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502화
석양이 지기 시작하자, 휀은 드디어 숙소 별궁을 향해 방향을 돌린 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걸어가던 휀은 갑자기 자신의 허리에 장비된 플렉시온을 뽑은 뒤 지면의 한쪽에 박았고, 곧 일직선으로 줄을 그으며 계속 별궁으로 향해갔다. 별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다다른 휀은 그제서야 검을 땅에서 뽑았고, 뭔가를 바닥에 털어낸 후 별궁 안쪽으로 향했다.
“…이제 돌아가서 쉬거라 련희야, 가희야. 너희들 때문에 이 오라버니의 마음이 그리 편치 않구나….”
아직도 병상에 누워 있는 태자 카이슈의 말에, 레이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오라버니. 언니와 전 괜찮습니다. 오라버니께서 한시라도 빨리 쾌유하셔야 저희들의 마음이 편하답니다.”
카이슈는 한숨을 후우 내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너희들에게 정말 면목이 없구나. 오라버니가 너희들을 일찍 쉬라고 하는 이유는, 내가 오늘 잠이 좀 빨리 와서 그런단다.”
“아, 그러셨군요. 그럼 저희들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편히 주무십시오 오라버니.”
그렇게, 레이는 방을 조용히 나섰고 카이슈는 힘겹게 몸을 돌려 바른 자세로 취침 준비를 하였다.
별궁 안을 걷던 휀은 부엌으로 누군가가 슬며시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섰고, 얼마 안되어 부엌으로 들어간 누군가는 역시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부엌 밖으로 나섰다. 그녀는 급히 별궁을 빠져 나오려고 했으나, 중간에 휀과 어쩔 수 없이 마주치게 되었고, 그녀는 약간 움찔 하며 걸음을 늦추었다. 휀은 역시나 감정없는 얼굴을 한 채 그녀에게 살짝 목례를 한 후 중얼거렸다.
“…고슴도치도 자신이 난 자식은 귀여워 하는 법이지요. 왕비 마마.”
그러자, 그녀–왕비는 인상을 찡그린채 자신의 넓은 봉선으로 입가를 가리며 상당히 불쾌하다는 듯 한 말투로 휀에게 말했다.
“…무슨 뜻으로 말하는 것인가 이방인…! 내가 무슨 이상한 행동이라도 했다는 것인가?”
휀은 슬그머니 왕비를 지나쳐 가며 허무감이 깃든 목소리로 조용히 대답했다.
“…그럴리가요.”
왕비는 계속 휀의 뒤를 쏘아보다가 계속 갈길을 가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물론 별궁의 밖이었다. 휀 역시 자신의 숙소로 갈 따름이었다.
그날 밤, 일행은 새로 옮긴 별궁 숙소의 회관에서 모두 모여 회식을 즐길 준비를 했다. 물론 그 자리에는 휀도 포함되어 있었다. 케이는 과실주가 든 잔을 들며 그 자리에 모인 일행들에게 말했다.
“자아, 여러분! 이제까지 계속 수고를 해 주셨는데 이런저런 상황으로 번번히 회식할 때를 놓쳐 이곳에 온지 2주일이 넘은 오늘에야 겨우 회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수고를 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표시로 차린 음식들이오니, 많이 드시기 바랍니다! 그럼, 건배를!!”
“건배!”
휀과 슈렌을 제외한 모두는 술잔을 높게 들었고, 역시 그 둘을 제외한 일행들은 건배를 한 술을 단숨이 들이켰다. 슈렌은 아주 천천히 술을 들이켰고, 휀은 술잔의 끝을 입가에 살짝 댄 후 조금씩 술을 마셨다. 원래 술과 음식을 좋아하는 사바신은 1분도 지나지 않아 술과 고기를 휩쓸었다. 특히, 술을 어느때보다도 많이 마시는 듯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옆에 있어야 할 누군가가 3개월간 불귀의 객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두들 조금씩 음식이 들어간 상태에서, 휀이 아무것도 먹지 않은채 술만을 마시고 있는 모습을 본 케이는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휀 님은 음식이 마음에 안드시는 듯 하군요. 왜 아무것도 안드시는지…?”
그러자, 휀은 케이를 흘끔 바라보며 짧게 중얼거렸다.
“독이 들었으니까.”
휀의 목소리는 분명 작았다. 그러나, 그 말이 들린 순간 모두의 손은 멈추고 말았다. 음식을 마악 먹은 상태인 린스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채 휀에게 소리쳤다.
“그, 그게 무슨 헛소리야!!! 여기 있는 사람들이 독이 들었는지 안들었는지도 구분 못할줄 알아!!!”
그러자, 휀은 빈 자신의 술잔에 다시금 술을 채우며 대답했다.
“…지금은 아무도 모르지…. 양념에 자연스럽게 첨가된 독이니까. 지금 상태로는 나라도 음식 안에 독이 들었는지 들지 않았는지 몰라.”
그러자, 가만히 음식을 바라보던 슈렌은 시선을 후식으로 준비된 과일 혼합 음료에 돌리며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반응식 독…. 성분을 두개로 나누어 한쪽은 본 음식에, 한쪽은 후식에 넣은 후 두 음식을 모두 먹었을때 두 성분이 하나로 되어 맹독으로 변하는 것….”
그러자, 케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채 중얼거렸다.
“그, 그런…? 그 반독(反毒)은 사건정중 제 2대부터 내려온 비술인데…?! 어째서 그런 독이 여기에….”
일행은 아무 말이 없었다. 단서도 없었고, 물증도 없었다. 그때, 함께 식사를 하던 테크가 갑자기 벌떡 일어서며 휀을 향해 소리쳤다.
“네 녀석이 음식에 독을 넣고, 연극이 걸릴 것 같으니까 발뺌하려는거 아니야!! 감히 우리를 그런 유치한 연극으로 속일 수 있을 것 같나!!!”
그러자, 휀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테크를 향해 무감정의 말투로 조용히 말했다.
“…나라면 너희들 정도를 없애는데 궂이 독을 사용할 필요가 없지. 너무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않는게 좋아. 추리라는 것은 아무나 하는게 아니니까.”
그러자, 열혈한 테크의 눈에선 불이 튀었고, 술도 적당히 들어간 상태인 그는 결국 회관까지 들고 온 검을 빼들며 휀에게 소리쳤다.
“이자식, 말 다했냐!!! 어서 일어나서 나와 한판 붙어보자!!!! 그 재수없는 입을 내가 틀어막아주지!!!!!”
그러자, 휀은 못들은듯 가만히 술잔을 채웠고, 무시까지 당해버린 테크는 결국 휀을 향해 몸을 날리고 말았다. 사바신과 슈렌은 이미 말리기엔 늦었다는 듯 가만히 앉아 있었다. 테크가 살기를 뿜으며 달려오는 순간, 휀은 술이 아직 많이 든 술잔을 입에서 떼며 중얼거렸다.
“…맛이 없군.”
곧, 휀은 자신에게 근접한 테크를 향해 술잔 안에 든 술을 부었고, 넓게 퍼진 술은 곧 테크의 몸에 닿게 되었다.
퍼억—!!!!!
“허억—!!!”
술에 맞았다고 설명해야 할까. 휀이 넓게 뿌린 술에 맞은 테크는 헉 소리를 내며 그자리에 쓰러졌고, 그 모습을 본 사바신과 슈렌은 동시에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많이 봐줬군…. 다행이야.”
휀은 자신의 근처에 쓰러져 기절한 테크를 바라보며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미안하군. 내가 검을 안가지고 나왔으니 오늘은 이렇게 끝내지.”
일순간에 끝나버린 혼란 상황 후, 일행은 자신들의 몸에 약간이나마 들어간 독의 반쪽 성분에 대해 불안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일도 매우 간단했다.
술과 안주를 마구 먹던 사바신이 걱정 말라는 듯 웃으며 일행에게 말했다.
“핫핫…이래뵈도 난 땅의 가즈 나이트…. 땅 위에 나는 약용 식물, 즉 약초에 대해선 좀 쌈박하거든. 식사 후 내가 해독용 탕을 끓여올테니 걱정 말고 모두 먹고 마시길…. 자자, 슈렌도 한잔….”
“…난 커피가 좋은데….”
슈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바신에게 술을 받았고, 그 역시 사바신에게 술을 주었다. 물론 그들이야 죽고 사는것이 그렇게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는 존재라 그렇다 치지만 다른 일행들은 그렇지 않았다. 린스는 다시금 인상을 쓴 채 가즈 나이트 세 명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 인간들 정말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