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신녀와 비류연
-타인의 손에 운명을 농락당하는 남궁상
“잠깐!”
남궁상이 검을 뽑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비류연이 끼어들었다. “자넨 또 누군가?”
진소령이 갑자기 등장한 훼방꾼을 향해 물었다.
“비류연이라 합니다.”
비류연이 가볍게 읍하며 대답했다. 놀랍게도 진소령은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비류연? 설마 자네가 이번 화산지회에서 ‘얼떨결에 우승했다던 그 비류연?”
진소령이 그 이름과 그에 대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소문을 들은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었다. 웬 무명의 청년 하나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이번 화산지회의 우승 자로 결정되었는데 모두들 그가 우승자로 결정된 경위와 그 이유에 대해 함구하고 있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왜 얼떨결이란 수식이 붙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비류연이 맞긴 맞습니다.”
그는 자신에 관한 악평이 나도는 데도 그다지 크게 신경 쓰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남들이 자기를 재단하든 말든 자기가 자기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을 그 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소문이란 건 언제든지 의도에 따라 조작해 내고 부풀릴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기에 거기에 자꾸만 귀를 쫑긋하는 것은 무가치한 일 이라는 게 그의 평소 지론이었다.
“그래, 할 말이 뭔가?”
다시 진소령이 물었다.
“불공평하다는 거지요.”
“불공평?”
“그렇죠. 불공평하죠.”
“뭐가 불공평하다는 건가?”
“강호에서의 지위나 나이나 명성을 비교해 보면 두 사람 사이에는 많은 격차가 있지요. 게다가 덤으로 그쪽은 이쪽이 사랑하는 정인의 고모이기도 하고요. 여러모 로 꿀리는 점이 많을 수밖에 없지요, 이쪽은.”
“그래서?”
“그러니 그렇게 일방적으로 일을 진행시키면 이쪽은 소심해서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죠. 그러니 그게 불공평한 게 아니면 뭐가 불공평한 것이겠어요. 안 그런가요?”
진소령은 화내지 않았다. 비류연의 말이 그럴듯하게 들렸던 것이다. 그녀도 원치 않는 비무를 강압적으로 진행했다는 평은 사양하고 싶었다.
“자네 말에도 일리가 있군.”
잠시 생각해 본 진소령이 대답했다.
“물론 일리가 있죠.”
자신만만한 어조로 비류연이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공평해지겠나?”
그것은 기다렸던 질문이었다.
“비무를 요구한 것은 그쪽이니 그 방법에 대해서는 이쪽에서 결정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비류연은 대화에 끼어들 때부터 몰래 준비하고 있던 자신의 생각을 펼쳐 보였다.
“일리가 있군. 좋은 생각이네. 그렇게 하도록 하게.”
전혀 상관없다는 투로 진소령이 대답했다. 그녀 정도의 고수쯤 되면 사소한 방식은 따지지 않는 법이었다. 모두 계산대로였다.
“어떤 방법이 좋겠나?”
여기서는 진소령이 납득할 만한 대답을 내놓지 않으면 안 된다. 억지를 부려서는 설득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풍문에 듣자 하니 아미파의 검술 비기 중에 ‘비상련화(飛翔蓮花)’라는 비전절기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요.”
비류연이 가볍게 운을 띄우자 진소령이 약간 놀랐다.
“그렇네. 확실히 그런 절기가 있지.”
그녀의 놀람은 그녀의 어투에서도 충분히 드러나고 있었다. 설마 자신이 그런 사실까지 알고 있을 줄을 몰랐던 것이다. 그러면 일단 성공이었다. 사실 그 풍문이라 는 것은 진령에게 캐물어서 듣게 된 것이었다.
“듣자 하니 지난 오십 년간 아미 장문인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익히지 못한 절기 중의 절기라던데요?”
“그렇네.”
진소령이 순순히 인정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딱히 숨길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가씨께서는 그 비전절기를 터득하고 있다던데 사실인가요?”
“아, 아가씨?”
뒤에서 조용히 시립하고 있던 유란은 진소령을 아가씨라 호칭하는 비류연의 대담함에 하마터면 각혈할 뻔했다. 진소령은 태연했다.
“딱히 숨길 일도 아니지. 사실이네. 그런데 그게 비무랑 무슨 관련이 있나?”
“물론 관련이 있죠.”
“그 초식은 비무에서 사용하지 말아달라고 한다면 그럴 수 있네. 어차피 그런 큰 기술까지 쓸 생각은 없으니까 말일세.”
그러나 진소령의 짐작은 틀렸다.
“아뇨, 그 반대예요. 다른 초식은 빼고 오직 그 초식만을 써달라는 거죠. 즉, 그 비상련화라는 비전절기를 파훼하면 이쪽의 승리, 실패하면 그쪽의 승리로 하는 게 어떨까요?”
“진심인가?”
진소령이 진심으로 놀란 표정으로 반문했다. 설마 그런 제안을 해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기(技)가 어떤 기인지 그대는 알고서 그런 말을 하는 건가?”
“조금은요.”
태평한 목소리로 비류연이 대답했다.
“그런데도 자넨 그 기와 정면 승부를 펼치겠다는 것인가?”
“그 정면 승부를 펼치는 건 이쪽이죠, 내가 아니라.”
그러면서 비류연은 양손으로 남궁상을 가리켰다.
아마 이 자리에 진령이 함께 있었다면 당장 기겁해서 ‘안 돼요!’라고 소리 질렀을 것이다. 그리고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뜯어말리려 했을 것이다. 그녀는 아미파 출 신인만큼 그 기술이 얼마나 무서운 기술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무척 억울해했으리라. 당시에 그녀는 비류연이 진소령의 가장 최상위 절기를 봉인하기 위해 물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사형의 사악한 계책은 언제나 예측을 불허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는 것을 그녀는 잠시 잊고 말았던 것이다.
“그걸 못 쓰게 하는 쪽이 훨씬 유리하지 않은가?”
진소령이 반문했다. 그 정도 제약은 충분히 감수해 줄 수 있다는 자신감이 내비쳐지는 말이었다. 남궁상 역시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맞장구치고 싶었다. 그러나 비 류연의 대답은 그의 기대와는 정반대 되는 것이었다.
“응? 그럼 비겁하잖아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서 비류연은 그렇게 말했다. 비겁이란 말에 남궁상은 순간 혼이 나간 얼굴이 되었다. 사고가 마비된 것이다. 언제부터 자신의 대사형이 이토 록 정정당당한 인물이 되었단 말인가? 갑자기 세상이 농담처럼 느껴졌다.
“정면 승부를 해서 깨뜨려야 의미가 있지. 그래야 아가씨께서도 납득하지 않겠어요? 이것저것 다 못 쓰게 하고 이겨봤자 진령의 짝으로 어울려 보이겠어요? 그랬 다가는 영원히 봐줘서 이긴 놈이란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할걸요?”
“그건 확실히 자네 말이 맞군. 내 그 점을 미처 생각 못했네. 저 사람에게 내가 못할 짓을 할 뻔했군.”
진소령은 공명정대한 듯 보이는 비류연의 태도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그녀는 비류연의 말에 완벽하게 설득당해 있었다.
“사과하네, 남궁 소협.”
“아, 아닙니다. 사과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남궁상이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진소령의 입에서 이런 사과라는 말까지 나오는데 자신이 어떻게 더 이상 비참하게 그녀의 치마에 매달릴 수 있겠는가. 그는 자 신이 어느새 외통수에 몰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뭐, 파훼한다고 해도 진짜로 깬다는 건 아니고 막아낸다는 의미 정도죠. 그 기술에 당하지 않으면 이쪽의 승리, 당하면 그쪽의 승리. 어때요?”
“필살기란 반드시 상대를 죽이기 위한 기술 적을 죽이는 데 실패했다면 그 기술은 이미 파훼된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무척 엄격한, 아니, 과격한 잣대가 아닐 수 없었다.
“과연 잘 이해하고 계시네요.”
비류연은 그녀의 그런 사고방식이 매우 잘 이해가 가는 모양인지 연신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이 기술을 막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을 텐데? 이참에 확실히 말해두겠지만 난 적당히 할 생각은 없네. 그런 건 상대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하니까 말일 세.”
갑자기 남궁상은 한 번쯤 모독당해 보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가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뭐, 그거야 이쪽의 팔자소관이죠.”
앞으로 다가올 타인의 운명에는 마음대로 개입했으면서 그에 대한 책임은 갑자기 당사자에게 홱 떠넘겨 버리는 비류연이었다.
“그, 그런…….”
남궁상은 억울하기 짝이 없었지만 지금의 그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기에는 지극히 무력했다. 잔인한 운명은 그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날려 버릴 거센 춤을 추고 있었다.
“그럼 언제가 좋겠나? 날짜를 정하게.”
“보름 후가 어떨까요?”
그 다음은 승천무제 본선이 시작되어 버린다. 그러면 모두 바빠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두 사람은 동의했다.
“좋네.”
“그럼 장소는 이쪽에서 통보해 드리죠.”
“불만없네.”
“지금 어디에 묵고 계신가요?”
“중양표국 남창지국에서 신세를 지고 있네.”
귀에 익은 장소가 나오자 비류연이 고개를 잠시 들어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건 또 의외군요.”
설마 중양표국하고도 관련이 있는 줄은 그도 몰랐던 것이다.
“그곳이라면 잘 아는 편이니 연락해 드리도록 하지요.”
“그럼 보름 후에 보도록 하지.”
“보름 후에.”
비류연이 대답했다.
“과연 대단한 고모님이군. 진령이가 호들갑 떠는 것도 이해할 만해.”
진소령과 유란이 아이들을 데리고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비류연이 한마디 했다. 남궁상은 느닷없이 닥친 엄청난 현실 때문에 아직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전 이제 어떡해야 하죠?”
아니나 다를까, 그의 표정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운명. 어떻게 해야 될지 제대로 판단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쯧쯧, 이건 네가 선택한 운명이야. 내가 선택한 운명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구. 그건 큰 착각이니깐 말야. 난 네가 네 자신이 선택한 운명을 움켜쥘 수 있도록 도와 주는 조력자일 뿐이야.”
언제부터 도와준다는 말이 판을 깬다는 말과 동일하게 되었는지 의문이 드는 남궁상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기억을 들춰봐도 자신이 이런 운명을 선택한 기억은 없 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운명, 제가 선택한 것 같지는 않은데요?”라고 반항해 봤자 돌아오는 것은 꿀밤뿐일 게 분명했다. 역시 운명이란 인간의 손에 의해 조종되어질 수 없는 괴물인 걸까? 다만 자신은 그 괴물이 인간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보다 뚜렷한 모습으로 곁에 있는 것뿐이었다.
“자신의 운명은 자신 스스로 움켜쥐는 거야. 그럼 갈까?”
비류연이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어디로 말씀이십니까?”
“특훈하러!”
그걸 하러 가자는 것이었다.
“그걸 또 해요? 이미 끝났잖아요?”
남궁상은 정말이지, 이번에야말로 도망치고 싶었다. 그 지옥에서 겨우 벗어났나 싶어 안도하고 있었는데 또다시 그 지옥으로 끌려가야 한단 말인가? 그것만은 절 대 사양하고 싶었다.
“응? 그건 준비 운동이었지? 본격 수련을 위한! 그 정도 가지고는 그 기술을 못 막을걸? 너 장가들기도 전에 죽고 싶냐?”
“아뇨, 장가는 들어야죠.”
“걱정마! 안 죽게 해줄 테니깐. 나만 믿어. 게다가 이번 건 짧아! 보름 속성반이거든!”
비류연은 정말 즐거운 모양이었다. 자신의 불행이 비류연에게 기쁨을 가져다주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욱 우울해지고 마는 궁상이었다.
“중양표국 남창지국은요?”
중간에 잠시 몇 가지 일이 일어났지만 그들의 원래 목적지는 중양표국 남창지국이었다. 그러나 비류연은 이미 거기에 흥미가 떨어진 모양이었다.
“더 중요한 일이 생겼으니 나중에 가지 뭐. 지금 이 상황에 거기 가게 생겼냐? 게다가 그 쎈 누님이 그곳에 머무르고 있다고 했으니 비무가 끝나기 전에는 가기도 그렇잖아?”
무사히 도착했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보다 세세한 상황은 비무가 끝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았다.
그리고는 비류연은 남궁상과 함께 중양표국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천무학관으로 돌아갔다.
***
슈우욱!
은빛 섬광 한줄기가 헤엄이라도 치듯 우아하게 나선을 그리며 숲 속 한가운데를 가로지른다. 마치 스스로의 의지를 지닌 한 마리 새처럼 거침없이 자유롭게 바람 의 물살을 가르는 그것은 한 자루의 새하얀 검이었다.
보통 사람이 이 광경을 봤다면 기겁하여 다음과 같이 외쳤으리라.
“으악! 귀신 들린 칼이다!”
사실 검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무지가 올바른 인식을 방해했기 때문이지 사실이 그런 것은 아니다.
반면 이 광경을 본 사람이 무공에 조예가 조금이라도 있는 강호인이었다면 다음과 같이 외친 후 다른 의미에서 경악했을 것이다.
“이, 이기어검술!”
기(氣)를 이용해 검을 허공 중에서 띄워 손도 대지 않고 자유자재로 부린다는 신묘한 경지. 검객이라면 누구나 꿈에라도 다다르고 싶어하는 환상의 경지였다(편견 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실 따위는 매달려 있지 않았다. 눈속임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허공 중에 떠 있었고, 은빛 지느러미를 흔들며 헤엄치는 한 마리 잉어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피육!
바람과 함께 춤추던 검이 순식간에 하늘로 솟아올라 하나의 점이 되었다. 천공을 꿰뚫고 달에 다다를 기세로 솟구쳐 올라가던 검이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우뚝 멈 추었다.
완벽한 정지. 그 찰나의 순간 만상일체가 정적 속에 가두어졌다.
스스륵!
그 다음 순간 검은 검자루를 축으로 검극이 서서히 뉘어졌다. 곧 그것은 땅과 평행을 이루었고, 그 이후에도 쓰러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검극이 역전을 마치자 하늘을 겨누던 검끝이 이제는 땅을 겨누고 있었다.
피융!
하늘의 한가운데 오롯이 정지해 있던 검이 무서운 속도로 떨어졌다.
자신의 백회혈을 향해 쏘아져 오는 날카로운 살기에 남궁상은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그는 아직 머리 위에서 수직으로 떨어지는 공격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 다.
“에잇!”
할 수 없이 남궁상은 뒤로 줄행랑쳤다.
그러나 검은 멈추지 않았다. 지면을 향해 하얀 낙뢰처럼 떨어지던 검이 우뚝 멎었다. 땅에 꽂히기 직전에 멈추어 선 검끝이 자신의 사라진 목표물이 달아난 방향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아직 멀리 가지 않았고, 승산은 충분했다.
피융!
다시 한 번 검은 하얀 섬광이 되어 남궁상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이기어검술을 이 정도까지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는 인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과연 누가 이 검의 주인인 것일까? 그리고 왜 그는 이토록 집요하게 남궁상을 노리고 있는가?
이 검의 이름은 ‘빙백’, 그의 주인은 천하오검수의 한 사람으로 강호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검의 고수 빙검 관철수였다.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까??
남궁상은 뒤돌아서서 검을 뽑아 들었다. 정면을 향해 정직하게 날아오는 검. 빠르지만 막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
었다.
그를 향해 날아가던 검의 서리가 내려앉은 듯한 하얀 나신이 순간 흔들리면서 두 개의 상(像)을 만들어냈다.
“어, 어검분영술!”
남궁상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건 반칙이었다.
말 그대로 이기어검의 분신술이라고 할 만한 최절정 상승절예였다. 단순히 검만 날리는 이기어검술과는 차원이 다른 고난이도의 최상급 기술이었다. 보통 검객은 평생을 살면서 단 한 번 제대로 견식해 보지 못할 만큼 이 기술의 체득자는 극히 희소했다. 그만큼 희귀한 기술이었다.
피! 피융!
두 개로 갈라진 검영은 잠깐의 휴식도 없이 좌우로 갈라져 남궁상을 노리며 집요하게 날아갔다. 예측할 수 없는 좌우 연계 합공.
‘피할 수 없어!’
남궁상은 눈을 질끈 감았다.
“끼아악!”
그 모습을 본 진령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
진소령과의 뜻하지 않은 만남이 있은 후 하루가 지났을 무렵 남궁상은 겨우 비류연에게 질문할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대사형!”
“왜?”
“저… 그 비상련화라는 초식은 도대체 어떤 기(技)입니까? 왜 그 초식을 고르신 겁니까?”
어제 그 초식명을 들은 이후로 지금까지 남궁상은 항상 그 점이 자못 궁금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용기를 가지고 물어본 것인데…… “어? 모르고 있었냐?”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했다는 말투. 그러나 남궁상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예, 몰랐는데요.”
“아미파 검법이잖아? 진령이 안 가르쳐 주던?”
“안 가르쳐 주던데요?”
남궁상은 조금 상처받았다.
“진령이가 그러는데 그건 초식이라기보다 하나의 경지로 보는 게 옳다더군.”
“경지요?”
“그래. 그 초식은 쉽게 말해서 어검술이야.”
“예에? 지금 뭐라고?”
순간 남궁상은 자신의 귀가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비류연은 그의 그런 기대를 단숨에 깨버렸다.
“이기어검술이라고! 그 비상련화란 초식은.”
그 대답에 궁상의 정신은 잠시 공황 상태에 빠졌다.
“왜 그 있잖아. 기로써 손도 안 대고 검을 부린다는 그거 모르냐?”
모르다니, 이건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럼 지금 저보고 이기어검술과 맞상대하라는 겁니까?”
“아니!”
비류연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남궁상의 얼굴에 약간 화색이 돌았다.
“그걸 맞상대해서 파훼하라는 거야. 춤추는 것도 아니고 상대만 하고 깨뜨리지 않으면 의미가 없지.”
두둥!
그의 심장으로 만 근의 쇠추가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갑자기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아미 최고수이자 천하오검수의 일인이 최고의 기량으로 펼쳐 내 는 이기어검술을 정면으로 부딪쳐야 한다는 중압감이 그의 심신을 단숨에 짜부라뜨릴 듯 짓눌렀던 것이다.
“걱정 마!”
걱정 안 하게 생겼습니까.
“준비는 다 해놨으니깐.”
준비는 개뿔.
짝짝!
“나와주세요!”
비류연이 손뼉을 두 번 가볍게 치자 수풀 뒤에서 한 사람이 걸어나왔다.
순간 남궁상은 갑자기 으슬으슬하게 몸이 추워지는 자신을 느꼈다. 여기가 산속 깊숙한 곳이라서가 아니었다. 감기가 걸려서도 아니었다. 봄의 기운을 단번을 몰 아내는 상대가 바로 코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과 검을 마주 대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빙검 대무사부님!”
나타난 사람은 놀랍게도 빙검 관철수였다.
“오랜만이구나.”
화산지회 이후로는 바빠서 거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그 뒷수습 때문에 빙검도 정신없이 바빴던 탓이다. 겨우 여유가 생겼는가 했더니 바로 이 꼴이다. 빙검으로 서도 썩 유쾌할 리 없었다.
“인사해. 앞으로 보름 동안 널 담금질해 줄 사람이야.”
비류연이 싱글거리며 말했다.
“역시 훈련은 실전이 최고지. 격이 비슷한 사람이랑 붙어봐야 짧은 시간에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거야. 그러니…….”
비류연은 빙검을 보며 말했다.
“절대 봐주지 말아요!”
빙검은 정말로 봐주지 않았다.
***
“…응?”
남궁상은 질끈 감았던 눈을 살짝 떴다. 그리고는 침묵 속에서 오른손을 옮겨 미간을 만져 보았다. 미끈했다. 다행히 예쁘게 뚫린 구멍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은 아직 살아 있었다. 다만 체면이 좀 깎였을 뿐이다. 다행히 바지는 빨지 않아도 되었다. 그건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더 이상 추한 꼴은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편하냐?”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에 남궁상은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
“예.”
“그럼 계속 누워 있을래?”
“그래도 되나요?”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토록 당연하게 자신의 머리 위에 떠 있던 하늘이 이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보통의 파란색과는 다른 깊 이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행복했다. 비록 그 행복은 찰나로 끝장나고 말았지만 말이다.
“물론. 몇 달 정도 침대 신세 지게 해주는 게 뭐 그리 어렵겠나.”
벌떡!
반사적으로 남궁상의 몸은 풀들을 으깨며 퉁기듯 일어났다. 그는 여태껏 자신에게 질문을 한 인물을 바라보았다.
“대, 대사형…….?”
“왜? 계속 누워 있고 싶다며?”
“아, 아닙니다. 아직 해야 할 수련이 산더미 같은데 팔자 좋게 늘어질 수야 있나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 그것 좀 아쉽군.”
말아 쥐었던 오른쪽 주먹을 털며 비류연이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뭐가 아쉬운 것인지는 묻고 싶지도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뭘 그렇게 쪼냐, 궁상아? 그 초식이 그렇게도 무섭냐?”
“물론입니다. 이기어검술이라고요. 그것도 어검분영까지 가미된 검술의 최고 경지 중 하나 아닙니까? 검객이라면 누구라도 꿈에라도 그리는 경지입니다. 그런 최 절정의 기()와 정면으로 맞닥뜨려야 하는데 어떻게 두렵지 않겠어요?”
빡!
별이 번뜩였다. 이제 비류연은 저 하늘의 별도 떨어뜨리는 가공할 능력까지 지니게 된 모양이었다.
“눈을 뒀다가 어디다 쓰냐? 머리는 그냥 무게 중심이나 잡으라고 달아놓은 건 줄 아냐? 똑바로 직시하지도 못하는 눈은 달고 다녀서 뭐 하냐? 그냥 확!”
비류연이 손가락을 가위로 만들고 찌르는 시늉을 하자 남궁상은 움찔해서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쯧쯧, 남들이 만들어놓은 환상에 농락되어 그 실체를 정면으로 바라보기도 전에 겁을 집어먹냐? 지옥 훈련은 왜 한 거냐? 왜 약한 애들이랑 티격태격할 때는 발 휘되고 너보다 강한 자랑 맞붙으면 그런 훈련 언제 받았냐는 듯 사라지냐? 넌 시작하기도 전에 진 거야. 이기어검술이 아니라 집단 의식이 만들어낸 ‘고정관념’이란 환상의 괴물에게.”
“화, 환상이요?”
“그래, 환상.”
“이기어검술이 열라 센 것처럼 보이는 건 다 환상이야, 환상, 사람들의 입과 입에서 오르내리는 사이에 부풀려진 환상이지. 뭐, 하수나 중수나 초보 고수―그런 게 있다면—에게야 먹힐지 모르지만 그 이상의 등급에서는 썩 효과적인 공격이라 부를 수 없는 물건이라고.”
“그게 정말입니까?”
남궁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비류연은 이 녀석들을 얼마나 한심하게 여기는지 가장 잘 표현해 줄 수 있는 표정을 짓기 위해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넌 이기어검술의 무서운 점이 뭔 줄 아냐? 생각해 본 적이나 있냐?”
“아니요.”
남궁상이 모깃소리만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허공을 슝슝 날아다니는 것 이외에 가장 무서운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손 안 대고 날아다닌다 해서 그 게 위협적이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바로 의외성이야.”
“의외성이요?”
그건 또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그래. 평소에 말로만 듣던 기술이 눈앞에 짠하고 나타난다고 생각해 봐. 사람들이 깜짝 놀라지 않겠냐? 그것도 평소에 호사가들의 혀 위에서 이리 구르고 저리 굴 러서 거의 전설이 되다시피 한 기술인데 말이야.”
남궁상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사실 이 이기어검술이라는 기술은 별로 실속이 없어. 상상한 만큼이나 위협적이지는 않다는 거지. 이건 사실 굉장히 효율이 떨어지는 기술이야. 낭비가 심하고 공을 들인 만큼 위력적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거든. 하지만 강력한 무기가 하나 있기는 있어.”
“그게 뭔데요?”
“그게 아까 말한 의외성이야. 그리고 그동안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허명이지. 비록 그게 허명일지라도 당사자가 그걸 간파하지 못하는 이상 그건 진실이거든. 그러 니 지레 겁을 집어먹게 되지. 누.구.처럼. 말이지.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냐? 정신이 나약해져. 누.구.처럼. 경직되어 버리지. 뱀 앞의 개구리처럼 말이야. 누.구.처. 럼. 그럼 당연한 말이지만 허점이 발생해 대응도 반응도 느려지지. 난 막을 수 없어. 난 절대 막을 수 없어. 이런 대단한 기술을 어떻게 막아라고 말야. 마음이 부정 으로 가득 차면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뒤바뀌지. 부정적인 사고방식은 온몸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해 버려. 그것은 가능성을 포기한다는 이야기야. 그리고 가 능성을 포기한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아냐?”
남궁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로 미래를 포기하는 거야.”
비류연은 잠깐 음미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그냥 단순히 혀가 피로해서인지 한동안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비류연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 다.
“이기어검이 위력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풋내기들뿐이야. 이기어검이라고 하니 대단해 보이긴 하겠지. 하지만 전신의 근력을 최대한 사용한 것에 그 속도는 미 치지 못해. 속도가 떨어지면 거기에 실린 힘이 떨어지지. 그냥 기(氣)만으로 검을 날릴 수 있다면 거기에 근력의 힘을 보태면 더 빨리 날아갈 수 있지 않겠냐? 간단 한 덧셈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 않아?”
남궁상은 졸지에 덧셈도 못하는 인간이 되었다.
“뭐, 단점만 있는 건 아니지. 이기어검의 이점은 그 조작의 용이성에 있어. 그걸로 의외성을 연출할 수 있는 거야. 평소 익숙하지 않은 사각에서 검을 찔러 넣을 수 있지. 하지만 만일 거기에 대비하고 있다면? 애송이들에게야 통하겠지만 고수쯤 되면 그 속도를 충분히 방어할 수 있어. 하지만 그런 애송이들에게 괜한 내공 들여 이런 큰 기술을 쓸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군. 큰 기술은 그만큼 큰 허점을 만들고 말지. 소모되는 기도 많고. 그러니 이만한 큰 기술을 써야 하는 상대에게 이 이기어 검이란 기술은 무용지물이 되기 십상이고, 그보다 못한 하수들에게는 굳이 힘들게 이 초식을 쓸 필요가 없단 말이지. 하지만 너 정도면 애송이로 보이니 사용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을 거야. 그 사고의 허(虛)를 찌르는 게 목표다.”
“사고의 허…….”
남궁상이 중얼거렸다.
“그래, 사고의 허실. 이기어검술 역시 그 마음의 허점을 파고들지. 때문에 강한 거야.”
비류연은 남궁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아직도 혼란에 휩싸인 그의 정신을 내비쳐 주고 있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쌓아놓았던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뜨린다는 것은 언제나 쉽지 않은 일이며 필연적으로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걸 깨지 못하면 그는 자기 자신을 극복할 수도, 새로운 세계를 경험할 수 도 없게 된다. 마지막에 세계란 이름의 알을 깨는 것은 자기 자신의 부리뿐이다.
“잊지 마. 네 마음에서 생겨난 공포가 너의 발목을 붙잡고 지옥의 입구로 너를 안내한다. 너를 찌르는 것은 이기어검술의 대단함이 아니라 네 마음이야. 그리고 그 것이 이기어검술의 진정한 무서움이기도 하지. 하지만 반대로 이기어검술을 막 쓸 수 있게 됐다고 자만해서 남발하다가 개죽음당한 이들도 역사적으로 꽤 만만찮 게 많거든.”
정확한 통계는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그 수가 열 손가락으로 모자라다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한다.
“그러니깐 겉모습에 속지 마. 초식의 화려함이 진정한 강함의 증거는 아니니깐 말이야. 그런 점은 이 세상이랑 질릴 정도로 똑같단 말이지. 그러니 미리 주눅 좀 들 지 마라. 정신만 바짝 차리면 막을 수 있어. 그리고 거기에 너의 승기가 있다.”
그리고 나의 승기도!’
이 승부에 어떻게 사람들을 끌어 모아 판을 크게 벌일까 고민하며 비류연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 흔들림없는 확신과 마주 대하자 남궁상도 그것이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류연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기어검술은 대단히 위험한 기술이야. 당하는 쪽이 아니라 쓰는 쪽, 즉 시전자 쪽에 말이야. 특히 적이 한 명 이상일 때는 특히 더. 기로 부린다고는 하지만 그러 기 위해서는 막대한 정신력이 필요하지. 요는 정신 집중이 필요하다는 건데 그렇게 되면 육체 쪽이 자연스럽게 둔해지거든. 일종의 무방비 상태가 되는 거지. 그럼 적이 한 명 이상일 경우 하나가 검의 시선을 끄는 순간 시전자를 공격하면 손쉽게 제거할 수 있어. 물론 이 경우 대응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야.”
잠시 말을 끊은 비류연은 남궁상의 이마를 검지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문.제.는 너나 네 친구들이 이걸 경험해 보지 못했다는 거야.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새롭지. 인간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 어느 정도 시간을 소비할 수 밖에 없어. 특히 전투 중에는 말이야. 내가 왜 저 썰렁한 아저씨를 데려왔겠냐?”
그건 별로 알고 싶지 않다는 것이 남궁상의 본심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알게 된다는 것에 현실의 비극이 있었다.
비류연은 남궁상의 영혼에 새겨 넣기라도 하는 듯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리 체험해 보라는 거다. 진정한 고수의 싸움을. 그 깊이를. 그 무서움을. 그리고 그 손에서 펼쳐지는 이기어검술이 어떤 것인지를!”
<『비뢰도』 제19권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