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항은 젊음의 특권?
-말린다고 말려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 넷은 떠났다.
중양표국에는 아직 젊은 혈기와 열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소년, 소녀 두 사람만이 남겨졌다. 두 사부, 사백님과 눈엣가시 같은 남궁상과 꽤나 취향인 공손절휘가 사 라지자 유란은 재빨리 부풀어 있던 두 볼의 바람을 빼고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시무룩해 있던 유운비를 바라보았다. 유운비도 그녀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두 사람 의 시선이 딱 마주쳤다. 이미 시무룩함은 사라진 그의 눈은 생기로 반짝이고 있었다.
“어쩌시겠어요, 유 소협?”
“예, 어떻게라뇨?”
어리둥절해하는 유운비의 반문에 유란이 짜증스런 어조로 나직이 소리쳤다.
“그냥 얌전히 여기서 죽치고 앉아 있을 건지 묻고 있잖아요.”
유운비는 대답 대신 밤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았다.
“왜요? 하늘에 뭐 두고 온 거라도 있어요?”
그제야 유운비는 시선을 돌려 유란을 바라보았다.
“아뇨, 좋은 밤이다 싶어서요. 달도 없고. 알면서 묻다니 유 소저도 참 짓궂습니다.”
두 사람의 입가에 악동의 미소가 어렸다. 사부의 속을 팍팍 썩이는 제자들의 입에서 종종 발견되곤 하는 그런 종류의 미소였다.
“진짜 괜찮겠어요? 댁의 큰 백부님께서 가만 안 놔두실지도 모르는데도요?”
유란이 짓궂은 목소리로 유운비의 아픈 곳을 찔렀다. 유운비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 바로 그의 큰 백부이자 사백인 점창제일검 유은성이었던 것이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요. 하지만 그때는 그때, 지금은 지금 아니겠습니까? 이런 절호의 기회를 그냥 멍하니 놓쳐 버릴 수야 없죠. 유 소저야말로 괜찮을까 걱정입니다. 신녀님께서는 꽤 규율에 엄하다고 들어서 말이죠.”
자신만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 유운비는 반격을 감행했다.
“오호호호호! 걱정없어요, 걱정없어. 전혀 걱정없어요. 사부님도 반드시 이해해 주실 거예요.”
손을 입가에 가져다 대고 요란하게 온몸으로 웃는, 크고 높고 날카로운 웃음이었지만 어쩐 일인지 매우 가식적으로 들렸다. 웃고 있는 것은 목소리뿐, 그녀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대로 그들은 젊었고 반항을 젊음의 특권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번엔 웬일로 저랑 마음이 맞았네요!”
하지만 마음이 맞았다 해도 그녀의 진행 속도는 너무 지나치게 빨랐다. 유란이 그 자리에서 입고 있던 무복을 훌훌 벗기 시작하자, 그녀의 갑작스런 이 대담한 행 동에 유운비는 화들짝 놀라 외쳤다.
“유 소저… 무, 무슨 짓입니까! 전 아직 마음의 준비가…….”
그러나 이미 젊은 청년의 방심은 열정으로 뜨겁게 화르륵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무리 세차게 손사래를 치고 눈을 질끈 감은 채 맘에도 없는 말을 더듬고 있어도 마 음의 화재(火災)만은 어쩔 수 없었다. 질끈 감았던 눈 주위 근육의 힘은 어느새 빠져 있었고, 시커멓던 시야가 빼꼼히 열렸다.
“댁이야말로 무슨 황당한 짓거립니까, 유.운.비. 소협?”
아니, 어느새? 안타깝게도 젊은 청년의 가슴에는 청천벽력할 일이었지만 눈앞에 펼쳐진 것은 한 여인의 아름다운 나신(裸身)이 아니었다.
“어?”
순식간에 검은 야행(夜行衣)를 차려입은 유란이 이상한 눈으로 그의 광태(狂態)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무복 아래에 야행의를 몰래 갖춰 입 고 있었던 것이다.
“유 소협도 빨리 옷을 갈아입으세요. 설마 그런 옷을 입고 두 분의 뒤를 밟을 만큼 어리석지는 않겠죠?”
우회적인 비난이었다.
“그건…..”
유운비는 자신의 옷을 바라보았다. 넉넉한 소매, 바람에 펄럭이는 청색 두루마기…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점창파의 공식 옷차림이었다. 그러나 그게 문제였다. 이런 넉넉한 소매와 풍성한 두루마기는 움직일 때 바람과 공기의 마찰을 통해 어쩔 수 없이 소리를 내게 마련이다.
때문에 경험이 많은 강호인들은 다들 언제나 야행의 한 벌을 따로 지참해 다닌다. 그것은 밤의 어둠 속에 자신을 녹아들게 하고, 몸에 딱 달라붙기에 소리가 잘 나 지 않으며, 신발 또한 부드러운 털가죽으로 되어 있어 소리를 최대한 줄여준다. 은밀한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인 도구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인해 몇몇 광명정대를 표방하는 문파에서는 야행의 지참을 금지하고 있기까지 했는데, 그 옷을 입는다는 것은 난 어떤 의도가 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표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보통 이 옷으로 갈아입는 것을 다른 사람의 눈에 들키면 매우 곤란한 일이 발생할 수 있었다.
“준비가 철저하시군요. 이 유모는 감탄했습니다.”
“잔말 말고 빨리 갈아입고 와요, 두 분을 놓치기 전에.”
“아, 알겠습니다.”
허둥지둥 방에 들어간 유운비는 서둘러 야행의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검은 비단 야행의를 걸친 탓인지 그의 목 아래는 마치 어둠에 녹아 들어 간 듯 잘 보이 지 않았다.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도록 하죠, 중요한 건 지금이니까. 그럼 갈까요, 유 소협?”
“갑시다.”
둘은 흙을 밟는 자그마한 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담을 넘어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 갔다. 자신들의 가벼운 판단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 모른 채.
***
“감히! 이 몸을 번거롭게 하다니!”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사내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긴 앞머리가 눈을 가리는 독특한 머리 모양을 지닌 사내였다. 그 사내의 오른쪽 귀에는 황금으로 만 든 다섯 개의 귀고리가 걸려 있었다. 바로 이시건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부하 녀석들을 시킬 걸 그랬나?”
그는 지금 한 청년의 뒤를 은밀히 뒤쫓고 있던 참이었다. 오늘은 덮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요 며칠간 자신이 깔끔하게 처리해 놓은 일에 초를 치려는 녀석이 나 타났던 탓이다.
범인이 잡혔는데도 범행이 계속 일어나면 곤란했다. 그 비류연이란 망할 놈에게 씌워진 혐의가 점점 옅어질 수 있었다. 만약 한두 번으로 그쳤다면 단순한 모방 범 죄로 치부할 수도 있었으리라.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남궁상이라는, 남창으로부터 수천 리 떨어져 있는 마천각에서도 이름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놈이 그 정 체불명의 습격자에게 당해 덜컹 뒈져 버리고 말았다. 사태는 상상 이상으로 심각하게 변했고, 또다시 그 자신이 직접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 다.
한 손으로 뺨에 난 상처를 어루만지며 이시건이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얼마 전 일도 있고…….”
그 일만 없었어도 그냥 부하들에게 맡겨놓을 생각이었는데 마음이 놓이지 않아 예의적으로 이렇게 몸소 행차한 것이었다.
“저 녀석이 제물인가?”
자신이 뒤를 쫓고 있는 줄도 모르는 불쌍한 미끼는 밤바람을 막기 위한 피풍의를 걸치고 손에 ‘천무(武)’라는 글자가 적힌 등롱 하나를 든 채 남창의 골목길 사 이를 지나가고 있었다. 사내의 왼팔에 얼핏 보이는 것은 황금 완장이다. 아무래도 지금 순찰 중이었던 모양이다. 최근 잇따른 습격 사건으로 인해 모두들 몸을 사리 고 있는데도 그는 용감하게도 혼자였다.
“쳇, 이제 밤바람 맞을 일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밤의 그림자 속에 숨어 사내의 뒤를 몰래 밟던 이시건의 입에서 불평이 터져 나왔다. 그는 이렇게 직접 실무를 뛰는 것보다 앉아서 명령을 내리는 게 더 적성에 맞 았다.
‘저놈을 따라가다 보면 그놈이 나오겠지? 그럼 둘 다 그 자리에서 우아하게 토막 쳐주마!’
증거 따윌 남기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잠깐 멈추시오!”
등롱을 들고 가던 황금 완장의 사내가 걸음을 멈추고 전면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피풍의를 머리까지 뒤집어쓴 한 남자가 느릿한 발걸음으로 걸어나왔다. “저놈이다! 드디어 찾았다.’
피풍의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이시건은 직감했다. 감히 자신의 완벽한 계획에 차질을 빚어놓다니, 그 죄는 오직 참혹한 죽음으로써만이 그 채무를 변제 할 수 있을 것이다.
눈앞에서 두 팔을 교차시켜 열 개의 손가락을 들어올리는 그의 입가에 잔인한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더 이상 기다릴 필요 없다고 생각한 그의 대응은 성급할 정 도로 재빨랐다.
“나의 손에서 춤춰라, 바람아!”
자운(紫雲) 암풍(暗風).
오의(奧義).
살식(殺). 질풍참살(疾風斬殺).
“갈기갈기 찢겨 죽을지어다!”
“방심하지 마! 방심하는 그 순간이 곧 죽는 날이니까.”
미리 경고받지 않았었다면 아마 피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날카롭게 곤두세워뒀던 감각 안에 희미한 살기가 포착되자마자 그는 재빨리 신형을 날렸다. ‘감각을 최대한 활성화시켜 놔!’
대비하고 피한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칼날이 그의 옷자락을 스치고 지나가자 옷자락이 예리하게 베어졌다.
“아마 추측컨대, 상처로 미루어보아 사검(劍)일 거야!”
“사검이라면 그……?”
“뭐, 이 몸에 비하면 백만 년은 멀었지만, 이 정도면 꽤 하는 수준이라 할 수 있지.”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보고 피하려 하지 마, 그럼 이미 늦으니까. 보려 해봤자 잘 보이지도 않고.”
“보고 피하지 말라구요?”
“그래. 낮에도 보기 힘든데 밤이면 더하지. 그러니깐 보는 건 포기해.”
“그럼 그냥 죽으라는…….”
뻑!
“누가 내 허락도 없이 죽으래? 맞을라꼬!”
“그럼……?”
“느껴!”
가느다란 살기의 그물이 그들을 덮치려는 순간 남궁상과 또 한 명의 사내는 거의 동시에 몸을 날렸다. 그들이 몸을 피한 자리 위로 살기 어린 질풍이 무참히 휩쓸 고 지나갔다. 그 여파는 상상 이상으로 강력했다.
“이대론 위험하다!’
뇌전검법(雷電劍法구명절초命絶招).
성막밀밀(星幕密密).
남궁상의 검이 무수한 선을 허공중에 그리며 그의 몸을 보호하는 방패가 되었다.
스샤샤샤샥!
골목좌우로 뻗어 있는 담장에 실낱같은 상처들이 무수히 새겨졌다. 그러나 정작 베어야 할 그것은 베지 못했다.
“거기냐!”
대사형의 조언대로 검막으로 몸을 보호한 채 위쪽으로 몸을 날린 남궁상은 재빨리 암습자가 있다고 예상되는 곳으로 신형을 날렸다.
“이, 이럴 수가!”
절대 실패하지 않으리라 자신했던 공격이 실패했다는 충격에 이시건은 잠시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자, 이제 정체를 밝혀주실까?”
이시건이 다시 정신을 수습했을 때 그는 이미 자신이 표적으로 삼았던 두 사람에게 양쪽으로 포위당한 채였다. 잠시 당황하긴 했지만 그건 잠시 잠깐의 일일 뿐이 었다. 그는 자존심이 남달리 강한 만큼 회복이 빨랐다.
“쳇, 할 수 없군. 조용히 끝내려 했더니.”
그는 두 사람에게 포위당한 채로도 그다지 긴장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속마음은 상처 입은 자존심 때문에 부글부 글 끓고 있었다. 자신의 기술을 피해낸 놈들이 이런 곳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대로는 손상된 체면이 회복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좋을 까? 결론은 간단했다. 피해낸 놈들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면 깔끔하게 끝날 일인 것이다. 떠올려 놓고 보니 정말 아주 좋은 생각이었다.
“내 기술을 피하다니, 곧 죽을 몸들이지만 이름과 별호 정돈 기억해 주마. 영광으로 알아라.”
그가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역시 자신은 너무 멋진 남자였다. 물론 두 사람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당신, 뭔가 지금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아냐? 이름이 알고 싶다면 가르쳐 주지! 네놈을 잡아갈 이 몸의 성함은 천무학관 주작단 단주 남궁상이다! 사람들은 뇌 전검룡이란 과분한 이름으로 불러주고 있지.”
남궁상이 목을 뻣뻣이 치켜들며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뭐라고! 네놈이 바로 그 남궁상이라고!”
이시건이 경악하며 외쳤다.
“네놈은 죽었잖아?”
‘그게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 바로 당신 때문이었지. 댁만 아니었음 나도 죽을 일 없었다고.”
이 일의 원흉을 눈앞에 마주 대하고 보니 자연스레 언성이 높아지는 남궁상이었다.
“그럼 그쪽의 형씨는? 쓰고 있는 복면은 이제 그만 벗는 게 어때?”
잠시 망설이던 복면인이 머리에 쓰고 있던 ‘두건’을 벗자 매우 준미한 얼굴이 그 안에서 나왔다. 자신의 미모에 나름대로 자신만만하던 이시건도 잠시 움찔하게 만드는 그런 미모였다.
“본인은 모용휘라 하오. 사람들은 보통 칠절신검이라 불러주고 있소.”
그 이름을 들은 이시건의 눈이 크게 떠졌다.
‘왜 그 검성의 후계자가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거지??
짚이는 바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이런, 제길! 함정에 걸린 건 나였단 말인가?”
“그걸 이제 아셨나? 의외로 둔하네.”
남궁상이 빈정거렸다.
‘재수가 없으려니…….”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믿는 구석이 있었다.
아직 놀이는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