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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冬天) – 410화


“이보시게들.”

멀리서 동천 일행을 지켜보고 있었던 위사들은 선두의 중소구가 자신들에게 말을 걸어오자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중소구는 대인이라는 자신의 외호를 의식한 듯 듬성듬성 나 있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여유롭게 말했다.

“황룡 가주께 급한 볼일이 있어 찾아왔으니 가서 기별을 주시게나.”

서로 마주보던 위사들은 이런 일을 간혹 겪었던 듯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행동했다.

“선약이 되어있는 분은 아니신 것 같군요. 신분을 밝히시고 저희에게 용건을 말씀해주시면 윗분께 전갈을 드리겠습니다.”

중소구는 과연 황룡세가라서 문지기들조차 이렇게 당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본인은 대인 중소구라고 하네.”

오른쪽의 위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인 중소구? 어디선가…….”

그러자 중소구가 껄껄 웃었다.

“하핫! 본 대인이 잠깐 실수를 했군. 얼마 전에 호를 바꾸었으니 헷갈리는 것은 당연한 일. 예전에는 협객이란 호를 썼다네.”

“아? 광(狂)!…이 아니라 협객 중소구님 이셨군요!”

자신의 실수를 급히 회수시킨 위사는 중소구의 느닷없는 방문에 심히 불안한 기색을 띄웠다. 당황한 그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하지만 워낙 신분을 속이고 들어오려는 자들이 많기에 선약이 안 되어있다면 확실한 신분을 증명할 수 있을 만한 것이 있어야 합니다. 양해해주십시오.”

기분이 나빠진 중소구는 다 때려치우고 다른 정파로 가볼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죽은 인간이 굳이 황룡세가를 언급한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확신 때문에 분기를 억눌러야만 했다.

“끄응, 특별히 내세울 것은 없으나 5년 전 황룡 가주와 대화를 나누었던 적이 있었으니 그분께서는 본 대인을 알아볼 것이네.”

결과적으로 중소구가 제시한 증명 방법은 자신이 안으로 들어가거나 가주께서 몸소 나오셔야 한다는 이야기인데 위사들 입장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무턱대고 아무나 들여보낸다면 위사라는 직함이 존재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죄송합니다. 그 방법은 어렵겠습니다. 대신 총관님을 모셔올 터이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중소구는 당장에 황룡굉을 만나보고 싶었지만 그래도 절차는 지켜야겠기에 마지못해 수긍하는 척했다.

“그렇게 하겠는가? 하하, 그렇다면 기다려야지.”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약간 뒤로 쳐져있던 다른 위사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것을 지켜보던 동천은 예전에 알고 지내던 위사들이 자신을 못 알아보는 듯하자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다.

‘2년이 지났고 머리카락으로 얼굴까지 가리니까 못 알아보는구나. 히히, 내 분장은 역시 완벽해!’

동천은 스스로 완벽한 분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위사들이 동천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중소구에게 신경을 쏟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괴짜로 소문이 자자한 중소구의 등장에 어린놈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동천이 쥐 죽은 듯이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도 한몫했지만 결정적으로 동천이 착각한 것은 자신이 없는 듯 보이는 것이 아니라 튀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완벽하도다. 참으로 완벽하도다. 이히히.”

웃음을 참다못해 쭈그리고 앉아 낄낄거리던 동천은 뭔가 따끔거리는 시선들을 느끼곤 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중소구가 한심하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뭐하냐?”

깜짝 놀란 동천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다.

“뭘 하긴 뭘 해요. 보시면 모르세요? 기다리는 게 따분해서 혼자 놀고 있던 거지.”

내심 놀라고는 있지만 겉으로는 태연하게 행동하는 저 모습이 바로 오늘날의 동천을 만들어줄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늘 그렇듯 중소구를 위시한 다른 사람들은 괜히 주시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중소구는 그런 동천을 보며 나직이 혀를 찼다.

“쯧쯧, 네놈이 그럼 그렇지.”

동천은 화를 내고 싶었지만 남아있는 위사가 자신에게로 시선을 주목하자 눈물을 머금고 마무리를 져야 했다.

“대인의 말씀이 다 맞습니다. 다음부터는 조심하겠습니다.”

중소구는 이놈이 웬일로 고분고분한가 했지만 조심하겠다는데 딱히 꼬투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내 관심을 끊고 총관이란 작자가 빨리 오기만을 기다렸다. 눈가를 뒤덮은 머리카락을 사이로 요리조리 주시하던 동천은 중소구에 이어 위사까지 시선을 돌리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정말로 죽은 듯 가만히 있으리라 마음먹었다. 총관이 당도한 것은 그로부터 반각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약간 노란 바탕의 문사 건을 쓰고 연녹색 경장 차림으로 나선 총관이란 사내는 둥글둥글한 윤곽선과 생글거리는 미소를 입에 매달고 있는 사내였다. 실제 그의 나이는 56세였지만 일정 수준의 무공을 겸비한 것과 호의호식한 덕분에 40대 초반이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중 대인께서 오셨다고요?”

그는 대인 관계에 능숙한 사람답게 나타나자마자 중소구가 바꾼 외호를 불러주었다. 그가 중소구를 기쁘게 하려는 속셈이었다면 보기 좋게 성공한 것이다.

“으하하하! 바로 그렇소. 본인이 대인 중소구외다!”

총관이 직접 중소구를 대한 적은 없었지만 간간이 흘러나오는 무시 못 할 기운과 호탕한 모습으로 보아 적어도 뜨내기는 아닐 것이라고 판단을 했다. 그는 중소구를 들여보내기에 앞서 동천과 도연의 신분을 물었다.

“이 아이들은 중 대인과 어떠한 관계입니까?”

총관이 물어보자 중소구는 도연의 어깨를 집고 흐뭇하게 대답했다.

“이 소형제는 본 대인이 찾아온 용건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니 그렇게 아시고, 옆에 있는 놈은 무시해도 되니까 그냥 알아서 생각하시오.”

순간 동천의 눈에서 불똥이 튀겼다.

‘뭐, 뭐야? 무시해도 돼? 어휴, 저 자식을 그냥!’

동천의 눈빛에는 적의가 가득 차 있었지만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들 때문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총관도 그러했는데 그는 동천의 얼굴이 미미하게 달아올라 있자 쪽팔려서 그러는 줄 알고 얼른 관심을 끊어주었다.

“하하, 어쨌든 아주 급하신 일이라고 하시니 저를 따라오시지요.”

“험! 그럽시다.”

한 번의 헛기침을 내뱉고 총관을 따라나선 중소구는 오래된 전각들 사이를 지나며 주위를 스쳐 지나가는 무사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총관이 그들에 대해 거론을 했다.

“순찰이라는 것이 아무리 돌고 돌아도 한정된 인원으로는 무리수가 있기에 지정된 순찰조 말고도 본가를 생각하는 자들이라면 언제든지 순찰에 동참해도 된다는 가주님의 지시가 있어 짝을 이룬 무사들이 자주 보이는 것입니다.”

중소구는 참으로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총관에게 물었다.

“하지만 저녁이나 한밤중에는 저런 행동이 오히려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요? 저녁이 되면 누가 누구인지 식별하기가 어려우니까요.”

쥐 죽은 듯이 얌전히 뒤따라오던 동천은 자신이 아는 문제가 귀에 들려오자 천성을 못 이기고 대뜸 한 소리 했다.

“아아, 그거? 그거는 네 말대로 처음에 시도될 당시 문제가 된 거였어. 혈기 왕성한 무사들이 오밤중에 바글바글거려서 대 혼란을 겪기도 했지. 하지만 인간이란 게 다 그렇듯이 차츰 힘들어진 무사들이 하나하나 줄어들면서 지금에 와서는 몇몇만을 한정적으로 받아주고 있는 실정이야. 알겠냐?”

도연이 그럴듯한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총관의 발걸음이 뚝 멈추었다. 그는 곤혹스러운 눈으로 말없이 동천을 응시했다.

“…….”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동천은 은근슬쩍 총관의 눈길을 피한 뒤, 하늘을 올려다보며 딴짓거리를 했다.

“아아, 날씨 좋다.”

총관은 그런 동천에게 다소 어눌한 어투로 물었다.

“꼬마야. 이름이….”

당황한 동천은 떠듬거렸다.

“예? 이, 이름이요? 그러니까……동철이. 맞아요! 동철(冬鐵)이에요.”

본명을 말하려다가 겨우 위기를 모면한 동천은 무슨 개소리냐는 듯한 중소구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윽? 큰일났다. 저 소구 자식이 불어버리면 어떻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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