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방문
-빙백봉의 반격
똑똑!
“예, 나갑니다.”
하던 일을 멈추고 쪼르륵 달려가 방문을 연 이진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린 언니! 언니가 여긴 웬일이세요?”
자신이 그녀의 방을 방문하는 일은 잦아도 그녀가 먼저 자신의 방을 찾아오는 일은 좀처럼 없었기에 놀라움은 더욱 컸다.
“부탁이 있어 왔다. 네가 도와줄 일이 있다.”
“부, 부탁이라고요? 지금 분명 부탁이라고 하셨죠?!”
이진설은 감격에 겨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래, 부탁이라고 했다. 그런데… 왜 울지?”
솔직히 나예린은 이진설의 그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용안의 능력을 지닌 그녀에게는 원인보다는 과정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리라. “하지만… 하지만 예린 언니가 저 같은 것한테 부탁을 하다니… 처음 있는 일이라구요. 언제나 모든 일을 혼자서 해결하려고 했잖아요. 물론 언니에게 그만한 능 력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제가 느낀 소외감은 이만저만 큰 게 아니라구요. 하지만 이제 저에게도 기회가 생겼으니.
이진설은 투지에 불타오르는 눈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그래, 잘 부탁한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그 지나친 열성은 다소 부담스러웠다. 이 애를 믿어도 될까? 그러나 다른 방법은 없었다. 혼자서 이 일을 하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격언도 있잖아요. 위험은 분산시키는 게 최고죠. 투자랑 마찬가지예요. 괜히 한 번에 뒤집어쓸 필요 있나요? 안 그래요?”
“그 말 역시 그 사람의 입버릇이었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나예린은 피식 웃었다.
“어, 예린 언니, 방금 뭐라고 말했어요?”
“아니,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언니, 방금 웃은 것 아니에요?”
이진설이 의심을 버리지 못하고 물었다.
“글쎄, 그런 기억은 없구나.”
나예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라, 이상하다.. 분명 본 것 같은데…….”
번쩍이는 섬광처럼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지만, 그녀의 눈이 정확하다면 방금 나예린의 입가에 맺혔다가 순식간에 사라진 것은 분명 통칭 미소라 불리는 것으로, 평소의 나예린에게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어쨌든, 잘 부탁한다.”
“맡겨만 주세요. 우선 뭘 하면 될까요?”
“이 일을 하려면 설이 너 말고도 한 사람이 더 필요하단다. 그 사람을 좀 불러주겠니?”
“그게 누군데요? 제가 아는 사람인가요?”
“물론이다. 그 사람은 바로…….”
한 남자의 고개가 돌아갔다. 또 한 남자의 고개가 돌아갔다. 이진설이 한 걸음 걸음을 내밀 때마다 사내들의 시선은 그곳에 붙잡혔다.
“오!”
“어!”
“우어~”
웅성웅성웅성!
이날 밤, 남자 전용 기숙사 검혼각의 밤은 매우 소란스러웠다 할 수 있겠다. 야수들이 드글거리는 금녀 구역에 한 여인이 겁도 없이 발걸음을 들여놓은 탓이다. 이
초유의 사태에 사내들이 얼어붙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진설은 그런 사내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복도를 지나 계단을 오른 후 자신이 목적하던 곳 에 다다랐다.
똑똑!
이진설은 기다리지 않고 문을 벌컥 열었다.
“푸우우우웁!”
효룡이 입에 물고 있는 차를 분수처럼 내뿜었다.
“으악!”
함께 차를 마시던 윤준호가 기겁하며 몸을 뒤로 날렸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뿜어져 나온 차가 윤준호의 옷에 직격했다.
“이, 이 소저?”
자신의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의외의 인물을 바라보며 효룡은 두 눈을 부릅떴다. 두어 번 소매로 눈을 비벼봤지만 별달리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여, 여긴 어떻게.”
와락!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진설이 효룡의 앞섶을 붙잡았다.
“저랑 함께 가줘야겠어요, 룡!”
의지에 가득 차 있는 그녀의 눈을 보자 효룡은 감히 그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의 마음가짐이 된 효룡은 이진설이 이끄는 대로 얌전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휘이이이익!
숨을 삼키며 전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검혼각의 관도들 중 하나가 손가락을 입에 물고 소리 높여 휘파람을 불었다.
“누군 좋겠다! 삐이이이익!”
“부럽다, 진짜!”
“오오! 끝내준다!”
“잘해봐라! 이휴~”
휘파람뿐만이 아니었다. 남자들만 있다 보니 천박한 우스갯소리도 몇 개 섞여 들렸다. 이런 때 이런 천박한 이야기를 던지지 않으면 남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머 저리들이 여기에도 있었던 것이다.
“오늘 총각 딱지 떼는 거냐?”
“동정은 안녕이구나! 효룡!”
“아가씨한테 살살 해달라 그래!”
“허리 조심하고.”
여기저기서 이진설의 당당함과 적극성에 경의를 표하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뜨겁다 못해 펄펄 끓는 주위의 열광적인 반응에 얼굴을 붉히며 효룡은 묵묵히 이진 설의 손길이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그에게는 이미 상황을 주도할 선택 권한이 박탈당해 있었다.
“나 언니! 데리고 왔어요.”
“그래. 수고했다.”
기다리고 있던 나예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라? 장형?”
이진설에게 이끌려 모종의 장소로 끌려온 효룡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두 사람 중 남자 쪽을 보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여자 쪽이 나예린이었다는 사실도 놀랍 긴 마찬가지지만, 그 옆에 장홍이 함께 있다는 사실이 더욱더 놀라웠다.
“여긴 어떻게…….?”
“어, 그래. 룡룡이, 자네도 왔나?”
뻘쭘한 표정으로 장홍이 대답했다. 상당히 엉거주춤한 자세가 아닐 수 없었다.
“장 형도 끌려온 거유?”
효룡이 전음으로 물었다.
“그렇네. 잡혀왔다는 게 맞겠지. 도대체 어떻게 찾아낸 건지……. 보아하니 자네도 그렇구먼.”
“그렇게 됐습니다.”
“소근거리는 건 그만 하시죠. 제 용건은 간단합니다. 장 대협에게 묻고 싶은 것은 딱 하나뿐입니다. 그 외에 다른 용건은 없으니 안심하세요.”
“아니, 뭐 대협씩이나……..”
천하 절색의 미녀에게 대협이란 소리를 듣는 것은 무척이나 황홀한 일이라는 것을 장홍은 오늘 뒤통수를 긁으며 처음 깨달았다.
“그자는 어디 있죠?”
나예린이 물었다.
“그자라뇨?”
“이시건, 그자 말입니다.”
“그자가 어디 있는지 제가 어떻게…….”
“어디 있습니까?”
나예린이 다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장홍은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검고 깊은 눈은 모든 거짓을 파헤치는 그런 눈이었다. 그 눈앞에서 모든 거짓말은 통용되 지 않는다는 사실을 장홍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할 수 없군.’
장홍은 사실밖에 말할 수 없었다.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는 건가…….?
“있는 곳! 제가 알고 싶은 것은 그것뿐입니다. 장 대협은 그것만 알려주시면 됩니다. 그 뒤는…….
단호한 결심이 어린 목소리로 나예린이 말했다.
“모두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나 소저께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더니 사실이었구려. 할 수 없지요. 알려 드리는 수밖에.”
마침내 장홍이 항복했다.
“그는 현재 중원표국 남창지국에 머무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