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의 진술
-기억이 안 납니다
“에휴~”
남궁상은 궁상스런 한숨을 내쉬며 밤 골목을 터덜터덜 걸었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허점투성이에 습격하기 딱 알맞게 보이기를 바라면서. 자신의 등은 지금 얼 마나 빈틈투성이일까? 왠지 칼로 쑤셔보고 싶은 등짝일까?
그렇다면 다행이지……. 다행인가?’
걸으면 걸을수록, 생각을 하면 할수록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게 무슨 꼴이람……. 아아……!”
이 무슨 기구한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왜 자신이 야밤에 이런 위험한 일을 도맡지 않으면 안 된단 말인가?
‘게다가 이 악취미 다분한 분홍빛 옷은 뭐람! 게다가 매화라니……. 꼴사납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전혀 적응되지 않았다.
‘화산파 녀석들은 부끄럽지도 않나? 어떻게 이런 볼썽사나운 옷을 걸칠 생각을 다 했을까?”
혹자는 이 옷을 보고 겨울 매화처럼 화려하고 멋지다고 평가하기도 했지만 그는 그럴 때마다 그런 평을 한 이들의 미의식을 의심해 보고 싶었다.
‘나라면 파문당하면 당했지 이런 옷은 절대 걸치지 않았을 텐데!’
그런데 지금 자신이 문제의 그 부끄러운 옷을 걸치고 있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주눅 들게 했다.
“아, 옷은 준호 걸 빌려 입고 가라!”
“왜요?”
“그래야 더 잘 습격당하지.”
“그, 그런가요?”
“그래, 혹 네가 팔대세가 사람이란 걸 알면 습격 안 할지도 몰라. 그래선 곤란하지 않겠어?”
“제가 습격 안 당하면 곤란한 건가요?”
“당연하지, 이 바보야!”
“그, 그렇군요.”
“흠, 이제야 네가 바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거냐? 생각보다 좀 많이 늦었다.”
“그게 아니라 무슨 말씀인지 알았다는 의미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왜, 싫냐?”
“안 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단지 그런 걸 입는다는 건 좀..
“꼴사납지 않느냐고?”
“예…….?”
“할 수 없지. 함정 파는 데 이것저것 가려야 되겠냐? 왜? 이참에 야식(夜食)도 싸줄까? 출출할 때 까먹게.”
“아, 아닙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면 되죠. 죽으면 되잖습니까, 죽으면.
“이보게, 왜 이야길 안 하나?”
유은성의 목소리가 상념에 잠긴 남궁상을 흔들어 깨웠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어디까지 했죠?”
퍼뜩 정신이 든 남궁상이 되물었다.
“쯧,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하나?”
그러면서도 친절하게 그가 중단한 대목을 알려주었다.
“화산파 제자의 꼴.사.나.운. 옷을 빌려 입고 어두운 골목길을 걷는 데까지 했지, 아마?”
“아, 알아주시는 겁니까?”
남궁상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었다. 유은성은 팔짱을 낀 채 거침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물론이고말고! 본인도 예전부터 화산파 녀석들의 그 계집애 취향 옷이 마음에 안 들었다네. 사내라면 모름지기 강건해야 하거늘 꽃무늬 연분홍색 도복이 뭔 가! 그런 건 정말 꼴불견이지 않나?”
“맞습니다! 맞고말고요! 알아주시는군요!”
찡ᅳ
자신과 같은 미의식을 가진 사람을 만난 사실에 고양된 남궁상은 하마터면 감격의 눈물을 흘릴 뻔했다. 사실 점창파와 화산파는 같은 구대문파에 속해 있는 처지 임에도 불구하고 사이가 그리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가 문제의 원인이었다. 화산파는 항상 자신들이 오악(五嶽)의 으뜸이라 생각하고 있었고, 언제나 오악에 속하지 않는 점창과 청성을 눈 아래 깔았다. 물론 수백 년에 걸쳐 쌓아온 그 저력은 인정하지만 점창파 사람인 유은성으로서는 화 산파의 케케묵은 오만이 그리 달가울 리 없었다. 화산은 언제나 그와 그의 사문에 있어 넘어야 할 산이자 쏘아 떨어뜨려야 할 해였던 것이다.
“그.래.서?”
토막토막 뚝뚝 끊어지는 고드름처럼 차가운 한마디가 남궁상과 유은성 사이에 세대를 초월해 이루어지는 영적 교감을 차단했다. 유은성은 진소령의 섬뜩할 만큼 차가운 목소리에 찔끔하며 얼른 남궁상을 재촉했다.
“자자, 그 얘긴 나중에 하고 이야기를 계속해 보게. 아직 도입 부분도 채 못 지났지 않나?”
“그, 그러지요.”
열심히 함께 맞장구치다가 느닷없이 손을 피해 버린 꼴이었다. 남궁상은 ‘박수는 한 손 갖고 칩니까?”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을 참아야만 했다.
남궁상은 서둘러 청자들이 지루하지 않게 도입을 지나 발전 단계로 이야기를 옮기기로 했다.
“다시 재습격이 있은 이후 순찰은 반드시 두 명 이상이 돌도록 엄격한 지침이 내려왔지만 전 혼자 학관을 나섰습니다. 그래야 잘 습격당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리 고 저 친구가 나타났지요.”
질긴 가죽 끈이 묶인 자신의 왼팔을 들어올리며 남궁상이 말했다. 진소령과 유은성과 장우양의 시선이 저절로 공손절휘를 향했다. 이야기를 끊지 말라는 무언의 압력이 공손절휘의 마음과 양어깨를 짓눌렀다. 그는 마침내 항복했다.
“전 절 시험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이야말로 단일 초에 황금 완장을 쓰러뜨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일 초?”
자신을 한 방 거리로 보고 있었다는 그의 이야기에 어이없다는 듯 남궁상이 반문했다. 이건 그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약해 보였으니까요.”
공손절의 서슴없는 대답에 남궁상은 그만 가슴을 치고 말았다. 자신이 일초지적으로 보였다는 말에 기뻐할 무인은 변태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
“왜 일 초에 집착했나?”
“모용휘, 그가 그렇게 했으니까요.”
그 이름을 내뱉는 공손절휘의 눈에서 불꽃이 번쩍였다.
“모용휘? 모용세가의 그 칠절신검 모용휘 말인가? 작금 강호에서 가장 뛰어난 후기지수 중 하나라는?”
유은성도 그 이름은 꽤 귀 따갑게 들은 바가 있었다.
그다지 인정하고 싶은 내용은 아니지만 공손절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 규칙을 이용해 그에게 도전하고 싶었습니다. 때문에 그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저도 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일 초에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을 만큼 제 검기를 날카롭게 연마해 놓지 않으면 안 됐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실전이 꼭 필요했습니다!”
“왜 그렇게 모용휘에 집착하나?”
유은성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제가 그자를 꺾어야 하니까요!”
망설이지 않고 공손절휘가 대답했다.
“모란의 꽃은 제 손으로 꺾을 겁니다. 때문에 오직 황금 완장에게만 도전한 것입니다. 모용휘 역시 황금 완장이었으니까요.”
“잠깐! 그럼 최근에 일어난 입관 후보생 연쇄 살인 사건은 자네의 소행이 아닌가?”
유운비의 물음에 공손절휘가 엉덩이가 데인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손을 가로저었다.
“아, 아닙니다! 결단코 아닙니다! 제가 왜 그런 가문에 누를 끼치는 일을 했겠습니까? 제가 비록 상대에게 부상을 입혔을지는 모르지만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 그날 밤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그만 함정에 빠지고 말았죠.”
“책략이라 해주게. 유.인.책!”
옆에서 남궁상이 정정해 주었다. 역사를 고쳐 쓰는 것은 언제나 승자의 특권이었고 그는 그 권한을 최대한 휘두르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그 뒤는 제가 말씀드리지요. 저희는 어떻게든 미끼가 필요했습니다. 그들이 이미 목적한 바를 달성했을지도 모를 그 시점에서 다시 유사한 일이 벌어진다면 그들 이 기껏 쌓아놓은 공이 무너질 수 있다는 위협을 그들이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들의 목적?”
“예, 아주 지독한 악당 한 명에게 누명을 씌워 감옥에 처넣는 일입니다.”
남궁상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건 좋은 일 아닌가?”
어이없는 어조로 진소령이 반문했다.
“어, 그렇게 되나요? 하지만 그 지독한 악당에겐 죄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행동은 잘못된 것이죠.”
“좀 이상한 논리군.”
“그, 그런가요?”
남궁상은 자신의 이야기가 점점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사실인데…….’
다만 잘 설명할 수 없을 뿐이었다.
“그들의 목적이 어떠했든 그 수단으로 살인을 택했다는 것은 용납받지 못할 일입니다. 그것도 건방지긴 하지만 죄없는 햇병아리들을 상대로 말입니다.”
“그건 그렇지.”
다행히 두 사람은 납득해 주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승천무제’를 훼방 놓으려 한다는 혐의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적을 이루고 잠적했을지도 모를 범인들을 끌어낼 미끼가 필요했다?”
“예, 명찰하신 바 그대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을 좀 더 크게 벌일 필요가 있었죠. 이 친구가 저지른 일은 한번 꺼진 소란의 불길을 다시 일으키는 데는 턱없 이 부족했으니까요.”
“이 미끼는 어디서 구했나?”
공손절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유은성이 물었다.
“낚았습니다.”
“뭘로?”
남궁상은 자신의 허리에 걸린 검을 한번 툭 쳐 보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렇군! 이해했네. 그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겠네.”
“예, 하문하십시오.”
“그때의 상황을 이야기해 줄 수 있겠나?”
“예?”
이제까지 질문에 거침없이 대답하던 남궁상이 처음으로 반문했다.
“자네가 어떻게 저 아이를 이겼는지 그 무용담을 들려달라는 것일세.”
“그게…….?”
당장이라도 자랑하듯 자신의 무용담을 떠들 것 같던 남궁상이 오히려 말끝을 흐렸다.
“그게 뭐?”
유은성이 대답을 재촉했다. 남궁상은 한숨을 내쉰 다음 세상 앞에 정직해지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진실을 말했다, 정직하게.
“기억이 안 납니다!”
““뭐라고?”
그 어처구니랑 이혼한 듯한 대답에 진소령과 유은성이 동시에 반문했다.
“이겼는데 기억은 안 난다?”
“예…….?”
한참 고민하던 유은성은 자신이 내린 결론을 확인하고 싶었다.
“너, 바보냐?”
“아닙니다!”
남궁상이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비록 확답은 받지 못했지만 여전히 의혹이 가시지 않은 말투였다. 그건 진소령도 마찬가지였다.
“자네의 주장은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군. 설득력이 매우 부족하단 말일세. 그러니 그냥 그때의 상황을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해 보게. 자네의 말이 진짠지 가 짠지는 우리 두 사람이 이야기를 다 듣고 판단하도록 하겠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아니지만 세 번째쯤 무서운 사람이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그게 말이죠…….”
남궁상은 그날 밤 달 아래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제가 “여어!”라고 인사하자 저 친구가 이렇게 반문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