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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388화


끼리끼리 논다고, 동천은 중소구의 의중을 단번에 간파할 수 있었다.

<혹시, 이 자식 심심한 거 아냐?>

아닌 게 아니라 중소구는 심심했다. 그래서 만만한 동천에게 따라붙으려 하는 것이다. 내심 당황했지만 동천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아뇨, 곧바로는 아니고요. 저기 건너편에 자그마한 서점이 있던데 거기로 가보려고 해요. 헌데 그건 왜 물어보세요?”

중소구는 톡 쏘아붙였다.

“물어보지도 못하냐? 험! 모자란 네놈이 서점에 들른다 하니, 아까 본 대인의 말씀을 듣고 무언가 깨달은 모양이로구나. 좋다. 내 특별히 동행해 주마.”

동천은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 진작에 알고 있었다. 알고 있다면 당연히 그에 대한 비책이 있다는 소리였다.

“말씀은 고마우신데요. 저보다 도연에게 가보세요.”

놀란 얼굴을 한 중소구는 동천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응? 도 소형제에게 무슨 일이 있더냐?”

동천은 재수 없는 쌍판이 들이밀자 한 발 물러섰다. 그러나 그로 인해 해야 할 말을 못하게 되는 실수는 없었다.

“무슨 일이라고 하면 좀 그렇고, 무언가 안 풀리는 게 있어서 고생하고 있나 봐요. 대인께서 가보셔서 어떠한 상태인지 봐주세요.”

중소구는 자신의 가슴을 탕탕 쳤다.

“걱정 말거라! 내가 누구냐? 바로 대인 중소구가 아니더냐?”

동천은 중소구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자신이 할 일을 했다. 그는 우선 주위를 둘러보았다. 물독이 보였다. 그리로 간 동천은 객점 관계자들의 눈치를 보면서 손수건을 그 안으로 집어넣었다. 다행히 바쁘게 일들을 하느라 동천 쪽을 주시하는 자는 없었다. 기회라고 생각한 동천은 물독 속의 손을 갑자기 빨리 움직였다. 부비고 또 부볐다. 잠시 후 손수건이 물독 속에서 빠져나오자 깨끗해졌다.

“히히, 난 역시 뭐를 해도 잘한다니까?”

모든 일을 무사히 마치고 방안으로 가려던 동천은 무언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만? 내가 뭘 빠트렸나? 뭐지? 없어진 것은 없는데 말야. 아? 서점!”

동천은 구석에서 책을 읽고 있는 서생을 보고서야 서점을 상기시켰다.

“가기도 귀찮은데 그냥 갔다 왔다고 뻥 칠까?”

그러기로 마음을 먹었던 동천은 금세 생각을 바꾸었다. 가서 뭘 사 온다는 말은 없었지만 분명히 그 미친놈은 생각 없이 왔다 갔다 했다고 꼬투리를 잡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동천의 생각은 그랬다.

“하여튼 그 새끼한테는 뭔 말을 못한다니까?”

동천이 이쪽으로 오다가 발견한 서점은 반각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더군다나 객점에서 나와 곧장 왼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무리 방향치라 해도 거기를 왕복 못할 동천은 아니었기에 그는 당당하고 자신 있게 그곳으로 향했다.

“어디 보자. 태화서점(太和書店)? 흐응, 간판은 그럴듯하군.”

간판만 그럴듯한 것이 아니라 규모 또한 상당히 큰 편이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던 동천은 대갓집 망나니 공자의 그 폼 그대로 어슬렁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손님, 어서 오십시오.”

늙으스름한 주인이 동천을 반겼다. 허나 어딘가 어색함이 엿보였다. 동천은 그것을 느끼고 서점 주인의 몰골을 자세히 살폈다.

“어디 아프슈?”

주인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아닙니다. 실은 감기 기운이 좀 있어서…”

동천은 나직이 혀를 찼다.

“쯧쯧, 그러게 조심하지. 늙으면 몸이 허해서 아무리 이 몸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손님이 책을 사러 왔으면 당연히 주인과 대화가 오고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지금 동천과 같은 류의 대화는 극히 드문 예였다. 목숨이 오락가락했던 서점 주인은 눈앞의 꼬마 녀석을 빨리 내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예예, 알겠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찾으십니까? 손님을 위해서 천자문을 드릴까요?”

안쪽으로 들어가 눈대중으로 책 더미를 세고 있던 동천은 얼토당토않은 얘기에 버럭 성질을 냈다.

“뭐? 천자아무운? 영감은 이 몸께서 그딴 것도 못 깨우친 것 같아? 엉?”

주인은 더럽고 아니꼽더라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허리를 굽혔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제가 나이를 먹다 보니 보는 눈도 쇠퇴해 가지고… 그럼 어떤 종류의 책을 원하십니까?”

“험! 본 공자는 심신의 수련을 위해 도가 계열의 책을 찾고 있네.”

드디어 방향을 잡은 주인은 재빨리 행동에 옮겼다.

“그것 말씀이십니까? 그거라면 잠시 기다리십시오. 제가 며칠 전 우연히 보아둔 책이 있습니다. 어디에 있더라. 어디에, 아? 여기 있습니다.”

한쪽 구석으로 다가가 뒤적이던 주인은 얇은 책자를 가져왔다. 동천은 그것을 받아들고 첫 장을 읽어 보았다.

“그것은 꿈이었다. 절대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꿈. 이루어졌을 시 파멸(破滅)을 몰고 올 꿈. 그래서 나는 그 꿈이 싫었다. 눈을 감는다. 그리고 긴 꿈을 꾼다. …확연히 느껴지는 불안감. 현실은 정녕 파멸을 원하는가? 뭐야? 꿈 얘기야?”

동천은 뒤에 많은 이야기가 있었음에도 그만두고 겉장의 제목을 보았다.

“천기록(天機錄)? 쳇, 이 인간 꿈 하나 꾼 거 가지고 되게 거창하게 구네. 이봐 영감. 이거 말고 다른 거 없어?”

서점 주인은 눈가에 경련을 일으켰다. 추천해 줄 때 들고 가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인데 꼬마자식이 속을 썩이는 것이다.

“그, 그럼 다른 것을 권해드리겠습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오오, 이것이 좋겠구나. 공자님 이것은 어떻습니까?”

동천은 내용을 읽기 전에 이번에는 받아든 책의 제목을 먼저 보았다. 낡고 허름한 책자는 천선도(天仙道)라는 제법 그럴듯한 제목을 소유하고 있었다.

“흐음, 이건 좀 다를 것 같은데? 어디 보자.”

휘리리릭!

동천은 책장을 넘겼다. 글씨는 한 자, 한 자 유려함을 자랑했다.

“대저 하늘에 도(道)가 있으니 선(仙)이 흥하고 사(邪)가 쇄하면 그때가 바로 천선이 되는 기회니라. 연자는 집이 있는가? 연자는 재산이 있는가? 연자는 땅이 있는가? 그대 천선봉(天仙峯)으로 오라. 세속의 미련을 등에 이고 오라. 가진 돈이며 땅이며 재산이면 모두 가지고 오라… 연자의 몸을 깨끗이…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에이 씨팔! 이거 사이비 단체 홍보물 아냐?”

동천은 싸늘한 눈으로 늙은 서점 주인을 노려보았다.

“영감! 혹시, 이 단체의 앞잡이 아냐?”

제목이 좋아서 권해 주었던 주인은 하필이면 그런 거지 같은 게 걸려서 곤욕스러웠다.

“그럴 리가요. 그렇다면 다른 것을 권해드리겠습니다.”

동천은 천선도를 내던지고 딱 부러지게 거절했다.

“됐어! 이 몸께서 친히… 영감. 혹시, 여기에 누가 또 있어?”

가슴이 철렁한 주인은 창백해진 얼굴을 했다.

“어, 어, 없습니다. 있기는요. 절대로 없습니다.”

동천은 예민해진 감각을 끌어올렸다. 방금 전까지는 몰랐는데 갑자기 전신이 따가웠던 것이다. 이 증상은 누군가가 자신의 감지력 영역권 내에 들어왔다는 소리였다. 바로 그때 동천이 내던진 천선도 위에 한 방울의 피가 떨어져 내렸다.

<헉? 피, 피?>

순간적으로 굳어버린 동천은 내심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다행히 그 덕에 위를 올려다보는 실수를 하진 않았다. 하지만 점점 살기가 느껴졌다.

<으으, 못 본 척하자. 그래, 그러면 될 거야.>

동천은 석상처럼 굳어 있는 얼굴을 하고 피가 떨어진 것은 못 본 척했다.

“볼 것도 어, 없는데 이만 가볼까?”

확실히 어색했다. 상대도 느꼈음인지 살기가 진함을 더해갔다. 동천은 울고만 싶어졌다. 이제야 자신을 빨리 내보내고 싶어 했던 주인의 행동을 이해한 것이다. 동천은 꼴에 책 좀 본다고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온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돌아가는 길은 왜 이리도 먼 것인지.

<하, 하늘님이 보우하사. 보우하사.>

목각 인형이 걷는 듯 부자연스럽게 걸어나가던 동천은 그 자세의 불안정함에 못 이겨 기어코 넘어지고야 말았다.

“으윽!”

서점 주인이 급히 동천을 부축을 했다.

“공자님, 괜찮습니까?”

“으응, 괜찮아.”

상황을 보건대 주인은 떨어진 피를 못 본 모양이었다. 동천은 일으켜주는 대로 힘없이 일어났다. 그냥 넘어진 것이 아니라 통로 옆에 쌓아 둔 책에 걸려서 넘어진 동천은 자신을 부축해주는 주인을 노려보았다.

<씨, 씨팔 놈! 정리도 안 하고 사니까 요 모양 요꼴로 살지!>

동천이 한바탕 욕을 퍼부은 후 다시 걸음을 옮기려 할 때 그의 눈에 검은 물체가 띄었다. 동천은 번뜩이는 무언가가 있어 그것을 집어 들었다. 제법 무게가 나가는 그것은 철경(鐵經)으로 추정되었다.

<좋아, 쇠로 된 거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이걸로 막는 거야. 아아, 하늘님. 제게 살길을 트여 주시는군요. 감사합니다!>

동천은 자신이 들고 있는 철경이 생명 줄인 양, 품에 안았다. 그것을 본 주인은 마침내 깐깐한 어린놈이 책을 골랐다는 사실에 기쁜 기색을 보였다.

“드디어 고르셨군요? 그건 별로 가치가 없는 것이라 닷 푼 되겠습니다.”

닷 푼이고 닷 냥이고, 지금 상황에서라면 은자 다섯 냥이라도 줄 용의가 있었다. 동천은 얼른 다섯 냥을 건네주었다.

“여기…”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동천의 등 뒤를 찔러 오던 살기는 문가로 거의 다가간 시점이 되어서야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제야 살았다고 안도할 때 동천이 나가야 할 입구를 막는 일련의 사내들이 있었던 것이다.

<저 자식들은 뭐야? 서, 설마 한 패?>

일단 막은 자들은 4명이었지만 동천의 감지력은 그들 말고 더 있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사내들은 짙은 남색 상의에 노란 빛깔의 하의를 입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동천이 얼어붙어 있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 어린아이가 자신들의 기세에 꼼짝도 못하는 것은 자주 겪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꼬마야, 이곳에서 이상한 자를 본 일이 있느냐?”

재빨리 머리를 굴린 동천은 그제야 천장 위의 인간이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쩐지 할 일 없이 피를 흘리더라.>

동천이 내심 생각하는 사이, 서점 주인은 때라도 만난 듯 그들 쪽으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위요! 위에 살인마가 있소!”

주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천장에서 한 사내가 떨어져 내렸다. 한쪽 팔이 무참하게 잘려나간 사내는 엉성한 응급조치로 천을 동여매고 있었다.

“으으, 네놈에게 돈까지 얹어 주며 따돌려달라고 했거늘!”

외팔이의 분노 섞인 일갈에 주인은 펄쩍 뛰었다.

“웃기지 마라! 너 같은 놈은 분명히 죄를 짓고 도망 다니는 죄수가 분명하다! 이 보시오들, 어서 저 놈을 잡아가 주시오!”

입구를 막아선 사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서 서생 풍의 유백색 비단옷을 입고 있는 30대의 사내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언뜻 보면 인자하게 생겼지만 사내의 얇은 눈매에는 날카로움이 숨겨져 있었다. 그의 손에 섭선만 들리면 딱 서생이리라.

“상황판단이 잘 돌아가는 자로구나. 좋다, 가르쳐 준 성의를 봐서라도 네 장례는 후히 치러 주겠다.”

서점 주인은 상체를 숙이고 듣다가 뭔가 이상한 대답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서생 같지도 않는 사내가 입가에 잔인한 미소를 머금었다.

“호오? 목을 치기에 가장 완벽한 자세로다.”

서걱! 떼구르르.

주인의 목이 매끈하게 잘려 동천의 바로 앞에 떨어져 내렸다. 서생 같지도 않은 사내의 손에는 어느새 섭선이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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