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349화
문정을 빼놓고 동천과 단둘이 대면한 장노삼은 되도록 심각하지 않은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누고싶었다. 그러나 딱딱하게 굳어있는 그의 얼굴은 동천조차 눈치를 볼 정도였다.
“하실 말씀이 있으면…, 하세요.”
마침내 장노삼은 입을 열었다.
“천아, 이 할애비는 네가 그 철경을 지니고있어 참으로 뜻밖이었다.”
‘전 할아버지가 대번에 알아 맞춰서 뜻밖이었어요.’
동천이 속으로 대답하는 사이 장노삼이 이어 말했다.
“분명히 너는 그 무공을 익혔겠지?”
동천은 멋쩍은 듯 대답했다.
“예, 쪼오끔이요. 헤헤.”
그러자 장노삼은 기나긴 한탄을 금치 못했다.
‘아아, 악연이로다! 핏줄은 속일 수가 없다는 말인가? 하늘은 이렇게 라도 그놈과의 인연을 이어주고 싶었단 말인가? 정녕, 이렇게 라도…….’
그가 무의식중에 힘을 주자 쥐고있던 탁자의 모서리가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그것을 접한 동천은 촌놈처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참동안의 실의를 뒤로하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장노삼은 그때까지도 입을 벌리고있는 동천의 모습에 미약하나마 웃음을 되찾았다.
“천아야, 그 무슨 해괴한 얼굴 표정이더냐.”
그제야 벌린 입을 다물어버린 동천은 흥분해하며 말했다.
“후와, 얼마나 뛰어난 경지라야 그 탁자의 모서리처럼 만들 수가 있는 거예요?”
동천의 시선을 따라가고 나서야 그의 말뜻을 알아차린 장노삼은 쓴웃음을 뒤로하고 대답해주었다.
“허허, 평범한 천재인 우리 동천이라면 10년 내에는 충분히 가능할 것이란다.”
다른 이들 같았으면 희망에 부풀어했겠지만 동천은 그 반대였다.
‘십 년이라. 그런 단어도 있었나?’
그때까지 언제 기다리냐는 뜻이었다. 대충 기대된다고 얼버무린 동천은 또다시 할아버지가 말이 없자 하는 수 없이 먼저 물어봤다.
“그런데 그 치우철경에 관한 건 왜 물어보세요? 그리고 어떻게 척 보자마자 치우철경인지 아셨어요?”
장노삼은 동천의 질문을 회피했다.
“나중에…, 나중에 어떠한 일이 해결된다면 그때 가르쳐주도록 하마. 이 할애비도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란다. 우리 착한 천아는 할애비의 이런 마음을 이해해줄 수 있겠지?”
당연히 아니었지만 할아버지의 성격을 너무도 잘 알고있었던 동천은 아무리 떼를 써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그래서 그는 겉으로나마 이해해주는 척하는 드넓은 포용력을 보여주었다.
“어쩔 수 없죠. 할아버지가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거니까요.”
장노삼은 흐뭇해하며 다시 웃음을 머금었다.
“허허, 천아가 나이만 먹은 어린아이인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까 정신적으로 성숙한 부분이 더욱 큰 것 같구나.”
동천은 갖은 폼을 다잡고 쓰윽, 머릿결을 쓸어 올렸다.
“훗, 그걸 인제 아셨어요?”
“그래그래. 다 할애비가 잘못 본 탓이다. 허허허.”
가슴속에 묻어둔 이야기를 남겨두고 동천의 방을 나선 장노삼은 품속에서 연보랏빛 머리 끈을 꺼내들었다. 그 세월의 흔적으로 보아 십여 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물건이었다. 추억에 젖은 듯한 모습으로 한동안 머리 끈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그는 그것을 보물 감싸듯 소중히 갈무리한 뒤 아련한 눈빛을 들어 푸른 창공을 바라보았다.
-아버지, 이 머리 끈 어때요?
-허허, 아주 잘 어울리는구나. 마치, 우리 소하(炤霞)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아.
-아이참, 아버지도? 호호호!
주루룩, 그의 노안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눈을 감으면 딸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내심 몇 번이고 딸아이의 이름을 읊조리던 그는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벌써 12년인가…….”
동천은 치우철경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이걸 어떻게 녹이지?”
그러나 그의 대가리로는 제대로 된 생각이 떠오를 리가 없었다. 문정은 하루동안 대안을 모색해오라는 동천의 명령을 이수하지 못해 그에게 약간의 귀여움을 받았다. 도연 또한 같은 명령을 이수하지 못해 눈 째림만 받고 물러났다. 문정은 그것이 무척이나 억울했지만 항의는 곧 귀여움으로 귀결되기 때문에 잠자코 멍든 눈 마사지를 했다.
“아아, 이 몸에겐 이리도 인재가 없는가?”
이렇게 중얼거린 동천은 그나마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제갈일위를 찾아갔다. 그러나 근신중이라는 말만 듣고 쫓겨나다시피 퇴짜를 맞아야만 했다.
“이럴 수가! 저놈은 의리도 모르는 놈이로구나!”
저 혼자 기가 막혀버린 동천은 분풀이로 문정을 귀여워 해준 뒤, 마지막 보루이면서 절대로 가고싶지 않았던 한림서원으로 발길을 옮겨야만 했다. 한 노사는 그런 동천을 들여보내며 한 소리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생각 외로 빨리도 찾아왔구나.”
안 올 줄 알았던 놈이 이렇듯 빠른 시간 안에 찾아오자 그로서는 의외였던 모양이다. 동천의 마음 같아서는 온갖 기물을 뒤집어엎고 기세 좋게 돌아가고 싶었지만, 내심 이곳까지 발걸음 한 것이 아까워서라도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헤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한 노사는 차갑게 말했다.
“용건이나 말하거라.”
‘재수 없게 생긴 영감 같으니라고! 그래도 옛정이 있는데 좀 반갑게라도 맞이하면 어디가 덧나냐?’
여기에서 동천이 재수 없게 생겼다고 욕한 것은 흔히들 ‘재수 없는 놈!’ 이라고 하는 그러한 욕이 아니라, 정말로 재수 없게 생긴 한 노사의 얼굴을 욕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동천은 외가내진(外假內眞)이라는 그만을 위한 사자성어를 토대로 겉으로는 싹싹한 척을 했다.
“우와, 어떻게 그걸 아셨죠? 헤헤, 실은 만년오행한철이라고 들어보셨나 해서요.”
돌연 한 노사는 흠칫했다.
“아니? 네가 어떻게 그것에 관한 것을 아느냐!”
한 노사가 아는 듯 하자 일단은 안심이 되는 동천이었다. 그는 자신이 시간을 끌면 성질이 더러운 한 노사가 입을 다물 수도 있다는 생각 하에 재빨리 말을 꺼냈다.
“저도 어제서야 알게 되었는데요, 그게 그러니까 치우철경을 처분해서 단도라도 만들 요량으로 대장간에 맡겼다가……, 어이쿠!”
눈에서 불똥이 튀길 정도로 머리통을 얻어맞은 동천은 이 영감이 무슨 미친 짓인가 했다.
“이씨, 왜 때려요! 그러다가 회까닥 변해버리면 노사님이 책임질 거예요? 예?”
동천의 기세도 기세였지만 워낙, 안 좋은 쪽으로 생긴 한 노사의 기세 또한 만만치가 않았다. 아니, 가뿐하게 동천을 앞지를 정도였다.
“이놈, 그 귀한 것을 녹여서 고작 단도로 만들려고 했다고? 썩 꺼지거라!”
성질 낸 보람도 없이 쫄아버린 동천은 밤일하다 들킨 도둑놈처럼 허겁지겁 뛰쳐나갔다. 문정의 팔을 잡고 나는 듯 도망쳤던 그는 안전지대로 왔다고 생각했는지, 도망 왔던 길을 향해 고래고래 욕지거리를 내뱉은 후에야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을 수가 있었다.
“아이구, 열 받아! 내 꺼 가지고 내가 녹인다는데 도대체 지가 무슨 상관인 거지? 이거 생각할수록 열 받네?”
문정은 쥐 죽은 듯이 서 있다가 기회를 노려 사부의 편을 들어주었다.
“아니, 그 노사님께서 사부님의 소유를 가지고 왈가왈부하셨단 말씀이십니까?”
동천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까? 그거 미친 영감 아냐?”
문정은 속으로 동천을 비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을 미친 영감이라니. 너도 참 싹수가 노랗구나. 뭐, 처음에 봤을 때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말야.’
차마, 똑같은 놈이 될 수 없었던 문정은 약간 우회하여 찬성의 뜻을 밝혔다.
“확실히 문제가 있기는 합니다.”
문정이 자신의 편을 드는 바람에 분풀이할 곳을 잃어버린 동천은 주위의 대나무들을 쓰러트린 후에야 자신의 거처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대나무 쓰러지는 것을 지켜보았던 문정은 재빨리 편들어두길 잘 했다고 생각했다.
“아아, 어찌해야 했을까이.”
방구석에 틀어박힌 동천은 한 노사에게 대든 것을 뒤늦게 후회하고있는 중이었다. 한순간만 참았어도 희망은 있었을 텐데, 그놈의 머리를 맞는 바람에 소위 빡 돌았다는 말처럼 성질을 못이긴 것이었다.
“이제는 물어볼 인간들이 없는 말야. 아아, 세상에 이 몸처럼 불쌍하신 분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그래.”
그때 문정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사부님.”
동천은 말했다.
“너냐?”
문정은 뭔 소리인가 했다.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장난 좀 쳐보려 했던 동천은 흥이 나지 않자 손을 내저었다.
“아니 됐어. 무슨 일인데.”
문정은 사부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 철경을 녹이는 문제 말씀인데요.”
눈을 반짝인 동천은 자세를 바로 잡았다.
“오오, 그래! 뭔가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느냐?”
“예, 다름이 아니라 불로써 녹일 수 없다면 그보다 더욱 강력한 것으로 녹이는 겁니다. 바로 용암이죠.”
문정의 말이 끝나자 흥분할 줄 알았던 동천은 의외로 침착해졌다.
“흐음, 그래? 그러면 그 용암은 어떻게 구하는데?”
‘잘 구해야죠.’ 라고 말하려했던 문정은 그러다 몰매를 맞을 것 같자 그나마 나은 대책을 강구했다.
“그러니까요. 산맥을 따라 용암이 잠재되고 있는 부근부터 차근차근 굴을 파내는 겁니다. 그래서 용암을 얻고요.”
자리에서 일어난 동천은 박수를 쳐가며 문정에게 다가갔다.
“아주 훌륭하다! 그렇다면 굴은 누가 파내지?”
불안해진 문정은 사부가 다가옴에 따라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에, 그러니까 인력을 동원해서…….”
“그 인력은 누가 고용하고? 또 그 인력에 따른 자금은 누가 부담하는 건데? 엉? 누가 부담 하냐고 이 잡것아!”
이제 죽었다고 생각한 문정은 재빨리 엎드려 빌기부터 시작했다. 그간의 경험으로는 빌어야 두 대 맞을 것도 한 대를 맞았기 때문이었다.
“아이고, 사부님. 제자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제 딴에는 사부님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 그랬던 것인데…….”
한참을 빌고있던 그는 사부에게서 아무 반응이 없자 무슨 일인가 하여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문정을 지나쳐간 동천은 방문 쪽에서 장노삼이 들어오는 것을 반기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제자야, 뭐 하느냐. 차를 내오지 않고.”
“예, 냉큼 가져오겠습니다!”
살았다고 생각한 문정은 기쁘게 내달려나갔다. 탁자에 마주 앉은 장노삼은 웃고있는 듯 보이지만 동천의 얼굴에서 미세한 그늘이 떠나질 않자 근심 어린 어조로 물었다.
“어허, 우리 천아가 얼굴이 반쪽이구나. 어째서 그러하지?”
동천은 자신의 심정을 족집게처럼 집어내는 할아버지의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역시, 할아버지에겐 속일 수가 없네요. 제가 실은 오늘 아침에 철경을 녹이는 방법을 알까해서 한림서원이란 곳엘 갔거든요? 그곳에 계신 분이 생긴 건 좀 그래도 머리는 비상하신 분이거든요. 처음에는 잘 나간다 싶었는데 글쎄, 제가 그 철경을 녹이려고 한다니까 막 성질을 내시더니 저를 쫓아내시는 거예요. 아아, 그분은 녹이는 방법을 알고 계시는 눈치였는데 말예요.”
장노삼은 은근히 놀란 얼굴을 했다.
“네가 어젯밤에 그 동안 치우철경을 익히는데 있어 지대한 공헌을 하셨다던 그분이 만년오행한철을 녹이는 방법까지 알고 계시다고? 대단하구나.”
그러자 동천은 삐뚜름하게 대답했다.
“대단하면 뭐해요. 성질이 개판인데.”
장노삼은 동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허허, 네가 단단히도 화가 났나보구나.”
“너무도 단단해서 깨지지도 않을 걸요?”
빙그레 웃고 난 장노삼은 할아버지로서 동천의 고민을 조금이나마 덜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동천이가 허락만 한다면 이 할애비가 그분을 만나 뵙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
귀가 쫑끗 선 동천은 크게 환영했다.
“물론이지요! 지자(智者)는 지자를 알아본다고, 만일에 그 영감…이 아니라 그분이 할아버지의 깊고도 깊으신 내면을 못 알아보시면 이렇게 말하세요. ‘에잉, 형편없는 자로다!’ 라고 말예요. 그러면 ‘아차, 내가 뜻깊은 분을 바로 앞에 두고도 못 알아 뵈었구나!’ 라고 생각해서 재빨리 붙잡을 거라구요.”
좀 유치하긴 했지만 동천의 성격을 잘 알고있기에 장노삼은 ‘꼭, 그렇게 하마.’ 대답해주었다. 문정의 안내를 받아 한림서원에 당도한 그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한 노사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동철에게 장 형 같은 분이 계실 줄은 꿈에도 몰랐소이다.”
“허허, 다 그런 게지요. 그렇다면 노사께서는 이 장 모가 찾아온 연유를 알고 계시겠군요.”
한 노사는 다소 굳어진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그러나 그 문제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말아주셨으면 하오.”
“어째서이지요?”
“답은 간단하오. 그 철경은 고대문화의 언어에 있어서, 그리고 치우라는 인물에 있어서 역사적으로 아주 귀중한 자료이기 때문이오. 그것을 고작 단도 하나를 만드는 데에 소비해서야 쓰겠소? 본 노사는 다른 것을 다 차치하고서라도 철경을 그따위로 훼손시키려했던 그 녀석의 심보를 도저히 용서하지 못하겠소이다.”
장노삼은 한 노사의 이야기가 끝나자 조용히 입을 열었다.
“노사께서는 혹시, 피의 기억이라는 것을 믿소이까?”
한 노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피의 기억?”
“그렇소. 대대로 내려오며 결코 사라지지 않는 유전적인 형질을 말하는 것이외다.”
눈을 가늘게 뜬 한 노사는 예사롭지 않은 질문에 중얼거렸다.
“피의 기억이라…….”
중얼거리는 도중에 갑자기 흠칫한 그는 치켜든 눈으로 장노삼을 마주보았다. 장노삼은 무언의 긍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 노사는 돌연 표정을 바꾸어 피식 웃었다.
“재미있구려. 좀더 자세히 들어봐도 상관없겠소?”
“물론이요. 단, 절대로 발설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하외다.”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시오.”
한 노사의 다짐을 끝으로 그들은 한참동안의 대화를 나누었다. 그 대화가 끝나자 장노삼은 동천에게 되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