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18권 12화 – 어떤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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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18권 12화 – 어떤 죽음

어떤 죽음

-청소

그 남자는 재빠른 걸음으로 산을 타고 올라가고 있었다.

사내의 성은 왕(王), 이름은 필(弼). 사천성 회음현 사람이다. 위진(魏晉) 시대의 현학자. 존재의 유무, 있기 전에 없었냐, 아니면 있기 전에 없는 것이 있긴 있었냐, 아니면 그것마저도 없었냐, 그럼 없음의 없음이란 도대체 뭐냐는 논쟁거리를 가지고 청담(淸談)에서 박 터지게 싸우다 스물넷이란 젊은 나이에 요절한 천재 소년 왕필과 성명이 같긴 했지만 이름만으로 그 사람의 존재가 규정되는 것은 아니기에 그의 십오대조까지 족보를 뒤져 봐도 터럭 한 올만큼의 관계도 없다.

그래도 이 사내는 오행상생의 원리에 따라 목의 기운을 활성화시키는 일련의 속성 변환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지니고 생활하고 있었다. 즉, 쉽게 말해 그는 나무꾼이었다. 그의 근면 성실함과 고생과 노력에 의해 나무는 불로 화하여, 자신의 몸을 태워, 혹은 화형당해 인간에게 보탬이 되는 것이다. 그는 오늘도 이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위해 산을 오르는 길이었다. 하루를 거르면 하루를 굶기에 쉴 수는 없었다. 언제나 오르던 산이었기에 그다지 힘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의 발걸음은 평지를 걷는 듯 가벼웠다. 그만큼 익숙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누구보다 빨리 위화감을 느낄 수 있었다. 사내는 걸음을 멈추었다. 몸이 더 나아가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사방을 가득 채운 기분 나쁜 적막. 어제 와는 달리 생경한 기운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산 전체가 침묵에 빠진 듯 조용했다.

“무슨 일이지?”

그는 조심스럽게 산을 올라갔다. 코끝을 간질이는 냄새가 갈수록 짙어졌다. 어제는 맡을 수 없었던 비릿한 냄새.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그를 엄습했다. ‘이대로 돌아갈까?”

확실히 매력적인 제안이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는 비록 유명하고 유식한 학자나 사상가는 아니었지만 공포(恐怖)를 낳는 어미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실마리조차 잡지 못한 채 이대로 발길을 돌린다면 무지에서 태어난 공포가 무럭무럭 자라 자신의 발목을 붙들게 되리라. 이대로 내려갔다가 내일 다시 이 산을 오를 자신이 없었다. 그럼 또 하루를 굶어야 한다. 게다가 이곳의 땔감은 질이 좋았다. 다른 곳에서 이만한 장소를 물색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 었다.

땔감이 땔감이지 별다를 게 있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그건 무식의 소치이다. 숙박비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게 바로 목임(木賃:나무 값)이다. 막말로 밥값보다 도 비싼 것이다.

땔감에도 엄연히 계급이 존재한다. 오늘 자른 나무를 내일 당장 파는 게 아니다. 금방 도끼질한 나무를 물기가 촉촉한 상태로 고스란히 가져가는 것과 미리미리 건 조시킨 다음 가져간 땔감은 대우가 다르다. 화력 차가 엄연히 존재하기에 가격도 다르게 매겨진다. 적어도 열흘 정도는 햇빛에 바짝 건조시키는 게 좋다.

그는 자신의 밥줄을 영문도 모른 채 잃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두려웠지만 계속해서 길을 올라갔다. 일종의 위기감이 그의 발을 전진시키고 있었다. 굶고 싶지 않 았다. 멈출 수는 없었다. 내일의 끼니를 위해 그는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왕필은 눈을 질끈 감고 마음의 길을 따라 달려 올라갔다. 수백 번, 아니, 수천 번은 족히 오르내린 길이다. 눈을 감아도 부딪치거나 걸려 넘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물컹하고 발에 밟히는 게 있었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간신히 자세를 바로잡자 기다렸다는 듯이 고약한 악취가 그를 덮쳐 왔다.

그는 두려워서 차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도리어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기분 나쁘고 비릿한 냄새는 더욱 강렬하게 그의 코를 자극할 뿐이었다. 헛된 달음박질은 더 이상 달릴 기력도 남지 않게 되어서야 마침내 멈추어졌다.

왕필이 감았던 눈을 빼꼼이 떠보았다. 그러자 보였다.

“으아아아아아아악!”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가 산에 울려 퍼졌다.

血! 血! 血! 屍!屍!屍!

피[血]와 시체[屍], 그는 어느새 시산혈해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사방은 참혹한 시체로 가득 덮여 있었다. 개중에는 몸통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도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날카로운 이빨에 뜯겨 나간 흔적이 역력했다.

괴물에게 습격당하기라도 한 모습이었다. 이 표식, 기억에 있었다. 호랑이를 꿰고 있는 두 자루의 칼. 근방에서 가장 큰 산채 ‘살호채’의 문장이었다. 이런 깊은 산 속에서는 사람을 잡아먹는 요괴가 나온다더니… 설마 이게…….

그때 그의 등 뒤로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불쑥 산처럼 솟아올랐다. 뜨거운 바람이 훅 목덜미를 쓸고 지나갔다. 전신에 오돌오돌 소름이 돋았다. 바람은 뜨거웠지만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으슬으슬한 기분에 뒤를 돌아본 왕필은 그대로 몸이 돌이 된 듯 굳어버리고 말았다. 보고야 만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사고 능력을 한 순간에 빼앗아 버리는 데 부족함이 없는 것이었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산이 떨어졌다. 태산이 그를 덮쳤다.

그리고 찾아온 암흑.

왕필은 그 자리에 선 채로 기절하고 말았다.

“흔적을 찾았습니다, 혈표 조장님!”

혈표는 우선 보고하는 부하의 배에 세차게 주먹을 꽂아 넣었다.

뻑!

힘차게 북 치는 소리가 울리며 부하의 입에서 ‘억!’ 소리가 튀어나왔다.

“수.석.조.장.님!”

혈표가 친절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부하의 실수를 정정해 주었다.

“크~ 읍!”

여전히 주먹을 배에 품고 있는 부하는 독특한 효과음으로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말을 했다가는 내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기에 함부로 입을 열 수도 없었다. ““다시 보고하도록!”

그제야 혈표는 꽂아 넣었던 주먹을 빼냈다.

“쿨럭쿨럭! 예, 혈표 수석조장님께 보고드립니다! 조금 전 목표물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좋아, 역시 얼마 가지는 못했군. 하긴 꼬맹이들의 발걸음으로 용을 써봐야 한계가 있기 마련이지.”

혈표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대장보다 자신이 먼저 두 꼬맹이를 발견했다는 점이 그를 더욱 들뜨게 만들고 있었다.

“설마 아미파로 도망치지 않을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그들은 당연히 아미파로 가리라 예상하고 그 방면의 길목을 전면 차단했다가 완전히 허탕만 쳤던 것이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신세가 된 혈표는 그제야 부랴 부랴 조원들을 재정비해 추적에 나섰다.

“뭐, 은장에 다시 돌아갔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지.”

뒷정리를 하라고 남겨두었던 대원들이 원인 불명의 이유로 전멸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그 역시 경악했다. 도대체 누가 왜 어떻게 그토록 깔끔하게 전멸시킬 수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머리는 금세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임무에 대한 실패의 책임은 대장이 지게 되어 있다. 그 는 비록 부대장 격인 수석조장이지만 책임을 져야 할 위치는 아니었다. 그 일을 기회로 대장이 실각한다면 그 다음 대장 자리에 앉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다시 말해 매우 좋은 소식이었다. 이 기회에 보란 듯이 공을 세우면 그 자리는 당연히 자신의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번 임무를 성공시킬 사람은 대장이 아닌 자신이 되어 야 했다. 때문에 그답지 않은 신속함으로 조원들을 재편해 추적에 나선 것이었다.

비밀 통로는 청룡은장에서 무려 삼백 장이나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아직 어린 탓일까, 남겨놓은 흔적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은 추적의 전문 가였다. 포획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좋아! 근접 추적을 개시한다!”

“예, 조장님!”

뻑!

다시 한 번 북 치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는 보통은 뭔가가 들어가는 곳으로 노란 뭔가가 특유의 소리를 내며 세상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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