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376화
그렇게 이틀이 흐른 밤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푹신한 침대에서 자게 된 동천과 도연은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곤히 자고 있었다. 동천은 입가에 미소를 매달고 허공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음냐, 화정아 젖 한번 만져보자. 이히히!”
아마도 좋은 꿈을 꾸고 있는 모양이었다. 도연은 함께한 20여일 동안 동천의 잠꼬대에 익숙해져있는 듯 주위의 산만함에도 용케 깨어나지 않았다. 동천이 히히거리기를 한각이 지났을까? 웃고 있던 동천의 잠꼬대가 어느 순간 흐느낌으로 바뀌었다.
“아이구, 아가씨 잘못했슈. 흑흑, 그거 제가 안 깨트렸어요.”
입가에 침을 질질 흘리며 꿈결에 애원하는 그 모습이란… 아무도 그 얼굴을 못 본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 정도였다.
“살려-! 헉? 허억, 허억.”
이번에는 좀 시끄러웠는지 그동안 단련되었던 도연조차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무슨 일입니까.”
동천은 몸을 움츠리며 말했다.
“으으, 드럽게도 재수 없는 꿈이었어.”
사정화에게 죽도록 얻어맞는 꿈을 꿨던 동천은 진저리를 치고는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냈다. 꿈속의 영향 탓인지 갑자기 목이 탔다. 그래서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 무식하게 마셔댔다.
“꿀꺽, 꿀꺽. 프하, 맛 좋다!”
말 그대로 정말 맛있었다. 갈증 뒤에 먹는 물이 이렇게 꿀맛일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을 정도였다. 도연은 잠시의 여유를 가진 뒤 안정을 취한 주군에게 물었다.
“이제 괜찮습니까?”
괜히 꿀리는 게 싫었던 동천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다.
“괜찮아. 자빠져 자던 거 마저 자.”
“알겠습니다.”
도연은 고개를 나직이 끄덕이곤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와 동시에 동천의 눈에 불똥이 튀겼다.
<인정머리 없는 새끼!>
지가 괜찮다고 했으면서 막상 그냥 자니까 화가 났나보다.
“에이!”
혼자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동천은 이불을 머리 위까지 덮고 자신도 잠을 청했다. 악몽에 시달려 몸이 노곤했던 듯 수마(睡魔)는 금세 동천에게 달라붙었다. 그렇게 동천은 잠이 들었다. 그러나 잠이 든 동천이 다시 깨어난 것은 한 시진도 채 못되는 시점에서였다.
“으응, 뭐야. 한참 잘 자고 있는데…”
자다 깨다를 반복해서인지 다분히 신경질적인 반응이었다. 그러나 곧 어리둥절해 했다.
“엥? 아무도 없네? 그럼, 누가 깨웠지?”
동천은 누군가 자신을 깨워서 일어난 줄 아는 모양이다. 머리를 긁적이며 도연 쪽을 봤다. 따로 떨어진 침대에서 도연은 잘도 자고 있었다.
“저 자식은 아닌데? 혹시, 기억나지 않는 꿈을 꾼 건가? 제길! 그건가 보네?”
이 상황에서 그것 이상 합당한 것이 없어 보였다. 동천은 무의식적으로 주전자를 찾아 입에 물었다. 그러나 그 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참나, 이젠 주전자까지 개기잖아?”
동천은 주전자를 내려놓고 점원을 부르기 위해 밧줄을 잡았지만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있어 손을 내렸다. 자정이 지나면 밧줄을 잡아당겨도 안 온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자정이 넘었나?”
동천은 창가로 다가갔다. 하지만 동천이 보기에는 그게 그거였다. 창가가 달을 등지고 있었던 것이다.
“별게 다 속을 썩이네. 쳇! 하는 수 없이 나가서 물을 먹어야겠다.”
몸을 돌린 동천은 대접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물독은 나서자마자 바로 보였다. 손님들을 위해 마련해놓은 것인데 특실의 손님에게 치중하다 보니 이쪽에 놓이게 된 것이었다. 문만 열면 보일 것을 가지고 투덜거렸던 동천은 한잔 쭉 들이켰다.
“쩝, 이제 마셨으니 잠이나 자 볼까?”
목적을 달성하자 다시 졸리기 시작했다. 헌데, 동천이 문고리를 잡는 순간 이층 계단을 통해 어슴푸레한 빛이 스며들어왔다.
“뭐지? 지금 이 시간에는 손님을 안 받을 텐데?”
다시 졸음이 쏟아져 침대로 향하고 싶었지만 호기심 또한 그 못지 않았다. 결국 동천은 호기심을 따르기로 했다.
“대단한 게 아니기만 해봐라. 아주 엎을 테다. 으으, 졸려.”
동천은 연달아 하품을 해가며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아래층에서 객점 주인과 대면한 세 명의 사내들을 볼 수 있었다. 아래 상황은 그들이 종잇조각을 주인장에게 보여주고 있는 상태였다.
“아시겠소?”
선두에 선 사내의 물음에 객점 주인은 묘한 얼굴을 했다.
“헤헤,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고…”
동천은 뭘 가지고 저러는지 몰라 안력을 극대화시켜 종잇조각을 살펴보았다. 주인장 쪽으로 들고 있어 확실치는 않았으나 무슨 인물화 같았다. 동천이 그 인물화의 사람을 확인한 것은 객점 주인이 종이를 내려놓은 직후였다.
‘쳇, 나였잖아? 아함! 마저 자야겠다.’
궁금함을 해소한 동천은 아직 잠이 덜 깬 듯 하품을 하고 몸을 돌렸다.
“…”
뭔가 이상했는가?
‘엥? 나, 나?’
왕방울만 해진 동천의 눈은 다시 아래로 향했다. 새삼 확인해도 자신이었다. 그때 동천은 객점 주인이 간사한 웃음을 지으며 선두의 사내에게 돈을 받는 걸 보았다. 그 다음 일어날 일은 동천이 눈감고 아구리를 후리는 것처럼 쉬웠다. 동천은 심장이 쿵쾅거리는 와중에도 용케 소리를 죽이고 신법을 전개했다.
<으으, 저 주인장 새끼 나중에 걸리면 아주 죽을 줄 알아라!>
방안으로 들어와 재빨리 문을 걸어 잠근 동천은 짐을 챙겨들고 도연을 발로 걷어찼다. 어찌나 위력이 있던지 굴러떨어질 정도였다.
“으윽!”
도연의 입장에서는 아닌 밤중에 날벼락이었으리라.
“빠, 빨리 일어나! 쪼, 쫓아왔어!”
도연은 옆구리를 부여잡고 고통을 참으며 말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동천은 창가로 달려가는 동시에 정신 나간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하고 떠들어댔다.
“왔다니까? 교에서 온 새끼들이 왔다고! 으으, 난 잡히면 죽을 거야. 나 먼저 갈 테니까 쫓아오려면 오고 말려면 마!”
말을 마친 동천은 이층인지라 주저 없이 뛰어내렸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도연은 짐을 챙기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그는 곧 감탄 섞인 낮은 신음을 터트렸다.
“으음…”
그 와중에도 챙길 건 다 챙겨갔던 것이다.
“헉헉, 끈질긴 자식들! 그렇게도 할 일이 없어?”
얼마나 뛰었는지 몰랐다. 잡히기 싫었던 동천은 죽어라고 뛰었을 따름이었다. 도연은 동천보다 신법이 딸리면서도 용케 뒤쫓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도연의 얼굴이 극심한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리라. 우연인지 몰라도 도연이 힘에 부쳐 쓰러지려는 순간 동천의 신형이 뚝 멈추었다.
“후우, 후. 이래서는 안돼.”
벽에 기대선 도연은 터질 듯한 심장을 부여잡고 힘들게 입을 열었다.
“무, 무얼, 헉헉.”
어느새 숨결을 고른 동천은 도연에게 시선을 돌렸다.
“생각해봐. 아무리 이틀을 놀았다고 해도 우리가 그전까지는 제대로 쉰 적이 있었어? 없지? 그런데도 쫓아왔다는 것은 그놈들의 신법이 우리보다 우위에 있다는 소리야.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도망간다고 해서 그놈들을 따돌릴 수 있다고 생각해?”
도연은 간만에 바르게 말하는 주군의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뭐라 말하고 싶어도 숨이 차서 입을 열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것을 더 이야기해보라는 뜻으로 해석한 동천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야. 이런 무식한 방법은 안되고 다른 방법으로 그놈들을 따돌려야 한다는 거야. 니 돌 머리로 이해하겠어?”
도연은 고개만 끄덕였다. 동천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얼굴을 했다.
“좋아, 그럼 이제부터 이 평범한 천재 소년의 말씀을 잘 들어라. 이름하야 허허실실(虛虛實實) 작전!”
도연이 의문의 표정을 짓자 동천은 한가득 미소를 베어 물었다.
“히히, 간단해. 되돌아가는 거야.”
정말 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