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8권 5화 – 변성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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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8권 5화 – 변성남자

변성남자

-청룡, 땅에 떨어지다

“혈표 수석조장, 뭘 꾸물거리고 있나? 본관이 자네에게 맡긴 임무는 유씨 일가의 제압이었나, 아니면 담소였나?”

대전 전체를 쩌렁쩌렁 진동시키는 목소리. 그 소리는 문밖에서 들려왔지만 바로 지척에서 울린 것처럼 또렷했다. 시전자의 내공이 그만큼 출중하다는 반증. 그 순 간 유재룡과 대치하고 있던 복면인 혈표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고개를 돌리기 조금 전까지 위풍당당하던 그 모습은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목뼈와 그 주위에 모여 있는 근육들을 이용해 고개를 돌리는 단순한 동작에 사람을 바꾸는 힘이 깃든 듯 느껴졌다. 겁을 집어먹고 있는 게 아닌가 의구심이 드는 그런 모습이었다.

입구를 막고 있던 복면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좌우로 갈라지면서 한 인물이 들어섰다.

“대, 대장님!”

혈표의 안절부절못하는 모습과 그 칭호를 들으며 유재룡은 속으로 신음을 터뜨렸다.

‘진짜 대빵의 등장인가?’

그런데…….

‘으응??’

뭔가가 이상했다.

유재룡은 두 눈을 부릅뜨고 전각 안으로 들어선 인물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상대를 보다 잘 파악하면 파악할수록 유리한 것은 싸움이나 장사나 매한가지였다.

대장이란 불린 이 사내는 다른 복면인들과는 복장에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밤이라서 잘 분간이 가지 않았고, 원래 야행인은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 놓고 표시하는 법이 없다. 그래도 이놈이 진짜 두목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자신과 노닥거렸던 놈은 조장급 정도에 불과했다. 그래도 수석조장이라고 불린 걸 보 면 이자들 중에서 이인자쯤 되는 존재인 모양인데도 이 대장이란 자와 비교하면 많은 모자람이 있었다. 기도(氣度)가 전혀 달랐다. 검은 천 조각 한 겹으로 가릴 수 없는 것이 이 세상에는 아직 많이 존재하고 있는데 기도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유재룡이 당황한 것은 강적의 등장 때문이 아니었다.

‘그, 그럴 리가…….’

저 대장 복면인,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 익숙한 기운이었다. 상당히 변질되긴 했지만 어딘지 친숙한 느낌. 수만 개의 의문 부호들이 떠 올랐다 사라진 마음의 빈터에서 의혹이 뭉게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친숙?’

친숙이라니? 이 무슨 개 같은 소리란 말인가! 상대는 자신이 피땀 흘려 쌓아놓은 기업을 파멸시키고 직원들을 몰살한 흉신악살(凶神惡殺)이었다. 그런데 친숙이 라니? 용어 선택이 잘못되어도 한참이나 잘못되었을 이 느낌에 그가 어찌 황당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 참을 수 없는 괴리감에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침이라 도 뱉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느낌은 느낌일 뿐 머릿속은 안개라도 낀 듯 흐릿해 형상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의 정체를 확인 할 수 없었다.

“한 가지만 묻겠소.”

유재룡이 말했다. 그는 어떻게든 이 감각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대답할 말은 없다.”

웅웅거리는, 듣기 귀에 거슬리는 심하게 탁한 목소리였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미미한 사실이었지만 유재룡은 그러지 않았다.

“목감기라도 걸리셨소, 아니면 원래 그런 돼지 멱 따는 소린 게요?”

처음 질문을 던졌던 의도는 무언가 특별히 궁금한 게 있어서가 아니라 혈의인의 목소리를 먼저 들어보려 질문했었던 것이다. 그러니 어떤 대답이든 그 내용은 상 관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혈의인은 그것을 간파했는지 목소리를 변조하고 있었다.

“원래 말단은 괴로운 법이지. 요즘 과도한 노동 때문에 몸이 많이 허약해졌거든. 이해하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지만 말일세.”

복면괴한이 맞받아쳤다. 역시 변성된 목소리였다. 처음 봤는데 목소리를 변조했다? 시커먼 복면까지 뒤집어쓰고 있으면서?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일부러 목소리 를 바꿨다는 것은 켕기는 구석이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그가 알아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안면이 있는 인물이란 말인가? 그런 생각이 들자 더 더욱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어차피 거리낄 것도 없었다. 그는 이제 막 나가도 되는 입장이었다. 이미 각오를 굳히고 있었다. 원래 상인은 거래할 수 있는 물건과 거래할 수 없는 물건을 잘 구분해야 하는 법. 여기까지 와서 다시 생을 구할 생각은 없었다.

“글쎄, 이해해 달라고 해서 이해해 보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전혀 이해가 안 되는구려. 혹시 우리 만난 적이 있지 않소?”

흠칫!

그것은 극도로 짧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아주 미세하게 짧은 순간이었지만 복면인의 몸이 움찔 반응하는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꼭 말로 하는 대답만

이 대답은 아니다. 오히려 말 이외의 대답이 혀만 굴리면 무책임하게 마구 튀어나오는 말보다는 훨씬 신빙성이 높았다.

“과연 우리는 만난 적이 있는 모양이오. 안 그렇소?”

“글쎄? 굳이 그걸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죽을 텐데 괜히 수고롭게 번거로울 필요가 있느냐고 복면인은 무언의 언을 하고 있었다.

“아직도 발뺌이시오? 그냥 순순히 가르쳐 주는 게 어떻소? 마지막 선물이라 생각하고 말이오.”

죽을 때 죽더라도 반드시 정체를 밝히고야 말겠노라고 유재룡은 속으로 맹세했다.

“자결해라! 그럼 가르쳐 주마!”

그 대답을 들은 유재룡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아무리 궁금해도 그것만은 사양하겠소.”

그러면서 그는 청각에 신경을 집중했다. 목소리를 의도적으로 변성하고 있다고는 하나 사람의 말버릇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대화를 길게 끌어보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어떤 특징을 잡아내기에는 복면수괴의 말이 너무 짧았다. 그래서 목소리를 통해 정체를 밝히는 것은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아직 유효한 수단이 남아 있었다.

“좋소. 그럼 이름만이라도 알려주시오. 그 정도는 알려줄 수 있지 않겠소? 본명까지는 바라지도 않소. 지금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오?”

“살(殺).룡(龍)! 살룡대의 대장 살룡! 그것이 지금 나의 이름이다.”

복면인의 대답은 짧았지만 그의 억눌러 놓았던 분노를 폭발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유재룡의 눈에서 불꽃이 번뜩였다. 더 기다릴 것도 없었다. 말버릇보다 더 감추 기 힘든 버릇이 있다. 그것은 바로 무공이다. 무공의 초식이라는 것은 단순한 칼부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사람의 인생 그 자체가 거기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뼈를 깎는 훈련과 경험과 삶이 그 안에 녹아들어 가 있다. 무공을 익힌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무공이라는 형태에 완전히 집어넣는 과정, 혹은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무공이란 그것을 익힌 자의 얼굴이자 존재 자체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검은 정직하다!’

검과 검, 쇠와 쇠가 격돌하는 소리만큼 정직한 소리는 없다.

그렇다. 부딪쳐 보면 알 것이다.

“청룡출해!”

검을 곧추세운 유재룡의 신형이 복면괴한을 향해 쏘아져 갔다. 물을 박차오르는 용처럼 청룡검은 나선을 그리며 살룡의 심장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검끝이 심장 을 먹어치우려는 순간 살룡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들었다. 용살도라 명명된 칼이었다.

스릉!

깡!

“흡!”

고막을 쩌렁쩌렁 울리는 쇳소리와 함께 유재룡의 눈이 부릅떠졌다. 아직 채 뽑혀 나오지 않은 칼의 도면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청룡검의 진로를 가로막았던 것이 다. ‘청룡출해’라는 초식의 변초를 모두 꿰뚫고 있는 듯한 완벽한 방어였다.

“이, 이럴 수가!”

유재룡은 급히 공중에서 신형을 두어 번 뒤집으며 급히 뒤로 물러났다. 살룡은 당황한 그를 쫓는 대신 느긋하게 칼을 마저 뽑은 후 자연스럽게 늘어뜨렸다. 그리고 는 왼손을 들어 까딱까딱 두 번 손짓하며 말했다.

“와라!”

자신을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에 유재룡은 분노가 폭발했다.

“오냐! 오라면 못 갈 줄 알았더냐!”

피가 날 정도로 힘껏 검병을 움켜쥔 유재룡은 더욱더 내공을 일으켰다. 단전이 말라 버려도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받아라!”

유재룡이 이번에 펼친 초식은 청룡십삼식 중 제팔초인 용아잔운이었다. 용의 이빨이 구름을 찢는다는 뜻을 지닌 이 용아잔운이란 초식은 청룡십삼식 중에서도 매 우 공격적인 살초였다.

땅! 차라랑! 채챙!

그러나 이번에도 살룡은 한 손으로 칼을 두어 번 옮기는 것만으로 두 손으로 내지른 검초를 모두 흘려버렸다. 또다시 유재룡의 청룡검법은 살룡의 손짓 몇 번에 요 술처럼 감쪽같이 증발해 버렸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살룡이 아직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유재룡은 이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래서는 상대의 무공을 알아내기도 전에 당하고 만다는 위기감이 그를 엄습했다.

“다, 다시 한 번! 좀 전에 잠깐 손이 미끄러진 것뿐이다! 이번에 실패하지 않는다!”

그러자 살룡이 비웃으며 말했다.

“수십 번이 아니라 수백 번을 다시 해도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유재룡! 너는 무력하다! 그러니 순순히 열쇠를 내놓아라! 얼마나 더 비참해져야 말귀를 알아들을

텐가?”

‘진정하자. 놈의 도발에 넘어가선 안 돼. 자기를 찾자.”

유재룡은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물론 대결 중에 눈을 감는 것은 매우 위험한 처사였다. 하지만 분노에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은 더욱 위험했다.

“후우~ 후우~”

그는 우선 기식을 다스려 분노로 날뛰고 있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몸과 마음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호흡을 다스림으로써 마음을 다스린 것이다. 마음이 진정되 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상하군.’

적은 자신이 펼치는 청룡십삼식에 너무나 익숙하게 대응하고 있었다. 마치 동문 사형제끼리 약속 대련이라도 펼치고 있는 듯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쉴 새 없이 쏟 아내는 검초들을 받아넘기고 있었다. 그 움직임에는 일말의 당황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의 검초를 손바닥 보듯 훤히 내다보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역시 적은 자신이 아는 존재가 틀림없었다.

‘도대체 누구지??

이대로는 위험했다. 상대는 나를 손바닥의 손금 보듯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자신은 손금은커녕 손톱 끝자락도 아직 못 보고 있다. 적은 나를 아는데 나는 적을 모르니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불리해지는 게 당연한 이치였다. 그의 기력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손 안의 모래알처럼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 상태로 계속 가다가는 금세 한계에 부딪치고 말리라. 그의 팔은 쇠처럼 무거워지고 호흡은 가빠지며 몸은 점점 더 피로에 찌드는 데 비해 상대방은 계속해서 안 정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다지 피로하지도 않은지, 여전히 담담한 모습으로 미칠 듯 쏟아내는 유재룡의 검초를 받아내고 있었다.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었다. 지금 승부수를 띄워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일 할의 승산도 기대할 수 없을 듯했다.

유재룡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 동시에 검끝에서 느껴지던 미세한 떨림도 함께 사라졌다. 몸이 마음을 움직이자 이번에는 움직인 마음이 다시 몸에 영향을 준 것이다.

스르륵!

유재룡이 양손으로 움켜쥔 청룡검을 비스듬히 치켜들었다. 그의 몸에서 매서운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오라!”

“간다!”

그는 평생을 연마해 온 청룡십삼식에 모든 것을 걸기로 결심했다. 유재룡이 도약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군!’

지금껏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있던 살룡에게서 처음으로 변화가 일어났다. 그가 유재룡과 대적한 이후 처음으로 자세를 잡은 것이다.

청룡은장의 독문가전검법인 청룡십삼식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고 위력적인 초식은 십초 이후에 있는 두 자리 수에 몰려 있다. 특히 청룡이 바람과 구름을 부른다는 이 청룡풍우(靑龍風雨)의 초식은 청룡이 바다를 박찬다는 뜻을 지닌 제십일초인 청룡약해(靑龍躍海)와 청룡이 하늘을 달린다는 제십이초 청룡주천(靑龍走天)으로 연계되어 극강의 파괴력을 자랑하는 삼중 연속 공격이 완성되게 된다.

청룡십삼식 비기 연환삼식 비룡승천.

스르륵 칼을 머리 위까지 들어 올린 살룡의 칼이 섬광을 발하며 떨어져 내렸다.

슉슉슉슉슉!

사선으로 비스듬히 질풍처럼 쏟아지는 연속 베기 ‘청룡풍우의 초식은 검로를 정확히 읽어낸 살룡의 칼에 의해 무위로 돌아갔다

전 체중을 실어 일도단천의 기세로 베어 들어가는 중(重)의 수법인 ‘청룡약해’의 초식을 비스듬히 막은 다음 뒤로 물러나 그 힘을 반감시켰다.

마지막으로 펼쳐진 것은 착지와 동시에 온몸을 회전시키며 솟구쳐 오르는 청룡주천의 초식이었다. 유재룡은 전력을 다해 연환삼식의 마지막 초식을 펼쳤다.

그러나 살룡은 그 궤도를 훤히 꿰뚫고 있기라도 하는 듯 세 발짝을 뒤로 움직여 종이 한 장 차이로 그 매서운 검초를 피해냈다.

“….!!”

큰 기술이 실패했을 때는 그보다 더 큰 빈틈을 허용하게 된다. 바람과 구름을 잃은 용은 이미 알몸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것을 기다렸다!’

“너의 패배다, 유재룡!”

살룡이 도약했다. 움켜쥔 용살도가 혈광을 내뿜었다.

참룡해체(斬龍解體) 청룡낙지(靑龍落地)!

오직 비룡승천을 파훼하기 위해 만들어진 초식이었다.

“흐헉!”

유재룡은 급히 검을 내려 살룡의 일격을 막았다.

까강!

“꾸엑!”

그러나 흐트러진 자세로 살룡의 검에 실린 위력적인 검력을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유재룡은 실 끊어진 연처럼 피를 토하며 훨훨 날려갔다. 쿵쿵!

유재룡은 공처럼 두 번 땅에 퉁긴 후 데구르르르 구른 다음 바닥으로 널브러졌다.

“끝났군!”

살룡이 뒤돌아서며 말했다. 그때였다.

“…이다.”

살룡의 등 뒤 저편에서 희미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이다!”

두 번째는 조금 더 또렷하게 들렸다.

지팡이처럼 검에 몸을 의지하며 유재룡이 일어났다. 필사적인 모습이었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의지하여 몸을 일으킨 그의 입에서 쉴 새 없이 피가 흘러나오고 있 었다. 그의 내상은 현재 매우 엄중한 상태였다.

“애처롭고 꼴사납구나, 유재룡! 절망의 진창 속에서 아등바등 몸부림치는 그 모습이 얼마나 추한지 알고 있나?”

살룡이 비웃으며 개탄했다.

“추해도 좋다! 나에게는 아직 지켜야 할 것이 있다! 그리고 아직 나의 마지막 장사는 끝나지 않았다!”

땅!

넝마가 된 오른팔로 간신히 검을 들어 올린 유재룡이 왼손 검지로 검신을 튕겼다.

팅!팅!팅!팅!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유재룡은 검지 손톱이 부서지고 손끝이 터져 피가 나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검신을 퉁겼다.

“그건 또 뭔가? 시끄럽게 해서 짜증나 죽게 할 셈인가?”

“청룡십삼식 비기 노룡광음! 네놈을 지옥으로 보내기 위한 준비 운동이다!”

“지옥으로 가는 것은 네놈이다!”

유재룡이 다시 한 번 비룡승천의 연환삼식을 펼치며 돌진했다. 살룡의 입에서 어이없다는 듯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핫! 건망증이 심해졌나, 아니면 미친건가? 한 번 더 반복한다고 성공할 수 있을 것 같나? 그렇게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어리석은!”

살룡의 말대로 조금 전 펼쳤던 것에 비해 현저히 위력이 떨어진 비룡승천이 먹힐 리가 없었다. 살룡은 조금 전보다 더욱 수월하게 그의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며.

“통하지 않을 거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뭣이!”

사실 이 비룡승천이란 초식에는 다음 한 단계가 더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쓸 때는 시전자가 죽기를 각오할 때였다. 그리고 유재룡은 알고 있었다. 그때가 바로 지 금이라는 것을.

“아야! 선아야! 반드시 살아야 한다!”

그는 단 한순간의 힘을 얻기 위해 남아 있던 생명을 모두 불태웠다.

“청룡십삼식 최후비기 용린폭(龍鱗爆)!”

유재룡의 외침과 함께 청룡검이 순간 폭발했다. 수천 조각으로 나뉘어진 용린(용의 비늘)이 두 눈을 부릅뜬 살룡을 향해 쇄도했다. 시전자인 유재룡의 몸도 무사 하지 못했다. 이것이 동귀어진의 초식이 된 것은 용린의 비산 방향을 제어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실패할 시 자신을 방어할 수단이 사라지고 내력도 바닥나 버리기 때문에 평소에는 쓰고 싶어도 감히 쓸 수 없는 그저 있으나마나 한 초식이었다. 그 봉인이 풀릴 때는 목숨을 내놓았을 때뿐이었다. 그만큼 필 사의 공력이 담긴 일격이었다. 유재룡은 온몸이 찢겨져 나가는 듯한 고통 속에서 성공을 확신했다.

그러나,

“하압!”

살룡의 무공은 유재룡의 예상을 훨씬 웃돌았다. 어느 정도냐 하면 그는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전력을 다해 자신의 몸을 가릴 수 있는 도막(刀膜)을 펼칠 수 있을 만 한 능력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자랑으로 삼고 있는 장기이기도 했다. 기합 소리와 함께 너덜너덜해진 오른팔이 섬전처럼 휘둘러지자 삼각형 모

양의 도막이 살룡의 몸 앞에 펼쳐졌다. 채재재재재쟁! 깡깡깡깡깡!

횡으로 눕혀진 폭우처럼 살룡을 향해 쏟아지던 검편의 무리가 삼각형 도막과 부딪치며 불꽃과 함께 요란한 격돌음을 일으켰다.

살룡은 도막을 찢어발길 듯 압박해 들어오는 거력에 밀려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를 휘둘렀다. 여기서 도막이 찢기면 그의 패배, 지켜내면 그의 승리였다. 폭 우 치는 밤 지붕에 새는 물처럼 그의 방어를 뚫고 몇 개의 검편이 살룡을 향해 날아갔다.

피!피!피!

흑의사내의 팔뚝과 어깨에 붉은 혈선이 생겨났다. 그러나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도를 휘둘렀다.

피융!

다시 방어를 뚫은 검편 하나가 그의 미간을 노리고 날아갔다. 사내는 재빨리 고개를 옆으로 숙여 그것을 피해냈다.

스각!

뺨을 스친 검편은 사내의 얼굴에 한줄기 붉은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그것은 청룡의 마지막 몸부림이 되었다. 청룡의 분노는 끝내 삼각의 도막을 뚫지 못하고 좌절 하고 말았다.

“사, 삼현조화(三絃造化)!”

찢어질 듯한 경악성은 유재룡의 폐부 깊숙한 곳으로부터 튀어나왔다. 그가 비장의 한 수를 감추고 있었듯 상대 역시 비장의 한 수를 감추고 있었다. 다만 상대의 한 수는 그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익숙한 것이었다.

유재룡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의 당황하는 모습도 절정을 맞이했다. 어떻게 저 초식이 저 악적의 손 안에서 펼쳐질 수 있단 말인가? 저 독 특한 세모꼴 모양의 도막을 형성하는 도법은 한 인물의 독문수법이었다.

“그, 그대는?”

푸슉!

섬뜩한 효과음과 함께 흑의사내의 용살도가 유재룡의 배를 관통했다.

“끄윽!”

고통으로 떨리는 유재룡의 손이 천천히 사내의 얼굴을 향해 올라갔다. 사내는 무심한 눈빛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손을 뿌리치지도 않았다. “이… 이…….”

간신히 말을 꺼내는 유재룡의 입에서 울컥울컥 피가 쏟아져 나왔다.

마침내 수전증 환자의 손처럼 떨리던 손이 검은 복면에 닿았다.

스르륵!

힘없이 떨어지는 손과 함께 사내의 복면이 흘러내리며 살룡의 얼굴이 드러났다.

“어, 어떻게. .?”

더 이상 놀랄 힘도 없는지 망연자실해진 퀭한 눈으로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유재룡은 지독한 배신이 가져다준 절망 속에서 나락으로 떨어졌다.

“자, 자네는……?”

유재룡의 충혈된 두 눈은 부릅떠진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예상을, 아니, 상상을 초월한 인물이 그 검은 천 뒤에 숨어 있었다. 아는 사이 정도였다면 차라리 행복했으리라. 흉악한 복면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절친한 지기의 얼 굴이었다.

“쯧, 끝까지 몰랐으면 좋지 않았나, 재룡? 그럼 마음 편히 저 세상에 갈 수 있었을 것을.”

사내가 혀를 차며 말했다. 이미 목소리의 변성을 푼 상태였다.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 절대 잘못 들을 리 없는 목소리였다.

“난 자네가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이렇게 알려주고 싶지는 않았다네. 그게 자네에 대한 나의 최소한의 배려라고 생각했거든.”

“이정 자, 자네가… 어떻게……? 은장과 표국은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붕우지간인 것을… 어떻게……?”

유재룡은 어떻게든 검을 들어 한때 친구였던 사내의 목을 베려 했다. 그러나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이미 상대의 칼이 그의 복부를 관통하고 있었기 때문 이다. 게다가 검은 이미 손잡이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지극히 무력하고 또 무력했다.

“원망하려거든 많이 원망하게. 얼마 안 남은 짧은 순간이지만, 죽은 다음에는 원망조차 할 수 없을 테니 말일세.”

“왜 배신했나?”

역류하는 피를 삼키며 유재룡이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뭐라고?”

살룡이 되물었다.

“왜 배신했나? 우린 십년지기가 아니었던가? 왜 다른 누구도 아닌 자네가 날 배신할 수 있는가?”

“배신이라니? 남이 들으면 오해할 말 같은 건 하지 말아주게.”

양심의 가책이라고는 조금도 받고 있지 않은 목소리로 그가 대답했다.

“배… 배신이 아니라고? 쿨럭쿨럭!”

자꾸만 피가 목에 걸려 그의 말을 끊었다.

“당연하지. 자네와 사귈 때부터 나의 목적은 열쇠의 행방을 찾는 것이었네. 난 열쇠가 있을 가능성이 있는 장소로 보내진 많은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지. 자네 입이 너무 무거운 탓에 그 사실을 알아내는 데 십 년이나 걸렸지만 말일세.”

만일 그에게 확신이 있었다면 그들의 교제 기간은 더욱 짧았을 것이다.

“오호, 통재라! 도적에게 재물을 맡긴 꼴이었구나. 네놈을 믿고 표물을 맡긴 사람들에게 부끄럽지도 않은가?”

“부끄러울 일이 있겠나. 그 일들은 완벽하게 처리했는데. 그러니 안심하게. 섣불리 이 자리를 버릴 수야 없지 않겠나? 그러니 이제 그만 포기하고 열쇠를 내놓게.” “웃기지 마라! 그것은 배신자가 가질 만한 물건이 아니다!”

피가 넘어오는 것도 상관치 않은 채 유재룡이 그르렁거리며 외쳤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자네 말은 틀렸네. 원래 그 열쇠는 그분의 것이네. 약속을 어긴 것은 자네들이지 우리들이 아니네. 우리는 우리의 당연한 권리를 행세하고자 할 뿐이네.”

“퉤엣! 네놈은 영원히 그것을 손에 넣지 못할 것이다!”

“그런 말을 들으니 섭하군. 그래도 우리는 한때 친구였지 않… 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살룡은 유재룡의 복부에 박아 넣고 있던 자신의 도를 힘껏 한 바퀴 돌렸다.

“끄아아아아아악!”

다시 한 번 유재룡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자, 어떤가? 이제는 말할 맘이 드는가?”

“퉤엣!”

다시피 섞인 침이 살룡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지만 그는 그것을 가볍게 피한 후 유재룡의 몸 구석구석을 뒤졌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물건은 나오지 않았다. “역시… 열쇠는 꼬맹이들에게 있나 보군.”

이미 예상한 바라는 듯한 살룡의 가벼운 말투에 유재룡의 눈동자가 작게 요동쳤다. 그의 눈을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던 살룡은 단박에 그 미세한 동요의 잔흔을 발 견해 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던가? 유재룡은 심신의 제어가 약해진 탓인지 마음의 동요를 완전히 숨길 수 없었다.

살룡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그런 모양이군.”

조금 전은 단순한 떠보기였는데 성과가 있었다. 평소의 유재룡이라면 넘어가지 않았겠지만, 지금처럼 육체의 상태가 나쁠 때는 정신의 빈틈이 드러나는 법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유재룡에게 볼일은 없었다.

““마지막 가는 길, 지난날의 정을 생각해서 편하게 보내주지. 잘 가게.”

살룡은 복부를 관통하고 있던 애도의 손잡이를 힘껏 잡아 뽑았다.

유재룡의 등 뒤로 피분수가 터져 나왔다.

붉게 변하는 시선 속에서, 아득한 어둠으로 잠겨가는 정신 속에서 유재룡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살아라..

한때 친구였던 이의 편히 감겨지지 못한 눈을 바라보며 살룡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자네와 지냈던 십 년, 무척이나 즐거웠다네.”

“살룡대 제일조 서열 사위 두심!”

“예, 대장님!”

재빨리 대열에서 뛰어나온 두심이 부복하며 대답했다.

“지금부터 네가 조장이다.”

유재룡의 검에 서열 이위와 삼위가 죽었기 때문에 그 빈자리를 메꿀 필요가 있었다.

“감사합니다.”

뜻하지 않은 진급에 얼른 머리를 조아리며 두심이 대답했다.

“뒤처리를 맡아라. 쥐새끼 한 마리 남기지 마라. 청룡은장은 오늘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전표와 서류는 모두 태워 버려라. 전표나 어음 같은 종이 쪼가리는 남겨둘 필요 없다. 은괴(銀塊)는 모두 본 국으로 이송시켜라. 깃발을 올리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명을 받듭니다.”

“혈표 수석조장!”

“예!”

혈표도 얼른 달려와 부복했다.

“대를 두 개 분대로 나눈다. 너는 일조와 삼조를, 나는 이조와 사조를 맡는다.”

“예!”

“시는 분명 그 애들이 가지고 있다. 십방으로 흩어져 그들을 쫓아라! 이 일대에 천라지망을 펼친다. 스쳐 가는 바람 한줄기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알겠느냐?” “예, 대장님!”

작전 수행 중 서열 이위와 삼위가 사망한 덕분에 갑자기 두 계단 승급한 두심은 매우 기분이 좋았다. 드디어 그의 구멍에도 볕 들 날이 온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정말 성심성의껏 일했다. 열심히 불태우고 열심히 부수고 열심히 파괴했다.

두심이 뒤처리에 한참 분주할 때였다.

“이보게, 젊은이. 말 좀 묻세.”

“아, 바쁘니깐 나중에 물으쇼.”

라고 무심결에 대답했던 조장 두심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그의 등 뒤에는 흰 수염이 텁수룩한 백발(白髮)의 노인이 서 있었다.

“헉! 여, 여긴 어떻게?”

깜짝 놀라 몸을 뒤로 날린 두심과 달리 노인은 태연하기만 했다.

“응? 걸어서 왔네.”

노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가 듣고 싶은 것은 그런 이야기 따위가 아니었다.

“이곳은 이미 결계가 발동 중일 텐데 어, 어떻게 이곳에 발을 들여놓을 수가?”

하지만 노인의 발걸음이 소리 소문 없이 그의 등 뒤에 이를 동안에도 아무런 경계 신호도 발해지지 않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이것 참 곤란하게 됐는걸!”

두심에게서 냉큼 등을 돌린 노인은 한 손으로 턱을 긁적이며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인 채 궁리에 빠져들었다. 이때 부하 다섯 명이 나타났다. 그러나 노인은 전혀 신 경 쓰지 않는다는 듯 등을 돌렸다. 등이 훤히 드러났다. 다시 부하 열 명이 더 나타났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노인은 바닥에 털썩 쭈그리고 앉아 나뭇가지 하 나를 들어 바닥에다가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이때 다시 부하 열다섯 명이 더 나타나 두심의 부하는 모두 합해서 삼십 명이 되었다. 뒤처리를 위해 남겨진 모든 인원 이 한데 모인 것이다. 그러나 노인에게는 다른 일이 더 중요한 모양인지 고개를 들어 뒤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어허, 이 일을 어쩌나…… 생식(生食)은 안 하는 주의니 쌀도 사야 하고, 이슬만 마시고 살면 입이 심심하니 지금까지 밀린 외상 술값도 처리해야 하고, 생활비도 필요하고…… 흠흠.”

뒤에 눈알을 부라리고 있는 두심과 그의 부하 삼십 명의 존재 따윈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등 뒤에서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이 살기들이 느껴지지 않는단 말인 가? 노인의 고뇌는 여전히 땅바닥에 쓰여진 숫자에 집중되어 있었다. 머리가 복잡해지자 더 이상 생각하기가 귀찮아진 두심은 얼른 빠르고 신속한 수단을 선택했 다. 그것은 바로 폭력이었다.

“에잇, 모르겠다. 얘들아! 당장 저 늙은이의 입을 막아라!”

그러자 잠시 어리둥절한 상태에 빠져 어쩔 줄 몰라 하던 부하 삼십 명이 정신을 차리고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

“죽어어어어어어!”

살기 가득한 외침이 불꽃의 붉은 광무 위에서 춤을 췄다.

그리고…….

“응?”

잠시 후 노사부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아니, 쟤네들은 어찌해서 저렇게 바닥을 뒹굴고 있나? 밤이라 바닥이 무척 찰 텐데?”

삼십 명에 달했던 두심의 부하들은 모두 차가운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피는 흐르지 않았다. 그러나 숨을 쉬는 사람도 없었다. 

“아… 아시지 않습니까?”

이미 혼이 반쯤 나간 두심이 사시나무 떨 듯 벌벌 떨며 말했다. 이빨과 이빨, 무릎과 무릎이 끊임없이 서로 부딪쳤다.

“응? 모르겠는데? 난 사소한 것에는 신경 쓰지 않는 주의일세.”

저걸 사소하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어떻게 당했는지도 모르고 부하 삼십 명이 한순간에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자네 얼굴은 또 왜 그런가? 조금 전엔 불그스름하니 생기가 돌더니만 지금은 푸르죽죽한 게 꼭 귀신이라도 본 얼굴 같구만?”

노인이 두심의 얼굴을 자세히 보기 위해 한 발짝 다가섰다.

“으아아아아악! 오지마! 오지 마! 가까이 오지 마!”

“어허, 젊은 사람이 어찌 그리 예의가 없나? 노인을 보면 공경해야 한다는 말도 못 들었나?”

“으아아아아아앙! 으아아아아앙! 오지 마세요! 제발 오지 마세요!”

그동안 수많은 전장을 누비며 칼에 수십 명의 피를 묻혔던 두심이 땅에 주저앉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유년 시절로 그의 시간이 역행이라도 한 듯이.

“거참, 알 수가 없군. 오지 말라 다음에는 울음을 터뜨리다니. 할 수 없지.”

잠시 숨을 고른 다음 노인이 힘주어 짧게 한마디 했다.

“뚝!”

그러자 두심의 모든 동작이 멈추었다. 부릅떠진 눈에서는 더 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았고, 입술은 굳게 앙다물어졌으며, 코에서도 더 이상 콧물도 나오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눈도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마치 그가 머문 곳 한곳에서만 시간이 멈춘 듯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 상태는 노인이 입을 열 때까지 계속되었다. “자, 이제 대화할 준비가 되었나?”

바지에 오줌을 지린 채 두심이 대답했다.

“예… 옙! 준비되어 있습니다.”

“음, 그런가? 그렇게 큰 소리로 대답할 필요는 없네. 아직 귀가 먹지는 않았으니깐.”

“아… 알겠습니다.”

다시 두심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어찌 된 일인지 그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여기가 청룡은장이 맞나?”

“옙, 맞습니다.”

“그럼 저기 불을 지른 건 자네들인가?”

“옙, 아, 아닙니다. 저흰 그냥 단순히 저곳을 습격하러 왔을 뿐입니다. 불은 저쪽에서 지른 것입니다.”

“저쪽에서?”

“예, 무지한 소인은 잘 모르겠지만, 그렇습니다.”

“그런가? 그만큼 필사적이었다는 것이겠지.”

감히 검을 내려칠 수 없었다. 뭔가에 사로잡힌 듯 더 이상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래, 그럼 저 안에 아직 은은 조금 남아 있겠지. 난 저곳의 고객이니 그 안의 은에서 내 몫만큼 가져갈 권리가 있는 것 같은데 말야.”

“저기… 송구스럽지만 저 안에는 지금 단 한 푼의 은도 황금도 없습니다.”

“뭐?! 없다고? 왜 없어? 전표는 어쩌고? 예금은? 자기들 마음대로 망하면 고객들은 어쩌란 말인가? 자네도 자네지. 자네들이 와서 난동 안 부렸으면 이런 불상사 도 없잖나? 자네가 내 생활 책임질 텐가? 자네들 목적은 도대체 뭔가? 만일 아무것도 안 나오면 자네에게 책임을 묻겠네. 자네 평생이 걸리더라도 말일세.”

노인의 박력에 압도된 두심은 그만 헉 하고 숨을 삼키고 말았다. 나한테 책임을 묻겠다고? 저 무시무시한 노인네를 평생 책임져야 한다고? 그런 끔찍한 일은 죽기 보다 싫었다. 두심은 그대로 숨을 멈추었다.

“응? 이봐, 젊은이? 왜 말이 없나? 두 눈만 퀭하니 뜨고… 어라? 죽었네?”

노인이 가까이 다가가자 두심은 더 이상 삼켰던 숨을 내뱉지 않고 있었다. 심장 마비였다. 그는 뻣뻣이 몸을 세우고 두 눈을 부릅뜬 채 그대로 죽음 속으로 도망쳤 다. 그것이 끔찍한 공포에 벌벌 떨던 그가 택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이었고, 그의 몸은 그의 절실한 소망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어라? 왜 죽었지?”

노인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 할 수 없지.”

앞서 말했듯 사소한 일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 노인의 지론이었다.

“하지만 이 일을 어쩐다… 이대론 밀린 외상 술값도 못 갚는데…….”

탈속한 듯 보이는 노인에게 있어서 생계 유지와 주량 유지는 사소한 일에 속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곤란하군! 곤란해!”

잠시 뒤 자문자답하듯 말했다.

“역시 그 수밖에 없나? 그다지 내키진 않는데……. 다시 그 녀석을 찾아야 하나……. 이대로 굶어 죽을 수도 없고…….”

노인은 들고 있던 증서를 불꽃 속에 던져 넣었다.

“오랜만에 강호 나들이나 한번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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