니 어제 제갈연 아가씨와 단둘이 시간들 보냈다고 하더구나. 어찌된 일이냐.”

그러자 공현의 얼굴을 주시하던 문정이 나섰다.

“그것은 공자님들께서도 잘 아시면서 뭘 물어보시는 겁니까?”

흠칫한 공현은 문정을 노려보았다.

“넌 누구냐. 보아하니 철 아우의 시종 같은데 공연히 나서지 말아라.”

문정은 당당히 말했다.

“나는 이분의 제자입니다. 적어도 나설 명분은 되지요.”

“제자?”

“그렇습니다.”

또 다시 주위에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공현은 그들에 상관없이 말했다.

“그렇다면 더욱 나설 수야 없지. 우리가 방금 철 아우의 형님들이 됐으니, 우리는 네 녀석의 어르신들 뻘이 되는 것이 아니더냐.”

분위기가 험악해지려는 가운데 동천이 급히 끼여들었다.

“문정아 그만하거라. 이분 형님의 말씀이 지당하시다. 죄송합니다. 이 녀석이 아는 게 별로 없어서요.”

공현은 안색을 폈다.

“됐다, 그보다 아까 전의 질문부터 해결하도록 하자. 어찌된 소문이냐.”

그에 동천은 눈을 똥그랗게 떴다.

“아니? 그것은 방금 여기 문정이가 말해주지 않았습니까. 형님들이 더 잘 안다고.”

찔리는 게 있는지 공현의 대답에 힘이 실리지 않았다.

“그,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동천은 장난치지 말라는 듯 밝게 웃었다.

“하하, 그럴 리가요. 이 동생의 제자는 거짓말을 못합니다.”

그러자 공현이 버럭 화를 냈다.

“너는 그렇다면 지금, 이 형님이 거짓말을 하고있다는 것이냐?”

문정과 공현을 번갈아 보던 동천은 흔들림 없는 눈으로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제자가 그렇다는데 형님께서 아니라 하시면 사부 된 도리로서는 제자를 믿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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