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360화
“아주 기초적인 물음이었지만 네 딴에는 고차원적인 문제이므로 일단 거기까지 생각한 것에 대해서는 칭찬을 해주마. 네 말인즉 혈도를 집혔다면 본 대인이 고수인 만큼 잠재 내력을 사용해 그 혈도를 풀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인데, 그 문제에 관해서 생각해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세상일이 다 뜻대로 된다면 혈도라는 것 자체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제압당하자마자 바로 뚫을 수 있다면 그게 어디 폐혈 수법이라고 하겠느냐? 그렇듯 혈도를 뚫는다는 것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이점 꼭 명심해두거라.”
“예, 알겠습니다. 라고 말할 줄 알았죠? 쳇, 한마디로 능력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다는 뜻이잖아요. 그냥, 난 안돼. 이 말 한마디만 했으면 될걸 가지고 괜히 아는 척 씨부렁거리고 난리야.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는 거라고요.”
딴엔 순수한 마음으로 피와 살이 되는 말씀을 들려주었다. 그러나 싸가지 없는 애새끼는 그것을 가지고 자신의 능력까지 수준 미달로 걸고넘어졌다. 당연히 성질이 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중소구의 마음은 평온하기 이를 데 없었다. 순간 그는 불가에서 말하는 ‘해탈의 경지’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그는 기왕 이렇게 된 김에 눈앞의 저 어리석은 아이에게 지금의 상황에서 혈도를 푼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작업인지를 차근차근 설명해주기로 했다.
“넌 이 세상에 보편적으로 퍼진 폐혈 수법이 대체적으로 몇 가지라고 생각하느냐?”
동천은 자신 있게 말했다.
“열여섯 가지요.”
내심 뜨끔한 중소구는 표정의 변화를 일으키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렇다. 그러하다면 드러나지 않은 수법들은 과연 몇 가지라고 생각하지?”
“드러나지 않은 거요? 음. 으음, 그게.”
주군이 좀 지체하는 것 같자 도연이 대신 대답해주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중소구는 힘들어하는 동천의 모습을 좀 더 즐기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도연이 말한 것이기에 친절하게 그의 말을 받아주었다.
“바로 그렇다네. 무공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서로의 독특한 점혈법을 가지게 되었고 드러나진 않았지만 흥하고 있거나 이미 멸문한 문파들은 적어도 두어 개 이상의 비전 점혈법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겠지. 그렇게 따지자면 수백에서 수천 이상의 점혈법이 세상에 존재했거나 존재하고 있다는 말일세. 때문에 웬만한 고수가 아니라면 꼬일수록 풀기 어려운 것이 점혈법인지라 하수들의 경우는 시전 한 자나 해혈법에 정통한 자들이 풀어주기 전까지는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 물론 시간이 흘러 자연히 풀리는 것들도 있긴 하지만 말야.”
그때 동천이 끼여들었다.
“결론적으로 중 대인께서도 하수라는 말이잖아요.”
중소구는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말한다면 서투른 결론이라고 할 수 있지. 이러한 점혈법, 혹은 폐혈 수법에는 만성폐혈법(慢性閉穴法)이라는 독특한 방법이 부수적으로 따라오는데 너는 그것이 무엇인줄 아느냐?”
처음 들어본 것이었지만 워낙 쓸데없는 것에 자존심이 강했던 동천은 괜히 아는 척 대답했다.
“뭐, 처음에 시전했던 접혈법을 풀지 못하게 해서 만성적으로 만드는 거겠…, 헉? 그, 그럼 지금 상황이 그렇다는 거예요?”
동천이 때려 맞췄다는 것을 알 리가 없는 중소구는 어린놈이 잘도 알아 맞춘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렇다. 일반적으로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지만 점혈법의 경우는 다르다. 한번 점했던 자리에 시간차를 두어 한번 더 점혈했을 때는 둘이 아니라 셋이 되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정기적으로 시행한다면 절대 풀 수가 없는 만성 폐혈이 되는 것이지. 그러니 이 얼마나 풀기 어려운 상황이더냐.”
상대가 남의 일 말하듯이 말하자 듣는 동천으로서는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지금의 상황에서 자신만이라도 빠져나가고 싶었다.
“한마디로 중 대인께서 만성 폐혈에 걸리셨다는 말이죠?”
“걸렸다기보다는 걸리고 있는 상황이다. 너를 비롯해 도 소형제까지.”
동천은 마지못해 자신을 가리켰다.
“저, 저도 요?”
“한말 또 하게 만들지 마.”
무심한 중소구의 대답에 동천이 다급히 물었다.
“절대로 풀 수 없는 거예요?”
중소구는 고개를 내저었다.
“풀 수가 없긴 왜 없겠느냐. 상대가 만성 폐혈법을 멈추고 시일이 좀 지나면 어떻게든 풀 수 있겠지.”
기가 막혀진 동천은 버럭 화를 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요? 이건 완전히 변비로 고생하는 여인에게 ‘참아, 언젠가는 나올 거야.’라고 말하는 거나 다를 바 없잖아! 안 그래? 할 말 있으면 그 주둥이를 놀려보라고!”
“어허, 터진 입이라고 여과 없이 쏟아지는구나!”
“그래 쏟아진다! 쏟아져 이 자식아! 더 쏟아볼까? 웩, 우웩! 더 쏟아봐? 웩웩웩! 웨에…….”
순간 동천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가만.”
그러나 중소구는 멈추지 않았다. 또 그러나 곧바로 멈추었다. 혹여, 민묘희가 오고 있는 상황일 수도 있는 것이다.
“왜 그래. 그 노파가 오고 있어?”
자세히 주위를 살펴보던 동천은 신경질 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좀 가만히 있어 보라니까요!”
울화가 뻗치는 중소구였지만 일단은 동천의 뜻대로 입을 다물어주었다. 그 사이 주변의 모든 곳을 낱낱이 살펴본 동천은 매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도연은 중소구 대신 나서주었다.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동천은 하체를 배배 꼬며 말했다.
“으응, 아주 큰 문제야. 그게 마려운데 눌 데가 없어. 어떻게 하지?”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쉰 도연은 자신의 바로 아랫부분을 가리켰다.
“그거라면 이곳에다 해결하십시오.”
동천이 바라본 곳에는 약간 모나게 튀어나온 둥그런 돌덩이가 보였다. 도연이 그것을 집어 들자 어린아이의 주먹만 한 구멍이 생겼는데 그곳에서는 동천에게 아주 익숙한 그러한 향기가 흘러나왔다. 문제는 그 향기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지만 말이다. 동천은 얼른 코를 막았다.
“뭐야, 여기 한 곳밖에 없어? 더군다나 이렇게 개방된 곳 뿐이야?”
뭐 뀐 놈이 성낸다고 동천이 바로 그러했다. 중소구가 잔말 말고 볼일이나 보라고 했지만 들은 척도 안 했다. 그는 잠자코 오줌을 갈겼다.
“어이, 시원하다.”
배출이라는 욕구에서 벗어난 동천은 나른한 기분에 도취되어 엷은 웃음을 띄웠다. 그러나 ‘큭큭!’ 거리는 중소구의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그의 기분을 확 잡치게 만들었다.
“왜 또 실없이 웃는 거죠?”
중소구는 동천의 거시기를 가리키다 배꼽을 잡고 드러누웠다.
“큭큭큭! 하이고, 중소구 죽네. 푸하하하! 저건 완전히 번데기가 아닌가!”
동천은 자신의 그것을 번데기로 치부하는 몰상식한 인간에게 큰 소리로 몇 마디 해주었다.
“쳇, 그렇게 말하는 댁은?”
“흐흐, 내 거?”
중소구는 기다렸다는 듯 바지춤을 까내렸다.
‘헉? 모, 몽둥이?’
기겁을 한 동천은 안 그래도 작은 것이 한없이 오그라드는 비참함을 느끼며 슬그머니 바지를 끌어올렸다. 설마하니 저 정도인 줄은 몰랐던 것이다. 조용히 앉아 시선을 반대편으로 돌리자 득의의 웃음소리가 동천의 귀를 파고들었다. 동천은 두 귀를 틀어막았다.
‘으으, 무시하자. 그게 크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무시하자, 무시해…….’
그날 동천은 꿈에서 검은 몽둥이가 쫓아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잠에서 깨어난 동천은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저절로 눈을 떴다. 보아하니 이른 아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몇 년 동안을 거르지 않고(물론, 부득이하게 건너뛴 적이 종종 있다.) 똑같은 시기에 운기조식을 하다 보니 몸에 배인 것이다. 아무리 밤낮을 구분할 수 없는 장소라고 해도 말이다. 무의식적으로 진기를 유통시키던 동천은 하단전의 묵직한 것이 전혀 움직일 생각을 않자 의아함보다는 당황함이 앞섰다.
“어?”
일단 당황 섞인 목소리를 냈지만 자신의 상태를 인지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맞아, 어제 하루 종일 시도했어도 꼼짝하지 않았지? 제기랄! 이제 어쩐다지?’
인상을 쓰자 어제 맞았던 곳이 아팠다. 아니, 아파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전혀 아프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서둘러 그곳을 만져본 동천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깨끗이 나아있던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사실에 그는 도연의 머리를 후려쳤다. 윽, 하는 소리와 함께 잠들어있던 도연이 깨어났다.
“무슨 일입니까.”
한 대 더 때리려고 주먹을 들었던 동천은 급히 손을 내리고 물었다.
“아프냐?”
도연은 양 눈썹을 미간으로 모았다. 마치, 주군 같으면 아프지 않을 것 같냐는 무언의 질문인 것 같았다. 동천은 그 속뜻을 충분히 풀이하고 자신의 오른쪽 눈을 만지작거렸다.
“봐봐, 다 나았다고. 운기조식도 안 했는데 자고 일어났더니 멀쩡하게 나았다니까?”
그제야 도연의 얼굴이 펴졌다. 주군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본 도연은 놀랍다는 반응을 고개 한번 끄덕이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그러나 그것은 동천이 바라고 있던 반응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몇 마디 정도 물어봐 주길 바랬던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아쉬운 놈이 먼저 말을 꺼냈다.
“너도 신기하지?”
“그렇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명상에 잠기자 또다시 동천이 말을 걸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금세 나은 줄 알아?”
도연은 마지못해 눈을 떴다. 주군이 이렇게 물어오는데 마냥 모른 척하고 있기가 좀 그랬던 것이다.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된 현상입니까?”
드디어 도연의 입에서 열의(?)에 찬 질문이 쏟아져 나오자 신이 난 동천은 흥분된 마음과는 달리, 고요한 눈빛을 들어 석실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래, 모든 것은 무(無)로부터 시작하는 것이야. 이 몸께서 맞기 전까지는 무였지만 맞고 난 다음은 유(有)가 되었지. 하지만 무에서 유로 갔다면, 유에서 무로 돌아갈 수도 있는 것 아니겠니? 그것을 믿고 잠을 청하자 이렇듯 말끔히 나은 것이다. 너는 본 주군이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지 잘 알겠느냐?”
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제 됐습니까?”
“응? 으응. 뭐, 이 정도면 됐다고 할 수 있겠지.”
떨떠름한 동천의 대답이 끝나자 도연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막혀있는 혈도를 풀어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 증거로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노력한 것에 비해 얻어지는 성과는 미비할 따름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정도로 정신을 집중시키고 있던 도연은 한계 상황에 다다르자 맥이 탁 풀리고 힘이 쏙 빠지는 듯한 경험을 맛보았다. 그는 긴장된 근육을 느슨하게 풀어냈다.
‘역시, 단시일 내로 성과를 바라는 것은 무리인가?’
깊게 숨을 들이 내쉬자 마치 높은 산에 올라갔을 때처럼 막혀있던 귀가 뻥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주위의 소리들을 차단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아울러 귀가 뚫리자 양옆에서 시끌벅적한 고함 공방전이 오고 가고 있었다. 자세히 들어보니 중소구 쪽에서는 ‘번데기 자식아!’ 정도가 주를 이루었고, 동천 쪽에서는 ‘미친놈의 인간아!’ 정도가 주를 이루었다. 도연은 서둘러 그들의 사이에 끼여들었다.
“왜들 또 다투십니까.”
동천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아 글쎄, 이 몸의 눈이 말끔히 나았던 이유를 설명해주니까 저 인간이 예의 없게 코방귀를 뀌는 거야! 너 같으면 화 안 나게 생겼어?”
중소구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본 대인의 말도 좀 들어보게. 세게 맞지 않아서 금세 나은 걸 가지고 무에서 유니, 그 따위 소리를 하는데 본 대인이 가만히 있게 생겼는가? 코방귀도 점잖은 거야, 이 번데기 놈아.”
“뭐, 뭐요? 정말 말싸움을 해보겠다는 거요?”
“해봐! 해봐 이 번데기 자식아! 그것도 거시기라고 달고 있냐? 본 대인 같으면 콱 죽어버렸어!”
“오오, 그러슈? 댁은 그렇게 잘나서 미친놈 소리 듣고 다녔소? 아주 소문이 파다해서 길 가는 거지들조차 당신을 꺼린다며? 왜 인줄 알아? 동냥하러 갔다가 오히려 빼앗길까 봐 무서워서 접근을 안 한다는 거야. 알기나 하쇼?”
“뭐라고? 내 이놈을…….”
“꼽냐? 덤벼봐! 때릴 수야 있겠냐? 덤벼! 덤…….”
도연은 현실감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이들 둘을 바라보며 과연 자신이 갇혀있는 것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말려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문득, 이러고 있는 자신이 처량하기까지 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상황에서 주눅 들지 않고 있다는 게 장점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도를 넘어선 것 같았다. 아무리 잘한다 해도 도가 지나치면 흉해 보이듯, 서로 헐뜯기에만 여념이 없는 이들 또한 그렇게 보였다.
사람은 싸우면서 정들기도 한다지만 이들은 특별히 원한진 일도 없었다. 그런데도 화합으로 이루어지기는 어려울 것만 같았다. 앞날이 막막해진 도연은 이럴 때일수록 자신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곤 다시 한번 정신을 집중시켰다. 처음이 어려울 뿐이지 정신을 집중하는 것은, 일단 성공하기만 하면 외부의 자극이 없는 한 본인이 원할 때까지 집중할 수 있는 것이 가능했다. 물론, 상당 기간 훈련을 받은 자들에 한해서 말이다.
‘먼저 굳어있는 하단전을 뒤흔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아주 미세한 흐름이라도 생성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머리로 생각하는 것은 쉽지만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지극히 어려웠다. 그것은 무공의 창시 과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마음 같아서는 자신이 원하는 각도로 움직여줄 것 같지만 실제로 시전 해보면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불가능해지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아, 움직이려고 한다.’
단단하게 굳어있던 흐름의 일부가 미세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바로 그때 누군가의 손이 그의 어깨를 뒤흔들었다.
“빨리 일어나! 그 할망구가 오고 있다고!”
그것을 끝으로 기의 흐름은 멈추었다. 도연으로서는 상당히 아쉬운 기회였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민낭이 오는 것이기에 군말 없이 일어나 두 손을 머리 위로 치켜올렸다. 곧바로 동천 일행에게 다가온 민묘희는 묵묵히 걸어 들어와 손에 들고 있던 횃불을 기존의 횃불과 바꿔치기 했다. 우측에 하나밖에 없는 것이라서 새로운 횃불을 걸어놓았다 해도 내부의 밝기에는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내심 그것이 불만이라면 불만이었던 동천은 그녀에게 용감히 말을 걸었다.
“저기요, 기왕이면 반대편 벽에 하나 더 걸어주시면 안 될까요? 반대쪽이 어두컴컴하니까 영 불편해서요.”
그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민묘희는 살짝 웃음 지으며 답했다.
“그것은 그럴 수가 없다.”
“왜요?”
잠깐 이채를 발한 민묘희는 작은 보폭을 움직여 동천에게 향했다.
“굳이 말하자면 두 개를 가는 것이 귀찮기 때문이다.”
동천은 웃는 낯으로 이를 갈았다.
‘겨우 그거 때문이야? 왜, 밥 처먹는 것도 귀찮다고 해보시지?’
그런 후 겉으로의 표정을 이어나갔다.
“그, 그러세요? 그렇다면 제가 참는 쪽으로 하죠, 뭐. 헤헤.”
민묘희도 조용히 따라 웃었다. 웃음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이니 말 그대로 조용히 웃는 것이다.
“헌데, 신기하게도 네 눈이 멀쩡하구나.”
그녀는 중소구와 도연조차 눈여겨보지 않는 것을 흥미롭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동천의 얼굴에 절로 웃음꽃이 피어오르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눈을 밤탱이로 만들었던 장본인이 민묘희였다는 사실조차 잃어버렸는지, 도연과 중소구에게 가르침을 내렸던 것처럼 그녀에게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전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말끔히 나은 것입니다.”
동천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 난 그녀는 실로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무유생성(無有生成) 유무환원(有無還元)이라. 저 아이의 심법과 관계된 듯한데 실로 그럴듯하구나.’
동천의 치우도법에 남달리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자신이 때린 강도를 알기에 내공도 없는 상태에서 이렇듯 멀쩡히 나은 것은 그 심법에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심법의 득의(得意)만으로도 엄청난 회복력을 보이자 더욱더 탐이 났다. 그러나 아무리 어린아이라 해도 비전절기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무턱대고 가르쳐달라고 해서 가르쳐줄 리 만무하지. 좀 더 작업을 거친 후에 물어봐야겠다.’
이는 동천을 몰라도 한참을 모르는 것이었다. 그냥 몇 대 때리고 부수적으로 공포감만 조성해도 만사 끝이라는 것을 그녀로서는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어쨌든 자리를 옮겨 중소구에게 다가간 그녀는 그의 막혀있는 혈도들을 다시 한번 찍었다. 동천으로서는 처음 보는 장면이었는데, 설마 했던 만성 폐혈법이 눈앞에서 시전 되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이고, 저 주안술 할망구가 진짜로 다시 혈도를 찍네? 이러다 정말로 평생을 내공 한번 사용해보지도 못하고 골로 가는 거 아냐?’
눈앞이 막막한 동천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민묘희의 감탄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호오, 제법 노력은 했나 보구나.”
중소구는 분노에 치밀어 오른 얼굴로도 용케 웃음을 지었다.
“큭큭, 노력이라고 할 것까지나 있나. 제압한 수법이 너무도 유치해 풀려다가 말았던 것이지.”
말은 그렇게 해도 남들이 모르는 동안(특히 동천) 알게 모르게 부단한 노력을 했던 것 같았다. 귀엽다는 듯 중소구의 볼살을 가볍게(?) 비틀어 꼬집은 민묘희는 자리를 이동해 도연의 혈을 제압했다. 그녀는 이번 또한 한마디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옆의 미친 녀석보다는 못하지만 네 나이를 감안할 때 대단하다고 할 수는 있겠구나. 노력하면 대성할 수 있겠어.”
듣다 못한 중소구가 소리쳤다.
“미친 녀석? 감히 요녀 따위가 본 대인에게 그 따위 망발을 늘어놓다니!”
짝!
민묘희의 손바닥이 매섭게 중소구의 뺨을 후려쳤다. 중소구의 얼굴에는 벌건 손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요녀라니. 내 분명 민낭이라 부르라고 했거늘.”
중소구는 오히려 두 눈을 부릅떴다.
“웃기지 마라 이 요녀야! 내 너 같은…, 크윽!”
민묘희의 주먹이 중소구의 안면을 뭉개버렸다. 아무 망설임 없이 때린 것으로 보아 상당한 충격이 예상되는 주먹질이었다. 그것을 목격한 동천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쾌재를 불렀고 말이다.
‘잘한다! 한 대 더 쳐! 아주 묵사발을 만들어 버리라구!’
그런 동천의 응원과는 상관없이 싸늘한 민묘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번 더 헛소리를 지껄이면 한쪽 눈알을 파버리겠다.”
이번 이야기는 좀 섬뜩했는지 중소구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분함을 참지 못하는 빛이 역력했다. 내심 몇 대 더 얻어맞기를 바랐던 동천은 입맛을 다시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그리고 순서에 따라 동천에게 다가온 민묘희는 동천의 혈을 점하다 말고 심히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왜 저따위 표정으로 이 몸을 보는 거지? 아하, 혈도를 풀려고 했던 흔적이 너무도 선명하여 당황하고 있는 것이로구나. 히히, 어디 저것들보다 멋지게 칭찬해 보라고.’
그러나 민묘희의 신형은 아무 말 없이 홱 돌아섰다. 그 돌아서는 모습이 어찌나 매몰찼던지 절로 살이 떨릴 정도였다.
‘어? 저 늙은 할멈이 왜 그냥 돌아서지?’
이럴 순 없다고 생각한 그는 재빨리 민묘희를 불렀다.
“저기, 민랑 여협님.”
민묘희가 동천을 바라봤다.
“민랑이라고만 불러라.”
동천은 높여줘도 지랄이라고 투덜거렸다. 당연히 속으로만 말이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상대의 뜻대로 해주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런데요, 민랑님 왜 저를…….”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종자로구나.”
“예?”
퍽!
뭔가 왔다 갔다 했던 것 같았다.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좌우로 뒤흔든 동천은 왜 자신이 맞아야 했는지 이해를 할 수 없었다.
“왜 때려요? 민랑이라고만 하라고 해서 그렇게 불러줬는데?”
그러자 옆에서 도연의 말이 이어졌다.
“깨어나셨습니까?”
동천은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이번엔 왼쪽 눈이 시큰거렸다. 그때서야 그는 깨달았다.
“뭐야, 또 기절했었어? 아야야.”
인상을 쓴 바람에 맞은 눈이 아팠던 것이다. 그가 왼쪽 눈을 부여잡고 있을 때 중소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