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 나이트 – 546화
“네, 주문하신 삭스핀과 브랜디입니다.”
스튜어디스는 여전히 차디찬 미소를 띄운채 휀에게 그가 주문한 것들을 가져다 주었고, 휀은 좌석에 부착되어 있는 조립식 간이 식탁을 뺀 다음 그 위에 술과 안주를 둔 후 여유있게 브랜디를 넘기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녀석….”
지크는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로 휀의 뒷통수를 쏘아보고 있었고, 다른 일행들은 어떻게 하면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지 고민중이었다.
“…정말로 우릴 이대로 두실건가요?”
넬은 휀 쪽으로 시선을 다시 돌리며 그에게 물었고, 휀은 잔을 놓으며 간단히 대답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어.”
“…너무하다고 생각하시지 않으세요? 그래요, 지크 선배님과 당신은 분명히 살 수 있겠죠, 하지만 5000t 분량의 폭발물이라면 저희들은 살 수 없다고요!!!”
넬의 말을 들으며 삭스핀의 맛을 조용히 음미하던 휀은 그것까지 다 먹은 후 입가를 닦으며 넬에게 중얼거렸다.
“상당히 삶에 대한 욕구가 강하군. 나이에 비해서.”
결국, 넬은 덮어썼던 모자를 벗어 바닥에 내 던지며 휀에게 강하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래요! 전 약한 사람이라 살고 싶어요!! 아빠와 엄마가 집에 무사히 계신지도 궁금하고, 앞으로 벌어질 전투도 무섭고,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는 이번 크리스마스도 두려워요!!! 하지만…하지만, 아무리 두렵고 무서워도 절망이라는건 해본 일이 없어요!!! 그런데 지금 당신이 저에게 절망을 주고 있단 말이에요!!!”
휀은 눈을 감고 팔짱을 끼며 넬에게 조용히 물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필요는 없어. 하지만…내가 어떻게 너에게 절망을 줬는지 궁금하군.”
그러자, 넬은 기가 막힌듯 벌떡 일어서며 휀에게 다시금 소리치기 시작했다.
“모르시겠어요? 지금 당신은 저희들이 죽을 운명에 처해 있는데도 도와줄 생각은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다고요! 그게 절망을 주는게 아니라면 뭐에요!!!”
휀은 아무 말이 없었다. 다른 일행들은 모두 넬과 휀을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넬은 두 주먹을 꼭 쥔채 휀을 계속 쏘아보고 있었다. 휀은 오른손을 입가에 댄 후 헛기침을 한번 하며 말하기 시작했다.
“흠…그럴지도. 그런데 착각을 하고 있군 넬. [희망]이라는 단어와…[절망]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우습게 보이나.”
“…?”
넬은 순간 움찔했고, 휀은 차가운 눈으로 넬을 바라보며 다시 말했다.
“심한 병에 걸린 아이가 있다. [희망]이라는 것은 아이가 아직 살아있을때 그 아이의 부모 마음에 존재하는 것이고, [절망]이라는 것은 그 아이가 죽었을때 부모의 마음에 생겨나는 것이다.”
“그, 그건…!”
“다르다고 생각하나. 하긴…그럴지도. 인간은 자기 정당화를 위해 다른 생명을 기분좋게 없애는 생물이니 그런 반응이 나오는건 당연하지. 좋아, 인간이 아닌 생물에게 한번 물어보지. 시에.”
의자의 등받이 위에 올라서서 휀이 먹은 삭스핀이 담겨있던 접시를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던 시에는 휀이 자신을 부르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고, 휀은 넬을 바라보고 있는 상태에서 시에에게 물었다.
“넌 조금 있다가 뭘 하고 싶나.”
그 질문을 들은 시에는 휀의 질문이 너무 어려웠는지 어색한 미소를 지은채 머리를 긁적이다가, 결국 무언가 떠오른듯 활짝 웃으며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거…그거(삭스핀) 먹을거야!”
휀은 시에의 대답이 나오자 옅은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들었나. 저 아이도 죽음이라는 신성한 단어는 머리속에 넣고 있지 않다.”
“하, 하지만 시에는 우리보다….”
“너보다 머리가 나쁘다고? 그럼 넌 머리가 좋아서 죽을 것부터 생각하고 있나?”
넬은 곧 말을 잊고 말았다.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지크는 주먹으로 자신의 이마를 살짝 치며 씁쓸한 미소를 지은채 중얼거렸다.
“헤헷…넬 녀석, 기막히게 한방 먹었군. 인정하긴 싫어도….”
시계를 보던 휀은 팔을 뻗어 넬이 내던진 모자를 주워 가만히 서있는 넬에게 건네준 후, 몸을 일으켜 스튜어디스에게 접근하며 모두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비행선은 정지하고 있어도 이 지구엔 바람이라는 것이 있다. 그 덕분에 이 비행선은 풍선처럼 다른곳으로 이동을 하지. 머리는 상당히 썼지만 별로 잘 쓰진 못했군. 정확히 1분 후, 이 비행선은 런던에서 뉴욕으로 가는 비행선에 접근하게 된다.”
콰앙—!!!
말을 멈춘 휀은 발로 객실의 문을 걷어 찼고, 두꺼운 문은 간단히 밖으로 날려져 객실엔 외부에서 밀려오는 차디찬 바람이 급히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휀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지크에게 말했다.
“내가 올때까지 짐을 챙겨두도록.”
휀은 곧 밖으로 날아갔고, 지크는 약간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일행들을 향해 손뼉을 두어번 치며 말했다.
“Hey Hey, 어서 대장님 말 대로 짐을 챙기자구.”
그러자, 일행들은 약속이나 한 듯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차린 후 천천히 짐을 찾아 챙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스튜어디스는 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유니폼 안주머니에 손을 넣고 잠시 꿈틀거렸다.
“…!?”
순간, 스튜어디스의 얼굴은 창백하게 변해 버렸다. 그녀는 계속 해서 안주머니에 넣은 손을 꿈틀거렸으나 별다른 상황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조금 후, 휀과 함께 황색 비행선이 일행을 싣고 있는 비행선에 가까이 접근했고, 다시 비행선 안에 들어온 휀은 선체의 외벽을 뜯어낸 후 간이 다리를 만들어 두 비행선의 문 사이에 놓은 후, 굵은 등산용 밧줄을 어디선가 구해와 역시 비행선의 문 사이에 연결하고 나서 일행들을 다른 비행선에 옮기기 시작했다.
“후우, 다 끝났나? 아, 맞어….”
마지막으로 남은 지크는 넬이 그늘진 표정을 지은채 가만히 앉아만 있자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일이 남았어.”
순간, 휀이 그렇게 말 하며 자신의 어깨를 잡자 지크는 평소와는 달리 고분고분하게 뒤로 물러났고, 휀은 앉아있는 넬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그렇게 살고 싶어했으면서 여기 가만히 있겠다는건가.”
그러자, 넬은 휀을 올려다보며 쓸쓸히 미소를 지은채 대답했다.
“…아니요. 잠깐…제가 바보같이 생각되서….”
휀은 아무 말 없이 넬을 바라보다가, 넬이 천천히 일어서자 넬의 앞에 바짝 붙으며 말했다.
“아직 너에게 볼일이 있어.”
“…? 앗!! 무슨 짓이에요!!!!”
휀이 갑자기 자신의 자켓 앞을 잡은 후 양쪽으로 활짝 벌리자 넬은 깜짝 놀라며 소리쳤고, 휀은 아무 표정변화 없이 넬의 자켓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후 무언가를 꺼내며 말했다.
“미성년자에겐 관심 없다고 말했을텐데.”
그렇게 말 한 휀은 넬의 자켓 안주머니에서 꺼낸 그 물체를 손가락으로 몇번 만진 후 좌석 깊숙히 던지고 나서 곧바로 돌아서서 밖으로 향했고, 넬은 자신의 자켓을 꼭 여민 후 다른 비행선으로 급히 옮겨 탔다.
※※※
옮겨탄지 10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휀과 일행들은 원래 타고 있던 승객들의 시선을 따갑게 받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궁금한건 도저히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성격의 지크는 휀에게 슬그머니 접근한 후 그에게 속삭이듯 조용히 물었다.
“이봐, 아까 넬의 주머니에서 꺼낸건 뭐야?”
지크의 질문에, 휀은 대답 대신 눈을 감을 뿐이었다.
순간.
쿠우우우우우우우웅—!!!!!!!!!!
순간, 엄청난 폭음과 빛, 그리고 폭발의 충격파가 일행을 태우고 있는 비행선을 덮쳐왔고, 그 충격에 의해 불안정한 자세로 휀의 옆에 있던 지크는 바닥을 굴러 반대편 좌석에 처박혔고, 휀은 눈을 뜨며 짧게 대답했다.
“뇌관.”
“…여유 부릴 이유가 있었군….”
그렇게 말 한 지크는 뭔가 속았다는 표정을 지은채 고개를 힘없이 저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