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395화
사정화는 이번에도 역시 간단하게 대꾸했다.
“아냐.”
“그럼요?”
사정화는 재차 터진 소연의 질문에 의외로 망설이는 듯한 기색을 보였지만 곧이어 냉정함을 되찾았다.
“그런 것이 아니라……. 단지 보여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야.”
상당히 난해한 대답이었다. 소연의 머리로는 도무지 해석 불가능이었다.
‘에휴, 내가 천재도 아닌데 저렇게 말씀하시면 어쩌라는 거야. 또 여쭈어봐야 하나? 아냐, 그랬다가 혼날지도 몰라. 우웅, 어떻게 하지?’
그녀의 고민을 알기라도 한 듯 사정화가 보충설명을 해주었다.
“내가 익히게될 무공은 마기(魔氣)가 너무 강해서 수련이나 너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돼. 오히려 피해를 입히게 되지. 그래서 오지 말라는 거야.”
그 정도는 소연도 알아들을 정도였다. 그녀는 마기가 너무 강하다는 소리에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저기, 그렇게 마기가 강한 것이라면 익히시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요.”
사정화는 소연을 마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소연은 한순간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무표정한 인형처럼 언제나 같은 얼굴이었던 사정화가 희미한 미소만으로 그녀의 가슴을 들뜨게 했던 것이다. 사정화는 어쩔 줄을 몰라하는 소연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지?”
소연은 자신의 추태를 깨닫고 황급히 손을 저어댔다.
“아, 아니에요. 그저 다른 생각을 하다보니까. 헤헤.”
사정화는 다시 얼굴을 굳히고 소연과 나란히 서 있는 화정이에게 다가갔다. 2년 전과는 다르게 어느 정도 시선이 맞추어졌다. 그 동안 제법 영리해진 화정이는 사정화가 자신에게 용건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먼저 말문을 열었다.
“예뻐.”
“뭐라고?”
흠칫한 사정화가 자신도 모르게 되묻자 화정이의 고운 입매가 작게 오므려졌다 펴졌다.
“웃어봐. 예뻐.”
당황한 소연은 재빨리 화정이를 제지시켰다.
“호호, 얘가 왜 안 하던 짓을……. 호호호!”
화정이는 자신의 입을 막아대는 소연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저 웃는 얼굴로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잠시 화정이를 주시하던 사정화는 찬바람이 휘날리도록 신형을 돌린 후 말을 건넸다.
“수고했어.”
긴장된 상황을 무사히 넘긴 소연은 안도감에 깊은 한숨을 내쉰 후, 화정이의 옆구리를 찌르며 조용히 말했다.
“화정아, 인사를 드려야지.”
화정이는 그제야 자신의 차례를 떠올리곤 잃어버렸던 물건을 되찾아 기뻐하는 아이처럼 생글거리며 꾸벅 인사를 했다.
“수고했습니다.”
1년 전부터 들어왔던 비무 끝의 인사였다. 사정화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저 차가운 음성만을 남겼다.
“너도.”
소연은 밖으로 나와 동생인 수련에게 안에서 들었던 그대로 전해주었고 수련은 ‘뭐라고요? 정말로 아가씨가 그러셨단 말이에요?’ 라고 물어본 뒤 밖으로 뛰쳐나갔다. 소연은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는 동생의 발광(?)을 막을 여력이 없었다. 그저 조금 붙잡는 시늉만 하다가 내버려두었을 따름이었다.
화정이와 둘만이 남게된 소연은 기다릴까도 했지만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수련이 누구이던가. 수다하면 둘째가 라도 서러운 아이가 아닌가. 조잘조잘 재잘재잘 엄청난 한숨과 푸념을 들을까 겁이 났던 소연은 그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정아 이만 우리도 가자.”
줄곧 소연에게 시선을 맞추고있던 화정이는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로서 울먹일 동생을 봐주지 못하는 것이 조금 찜찜했지만 요새 정신적으로 피곤한 상태여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내심 자위를 했다.
밖으로 나와 마차를 타고 돌아온 소연은 앞마당을 쓸고있는 감송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급히 달려가 인사를 올리고 감송의 빗자루를 뺐으려했지만 그녀의 그런 생각은 몇 발자국도 못가 멈춰야만 했다. 감송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뭐 하나 빠진 사람처럼 넋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감송의 빗질은 엉뚱한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그냥 지나갈까? 아냐, 못 보았으면 모를까 이렇게 지나갈 수 없어.’
‘아니지? 사공님께서 깊은 사색에 잠겨 계시는데 내가 방해할 수야 없지. 으으,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감송의 얼굴과 소연의 얼굴이 비슷한 양상으로 닮아가고 있었다. 누가 보았다면 똑같은 고민을 안고있을 거라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때 소연의 고민을 해결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화정이었다.
“안녕.”
덕분에 두 사람이 화들짝 놀랬다. 소연도 소연이지만 이들이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는데도 감지를 못했던 감송이 더욱 그러했다. 그는 너무 해이해져있던 자신을 탓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반겼다.
“허허, 누군가 했더니 화정이였구나. 소연이도 있고.”
소연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
“할아버님을 뵈옵니다.”
감송이 밖에서는 동천을 소전주라고 부르는 것처럼 소연도 대외적으로는 할아버님이라고 불렀다.
“그래, 사 아가씨께 다녀오는 길이냐?”
그러자 소연이 아닌 화정이가 대답했다.
“알면서 왜 물어.”
엉뚱한 인물이 대답하자 감송은 깜짝 놀라 물었다.
“뭐라고?”
이번에도 두 사람이 놀랐는데 더욱 놀란 사람은 아까와는 반대로 소연이였다. 화정이가 했던 말처럼 직선적인 대꾸는 아니었어도 분명히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슴이 뛰고 어찌할 바를 몰라하던 소연은 시범 삼아 절대로 우연일 수 없는 단어를 떠올렸다.
‘감똥…….’
예전에 주인님인 동천이 감송이 없을 때 자주 즐겨 불렀던 이름이었다. 그런데 그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바로 화정이의 입술이 열렸다.
“감똥.”
‘헉?’
소연이 새파래진 얼굴로 경악하고 있을 때 감송은 어처구니가 없는 모습을 했다. 곁눈질로 소연을 살펴보던 그는 곧 그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소문주를 떠올렸다. 그러자 금새 수긍이 갔다.
“허허, 소전주님께서 나를 그렇게 부르던 것을 네가 주워들었던 모양이로구나.”
화정이는 좌우로 고개를 저어댔다. 그리고는 진범을 가리켜주었다.
“아냐. 소연이 그랬어.”
“응? 소연이가?”
감송의 시선이 화정이에게서 벗어나려는 찰나 소연이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아, 아니에요! 제가 안 그랬어요!”
감송은 피식 웃었다.
“내가 뭐라고 했더냐? 허허, 나도 다 알고 있으니 괜한 걱정은 말거라.”
방금 말대로 감송은 전혀 의심을 하지 않았다. 강시는 심령이 연결되어있기는 하지만 마음까지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전음으로 지시하지 않은 이상 방금 전과 같은 상황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소연이 전음으로 지시할 리도 없고……. 허허, 내가 뭘 알아야지.’
독에 관해서는 훤히 꿰뚫어도 강시에 관해서는 별로 아는 바가 없었던 그는 자신이 소연을 의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려 줄 겸 넌지시 물어보았다.
“강시를 길들이다보면 가끔 이런 증상을 보이는 것이냐?”
소연은 생각할 것도 없이 얼른 대답했다.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그러니까 가끔 정말로 가끔가다가 이런 일이 벌어져요. 호, 호호!”
너무 과장된 행동을 보였으나 감송은 소연의 마음을 십분 이해를 했다.
“알았으니 이만 가 보거라. 나는 쓸던 것을 마저 쓸어야겠구나.”
“예,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사공님 대신 자신이 마당을 쓸려고 생각했던 소연은 더 큰일이 벌어질 까봐 얼른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 온 그녀는 뒤따라온 화정에이게 질책의 눈빛을 건넸다.
“너어!”
작은 주인이 화를 내도 화정이는 표정의 변화 없이 여전히 웃었다. 소연은 그 천진난만한 못습을 보자 차마 화를 낼 수가 없어 깊은 한숨만을 내쉬었다.
“에휴, 관두자. 니가 뭘 알겠니……. 가만? 그런데 정말로 화정이 니가 내 생각을 읽은 거니? 그런 거야?”
화정이는 양손으로 자신의 두 귀를 만지작거렸다.
“들렸어. 갑자기 목소리가.”
소연은 화정이의 팔을 붙잡고 다시 물었다.
“정말이야?”
“응.”
아까의 일이 있었고 이렇게 화정이의 확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소연은 쉽사리 믿으려 하지 않았다.
“좋아, 그럼 지금도 내 생각을 읽을 수 있겠어?”
화정이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소연은 곧바로 생각했다.
‘화정이는 바보다. 화정이는 바보. 후훗, 화정이는 바보. 바보.’
속으로 두어 번 더 중얼거린 소연은 웃음 끼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내가 뭐라고 생각했는지 이제 말해봐.”
그러자 가만히 그녀를 주시하던 화정이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안 들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