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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341화


휘이이이잉.

1월 중순의 아침, 세찬 찬바람이 미세한 눈발을 휘날리며 이동하는 가운데 순풍에 돛단 듯 제갈세가 안으로 들이닥친 찬바람은 한림서원 근처의 공터를 지나다 웬일인지 방향을 바꿔 다른 곳으로 스쳐지나갔다. 바람이 비켜간 공터에는 두 소년이 있었는데 하나는 눈밭에 대(大)자로 누워있고, 다른 하나는 그의 옆에서 목석 마냥 조용히 시립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람이 비껴 가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은 이미 짐작하고 있겠지만 차가움에 아랑곳없이 대자로 누워있는 동천이었다.

“…….”

하늘을 응시하며 말없이 누워있던 동천은 저 멀리 보이는 산허리 중턱에서 아침해가 따사로이 떠오르자 조용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태양을 마주보며 걸어가는 그의 걸음걸음에 따라 뽀드득거리는 눈 밟는 소리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뜸한 인적으로 인해 그 동안 차곡차곡 쌓여있던 눈들은 동천의 무릎 근처까지 파고들어 미약한 저항을 보여주었다. 그에 아랑곳 않고 십여 보를 나아간 그는 하얀 입김을 뿜어대며 잠시 전방을 주시했다. 찰나였지만 그답지 않게 그리움에 물든 얼굴을 보였다. 그는 양손을 입가로 모아 소리쳤다.

“건강하십니이까아아아!”

시원하게 소리친 동천은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도연에게 근엄한 자세로서 말해주었다.

“사부님께 멀리서나마 문안인사를 드리는 것이다. 너도 해보겠느냐?”

그에 도연은 ‘전주님께 문안인사를 드리려면 반대쪽으로 해야합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그렇게 말해봤자 무슨 어거지로 끝을 맺을지 몰랐기에 그냥 그러려니 넘어갔다.

“주군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는 괜찮습니다.”

“그으래?”

동천의 얼굴에 다소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어렸지만 곧 표정을 풀고 찬 공기를 세차게 들이마셨다.

“흐읍, 푸아!”

그가 들이마시고 내쉬는 행동을 반복하는 가운데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고싶지 않았던 도연은 주군을 잘 구슬렸다.

“이렇게 찬 곳에서 오래 계시면 몸에 해롭습니다. 한 노사님께서 기다리고 계실 것이 분명하니 어서 가시지요.”

동천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 몸은 추위를 타지 않는다. 왜 인줄 아느냐? 바로 겨울에 태어났기 때문이지. 고로, 겨울은 오히려 따듯할 따름이다.”

그게 아니라, 내공이 뛰어나 그다지 추위를 못 느끼는 것이었다.

“그럼, 언제까지 여기에 계실는지요.”

동천은 나직이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너는 인내심이 부족하다. 가끔은 여유를 가지고 주위를 둘러보는 것도 좋거늘, 너는 어찌 시간에 쫓기는 듯 하느냐.”

도연은 그도 그런 듯하여 순순히 자신의 모자람을 인정했다.

“그 점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편히 감상하시지요.”

“으음, 그래.”

여유를 가지고 주위를 거닐며 숨쉬기 운동을 계속하던 동천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게 그거이자 서서히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폼을 잡아도 그놈의 천성은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닌가보다.

여하튼, 먼저 돌아가자고 하기 뭐했던 그는 자연스레 도연 쪽으로 신형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이렇듯 하얀 눈으로 일색인 세상을 보니 답설무흔(踏雪無痕)이라는 것이 문득 이 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구나. 너도 들어는 봤겠지?”

“물론입니다. 말 그대로 눈을 밟아도 흔적이 남지 않는다는 의미로 일컬어지는 것으로서 상승의 고수들만이 펼칠 수 있는 경공이 아닙니까.”

흡족한 듯 동천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정확하다. 그렇다면 너는 이 몸께서 그러한 말씀을 꺼낸 의도를 알겠느냐?”

도연은 잠시 생각하는 척 하다 대답했다.

“제가 알고있나 모르고있나, 그것을 알아보시기 위해 꺼내신 말씀이 아닌지요.”

동천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쓸어 올렸다.

“후후, 내 너를 너무 과대평가 했나보구나. 그것이 아니라, 바로 그 답설무흔이라는 것을 이 몸께서 펼쳐 보이겠다는 것이었다.”

“예?”

얼마나 황당했으면 침착한 도연이 다 놀라겠는가. 그도 그럴 것이 답설무흔이 어디 이웃집 똥개의 이름이던가? 한 세력의 수뇌부들조차 감히 시전하기가 어려운 것이 바로 답설무흔이라는 것인데, 이제 11살인 어린놈이 아무리 잘나봤자 어찌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도연은 괜히 무리하다 내상이라도 입을까싶어 재빨리 주군을 말렸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어떠한 것인지는 다 알고 있습니다.”

동천은 도연의 충정도 모른 채(알려고 생각도 안 한다) 손을 내저은 뒤, 거닐지 않은 깨끗한 부분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도연이 제지할 틈도 없이 말이다. 이장에서 조금 모자란 정도를 도약한 동천은 무릎까지 파고든 양발을 차례차례 꺼내며 말했다.

“잘 보았느냐? 중간에 밟고 지나간 흔적이 없는 경공의 극치! 이것이 바로 답설무흔이라는 것이다.”

“…….”

눈살을 있는 힘껏 찌푸린 도연은 한참을 고민하는 듯하다 입을 열었다.

“훌륭하십니다.”

“히히, 이 정도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그런 의미에서 한번 더 보여줄까?”

도연은 재빨리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래? 흐음, 하기는 이런 신기(神奇)를 자주 보여주면 쓸데없이 보는 눈만 높아질 테니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하마.”

그제야 내심 안도를 한 도연은 뒤늦게 지끈거리는 머리를 가다듬었다.

“이제 한 노사님께 가셔야지요.”

“쳇, 그래야 하겠지.”

동천은 꺼리는 듯 하면서도 도망갈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있는지 한껏 찌푸린 얼굴로 도연의 뒤를 따랐다. 이름만 서원인 다 쓰러져 가는 모옥에 당도한 동천은 한 노사가 돌아가려는 도연을 붙잡자 의아해하는 얼굴로 지켜보았다. 그때 도연의 입이 열렸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는지요.”

먼저 불러 세웠으니 동천이 아니고서는 쓸데없이 부른 것이 아니리라. 그것을 증명하듯 한 노사의 고개가 미약하게나마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렇다. 내 어제 깜빡하고 할말을 잊었는데 오늘부터 동철이 목도를 사용할 것이니라. 헌데, 네가 알다시피 이곳에는 쓸만한 것이 없다. 그러하니 네가 좀 다녀와야 할성싶구나.”

동천을 시키고 싶어도 그간에 혼자서는 다녀올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마다할 도연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냉큼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동천이 앞으로 나섰다.

“야, 잠깐만 기다려봐.”

한 노사는 대번에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왜 또 그러는 것이냐.”

동천은 한 노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다름이 아니라, 목도를 사용해도 괜찮을지 그것이 걱정이 되어서요.”

“응? 자세히 말해보거라.”

한 노사가 연유를 묻자 어떠한 이유에서든 절로 기분이 좋아진 동천은 은근히 그것도 모르냐는 식으로 말했다.

“그러니까요. 제 도법이 너무도 강맹하여 보잘것없는 목도가 감히 그 힘을 견딜 수 있겠냐는 뜻이에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한 노사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뒤 대꾸했다.

“그렇군. 그것을 염두 해두지 않았어. 자칫하면 큰 사고를 당할 뻔했구나. 네가 간만에 깊이 있는 생각을 했어.”

동천은 기분이 좋아 머리를 긁적였다.

“헤헤, 뭘요. 이 정도쯤이…….”

그러다 중간에 기분이 상해버렸다. 이유는 ‘간만에’ 라는 부분 때문이었다.

‘뭐야. 그럼, 평소에는 생각 없이 사는 것처럼 보였다는 뜻이야? 저런 씨이…!’

한 노사는 동천의 일그러짐이 수상했는지 가느다란 눈을 하고 쳐다보았다. 그것을 감지한 동천은 언제 그랬냐는 듯 환히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제게 혈천도라고 아주 아주우―! 훌륭한 도가 있거든요?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어떨까요?”

한 노사는 잠시 의외인 듯 바라보다 이내 허락했다. 그는 도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가서 그것을 가져오너라.”

동천은 땡땡이도 칠 겸해서 제의한 것인데 한 노사가 끝까지 자신을 제외시키자 답답한 마음에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생긴 건 꼭 사기꾼 등쳐먹게 생긴 노친네가 더럽게도 눈치가 없네.’

그는 생각을 접고 재빨리 말했다.

“그것은 살상용이어서 저만 알고있는 곳에다가 감추어두었습니다. 그런고로, 제가 같이 가야만 할겁니다.”

한 노사는 살상용 무기의 위험성을 인식하여 거기까지 배려한(?) 동천이 참으로 기특하였으나 그는 칭찬을 많이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그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렇다면 같이 다녀오도록 하거라. 도연과 같이 가는 것이라, 예전처럼 다음날에 되돌아오는 일은 없을 테니까.”

동천은 왜 또 예전의 그 거지같은 일들을 들먹이나 했다. 가끔 스쳐지나가듯 그때의 일이 생각나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의 결론은 ‘기분 잡쳐 왕 잡쳐’ 였다. 그런데 이렇듯 대놓고 듣게되자 그것에 더해 ‘기분 잡쳐 왕 잡쳐 그것에 잡쳐 또 잡쳐’ 였다. 부글거리는 속마음과는 다르게 깍듯한 인사를 마치고 한림서원을 나선 동천은 이를 빠드득 갈았다.

“에이, 재수 없어! 기분 좋게 사부님께 문안인사를 드린 이 마당에 똥물에 튀겨 죽일 늙은이라거나 개 같은 꼬부랑 깽깽이라거나 주둥이를 족칠 씨부럴 것 등등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욕 할거 다해놓고 이제와 안 그런 척 시치미를 뗀 동천은 화가 나는 가운데서도 강호영을 직살 나게 패주었던 장면이 떠오르자 금새 기분이 좋아졌다.

“킥킥, 그 자식 같은 것들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데 말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동천은 순순히 답해주었다.

“왜 있잖아. 감히 이 몸께 깐죽거리다 다리병신이 될 뻔했던 놈.”

바로 생각났는지 도연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지금에와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그것은 너무도 무모한 행동이셨습니다. 상대가 다른 이도 아니고 장로의 손자였는데 어찌 손속에 사정을 봐주시지 않았는지요.”

동천은 힐긋 쳐다보며 말했다.

“안 봐주긴, 그 정도면 많이 봐준 거지. 그리고 다 생각이 있어서 본때를 보여준 거야. 히히, 이 몸의 공로를 생각하여 건드리지 못할 거라는 것을 다 염두 해두고 일을 벌였거든.”

“도해를 가지고 말씀하시나본데, 아무리 그렇다 하여도 정말로 다리 병신이 되었다면 주군께서도 무사하시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제는 그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자제해 주십시오.”

“쳇, 그게 어디 이 몸만의 잘못이냐? 주제도 모르고 덤빈 놈 잘못이 더 크지. 그리고… 아아, 알았어. 다 알았으니까 그런 재미없는 말은 그만 하자.”

동천의 얼굴에는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도연도 조용히 입을 다물고 그를 안내했다. 잠시 후 처소에 도착한 동천은 한 노사에게 말한 것과는 달리 정면의 벽에 바로 걸려있는 혈천도를 잡아들었다. 그것을 살짝 빼내든 그는 눈부시게 빛나는 날을 바라보며 나직이 노래를 불렀다.

“반짝반짝 혈천도 아름답게 빛나네~. 동쪽하늘에서도, 서쪽하늘에서도~, 반짝반짝 혈천도 아름답게 빛나네.”

동천은 그 뒤에 뭐라고 더 불렀지만 도연은 못 들은 척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 바람에 재미가 없어진 동천은 ‘이날의 위해 밤마다 손질해놓은 네가 이제야 빛을 보게 되었구나.’ 라는 말과 함께 방을 나섰다. 되도록 천천히 돌아가고 싶었던 그는 잠깐 주춤한 뒤 일부러 문정을 찾았다.

“그런데 이 몸의 제자는 어찌하여 안 보이는 것이냐?”

도연이 대답했다.

“제 방에서 운기에 열중하고있나 봅니다.”

한달 전에야 기초적인 공부를 모두 끝마친 문정은 동천의 명에 따라 역심무극결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내공이 생성되기 전까지 운기조식에만 열중하라는 뜻에서 도연이 동천을 바래다주고 있는 것이었다. 때마침 운기조식을 끝마친 문정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사부님, 찾으셨는지요.”

문정을 바라본 동천과 도연은 흠칫했다. 동천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가와 물었다.

“너 안색이 왜 그따위냐? 혹시, 눈 오면 하얘지고 비오면 흐려지는 그런 체질이냐?”

문정은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며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 안색이 이상한가요?”

그의 손목을 잡아당겨 진맥을 한 동천은 고개를 돌려 도연에게 말했다.

“너도 한번 진찰해봐.”

아마도 자신이 진맥한 것과 같은 결과가 나오는지 확인해 보려는 듯싶었다. 문정의 안색이 너무도 창백해 내심 걱정이 일었던 도연은 주저 않고 주군의 말을 따랐다. 그는 곧이어 깜짝 놀랬다.

‘기(氣)가 이리도 불균형하다니. 이것은 주화입마의 단계가 아닌가. 하지만…….’

그의 표정에 동천이 말을 건넸다.

“너도 이상하지? 익힌 것도 없는 자식이 벌써부터 주화입마 증상이 일어나서.”

동천의 말처럼 도연이 내심 고개를 갸웃거린 것이 그 때문이었다. 대체적으로 주화입마가 일어나려면 최소한 10여 년의 내공이 존재하고 있어야하거나 심법 자체에 결함이 있어야만했기 때문이다. 헌데, 내공 쪽을 생각하자니 고작 한 달간의 운기조식이기에 가능성이 희박했고 심법 쪽으로 생각하자니 주군인 동천이 무리 없이 익히고 있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나마 가장 큰 가능성은 문정이 심법의 구결을 잘못 알고 있거나, 정확히 알고 있다해도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생긴 결과라는 것뿐이었다.

마침, 동천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있었는지 구석으로 문정을 데리고 가서 구결을 외우고 구결이 의도하는 바를 설명해보라고 명했다. 이어 그는 자신이 가르쳐준 것과 한치의 틀림도 없자 아리송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자야, 방금 나오기 전까지 운기조식을 했던 거겠지?”

문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흐름을 느끼는 것으로만 운기를 마치고 다시 시작하려는 찰나였는데 사부님이 오셔서 나와본 것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대답을 듣고 난 동천은 이어 당부했다.

“너 말야, 본 사부가 돌아올 때까지 운기조식하지 말고 기다리고있어. 알겠냐?”

문정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부님.”

대답을 하는 그의 안색은 어느새 원래대로 돌아가 있었다. 혹시나 하여 다시 진맥을 시도한 동천은 아무런 이상이 없자 또다시 놀라했다. 그는 이상한 놈 쳐다보듯 그러한 얼굴로 문정을 쳐다보다 다시 한번 다짐을 시키고 한림서원으로 신형을 틀었다.

“거참, 그새 원래대로 돌아오다니… 뭐 저런 놈이 다 있지?”

고민하는 얼굴로 주군을 안내하던 도연은 고개를 돌려 물어보았다.

“두 번째 진맥 시에는 원래대로 돌아와 있던 것 같은데 맞습니까.”

“맞아. 주화입마의 초기증상이라면 운기를 마쳤을 시에 기의 불균형이 오랫동안 지속되다 사라져야 하는데 그 녀석은 너무도 금방 사라졌거든.”

도연이 걱정스레 말했다.

“아무래도 한 노사님께 말씀을 드려보는 것이…….”

동천은 듣다말고 소리쳤다.

“너 미쳤어? 그 노친네는 이 몸께서 문정을 가르치고있다는 사실을 모르고있는데, 괜히 그 사실을 말했다가 지 몰래 철경 안의 무공을 가르쳐줬다고 삐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냐? 니가 책임질래?”

도연은 지지 않고 말했다.

“그렇지만 방금 보셨다시피 문정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괜찮아. 안 죽어.”

동천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서 태평하게 대답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도연을 설득하기가 부족했다고 생각했는지 곧 부연설명을 추가했다.

“내가 자세히 말을 안 해서 니가 그러나본데 사실 그 심법은 그 늙은이도 아는 게 별로 없어. 왜냐하면 처음 그 영감에게 무공을 배울 때 이 몸께서 역심무극결은 잘 익히고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야. 그렇게 말하니까 그 할아범도 고개를 끄덕이더니 오로지 도법을 가르치는 것에 열중하더라고.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 노인네도 심법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야. 그리고 그 녀석의 문제는 저녁에 가서 자세히 살펴보고 결정을 내릴 거니까 그만 씨부렁거려. 알았어?”

“알겠습니다.”

그나마 설득력 있게 들렸는지 도연이 잠시나마 한발 물러섰다.

대답을 뒤로하고 한림서원에 당도한 도연은 동천에게 인사를 마치고 서둘러 되돌아갔다. 안에 있던 한 노사는 뽀드득거리며 눈 밟는 소리가 나자 문을 열고 대뜸 마당청소부터 시켰다. 동천은 이 나이(?)에 무슨 청소냐고 개겨 보다 한림서원으로 통하는 길목 끝까지 눈을 치우라는 보복적인 명령을 받아야만했다. 그러다 길을 잃고 못 돌아오면 어찌 하냐는 항변도 해봤지만, 길만 제대로 치우면 그 길을 따라 돌아오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대답에 하는 수 없이 눈을 치우는 신세가 되었다.

‘개 같은 늙은이! 빈둥거리고 할 일도 안 하면서 얼마나 오래 사나 두고보자!’

그렇게 말하면 동천도 오래 살 운명이 아닌 게 되어버린다. 알고서 그런 욕을 퍼부은 것인지 원……. 여하튼 마당청소를 끝마치고 한 시진 가까이 길목을 쓸어낸 그는 약간 얼어버린 양 볼을 쓰다듬으며 되돌아왔다.

“노사님, 청소를 다했습니다.”

한 노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방이 좀 춥구나.”

아궁이에 불 좀 지피라는 뜻이었다. 이 일은 겨울이 되면서부터 동천이 하던 일이었지만 방금 전 예정에 없던 눈까지 치우고 돌아온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화가 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참았다.

“곧 불을 지피겠습니다.”

부엌에 들어가 신경질적으로 나뭇가지를 부러트리며 아궁이에 불을 지핀 그는 새삼스레 겨울이 오기 전까지가 그리웠다. 그때까지는 이런 하찮은 일들을 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잡일을 시키기 시작한 것은 겨울이 오면서부터였는데 늙을수록 찬바람을 피해야한다며 웬만한 것들은 동천에게 다 떠넘겨버렸다. 오직 한 노사가 전담하고있는 것은 뒷간에 가는 일 뿐이라면 말 다한 것이리라. 오죽했으면 동천이 그 동안 밥은 어떻게 해서 처먹고 살았나 그것이 다 궁금할까.

“씨팔, 봄이 되어 날씨가 따듯해져도 이따위 일들을 시켜만 봐라. 아주 엎어버릴 테다.”

한시도 주절거리기를 중단 않던 그는 마침내 모든 작업이 끝나자 신경질적으로 부엌을 나섰다. 그새 동천이 가져온 혈천도를 매만지고있던 한 노사는 그가 방안으로 들어오자 그것을 건네주며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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