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368화
“이곳인가?”
암흑마교 교주인 냉소천의 물음에 마차를 세운 가는 눈썹의 노인은 힘있게 대답했다.
“예, 교주님. 이제 다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본격적으로 범정산(梵淨山)에 도달하시려면 이 마차로는 더 이상 무리입니다. 천천히 행보하시면 이틀이 걸리옵고, 귀찮으셔도 힘을 쓰시면 한 시진 만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어쩌겠냐는 물음이었다. 냉소천은 느긋하게 자신을 보필하고 있는 또 한 명의 노인에게 물었다.
“염홍(廉紅). 현아의 서찰로 보면 중대한 일인 것 같긴 한데 자네는 어떠한가.”
흑의를 걸치고 있었던 노인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모든 일에는 확실한 것이 좋다고 생각되옵니다.”
“그래그래, 힘을 좀 써보자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냉소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얼굴로 천천히 마차에서 내렸다. 그는 산세가 험준하기로 소문난 귀주에서 손꼽히는 범정산 쪽을 바라보았다. 절로 낮은 휘파람이 나왔다.
“이런 곳인데 처음의 수색대는 그곳을 잘도 찾아냈군.”
적의(赤衣)를 입은 가는 눈썹의 노인은 뒤따라온 몇몇 수하들에게 마차를 맡긴 뒤 냉소천을 안내했다. 주위의 경물(景物)들을 밀어내며 막힘 없이 쭉쭉 나아가던 그들은 예측했던 시간보다 약간 빠르게 범정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잠시 멈춰선 냉소천 일행은 다소 거칠어진 숨결을 진정시켰다. 그들도 사람인 이상 힘들기는 매한가지인 것이다.
“들어가시죠.”
그들은 세찬 바람이 불어 닥치는 협곡 사이로 몸을 움직였다. 안쪽으로 한참을 들어가자 경계를 펼치던 무사 넷이 튀어나왔다.
“누구냐?”
염홍은 패를 들어 보여주었다. 그제야 냉소천 일행의 정체를 파악한 그들은 급히 엎드려 인사를 올렸다.
“소인, 교주님과 장로님들을 뵈옵니다!”
“교주님과 장로님들을 뵈옵니다!”
적의의 노인은 차갑게 명했다.
“가서 소교주님께 전갈을 띄워라.”
“조, 존명!”
그들을 뒤따라가자 얼마 안 있어 냉현과 흑혈이살이 그들을 영접했다.
“오셨습니까, 아버님.”
“교주님과 사부님들을 뵈옵니다.”
그리고 꼽사리로 나온 총감독관 서당주(西堂主) 선호균(宣虎菌)이 엎드리다시피 허리를 숙였다.
“여기까지 오시는데 아무 조치도 취하지 못한 점을 용서해주십시오.”
냉소천은 인사치레로 괜찮다고 대답해주었다. 아들의 인도를 받아 동굴의 내부로 들어간 그는 처음 와본 곳이라 그런지 가슴이 뛰는 것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교주라는 신분답게, 겉모습만으로는 어떠한 심중을 품고 있는지 그 진의를 파악할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내부로 들어가며 아들인 냉현에게 기관 장치의 발동과 제어 부분을 꼼꼼히 들었지만 정작 냉소천은 새겨듣지 않았다. 그가 다시는 이곳에 찾아올 이유가 없을뿐더러 이러한 것은 대동하고 온 장로들이 다 알아서 숙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복잡한 기관 장치들을 눈여겨보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냉현에게 있었다.
“그만하면 충분하다. 이 모든 것들은 지나치듯 보아도 아주 훌륭하다. 만약 이 아비라 해도 사전지식이 없다면 아주 위험할 것 같구나. 허나, 네가 이 시기에 아비를 부른 것은 고작 이러한 것을 선보이기 위함이 아닐 터.”
냉현은 설명을 그치고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서찰에는 아주 중대한 일이 벌어진 듯했는데 내부는 너무도 조용하구나. 어찌된 일이냐.”
아들을 바라보는 냉소천의 눈빛은 대답여하에 따라 아무리 아들이라 해도 각오를 해야 할 것만 같은 차가움이 담겨져 있었다. 그 눈빛에 냉현의 얼굴이 굳어지려는 찰나 냉소천의 안광이 불을 내뿜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장로들이 냉소천을 호위했다.
“거기 누구냐!”
그의 시선이 멈춘 좌측 통로에는 청수한 용모의 노인이 기척 없이 서있었다. 아무도 느끼지 못한 사이, 불과 지척에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냉소천과 장로들이 눈치챘으니 망정이지, 그가 아니었다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서야 뒤늦게 알아차렸을 것이 분명했다.
“허허, 역시 암흑마교의 교주와 선대의 흑혈이살답구려. 본인의 기척을 이리도 빨리 잡아채다니.”
노인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는 냉소천 일행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러나 놀라긴 했어도 냉현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은 그다지 경계하는 태세가 아니었다. 뒤늦게 그것을 눈치챈 냉소천은 가늘게 입술을 뗐다.
“저분은 누구시더냐.”
냉현은 뒤이어 벌어질 상황을 즐기려는지 느긋하게 가르쳐주었다.
“제가 아버님을 이곳으로 청한 이유는 바로 저분 때문입니다. 이곳에서의 대화는 좀 그런 것 같으니, 우선 안으로 들어가신 후 인사를 나누시죠.”
냉소천은 적의(敵意)를 가라앉히고 냉정히 고개를 끄덕였다. 실로 가슴이 철렁할 정도의 충격을 받았기에 심리적인 안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도록 하마.”
은연중 서로를 경계하며 통로를 걸어간 냉소천과 노인은 경비가 삼엄한 곳에 이르러 잠깐 멈추었다. 무사들이 허리를 숙이고 길을 터주자 비교적 넓은 석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버님, 이곳은 괜찮지만 나중에라도 주위의 것들을 만지는데 있어 주의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하나하나 위험한 것들이니까요.”
“으음, 그러마.”
아들의 당부를 받고서야 자리에 앉게 된 냉소천은 마침내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노인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뭣이? 당신이 그!”
주먹이 으스러져라 거머쥔 냉소천은 하마터면 교주의 위상을 무너뜨릴 뻔했다. 진정한다시고 이를 악물었지만 안면이 꿈틀거리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허허, 본인이 틀림없으니 의심일랑 거두어주시기 바라오.”
냉소천은 단어 하나하나를 분해하듯 또박또박 말했다.
“의심이라니. 그럴 리가 있겠소? 내 사람 보는 눈만큼은 정확하니, 걱정일랑 거두어주시기 바라오.”
노인은 상대가 자신과 비슷하게 받아치자 뜻 모를 웃음을 머금었다.
“좋소, 좋소. 워낙 두문불출하시는 분이라 이렇듯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만나게 되었지만 본 제갈(諸葛) 모(某)는 피할 생각이 없소이다. 교주께서는 어떠하시오?”
냉소천은 잠시 생각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들어봐야 알겠지만 심기로서는 도저히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우선은 맞장구를 쳐주고 중대사는 천천히 결정하는 것이 최선책이리라.’
“이 냉 모는 이렇게 귀하신 분을 뵌 것만으로도 운명이라고 봅니다. 그전에 잠깐….”
제갈 노인에게 양해를 구한 냉소천은 모두에게 나가라는 전음을 띄웠다. 모두가 물러가는 와중에 장로들이 남아 있기를 자청했지만 냉소천으로서는 허락할 수가 없었다. 수뇌부끼리의 중대사에 상대가 혼자 왔거늘 어찌 그가 호위를 둘 수 있겠는가. 이는 예의가 아닌 것이다. 마침내 모두가 물러가고 단둘이만 남게 되자 노인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공간은 넓거늘 그에 비해 둘뿐이니 조금 어색하구려.”
“그러시오니까? 저는 신기(神奇)께서 너무도 커 보여 그런 느낌을 못 받았소이다.”
“허허, 너무 추켜세워 주시는구려.”
제갈 노인은 이야기가 겉돌고 있자 본격적으로 본론에 들어갔다.
“그건 그렇고, 실로 의외였을 것이요.”
냉소천은 웃음을 거두고 말했다.
“그렇소. 이곳 천마동(天魔洞)에서 제갈여휘(諸葛呂揮)님을 보게 되리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신기 제갈여휘. 신무제(神武帝) 우연승(宇沿昇)과 더불어 정도의 지주로 불리는 자. 24-5년 전 홀연히 사라져 수많은 의혹을 낳았고, 제갈세가의 위세를 황룡 세가에 건네주게 만든 바로 그 장본인. 그런 그가 이런 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냉소천과 눈을 마주친 그는 빙긋 웃었다.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소. 천마동의 내부를 개조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구멍을 뚫고 나타났으니 어찌 놀라지 않았겠소. 예전부터 의심은 해왔었지만 설마하니 천마도해가 두 장이었을 줄이야. 그리고 그 두 장이 합쳐져야만 완전한 의미로 천마동이 되는 것일 줄이야. 훗, 우연이라고 하기엔 조금 냄새가 나지만 이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따르고 싶은 것이 이 제갈 모의 심정이라오.”
눈을 크게 뜬 냉소천은 침중한 신색으로 붉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으음, 역시 두 장이었나? 이것 참, 내 너무도 모른 채 제갈여휘님을 대하고 있으니 실로 당황스럽군요.”
제갈여휘는 여유 있게 말했다.
“허허, 그럴 겝니다. 그럼 지금의 대화를 잠깐 미루도록 할까요?”
냉소천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그렇게 하지요. 정확히 반 시진 후에 다시 뵙겠소이다.”
“알겠소이다.”
인사를 나누고 석실을 벗어난 냉소천은 분노한 얼굴로 아들을 찾았다.
“네 이놈, 어찌 이렇게 중대한 사안을 놓고 일 처리를 허술하게 했느냐! 서찰에는 신기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 또한, 또 다른 천마동에 관해서도 언급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서찰을 띄운 것이냐!”
자존심이 상한 냉현이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자, 흑혈이살 중 흑살인 철소가 급히 고개를 조아리고 나섰다.
“고정하십시오. 소교주님께서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신기 그자가 이 일의 중요성을 언급하여, 직접 보는 앞에서 쓰셨기 때문에 이곳의 사정은 전혀 전달해주실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지금의 상황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만일 소교주님께서 보내신 서찰이 중간에 잘못되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실로 큰일이 벌어지지 않았겠습니까.”
듣고 보니 그랬다. 어차피 자신은 이곳에 왔어야 했다. 그렇다면 상세히 적어 보내는 것 보단 위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내용을 간추린 것이 확실히 옳은 판단이었다. 그는 서찰의 내용을 상기시켜보았다.
-일이 차질을 빚고 있음. 아버님께서 직접 오셔야만 해결될 수 있음.
아주 간단한 내용이었지만 일의 중요성을 볼 때 절대로 가지 않으면 안 될 사안이었다. 이번 일에 모든 것을 걸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는 신기의 손에서 놀아난 것만 같아 새삼스레 기분이 나빠졌다.
“됐다. 그 동안의 일들을 차근차근 말해보거라.”
그제야 냉현의 입이 떨어졌다. 그는 처음 구멍이 뚫렸던 일을 시작으로 신기의 등장, 그리고 실로 만만치 않은 전력을 보유한 상대 측과의 교섭. 교섭 내용으로 볼 때 그가 결정할 사안이 아니자 아버지인 냉소천을 불러야만 했던 일에 이르기까지 조목조목 잘 집어서 설명해주었다.
“흐음, 그랬었구나. 잘했다.”
이야기를 듣는 사이 기분이 되살아난 냉소천은 아들을 칭찬해주었다.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어리석게 행동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잠시 휴식시간을 갖고 자리에서 일어난 냉소천은 뒤따라오는 장로들에게 넌지시 말을 꺼냈다.
“그자 말인데. 예전에 한번 보았을 땐 범접치 못할 기도를 뿜어냈거늘 지금에 와보니 그 기운도 많이 수그러들었더군. 못 알아봤단 말이야.”
사장로인 염홍이 거들고 나섰다.
“그렇습니다. 이십여 년이 지난 탓도 무시할 수 없지만 처음 그와 걸어갈 때는 내내 고개만 갸웃거릴 정도였으니까요.”
냉소천은 맞는 말이라며 오장로에게 물었다.
“경현(硬現), 자네는 어떠한가. 현아가 말해주기 전에 알아보았는가?”
오장로도 고개를 내저었다.
“저 역시 익숙하다는 느낌만 받았을 뿐 그 이상은 알아채지 못했었습니다.”
냉소천은 피식 웃었다.
“재미있군. 집안 식구라던가 잘 아는 친우가 아니라면,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그를 보고도 신기 제갈여휘라는 생각을 떠올리지 못할 거란 말이지?”
그는 왠지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나중에 가서는 그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졌다.
“후후, 푸하하하! 재미있는 세상이야!”
그는 기대에 찬 얼굴로 신기 제갈여휘를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