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가즈 나이트 – 693~694화


“거짓말이에요, 어떻게 넬이 그렇게 될 수 있어요!!! 넬이 아닐 거예요!!!”

리진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장로의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고 장로는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연구실 안에 들어와 있는, 넬을 아는 모든 사람들은 거의 다 리진과 같은 반응이었다. 티베는 마키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흐느끼고 있었고, 마키는 눈을 크게 뜨고 넬의 뇌가 있는 캡슐을 바라보고 있었다. 챠오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연구실 바닥만을 바라보았고, 헤이그, 케빈은 묵묵히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또 한편으로, 세이아는 넬의 뇌가 들어있다는 캡슐을 양팔로 안은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세이아의 표정은 슬픔 그 자체였지만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 어떻게 된 거죠…?”

그때, 연구실의 문이 열리며 리오가 안으로 들어왔고, 그 순간 한껏 인상을 구기고 있던 챠오는 리오에게 달려들며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리오는 자신의 품에서 오열을 터뜨리고 있는 챠오의 등을 멍한 눈으로 토닥거리며 장로에게 시선을 돌렸다.

“… 장로님. 넬에게… 좋지 않은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 예. 그러니까….”

장로는 곧 넬의 상태 등 자초지종을 말해 주었고, 장로에게 말을 듣는 동안 리오의 시선은 점차 캡슐 쪽으로 돌려졌다. 리오의 눈동자 속에선 불빛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노기를 뿜어낼 때 가즈 나이트의 특성인 **흉안(凶眼)**이었다.

“… 아, 이러면 안 되지….”

리오는 곧바로 손으로 자신의 눈을 덮었고, 그는 그 상태에서 세이아를 불렀다.

“… 방법이 없겠습니까 세이아씨. 아니, 세이아님…! 당신의 힘으로 어떻게…!”

그러나, 세이아는 굳은 표정으로 리오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그에게 말했다.

“… 성계신의 힘은 행성의 힘을 적절히 조정하는 것, 사람을 되살리는 힘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성계신은 주신과 같이 전지전능하지 못하답니다. 전 할 수….”

“넬은 죽은 게 아니잖습니까!!!!”

리오의 갑작스러운 큰 목소리에 세이아는 말문을 닫았고, 연구실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리오에게 시선을 돌렸다. 리오는 가슴 속에서 밀려오는 분노를 억제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혼자 아메리카 대륙으로 날아가 대륙 전체를 날려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리오는 그럴 수 없었다.

“사람의 몸입니다. 재생시킬 수 있어요!! 뇌가 살아있고, 신경이 살아있습니다!! 과학이 지닌 복제 기술을 통해 넬을 되살릴 수 있는 가능성이 일말이라도 있다면, 세이아님도 할 수 있습니다!!!”

리오의 울분과 안타까움이 섞인 외침에, 세이아의 굳은 표정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고 세이아는 양손으로 입을 가린 채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리오를 향해 흐느끼기 시작했다.

“… 서, 성계신의 힘은… 넬 한 명을 위해 사용할 수 없는 것이에요…. 저라고 왜 그러고 싶지 않겠어요 리오씨! 저도 리오씨 못지않게 안타깝고 슬프단 말이에요!! … 절 성계신으로 만든 분이 누구신데… 제 마음을 몰라주시는 거예요… 흐흑…!!”

“…!!!”

리오는 순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복잡한 상황의 연구실 안엔 오랫동안 세이아가 흐느끼는 소리 외엔 들리지 않았다.

치익–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아이스크림 한 통을 사 들고 온 지크가 안으로 들어왔고, 상황을 모르는 지크는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자아, 우리에게 돌아온 바람둥이와 예비 BSP 아가씨를 위해–! 하하하핫–!!!”

“….”

“하하… 아? 왜, 왜 그러지 모두?”

아이스크림을 높이 든 채 웃던 지크는 순간 연구실 안의 이상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웃음을 멈추고 주위를 돌아보았고, 리오와 시선을 마주친 지크는 여러 번 보아 왔던 리오의 어두운 표정을 보고 나지막이 그에게 물었다.

“… 무, 무슨 일이야 리오. 누가 죽기라도 한 거야? 아니면… 케빈이 담배라도 피웠어? 모두 왜 그래?”

지크의 질문에, 리오는 곧 지크의 앞으로 다가갔고 지크의 양 어깨를 손으로 잡으며 무겁게 말했다.

“… 진정하고 내 말 잘 들어. 넬은 아직 저 캡슐 안에 있다. 보고 싶으면 봐도 좋아. 하지만… 넬은 절대 죽은 게 아니야. 명심해. 넬은 살 수 있어….”

“… 뭐?”

지크는 표정을 찡그리며 캡슐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캡슐 전면에 있는 압력 유리에 시선을 돌렸고, 그 순간 지크의 몸은 굳어버리고 말았다. 노란색의 액체 속에 들어있는 뇌와 척수… 지크가 본 것은 그것이었다.

“… 헤헷… 하하하핫–!!”

순간, 지크는 이마를 잡고 웃기 시작했고 지크를 알고 있는 BSP 동료들은 그만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말았다. 안타까워서도 그랬지만, 지크의 지금 반응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하하하핫–!! 이런 이런… 누굴 놀리려고 그러는 거야? 난 이런 호러 코미디는 싫어한다구. 헤헷, 악취미야. 자자, 장로님. 넬은 어디 있나요? 화장실이라도 갔나요? 아니면 식당?”

지크의 솔직한 질문에, 장로는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솔직히 대답을 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돌려서 말을 해야 하는 것인가….

“… 보신 바와 같습니다. 넬은 와카루라는 박사에 의해 뇌와 척수만 남고… 우리에게 돌아왔습니다.”

“….”

순간, 지크가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은 바닥에 떨어졌고 장로는 지크를 달래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 진정하십시오 지크님. 넬은 아직 살아있습니다. 가망이 충분히….”

“… 빌어먹을–!!!! 뇌와 척수만 남은 사람이 가망이 있다고!!!!! 차라리 스테이크가 된 소를 한 달 동안 치료하면 풀을 뜯어 먹을 수 있다고 하시는 게 어때요!!!!! 이런 빌어먹을, 젠장할–!!!!!”

“좋아, 레어 스테이크를 치료해 보지.”

그때, 문이 다시금 열리며 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연구실 안의 모든 사람들은 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문 밖에 서 있는 노인을 본 장로의 얼굴은 놀라움에 휩싸였고, 리오와 지크의 얼굴 역시 일말의 희망을 본 사람처럼 밝아졌다.

“머, 멀린…!”

“멀린경…?!”

“할아범!!”

장로의 부드럽고 긴 수염과는 달리 약간 뾰족한 느낌의 긴 수염을 지닌 노인, 멀린은 빙긋 웃으며 연구실 안으로 들어왔고 장로의 앞으로 다가가 그의 손을 잡으며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허헛, 오래간만일세 클로머트. 요즘 고민이 많은가 보이, 주름살이 더 늘은 걸 보니 말이야. 하하하핫….”

“아, 아니 멀린… 아, 멀린경. 어째서 당신이….”

“이런, 사람들 앞이라고 존댓말을 쓰진 말게. 지금 이 안에 있는 젊은이들은 다 이해해 줄 테니 말일세. 술 마실 땐 편한 사람이 꼭 공적인 자리에선 존댓말을 즐긴단 말이야. 하하하하핫…. 아, 리오군. 어쩌다가 화이트 나이트를 저 지경으로 만들었나? 바이오 티탄 장갑은 만들기도 어려운데….”

“아, 죄송합니다. 사정이 그렇게….”

“… 음, 얘기는 나중에 듣기로 하지. 오오, 지크군. 시에는 어디다 두고 여기 있는 건가? 난 같이 온 줄 알았는데….”

“네?”

지크는 멍한 얼굴로 멀린의 질문을 되돌렸고, 멀린은 미소를 띠우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허허헛… 이 친구 혼이 나갔군. … 아아, 인사가 늦었습니다 성계신이시여. 이 늙은이의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아, 예에….”

문득 세이아에게 시선이 돌려진 멀린은 세이아에게 예를 올렸고, 갑작스러운 상황에 역시 당황하고 있는 세이아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멀린은 곧 몸을 일으켜 넬의 뇌와 척수가 들어있는 캡슐로 향했고, 압력 유리를 통해 내부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 흐음, 역시 와카루. 인간의 뇌수 성분과 흡사한 액체를 이용해 인간의 뇌와 척수를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생존시킬 수 있는 건 그 인간밖에 없지. 그건 그렇고 다행이군. 뇌만 남겨둔 게 아니라 척수까지 남겨놔서 클론 재생을 할 수 있게 해놨으니…. 하긴, 보통 인간에겐 흔히 볼 수 없는 이상 신경계니 남겨둘 가치가 있었겠지.”

캡슐 내부의 상황을 본 멀린은 곧 장로에게 시선을 돌렸고, 자신의 두터운 남색 코트를 벗으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자아 클로머트, 500와트의 이동 전력 장치와 액체 산소 공급 장치를 이쪽으로 보내 주겠나? 지금 이 상태로 저 아가씨를 방치해 두면 일말의 가능성도 없어지니 말일세. 응급처치부터 한 다음 일을 하도록 하지. 자, 다른 분들은 모두 나가주시오. 저 스테이크 아가씨는 나와 클로머트가 맡을 테니 말이오.”

그 말을 들은 리오의 표정은 곧 밝아졌고, 멀린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머, 멀린경…! 정말로 넬을 살릴 수 있으시겠습니까?”

“… 허헛, 저 아가씨를 살리지 못하면 큰일이 날 것 같은데 억지로라도 살려야 하겠지. 어쨌거나 얘기는 나중에 함세. 아, 그리고 휀군을 좀 불러주겠나? 그에게 얘기를 해 줄 것이 있어서….”

“… 예! 알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멀린경! 정말 감사드립니다!”

리오는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며 멀린에게 감사를 표했고, 연구실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기뻐했다. 그러나, 세이아는 그렇지 않았다.

“….”

세이아는 말없이 연구실을 훌쩍 나섰고, 넬이 살 수 있다는 말에 정신이 흐려진 지크와 리오는 세이아가 나간 것도 모르고 계속 기쁨을 만끽했다.

※※※

미카엘님의 환생이 이 아이란 말씀이십니까.”

휀은 다시 마련된 투명한 캡슐 안에 들어있는, 넬의 뇌를 중심으로 뭉쳐져 있는 유기질 덩어리를 바라보며 멀린에게 물었고, 멀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다네. 몇일 후 오실 아더왕께서 십수 년 미카엘님의 전음을 직접 전해 들었다 하셨네. 하지만 나도 잘 모르겠어. 메타트론을 막으실 생각으로 미카엘님께서 전생을 하셨다면 강인한 남자의 몸으로 전생하셔야 하는 것이 당연할 텐데, 왜 하필 여성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신 건지….”

휀은 아무런 말없이 캡슐 안에만 시선을 두었다. 유기질 덩어리는 마치 심장이 고동을 치듯 리듬 있게 불끈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한 번 불끈거릴 때마다 유기질 덩어리는 차츰 크기를 더해갔다. 물론 아주 미세할 정도로….

“…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음?”

“아닙니다. 하실 말씀이 더 없으시다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 아아, 수고하게.”

휀은 곧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구실을 나섰고, 멀린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인 후 앞에 놓인 뜨거운 코코아를 마셨다. 그런 뒤, 계속 캡슐 안의 상황을 지켜보던 장로에게 말을 건네었다.

“… 이보게, 저 휀이라는 청년… 처음 가즈 나이트가 되었을 때와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나?”

멀린의 말에, 장로는 안경을 벗은 뒤 손가락으로 미간을 마사지 하듯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그렇지. 처음 가즈 나이트가 되었을 때, 저 청년은 자신에게 갑자기 주어진 막대한 힘과 책임감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엔 방황할 정도로 심약한 젊은이였지. 그런데 갑자기 달라졌어. 놀라울 정도로 성장했지. 지금은 내가 존경심을 가질 정도로 강하고 냉철한 가즈 나이트 리더가 되어 있다네. 어째서 갑자기 변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일세.”

“… 옛날, 떠도는 소문 중에 휀이란 청년이 미카엘님을 살해했다는 말이 있었지?”

멀린의 질문에, 장로는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멀린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미카엘님과 휀이란 청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 아, 그냥 노인의 느낌일세. 신경 쓰진 말게나.”

“… 허허헛, 나보다 몇 년 젊은 사람한테 노인의 느낌이란 말을 들으니 기분이 이상하구먼.”

“예끼 이 사람아. 수백 년 차이 나는 것도 아닌데 생색은… 하하하핫….”

“하하핫…. 자아, 우린 치료에나 전념하세. 젊은이들에게 아직 우리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니 말일세.”

한참을 얘기하며 웃던 두 노인은 다시 키보드와 약물을 매만지며 작업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젊었을 적의 추억을 되살리듯….


3일 후.

“… 이 정도까지 재생이 될 줄이야…. 정말 멀린경과 장로님은 대단하시군요.”

리오는 캡슐 안에 들어있는 넬–정확히 말해 피부만이 씌워지지 않은–을 바라보며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고, 멀린과 장로는 빙긋 웃을 따름이었다.

“허헛, 신에게 능력을 인정받은 과학자 둘이 천재 인간 한 명에게 농락을 당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어쨌거나, 내일 오후 정도 되면 피부 조직과 체모까지 모두 재생이 될 듯하니 걱정 말고 기다리게나.”

멀린의 말을 들은 리오는 안도의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그러나, 리오에겐 아직 풀리지 않은 궁금증이 있었다.

“아, 그런데… 정말 예전처럼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그래도 뇌와 척수만이 상당 시간 몸에서 떨어져 있었는데….”

리오의 질문을 들은 멀린은 곧 장로를 흘끔 바라보았고 장로는 대신 대답을 해 주기 시작했다.

“… 영혼이 없는 상태… 소위 말하는 뇌사 상태라면 모르지만 넬 양의 뇌는 죽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제가 마법을 이용해 넬 양을 수면 상태로 만들어 놨으니, 내일 눈을 뜨게 되면 넬 양은 아마 나쁜 꿈에서 깨어난 듯한 반응을 보일 겁니다.”

“…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흠… 그럼 가보겠습니다. 계속 부탁드립니다.”

“음, 그러지. … 아, 그런데 리오군.”

멀린은 막 돌아서려는 리오를 곧장 불러 세웠고, 리오는 다시 시선을 멀린에게로 돌렸다.

“… 요즘 세이아님께서 안색이 안 좋으시던데, 무슨 일 있으신가? 그렇게 아름다운 여신께서 그런 표정을 짓고 계시니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 아… 예….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멀린의 말을 들은 순간, 리오의 표정은 잠깐 흐려졌으나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런 것을 놓칠 멀린은 아니었다. 멀린은 헛기침을 한 번 한 뒤 리오에게 충고하듯 말하기 시작했다.

“… 그분이 여신이라 해도, 아직은 20대 초반의 어린 여성일 뿐일세. 우리나 자네처럼 세상을 오래 살지도 않았지. 게다가 지금은 성계신이라는 중책까지 떠맡고 있으니 정신적으로 상당히 불안할 거고, 또 의지할 곳이 필요할 거야. 지금 그분은 유리와도 같다네. 깨어지면 걷잡을 수 없지….”

“….”

리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잠시 동안 생각을 하던 리오는 곧 멀린을 바라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 알겠습니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리오는 곧 연구실을 나섰고, 멀린은 커피잔을 들고 장로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 젊다는 건 좋은 거지….”

리오는 터벅터벅 제궁 밖으로 걸어 나갔다. 사실, 그는 3일 전 자신이 세이아에게 상당한 상처를 줬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물론 그때 상황이 리오가 흥분할 빌미를 상당히 제공된 상태였지만, 냉정히 상황 판단을 하지 못한 건 자신의 책임이라 탓하는 리오였다.

“… 하아.”

리오는 길게 한숨을 지었다. 또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그를 괴롭혔다.

“어이구, 너무 늦은 것 같구먼….”

그때, 리오는 등산객 차림에, 등산용 배낭을 멘 한 노인이 급히 자신을 지나쳐 가는 것을 느꼈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앞을 걸어가다가 움찔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 아더왕이시여!!!”

리오의 외침에, 그 노인 역시 발걸음을 멈췄고 곧 뒤를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오오, 리오군 아닌가. 정말 오래간만일세.”

“주신께서 인정하신 유일한 인간의 왕이시여, 가즈 나이트 리오·스나이퍼, 지금 인사를 올립니다.”

리오는 곧바로 아더의 앞에 달려와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고, 아더는 리오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그래, 그동안 잘 있었나? 자자, 어서 일어나게. 계속 허리를 굽혀 자네를 내려다보면 내 허리가 아파져.”

“아, 예.”

리오는 곧 몸을 일으켰고, 리오를 말없이 바라보던 아더는 씨익 웃으며 리오에게 물었다.

“요전에 만났을 때완 달리 안색이 안 좋군. 무슨 걱정이라도 있나?”

“예? … 아, 아닙니다.”

리오는 억지성이 짙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아더의 눈을 속이기엔 리오의 표정 연기는 너무도 부족했다. 아더는 리오에게 물었다.

“음… 제궁 안에 훈련장이 있다고 들었는데, 좀 안내해 주겠나?”

“예? 훈련장엔 무슨 일로….”

리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아더는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가볍게 대답했다.

“음음, 요즘 운동이 너무 부족해서 몸이나 잠깐 풀어보려고 하네. 상쾌한 기분으로 멀린을 만나 자초지종을 들어야 이해가 빠를 것 같거든. 허헛, 자네도 알다시피 멀린의 말은 이해하기가 좀 난해하지 않나.”

“… 예. 그럼 제가 모시겠습니다.”

“음, 부탁하네.”

리오와 아더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제궁 내 훈련장에 도착했고, 훈련장 안에서 한참 자기 수련을 하던 전룡단 단장들은 리오의 모습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며 무기를 놓고 리오의 앞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특히 반가워하는 사람은 제 1 전룡단 단장 이었다.

“아, 리오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아아, 나한테 할 인사는 미루지. 더 큰 손님이 오셨으니까. 자, 이쪽으로 오시지요.”

“으음, 그러지.”

리오의 안내를 받아 훈련장 안에 들어선 아더를 본 전룡단 단장들은 순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보통 등산객처럼 보이는 덩치 큰 노인으로 밖에 보이지 않은 탓이었다. 하지만 그 반응은 리오의 소개가 있은 즉시 바뀌어졌다.

“주신께서 인정하신 유일한 인간의 왕, 아더왕이시네. 예를 갖추게나.”

“… 네에–!?”

전룡단 단장들은 속으로 거짓말이라 외치며 즉시 무릎을 꿇었고, 아더는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리오에게 말했다.

“허헛, 이거 오래간만에 이런 인사를 단체로 받으니 좀 부끄럽군. 자아, 정식 인사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일단은 볼일들을 보게나. 자, 리오 자네는 나와 저쪽 빈 곳으로 가세.”

“예, 알겠습니다.”

리오와 아더는 훈련장 중앙의 대련장으로 향했고, 그들이 가는 모습을 바라보던 전룡단 단장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 이봐, 정말 저분이 아더왕이실까? 그냥 보통 노인분처럼 보이는데…?”

“그래, 배도 나왔고…. 그런데, 리오님과 대련하실 것 같은데 정말 괜찮으실까?”

팔짱을 낀 채 리오와 아더를 바라보던 은 곧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주신께서 만드신 검 중 최고라 불리우는 엑스칼리버를 다룰 수 있을 정도의 분이라면 아마 리오님과도 충분히 대련하실 수 있을 거야. 사실, 엑스칼리버 하나만으로도 우리보단 강하다는 말이니까.”

“… 그, 그래…? 앗! 저분 도대체 무슨…?!”

한 전룡단 단장의 외침처럼, 아더는 배낭에 들어있던 물통을 꺼내어 대련장 바닥에 물을 붓고 있었다. 하지만, 처음엔 노망이 아닐까 생각하던 전룡단 단장들의 생각은 그 물에서 엑스칼리버가 오색 검광을 뿜으며 튀어나오는 것을 본 직후 변했다.

“아, 맞아…. 엑스칼리버는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물에서만 꺼낼 수 있다 들었어. 바닷물도 안되고, 인공적으로 정화된 증류수도 안되지. 우린 지켜보기만 하세.”

“… 으음….”

의 말에 따라, 전룡단 단장들은 숨을 죽이고 리오와 아더를 지켜보기 시작했다.

한편, 엑스칼리버를 꺼낸 아더는 검을 앞에 세운 뒤 몸에 힘을 집중했고, 순간 아더가 입고 있던 등산용 복장은 붉은 망토가 달린 화려한 플레이트 메일로 바뀌어졌고, 물론 그가 쓰고 있던 등산용 모자 역시 갑옷에 걸맞은 투구로 변했다. 가볍게 몸을 풀고 있던 리오는 아더의 그 모습과, 그 노인의 몸에서 뿜어지기 시작한 무서운 기운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이 위엄… 위압감…. 과연 주신께서 인정하신 유일한 인간의 왕…! 만만히 볼 분이 아니군.’

아더는 곧 팔짱을 꼈고, 엑스칼리버는 그의 주위를 몇 바퀴 돌며 자신의 주인을 호위하기 시작했다. 리오의 몸풀기가 끝나길 기다리던 아더는 리오가 곧 자세를 바로 한 뒤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자, 자신 역시 엑스칼리버를 잡으며 간단히 목례를 올렸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아더왕이시여.”

“으음. 대련이지만 최선을 다 해 주게.”

아더가 먼저 엑스칼리버를 잡고 자세를 취하자, 리오는 예절상 한 발 늦게 디바이너를 꺼내며 자세를 취했고 둘 사이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 내가 먼저 가지.”

그 말과 함께, 아더는 검을 내리고 리오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고 눈을 부릅뜬 채 아더를 바라보던 리오는 순간 디바이너를 치켜 올리며 외쳤다.

“쉽게 당하진 않습니다!!!”

콰앙–!!!

리오가 검으로 바닥을 내려침과 동시에 날카로운 충격파가 대련장 바닥을 찢으며 아더에게 달려가기 시작했고 아더는 자신을 향해 오는 충격파를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아직 이르다네!!!!”

쿠웅!!

충격파가 코 앞까지 온 순간, 아더는 자신의 왼발을 앞으로 뻗어 그대로 충격파를 짓밟았고, 아더는 노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몸놀림으로 자세를 전환하며 리오를 향해 자신의 검기를 날렸다.

“허업–!!!!”

그때, 리오 역시 자세를 바꾸어 자신에게 날아오는 검기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고, 어깨로 아더의 검기를 강하게 들이받았다. 폭음과 함께, 아더의 검기는 사라졌고 아더와 리오는 다시 자세를 바꾸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짧은 시간이긴 했지만, 둘의 놀라운 실력을 눈으로 본 전룡단 단장들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세, 세상에…!!! 리오님의 지뢰자르기를 발로 밟아서 소거시키다니…!!! 아더왕이라는 분, 원래 저렇게 강한 분이셨나?!”

“리오님도 만만치 않아, 훈련장 천장은 종이 뚫듯 뚫을 것 같던 검기를 어깨로 받아 치시다니….”

그러나, 동료들의 대화를 듣던 의 생각은 달랐다. 상당한 위력이 실린 충격파와 검기를 몸으로 받아낸 리오와 아더 쌍방이 분명 피해를 입긴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의 생각대로, 리오의 충격파를 밟아 없앤 아더의 왼쪽 다리는 그 직후 잠시 동안 경련을 일으켰고 리오의 왼쪽 어깨 역시 잠시간 마비되었었다.

리오는 어깨의 마비 증상이 끝남과 함께 디바이너를 양손에 잡았고, 아더 역시 다리의 경련이 끝난 직후 몸을 옆으로 움직여갔다.

“… 자네의 기술, ‘지하드’… 보여주지 않겠나?”

“… 예?”

아더의 갑작스러운 말에, 리오는 순간 당황했고 역시 그 말을 들은 전룡단 단장들은 잠시간 숨을 멈추고 말았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