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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 나이트 – 510화


“…린스…공주님…?”

리오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은채 중얼거렸다. 그리고, 잠에서 덜 깬 얼굴로 문 앞까지 나온 여자—린스 역시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은 상태에서 뒤로 주춤거렸다.

“리, 리오…?”

뒤에 있던 일행들중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서로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리오는 그녀가 이곳에 있는 이유를 묻기 위해 집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때, 린스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고, 리오를 향해 무언가를 집어 던지며 강하게 소리쳤다.

“…거짓말장이!!! 지금 와서 어쩌자는거야!!!!! 이 바보야!!!!!”

리오는 다시금 놀라며 린스가 집어 던진 반짝이는 물건을 받아 들었다. 리오는 그것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이것은…?”

십자가…자신이 예전에 린스에게 준 은제 십자가였다. 린스는 곧바로 리오에게 다가와 그의 망토 자락을 움켜쥐며 울분이 섞인 목소리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지금 오면…어쩌자는거야!!! 네가 다른 곳으로 날려가지만 않았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거야!!!”

리오의 얼굴은 놀라움과 궁금함이 뒤섞여 있었다. 린스가 오랫만에 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에게 이런 반응을 보일리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때, 누군가의 부축을 받으며 파란 장발의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몸이 거의 붕대 투성이로 변해버린 슈렌이었다.

“…역시 왔군 리오…. 할 얘기가 많으니 어서 들어와라. 모두 안에 있으니까….”

“…슈렌…!?”

리오는 만신창이가 된 슈렌과, 그를 부축하고 있는 노엘, 레이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모두 그리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특히, 레이는 무언가 빠진 느낌이 들 정도였다. 평소와 같이 조용한 느낌이었지만, 평소와는 다른 슬픔이 서려 있는 눈으로 리오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노엘의 집 안에 있었다. 친근한 얼굴도 많았지만, 보이지 않는 얼굴도 많았다. 망토를 벗은 리오는 초조한 얼굴로 앉아 있다가, 레이가 천천히 걸어 나오자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레이씨,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레이는 조용히 리오를 바라보았다. 조금씩 조금씩…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고, 이윽고 앉아 있는 리오의 팔 아대에 얼굴을 묻으며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죄송합니다…하지만…잠깐이라도 이렇게 있게 해 주세요…! 도저히…견딜 수 없을 것 같아요…!!”

레이의 전에 없는 반응에, 리오의 얼굴은 더욱 참담해졌고 팔짱을 낀 채 아무 말 없이 서 있던 지크 역시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노기를 띈 얼굴의 지크와, 참담한 얼굴의 리오를 번갈아 바라보던 라이아는 걱정되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언니인 세이아를 바라보았고, 세이아 역시 걱정되는 얼굴로 리오에게 시선을 두고 있었다. 조금 후, 슈렌이 노엘의 부축을 받은 채 걸어 나왔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

그때, 얼굴을 일그러뜨린채 서 있던 지크가 슈렌에게 소리쳤다.

“…알았으니까 빨리 말 해!! 듣지 않으면…가슴이 터질 것 같으니까…!!!”

지크의 그 반응을 본 챠오, 프시케, 마키, 넬 등은 흠칫 놀라며 지크를 바라보았고, 챠오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오래간만에 보는 진지함이지만…보고싶지 않았는데….’

슈렌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 다음, 의자에 앉아 천천히 얘기를 시작했다.

“…우리가 여기 도착한 시기는…어제였다. 단 하루만에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지. …린라우가 일시에 총 공격을 가해온 것이다.”


※※※

조커 나이트가 습격한 다음날….

조회에선 몇차례의 습격으로 인해 초토화가 되어가는 성과, 사람들을 지킨다며 성을 부수고 있는 가즈 나이트들에 대한 대신들의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마마, 저들을 위해 마마께서 희생하실 이유가 어디 있사옵니까!! 레프리컨트라는 나라는 이미 망한 나라이옵니다. 예전에 마마께서 친분관계를 가지신 그 레프리컨트 왕국이 아니옵니다!! 게다가 저들을 노리고 마귀들이 쳐들어 온다는 사실이 확인되지 않았사옵니까!!!”

“그러하옵니다!! 게다가, 그들 때문에 생긴 인적, 물적 피해가 극에 달하고 있사옵니다!!! 더이상 그들을 보호하신다면 언제 도성이 바닷모래로 변할지 모르옵니다!”

청성제는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손으로 이마를 감싼채 고뇌에 찬 목소리로 대신들에게 말했다.

“…경들의 말은 알겠소. 그들은 짐이나 공주들과 친분관계가 있는 상태니, 짐이 그들에게 직접 말을 해 보겠소. 오늘 조회는 일찍 끝낼테니, 오후에 다시 봅시다….”

곧, 대신들은 물러갔고 청성제는 시름어린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친구여…자네와의 약속을 못지킬지도 모르겠네….”

케이는 무술 수련을 끝낸 후 별궁에 있는 자신의 방에 들어갔다. 깨끗한 옷으로 다시 갈아입은 그녀는 자신의 방 문을 연 후 성의 광장을 바라보았다.

“…음? 그가 없네…?”

케이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당히 흐린 날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광장 중앙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어야 할 휀이 오늘은 나오지 않은 것이었다. 구름 한점 없이 맑은 날임에도 불구하고….

그때, 누군가가 방 문을 두드렸고, 케이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들어오시오.”

그러나, 문 밖에 있는 사람은 생각이 달랐다.

“…나오는게 좋아.”

그 목소리를 들은 케이는 인상을 찡그리며 걸음을 옮겨 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문 밖에 서 있는 금발의 남자, 휀은 별 표정 없이 문을 연 케이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코트를 받으러 왔어.”

그의 반응에, 케이는 팔짱을 낀 채 휀을 올려다보며 화가 난 어투로 말했다.

“호오…당신, 그것 때문에 오늘은 하늘 구경을 안 한거군요? 그 코트가 그렇게 마음에 드나요?”

그런 말에도 불구하고, 휀은 아무 감정 변화가 없었다.

“말로 시간낭비하고 싶지 않아.”

결국, 케이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휀에게 그의 코트를 던져 주었다. 코트를 받은 휀은 말 없이 케이의 방으로 부터 멀어져갔고, 뭐라고 말을 또 하려던 케이는 그가 아무 말 없이 사라져 버리자 화가 난 듯 방에서 급히 나와 그의 등을 손으로 치며 말했다.

“이봐요! 당신 도대체…앗?”

그의 등을 친 케이는 자신의 손에 무언가가 묻은 것을 볼 수 있었다. 투명한 액체가 섞인 피였다. 케이는 놀란 표정으로 휀을 바라보았고, 케이에게 등을 맞은 후 잠시 서 있던 휀은 말 없이 걸음을 다시 옮겼다. 자신의 손에 묻은 휀의 피를 바라보던 케이는 급히 그의 앞을 막아서며 소리쳤다.

“자, 잠깐만요!! 등에…상처가 난 것인가요? 꽤 큰 상처 같은데 치료를…!”

그러나 휀은 말 없이 케이를 슬쩍 돌아 계속 앞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그의 등을 본 케이는 더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검은색 상의의 등 부분이 길게 젖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에 젖은 것은 아니었다. 분명 피에 젖은 것이었다. 케이는 다시금 휀의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어디서 그런 상처를 입었나요! 설마 어제…?”

케이가 팔을 벌려 복도 전체를 가로막은 상황이어서, 휀은 케이를 돌아서 빠져 나갈 수는 없었다. 휀은 결국 그자리에 서며 말했다.

“어제 입은 상처가 맞아. 네가 등을 친 덕분에 상처가 터졌지. 됐으면 비켜.”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휀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케이는 결국 입술을 깨물며 휀에게 소리쳤다.

“좋아요, 당신 따위 죽어도 좋아!!! 어서 가버려요!!!”

“고맙군.”

케이가 복도 벽으로 비켜서자, 휀은 그렇게 말을 한 후 곧 유유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무슨 이유인지, 주먹을 불끈 쥔 채 몸을 떨던 케이는 곧 힘없이 자신의 방으로 돌아섰다. 그때, 휀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는다 해도, 네가 죽기전엔 죽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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