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363화
“저기, 민낭님.”
민묘희는 싸늘히 입을 열었다.
“민낭이라고만 불러라.”
소연은 토끼눈을 뜨고 어찌할 줄을 몰라했다.
“예? 하,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민묘희는 잠깐 멈추어 서서 소연을 노려보았다.
“난 너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냥 내가 명하는 대로 따라 하거라.”
소연은 절로 움츠러드는 자신을 느꼈지만 움직이려는 입술을 굳이 멈추려하지 않았다.
“제가 무공을 제대로 시전하지 못하여 의심하시는 건가요? 그런 거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참으로 말귀를 못 알아듣는 아이로구나. 네가 언니의 제자라는 사실은 의심하진 않지만 난 네가 언니의 제자라는 것을 개인적으로 인정하기 싫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 사고라는 호칭도 듣기 싫다는 것이고.”
소연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이제 천하에 혼자이다시피 한 자신인데 그나마 이어진 연줄의 상대가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니, 두렵고도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어, 어째서. 어째서 그러한 말씀을…….”
민묘희는 안 그래도 골치 아픈 문제가 산재해있는 이 마당에 혹 덩이 같은 소연이 말귀를 못 알아듣자 화가 날 것만 같았다.
“아직 확정된 것이 아니지만 만일 이곳에서 머물게 된다면, 아니 단 일각이라도 이곳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중이라면 앞으로 명심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내가 명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아까의 말처럼 민낭이라고만 불러달라고 했으면 거기에 굳이 님 자를 붙이지 말고 네 귀로들은 그대로 민낭이라고만 하란 말이다. 알겠느냐?”
소연은 겁에 질려 울음까지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확인하고 난 민묘희는 턱짓으로 안고있는 화정이를 가리켰다.
“이 아이는 어째서 기절해 있는 것이냐. 보아하니 내외상을 입은 흔적은 없거늘.”
“그, 그것보다 먼저 아셔야 할 일이…….”
민묘희는 눈살을 찌푸렸다.
“또 울려는 것이냐? 정말 눈물이 많은 아이로구나. 난 칠칠맞게 아무 때나 눈물을 흘리는 계집 따윈 필요 없으니 언성을 높이기 전에 울음을 그쳐라.”
소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움찔거리며 눈가를 닦았다.
“예에…. 하지만 사부님의 일을 말씀드려야 하기에.”
어느새 중앙 통로에 다다라 열 십자로 나있는 길에서 왼쪽 방향으로 신형을 튼 민묘희는 소연보다 한 박자 빠른 발걸음으로 나아갔다.
“그래, 많이도 늙었겠지. 언니는 의외로 늙는다는 것에 미련이 없었으니까. 형부는……, 잘 계시겠지?”
소연은 미온적인 태도로 말문을 열었다.
“본문으로 돌아가시는 것까지 보았지만 그 뒤는 잘 모르겠습니다.”
마침내 앞서가던 민묘희의 고개가 소연에게로 향했다.
“너는 본문에서 온 것이 아니었더냐?”
“예에, 소녀는 암흑마교에서…….”
“암흑마교?”
갑자기 민묘희가 짤라 들어오자 긴장해 있던 소연이 화들짝 놀랬다.
“그, 그렇습니다. 소녀는 그곳 약왕전의 소전주님 시녀로 있었습니다.”
민묘희가 바로 물었다.
“그곳에 어째서 형부가 계셨던 거지? 가만, 네가 그곳의 시녀였다는 이야기는 내 언니도 같이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자세히 말해보거라.”
이제야 본론을 꺼낼 수 있게 되자 말하기에 앞서 전신의 맥이 탁 풀리는 소연이었다. 그녀는 사부님의 죽음부터 말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처음의 이야기부터 말해줘야 할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을 했다. 그러나 심약한 그녀의 성품으로 인해 처음부터 말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야기를 시작하며 조금 걸어가자 방문이라고 하기엔 조금 의심스러운 석벽(石壁)이 나타났다. 소연은 두꺼운 돌문을 밀어 제친 민묘희 덕분에 그것이 문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정도였다.
그나마 제대로 된 침상에 화정이를 눕힌 민묘희는 소연을 침대 모서리에 앉게 했고, 그녀 자신은 삐걱거리는 의자를 가져와 마주 앉았다. 그렇게 그녀는 소연의 긴 이야기를 들었다. 비록, 중간쯤 넘어가면서 소연이 눈물을 내비쳤지만 이야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는 그 눈물을 펑펑 쏟아냈지만 하얗게 질려버린 민묘희의 안색은 그것들을 충분히 묵과하고도 넘칠 지경이었다.
“뿌드득!”
솜털이 곤두설 정도로 이가 갈리는 소리였다. 탈색된 얼굴과는 달리 은은한 청광을 내비치는 민묘희의 두 눈은 마주 앉은 소연으로 하여금 냉기를 머금게 하였다.
“그래서, 그래서 그곳에 나의 언니가 묻혀있다는 말이냐?”
“흑흑, 네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방안에는 오직 소연의 훌쩍이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 자리에서 일어난 민묘희는 아무 말 없이 방을 나섰다. 처음 걸음을 옮길 때 약간 상체가 흔들리는 것으로 보아 심각한 심경의 변화를 겪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소연은 그저 퉁퉁 부은 눈으로 그녀의 등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크게 소리 내어 울어버리고 싶었다.
“흑흑, 사부님. 주인님. 엉엉!”
내내 울어대는 통에 더 이상 나올 눈물도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인간의 구조상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었다. 얼마나 울었을까? 사물이 희뿌옇게 보이자 눈물을 닦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여전히 시야가 형편없었다. 나중에야 깨달은 거지만 하도 운 탓에 부어오른 눈이 시야를 가린 것이었다. 눈물이 앞을 가리는 경우는 몇 번 겪어봤어도 부은 눈이 앞을 가리는 경우는 처음 겪어본 소연이었다.
“아아, 이제 나는 어쩌지? 혼자서 해낼 자신이 없어. 자신이 없어, 화정아.”
무심결에 중얼거리고 보니 화정이의 존재가 떠올랐다. 재빨리 화정이에게 고개를 돌린 그녀는 질척한 느낌에 자신의 옷을 매만져보았다.
“긴장하고 있던 탓에 비를 쫄딱 맞았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구나. 아, 그렇다면 화정이도 비를 맞았는데 이를 어쩐다지? 아무리 강시라지만 환자는 환자인데 말야. 어서 옷을 갈아 입혀야…. 어?”
화정이의 옷은 의외로 뽀송뽀송했다. 단지 습한 것이 조금이나마 느껴질 따름이었다. 그녀는 화정이를 업고 온 조정광이 빗속에서 그녀를 보호해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혼자 비 맞은 꼴이 되고만 소연은 처량 맞게 한숨을 내쉰 뒤 갈아입을 옷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찾아볼 필요도 없었다. 을씨년스러운 방안에는 침대 하나와 식탁과 의자 하나. 그리고 형식적으로 한쪽 구석에 처박아 놓은 짐짝 하나가 전부였다.
짐짝 안에는 다행스럽게도 옷이 몇 벌 들어있었다. 하지만 옷이 상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일 정도로 오래 묵혀둔 냄새가 코를 찔렀고, 그것이 남성용 옷이라는 것에 조금 문제가 있었다. 아무리 비위가 좋다 해도 도저히 그냥은 입지 못할 것만 같았다. 알몸으로 저잣거리에 내쫓겨야 하는 신세가 아니라면 모를까. 그녀는 방안을 두리번거렸다.
“어디 빨래를 할 곳이…… 있을 리가 없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슬픔에 못 이겨 통곡을 했던 자신이었다. 그녀는 그러했으면서도 빨래할 곳을 찾아 나서려는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후우! 아까 전 진법에 잘못 빠져들지만 않았어도 행랑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을 텐데.”
그녀를 구한 조정광이 진법을 파괴하는 바람에 행랑까지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었다. 진법에서 헤매는 것보다 구출되어 무사히 나온 것이 백번 생각해도 다행인 것이지만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주섬주섬 옷가지를 품안에 안은 소연은 희미한 빛이 비춰드는 방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어둠에 익숙해져있긴 했지만 드문드문 걸려있는 횃불들은 그녀가 원하는 만큼 주위를 밝혀주지 못했다. 문득, 횃불의 따스함을 잠시 생각하자 부르르 몸이 떨려왔다. 추운 공기가 그녀를 자극했던 것이다.
“어, 어떻게 하지?”
그녀답게 막상 일을 실천하기에 앞서 갈등을 때리고 있었다. 이어 깊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옷가지들을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고 자신의 옷들을 벗어 식탁 위에 펼쳐놓았다. 상상 외의 추위가 몰려왔다. 속옷만을 남겨둔 채 재빨리 침대 속으로 몸을 피신한 그녀는 화정이를 바싹 부둥켜 안았다. 처음에는 여전히 추웠지만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따스한 화정이의 체온이 그녀 쪽으로 흘러 들어왔다. 따스함이 느껴지자 그간의 피로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그리고 정해진 수순에 따라 졸음이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거부하지 않고 눈꺼풀을 감았다.
“주인님…….”
그녀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으아아악! 헉헉!”
동천이 멱 따는 비명을 질러대자 모두들 잠에서 깨어났다. 특히 오늘 하루 먹을 것이 들어오지 않아 신경이 날카로워진 중소구는 그에 합당한 날카로운 목소리를 발했다.
“또 야? 네놈은 지치지도 않더냐?”
동천은 후줄근히 젖어버린 이마며 목 언저리를 닦고 난 뒤, 그 또한 날카롭게 반응했다.
“내가 악몽을 꾸고 싶어서 꾸는 줄 아슈? 가뜩이나 배고파 죽겠는데 거 더럽게 지랄이네.”
그는 요즘 들어 가끔 폐혈서생이 나타나는 꿈을 꾸었다. 예전에 그를 죽인 후 며칠 동안 꿈에 등장하긴 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헌데, 그렇게 잊혀졌던 인간이 요새 들어와서 자꾸만 꿈에 나타나 그의 두개골을 부수는 것이었다. 동천은 짜증난 김에 자신에게까지 화를 냈다.
“젠장, 강철 같은 의지 하나로 버텨온 이 몸인데 두어 달 갇혀 몸이 허하다 보니 정신력이 많이 쇠퇴했나 보군. 그나저나 이 할망구는 뭐 하고 있는 거지? 하루가 지났어도 깜깜무소식이라니, 그게 인간으로서 할 짓이야?”
도연이 옆에서 그런 동천을 달랬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시면 될 겁니다. 설마하니 이틀을 거를 리가 있겠습니까.”
동천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지만 왠지 감이 안 좋았다.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어제부터 속이 울렁거렸다.
“어제 낮잠을 즐기다 따끔한 느낌에 잠을 깼는데 그게 예지력의 한 부분인지 아닌지 그게 아직까지도 헷갈린단 말야?”
중소구가 그새를 못 참고 걸고 넘어졌다.
“독한 모기가 물었나 보지.”
“거 좀 잠자코 있으쇼! 그렇게 입이 근질거려? 한 대 쳐줄까?”
중소구는 하도 어처구니가 없자 동천에게 삿대질을 해가며 목청을 높였다.
“저런 되먹지 못한 놈을 봤나! 이젠 아주 막 나가는구나!”
동천은 먼지가 날리도록 풀썩 누웠다.
“떠들든지 말든지.”
자신은 하고 싶은 말을 실컷 다했으니 미련이 없다는 뜻이었다.
“저, 저! 끄응!”
이렇게 되면 언제나 손해 보는 쪽은 중소구 쪽이었다. 한순간의 잘못으로 동천을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조했던 것이 이렇게 일방적인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다. 안 보면 그만이지만 지금 상황이 어디 안 본다고 보이지 않을 그러한 상황인가? 그의 속이 부글부글 끓는 가운데 입을 다물었던 동천이 소리 질렀다.
“으아 배고파!”
소연은 잠에서 깼다. 그녀는 잠이 덜 깬 얼굴을 하고 벌떡 일어섰다.
“네! 네에, 금방 밥을 차려……, 꿈이구나.”
간만에 주인님의 꿈을 꾸었다. 먹을 것이 없는데 자꾸만 밥을 차려달라고 그녀를 괴롭혔다. 꿈에서라도 주인님을 만나 즐거웠지만 그 나머지 부분들은 전혀 즐겁지가 않았다. 잠들기 전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했던 걱정은 기우였다. 배고픈 것만 빼고는 가뿐한 상태인 것이다.
침대에서 나와 식탁의 말린 옷을 집어 들자 다소 축축함이 느껴졌다. 혹 누구라도 볼까 싶어 재빨리 옷을 입었지만 좀처럼 찜찜한 느낌이 떠나질 않았다. 여전히 깨어나고 있지 않은 화정이의 얼굴은 창백한 듯하면서도 발그레했다. 표면적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는 상태인지라 소연에게 있어서는 그나마 마음이 놓이는 부분이었다. 자리를 잡아 간단하게 운기조식을 끝낸 그녀는 한결 개운해진 몸과 마음으로 일어섰다.
“사고님…, 아니 민낭님께서는 어디에 계시는 것일까?”
얼마 동안 잤는지 알 길이 없는지라 그녀로서는 지금이 밤인지 낮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심한 충격을 받아 자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사람의 일이란 모르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지금이 밤이어서 주무시고 계실 수도 있는 것이다. 조심스레 주위를 살피며 방문을 나선 그녀는 중앙 통로로 가지 않고 자신의 방 복도 끝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곳으로 가는 것은 민묘희와의 방과 멀어진다는 의미이지만 소연도 그런 것쯤은 알고 있었다. 사고의 방을 찾기 전에, 자신이 기거하고 있는 통로의 구조 정도는 미리 알아놔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또한 그런 와중에 부엌이나 빨래터를 겸한 곳을 찾을 수 있다면 더 좋고 말이다.
“의외로 통로가 깊구나. 그에 비해 구조는 간단한 것 같고. 설마 이 동굴의 길은 열 십자로 나있는 길들이 다가 아니겠지?”
어느 순간 주위가 급격히 어두워졌다. 막다른 길에 다다른 줄 알고 걸음을 멈춰 선 그녀는 중간에 횃불 하나가 꺼져있는 것을 발견했다. 꾹 참고 지나쳐 가면 다시 밝은 곳에 다다를 수도 있었지만 왠지 겁이 나서 그만두기로 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좌우 일정한 간격으로 방들이 늘어서 있었다. 어느 곳은 깨끗이 비워져 있었고, 어느 곳은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 건지조차 알 수 없는 물건들이 듬성듬성 놓여진 곳도 있었다.
기분이 나빠진 그녀는 천천히 걸어왔던 것과는 달리 왔던 길을 뛰어서 되돌아갔다. 자신이 기거한 방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화정이를 보고 나서야 안심이 되었다. 그녀는 소담스럽게 솟아오른 가슴에 한 손을 지그시 얹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괜찮아. 하나도 무섭지 않다고. 사부님께서 나를 지켜주시고 계실 거야.”
의지를 고무시키는 것까진 좋았지만 막상 혼령이 된 사부님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두려운 마음에 주위를 두리번거리게 되었다. 아무리 존경하는 사부님이라 해도 혼령이란 존재가 무서운 건 무서운 거였다.
“성불하소서. 부, 부디, 성불하셔서 저를 도와주소서.”
그렇게 차선책을 써서 중앙 통로로 걸어간 그녀는 원하는 곳에 다다르자 어디로 갈까 잠시 고민했다.
“지금 내 쪽에서 오른쪽은 밖으로 나가는 통로이고, 뒤쪽은 화정이와 내 방. 그렇다면 앞쪽과 왼쪽만이 남아있는데 어느 쪽으로 가야 할까?”
그녀는 한참을 끙끙거렸다. 그렇게 고민만 하다가는 해결될 일도 짜증을 내며 그녀에게서 물러날 것만 같았다.
“좋아, 앞으로 가는 거야. 주인님이라면 분명히 그렇게 하셨을 거야.”
“나?”
동천이 그렇게 묻자 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주군이라면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제는 대놓고 주군이라 불렀다. 그 문제에 관해서 중소구가 집요하게 파고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고작 도연이 가르쳐준 것이라고는 ‘원래 주군이셨습니다.’ 그거 하나뿐이었기에 그로써는 입맛을 다시며 그런가보다 해야만 했다. 도연의 성격을 알기에 그쯤에서 포기한 것이었다. 어쨌든 동천의 말이 이어졌다.
“물론 이 몸 같으면, 정면보다는 옆으로 돌아가는 것을 즐겨하지. 괜히 앞으로 나섰다가 인생 종치는 인간들을 몇몇 본 적이 있거든. 그러니까 너도 조심해.”
“주옥같은 말씀 감사합니다.”
기분이 좋아진 동천은 어깨를 으쓱했다.
“훗, 뭘 그 정도 가지고. 그보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진법 속으로 저 인간을 따라 들어간 것은 병신 같은 짓이었어. 수하가 주군을 지켜야지, 안 그래? 별 영양가치도 없는 놈을 구하겠다고 들어간 것은 수하 된 도리를 저버리는 행동이었다고. 막말로 네가 그곳에 들어가지 않고 우리 둘이서 협공을 했었더라면 상황이 어떻게 변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란 말야. 이해하겠어?”
도연은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그 점에 관해서는 항시 죄송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제가 좀 더 냉정했더라면 다른 방법을 모색했을 텐데…….”
그때 중소구가 소리쳤다.
“이 빌어먹을 놈아! 뭐? 별 영양가치도 없는 놈? 뚫린 입이면 다 그따위로 말해도 되는 것이냐?”
동천은 다시 풀썩 누웠다.
“떠들든지 말든지.”
“크아아악! 본 대인이 여기에서 이렇게 미쳐가는구나!”
역시 그가 말발로서 동천을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리라.
앞으로 계속 나아간 소연은 처음으로 닫혀있지 않은 방을 보았다. 아니, 문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도 않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은 그녀가 찾아 헤맸었던 곳 중 한 곳이기도 했다.
“여기가 부엌이로구나. 아니, 한쪽은 약재의 제조실이고 나머지는 부엌이라고 해야 하나?”
여러 약탕기들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하얀 종기 그릇들에 가득 담겨있는 형형색색의 약재들도 살펴본 그녀는 여러 약재들 중 메스꺼운 향기가 발하는 것들이 있자 급히 떨어졌다. 만독문의 사람이니 ‘혹시, 독초 같은 것도 섞어놓은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일었던 것이다.
“우선 부엌은 알아냈으니 이제 민낭님의 거처를 찾아봐야겠다.”
밖으로 나선 그녀는 의외로 민묘희를 금방 찾아냈다. 다음에 찾은 곳이 민묘희의 방이었던 것이다. 방안은 어질러져 있었고, 흐트러진 모습으로 침대 위에 앉아있는 민묘희의 눈동자는 초점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소연이 그녀의 백발을 처음 보았을 때는 그래도 반질반질 매끄러워 보였지만 지금의 머리칼은 푸석푸석한 것이 건드리면 그대로 부서져 내릴 것만 같았다. 조심스러워진 동작으로 가까이 다가간 그녀는 행동만큼이나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어, 민낭…. 민낭…이임.”
뒤에 님 자가 모기 소리처럼 튀어나와 흐지부지하게 끝을 맺었다. 그녀로서는 도저히 반말 조로 부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에 평소 같으면 호된 질책이 터져 나왔겠지만 민묘희는 별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좀 더 앞으로 다가가던 소연은 그만 부서진 조각을 잘못 밟아 중심을 흐트러트리게 되었다.
“앗, 아앗!”
중심을 잡기 위해 양팔을 파닥거렸다. 그러나 기울어지기 시작한 그녀의 몸뚱이는 멈출 용의가 없는 모양이었다. 결국, 앞으로 고꾸라진 그녀는 우습게도 민묘희의 품에 파고든 형국이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민묘희가 정신을 차리게 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고 말이다.
“…….”
“…….”
무심히 시선을 내리 깐 민묘희는 소연의 작은 눈망울을 쳐다보았다. 그 눈망울은 여차하면 눈물을 쏟아낼 것만 같았다.
“…뭐 하는 짓이냐.”
너무도 놀라 다리에 힘이 빠진 소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변명을 늘어놓아야만 했다.
“저, 저기, 저기 그게요. 이, 일부러 이런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참이더냐.”
소연은 언제 다리가 풀렸냐는 듯 제3의 의지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허리를 숙여 용서를 비느라 정신이 다 없을 지경이었다.
“용서해주세요. 이,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요. 사고님을, 아니. 민낭님을…, 아, 아니. 흑흑, 민낭…을 부르려고 온 것인데, 온 것인데……. 흑흑흑!”
결국 그녀가 울음을 터트리자 화낼 기운도 없었던 민묘희는 그만 끝내기로 했다.
“됐다. 온 용건이나 말하거라.”
어느 정도 민묘희의 분위기에 적응한 소연은 급히 눈물을 머금고 차근차근 말을 꺼냈다. 그래야 훌쩍거리지 않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우선 빨래를 하고 싶은데 찾을 수가 없고요. 부엌은 찾았는데 음식이 없습니다. 또 간간이 횃불들이 꺼졌는데, 아? 이건 상관없는 겁니다. 제가 찾아온 용건은 이 정도입니다.”
순간 민묘희가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설마 따로 모아놓은 약재들을 건드린 것은 아니겠지?”
소연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요! 저는 허락 없이 함부로 만지지 않습니다.”
민묘희는 믿는 듯 보였다.
“좋다. 첫째, 빨래터는 없지만 식수로 사용하는 곳은 동굴 바로 오른편에 있다. 그곳에서 약수가 흘러나오니 빨래를 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다. 조심할 것은 멀리 나가지 말라는 것이다. 행여 호기심에라도 멀리 나갔을 시에는 독충이나 독물들에게서 보호받을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라. 둘째, 부엌의 음식은 좀 더 안으로 들어가면 된다. 그러면 왼쪽의 통로가 보이고 그 안쪽은 냉동고 역할을 하고 있으니 풍족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끼니는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횃불의 교체는 안 그래도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오늘 나갔다 돌아올 것이니 그리 알면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길을 잘못 들었다 해도 함부로 건드리거나 만져서는 아니 된다. 알아들었느냐?”
소연은 숨을 죽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민묘희가 지체 없이 질문을 했다.
“허면, 이번엔 내가 묻겠다. 넌 이제 암흑마교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것이겠지?”
차디찬 그녀의 목소리는 단칼에 베어버릴 정도로 단호했다. 오싹함을 느낀 소연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떼어냈다.
“그, 그것은 어째서 묻는 거죠?”
민묘희는 잠시 침묵을 지킨 후 대답해주었다.
“차후 힘을 길렀을 때 암흑마교에 관련된 모든 무리들은 처참하게 죽여버릴 것이다. 나는 그 집단에 네가 포함되길 바라는지, 아닌지를 묻는 것이다.”
“만일….”
“만일! 네가 암흑마교의 사람이길 원한다면 가차 없이 베어버릴 것이니라.”
두려움에 주춤 물러선 소연은 주인님을 생각해서라도 버텨보아야 하지만 이미 암흑마교에서 그녀를 버렸고, 그녀가 없다면 주인님께 돌아가야 할 화정이가 큰일 나게 되므로 어쩔 수 없이 대세에 따라야만 했다.
“저는 이제…, 암흑마교와 인연이 없어요.”
소연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자 민묘희의 안색이 다소 풀어졌다. 그녀는 갑자기 뜬금 없는 질문을 했다.
“요리는 할 줄 아느냐?”
소연은 빨래를 아주 잘했다. 윗분의 비위도 그만하면 잘 맞춰주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녀는 또 기억력도 우수한 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음씨가 고왔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하고픈 말이 뭐냐하면 그런 그녀에게도 옥의 티가 있다는 말이었다.
“그거야 조금…….”
민묘희는 두말할 것도 없이 결정을 내렸다.
“조금이라도 할 줄 알면 됐다. 어차피 잘 차려줘서 먹일 놈들도 아니니까.”
소연은 눈을 크게 떴다.
“예? 먹일 놈들이라니요? 무슨 말씀이신지…….”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라 여긴 민묘희는 숨김없이 말해주었다.
“중앙 통로에서 일직선으로 들어가면 막다른 곳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그곳에 가보면 철문들이 있는데 몇 달 전 함부로 침입한 여섯 놈들을 잡아두었지. 그냥 열면 열리게 되어있으니 그 녀석들에게 밥을 지어서 먹이라는 얘기다.”
민묘희의 대답에 소연이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아무 잘못도 없이 잡혀 들어오다니, 불쌍해요. 어째서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놓으셨죠?”
민묘희는 나직이 웃었다. 그러나 그녀의 웃음은 비웃음에 가까웠다.
“불쌍해? 무고한? 너는 내가 아무 이유도 없이 잡아놓고 있다고 보느냐?”
“그건 아니겠지만…….”
대답하는 표정으로 보아 쉽사리 수긍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민묘희는 말했다.
“그 자들은 모두 무림인이다. 그리고 이곳에 들어오기에 앞서 내 경고를 보았음에도 무시하고 들어왔지. 그렇다면 그만한 각오가 되어있다는 말일 터. 물론, 평생을 가둬두려는 것은 아니다. 어떤 놈들은 몇 년, 어떤 것들은 일, 이년 혼쭐을 내준 뒤 돌려보낼 생각이지. 그러니 그만한 것도 수용하지 못하겠거든 그만두어라.”
선뜻 내키지 않은 이야기지만 풀어준다는 말이 나왔던 만큼 소연으로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재빨리 대답했다.
“아, 아니오. 하겠습니다.”
“좋다, 그 녀석들과 쓸데없이 얘기를 나눌 생각은 말고 식사를 건네주거든 그냥 나오 거라.”
“예, 민랑님. 아, 아니 민랑.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가벼이 고개를 끄덕여준 민묘희는 소연이 나가고 나자 다시금 표정을 지웠다.
“언니….”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만큼은 슬픔에 젖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