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담에 떨어져도 출근을 해야 하는구나 39화
나는 심호흡하며 혈욕조 설명서를 떠올렸다.
우선,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는다.
1. 깨끗한 물을 욕조에 원하는 만큼 담아주세요.
(‘젊음의 욕조 – 풋 마사지 에디션’은 자동 급수가 불가능한 상품입니다.)
그 말대로 봉제 인형 하나 잠길 만큼의 온수를 세면대에서 받아서 욕조에 부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가 본론이다.
2. 물이 원하는 만큼 차오르면, 그 위로 신선한 혈액을 200㎖ 이상 붓습니다.
건강하고 활기찬 대상에게서 갓 뽑은 혈액일수록 효과가 좋습니다.
이딴 소리가 친절하고 상냥한 폰트로 적혀 있다는 것부터가 미친 소리 같지만, 다행히 내게는 대체품이 있다.
나는 산삼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가위로 중간 정도 크기의 외곽 뿌리 한 줄을 잘랐다.
‘윽.’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것 같은, 검보라색 진액이 잘린 뿌리에서 줄줄 새어 나왔다.
고무장갑을 껴서 천만다행이었다.
나는 그것에 최대한 닿지 않으려 하며, 뿌리 단면을 혈욕조에 기대었다.
그러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보글보글.
욕조에 닿는 진액에서 거품이 일며 환상적인 향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
구역질 나던 검보라색 진액은 어느새 농후하고 아름다운 장밋빛 크림색으로 변해 반짝거리고 있었다.
기묘하고 환상적이다.
누구나 혹해서 발을 넣을 만큼 안락하고 고급스러운 목욕물이, 그렇게 준비되었다…….
3. 입욕제에 신체를 푹 담가 목욕을 즐기세요.
(풋 마사지 에디션은 전신까지 활력을 줍니다.)
어두운 침대 밑에서 기대에 찬 소리가 났다.
-드디어!
봉제 인형의 웃음소리.
-아아, 절 들어서 이동시켜 줄 필요는 없습니다! 노루 씨.
-그대로 뒤를 돌아보지 마십시오.
나는 그대로 굳었다.
…등 뒤에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봉제 인형이 걷는 소리다.
아니, 봉제 인형이… 맞나? 남성의 구둣발 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약간 경쾌하고 묵직한 소리는 내 바로 등 뒤를 스쳐 지나가더니, 멈췄다.
그리고 내 바로 옆 욕조에서 풍덩, 뭔가가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앞을 보아도 괜찮습니다.
고개를 돌렸다.
작은 욕조 안 입욕제에 푹 젖은 작은 봉제 인형이, 표정 변화 없이 웃는 동물 마스코트 생김새 그대로 둥둥 떠 있었다…….
“……브라운?”
대답은 없었다.
당연했다. 현실에서 인형을 직접 마주 보고 대화할 순 없으니까.
하지만 듣고 있을 것이다.
“일단 산삼은 치울게. 목욕 잘 즐기고.”
나는 진액이 멈춘 산삼을 다시 책상 위로 치우고, 욕조를 보았다.
혈욕조를 사용했던 사람들의 기록을 떠올리며.
———————=
사용기록 #5
40대 사용인이 집주인이 담아놓았던 입욕제(만 20세 코카시안 혼혈 남성의 피)를 치우는 과정에서 혈욕조에 담긴 물을 손으로 휘저음.
욕조를 다 비울 때까지 30초 경과.
즉시 손 피부와 근조직의 상태가 30대 중반의 때로 회춘한 것을 목격. 전신에서 활력 징후 관찰.
당일 밤 해당 사용인이 혈욕조를 차에 싣고 도주하다 체포됨.
———————=
음, 딱히 그런 건 없는데.
‘역시 인형한테는 통하지 않나.’
수건이라도 가져와야겠다.
몸을 돌려 서랍장으로 향하던 때였다.
-오오!
목소리?
나는 고개를 돌렸다.
보이지 않는 욕조 속, 오래된 TV에서 스파크가 튀듯이 전깃불이 튀겨 오른다.
-힘없는 사지에 빛이 들어온다!
번쩍.
욕조 위로 두 팔을 들어 올리는 봉제 인형의 그림자가 짙고 크게 졌다.
저게 뭐야?
-노루 씨!
부르지 마!
-이거 정말 재밌는 물건이군요! 하하, 하하하하!
나는 침을 삼키며 그 꼴을 봤다.
‘…정말로 힘이 돌아오고 있는 건가?’
혈욕조의 회춘이라는 게 저런 범위까지 통용된다는 기록을 본 적이 없었는데.
새로운 사례다.
내가 알지 못하는.
-입욕제를 더! 더 부어주십시오!
입욕제.
나는 책상 위의 산삼을 무의식중에 잡았….
[으아아아악 이놈들이 산삼 잡는다!!!]
[아니, 귀인!! 귀인! 살려줘! 제발 살려주십쇼!!]
으악 X발!
‘이거 깼잖아!!’
기겁해서 반사적으로 산삼을 내던졌다.
퉁.
거짓말처럼 혈욕조에 들어간 산삼이 자신이 흘리고 남은 진액이 향기로운 입욕제로 변하는 것을 느끼는지 발악한다.
[아아아아아!!]
하지만 그게 다였다.
산삼은 전처럼 허튼 수작을 부리진 못 하는 듯했다. 혈욕조의 기묘한 힘이 산삼을 누르고 있는 건지, 아니면 브라운이 무슨 수를 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절규가 울렸다.
[제발 살려주세요 귀인!! 귀인!! 제가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어요!]
[열심히 할게! 열심히 할게에에에!! 널 섬길게!!]
-이렇게 무례하고 시끄러울 수가!
혈욕조 안에서 또 전기가 튀었다.
마치 TV 화면이 합성되는 것 같다….
그 안에서 분노한 사회자의 외침이 쩌렁쩌렁 울린다.
-이것의 목을 그으십시오, 친구! 조용히 시켜요. 이 장면을 망치지 말란 말입니다!
“…….”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욕조를 들여다보진 않은 채로 말했다.
“그렇게 안 해도 조용히 시킬 수 있어.”
-…….
“극단적인 방법은 안 써도 괜찮아.”
-쇼에서는 한순간, 한 타이밍이 모든 반응과 느낌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쇼가 아니잖아?”
-그건….
욕조에서 튀기던 전기가 잦아들었다.
-그렇군요. 예. 맞는 말입니다.
휴우우우우.
‘혈욕조 신규 이용기록-이레귤러 이런 식으로 등록될 뻔했네.’
안 그래도 상황 한 번 기가 막힌 데 말이다.
욕조 안에서 흑흑대는 가련한 목소리가 들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은인.]
[선량한 귀인! 이제 절 여기서 꺼내서 제발, 이 무도한 괴인의 손에서 살려주십…….]
나는 팔짱을 꼈다.
“살려주겠다고 한 적은 없는데.”
[…?!]
괴담에서 중후반부에 당하는 게 누군가?
바로 이런 순간 방심하는 선량한 사람이다!
‘귀신이 우는소리 한다고 마음 약해지면 딱 그때 무서운 일이 일어난다고!’
이럴 때는 침착하고 만만찮게 나가야 한다. 나는 혈욕조에 방치된 산삼을 욕조의 세라믹 너머로 응시했다.
“널 살려줬다가 무슨 일을 당할 줄 알고?”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그러면… 어, 이건 어떠십니까? 밭! 제가 있던 밭 주변에 있는 진귀한 물건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어.”
왠지 귀신 들린 저주받은 물건일 것 같다.
[그, 그럼….]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냥 누굴 해치지 않을 걸 스스로 증명해. 조용히 있으라고.”
[…….]
산삼이 입을 다물었다.
일단 이걸로 시간은 번 것 같다.
그렇게 몇 분간, 나는 숨 막히고 (아마도) 브라운은 즐거웠을 시간이 흘렀다….
‘10분.’
내가 그렇게 시간을 체크했을 때였다.
-음. 좋은 목욕이었습니다.
“…….”
끝났나.
이제 브라운을 욕조에서 꺼내줘야 하나 싶어서 고개를 돌리기 직전이었다.
-아, 훌륭합니다…. 고맙습니다, 노루 씨.
봉제 인형의 목소리가 음흉해졌다.
-내 목욕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줘서!
쾅.
[캬아아아악!!]
욕조에서 벼락같은 소음과 절규가 쏟아졌다.
이런 미친!
-잠시만요! 친구, 움직이지 마십시오. 누군가 보면 이 솜 든 육신은 부끄러워서 움직이질 못하는군요!
[살려준다고, 살려준다고오오!]
-하하! 노루 씨는 살려준다는 약속을 한 적이 없다는데 말입니다!
“잠깐!”
나는 결국 욕조로 뛰어갔다.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으나, 욕조로 고개를 숙이자 사라졌다.
보이는 건 구석에 처박혀 열매를 미친 듯이 흔들며 허우적대는 산삼이었다.
열매는 누군가의 발길질에 맞은 듯 반쯤 짓눌려 있었으며, 뿌리도 마치 진액을 짜내려고 한 듯 옆이 뭉개져 있었다.
[살려줘, 살려줘….]
산삼은 이미 기력을 다한 듯이 열매의 움직임이 느려진다.
[나, 나 풀어줘…….]
…풀어달라고?
나는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욕조에서 산삼을 뒤적였다.
‘묶여 있진 않은데.’
[살려…….]
산삼의 말을 따라 손에 진동이 왔다.
“…….”
진동이라.
그러고 보니 이 산삼이 말 비슷한 걸 할 때면 손에 이런 파동이 전해져 왔다.
이상하진 않았다 목소리도 일종에 파동이니까.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다.
‘뿌리는 안 흔들리네.’
그러고 보니, 처음 밭에서 봤을 때도 말할 때 이파리와 열매만 흔들렸었다.
뿌리는 마치 감염된 촉수처럼 뻗어났을 뿐이고.
“…….”
그렇다면.
나는 직감적으로 산삼을 붙잡아 열매를 뜯어냈다.
그 순간.
[호오오오오!]
열매가 미친 듯이 떨리며 내 손에서 튕겨 올랐다.
“…!”
그리고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듯이 손안에 맴돈다.
[벗어났다!! 벗어났다! 범 아가리가 사라진다! 사라진다아아아….]
[고마워 은인!! 고마워!!]
열매는 점점 형체가 옅어지며 아롱거리더니, 이윽고 불빛처럼 허공에 떠올라서 창밖으로 날아가듯 사라졌다.
“…….”
저게 본체였나.
-이런! 도망쳤군요. 아깝습니다.
휴우.
-저렇게 말 바꾸기 좋아하는 저열하고 야비한 종자에겐 기회가 주어져서는 안 되건만!
“그러냐. 그래도 다음부턴 제발 뭐든 합의하에 하자….”
-순발력이 필요한 순간에도 말입니까?
“누가 죽는 게 아니면, 응.”
-…알겠습니다. 친구.
왠지 뚱한 목소리지만 어쨌든 확답은 들었다.
거기에 만족하자….
-그나저나, 이걸 보십시오! 이제 난 제법 회춘했습니다!
나는 욕조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쳐다보니 거짓말처럼 조용해진 봉제 인형.
물에 젖은 솜뭉치에서 어쩐지 윤기가 흘렀다.
“……?”
어, 정말 왠지 좀 더 비싸 보였다. 질이 좋아 보인다고 해야 하나.
본인 말대로 미세하게 좀 커진 것 같기도 하고.
‘…더 커지는 건 안 되는데?’
키링 사이즈라 의심 안 받고 들고 다니는 건데. 다 큰 직장인이 손보다 큰 인형을 언제나 들고 다니는 건 너무 시선을 끌 것 같단 말이다.
안 그래도 충분히 회사에서 눈에 띄고 있는데.
‘다음에 혈욕조를 쓰기 전까지 좀 생각해 놓자.’
아니, 기왕이면 내가 그 전에 집에 돌아가면 좋고.
“그러게. 멋지네.”
나는 브라운을 건져서 드라이어로 조심스럽게 말린 후 잠자리 수건에 잘 뒀다.
그리고 욕조 물을 치우려고 돌아오자, 놀라운 것을 보았다.
“…산삼 뿌리가 남았잖아.”
열매가 날아가고 난 뒤, 산삼도 사라질 줄 알았는데 멀쩡히 남아 있던 것이다.
심지어 더 멀쩡해졌다.
오염된 듯 변색 됐던 산삼은 어느새 깨끗한 원래의 상아빛 색을 되찾은 것이다.
‘좋은 향까지 나는 것 같은데.’
영험해 보였다. 괴담과 정반대 속성으로.
“흠.”
나는 머뭇거리다가 그것을 챙겨서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다.
어딘가 쓸데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이걸로…… 끝인가.”
‘한 건 넘겼다….’
나는 침대에 스르륵 걸쳐 뻗었다.
와, 이 괴담 세상에 들어온 후로 수명이 한 이십 년은 줄어든 기분이다.
‘역시 포인트 빨리 모아서 튀어야 해.’
그러려면 괴담을 더 적극적으로 공략해야 하는 모순적인 이 상황이 웃긴….
-노루 씨.
으아씨 깜짝이야.
-몸도 입도 움직이기 한결 편하군요!
-아차차, 이쪽을 보진 마십시오.
나는 하마터면 돌아갈 뻔한 머리를 베개 위로 도로 고정시켰다.
그러자 브라운이 다시 떠든다.
-이제 이곳에서도 우리가 직접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면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 수줍은 방식 아닙니까? 답답하지만 나름대로 흥미롭습니다.
그래. 마음껏 떠들어라….
‘괴담 들어가면 또 내 생명줄 해줘야지…….’
-많이 피곤한가 보군요! 좋은 꿈 꾸길 바랍니다. 친구.
나는 기절하듯 곯아떨어졌다.
며칠 간의 피로가 확 풀리는 개운한 잠이었다.
…깨어나니 또 문제가 터져 있었지만.
* * *
같은 날 낮.
김솔음이 한참 D조 사무실에서 상사들과 신변잡기식 잡담을 하고 있을 무렵, 최근 그의 신변과 꽤 연관 있던 이 직원은 복도를 걷는 중이었다….
“아, 이병진 과장.”
그렇다. 실종됐다 김솔음에 의해 구출된 그 과장 말이다.
“예, 예!”
그리고 그를 불러세운 건 이사 중 한 사람이었다.
직장인으로선 그다지 반갑지 않은 마주침이었으나, 과장은 안면근육에 안간힘을 서서 환한 웃음을 지으며 공손히 악수를 받았다.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잡은 회사의 동아줄.
A조와 이어져 저 위로 가는 그 줄 맨 위에 있는, 이 기묘하고 무서운 대기업의 먹이 사슬 최상층에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호 이사!’
복도에서 그를 불러낸 이사가 마주 웃으며 물었다.
“실종됐다가 돌아오셨다면서요. 괜찮으세요?”
“아이, 건강합니다 이사님. 걱정해 주신 덕에 아주 멀쩡하게 우리 회사의 안녕을 위해, 예, 열심히 근무 중입니다.”
“하하.”
이사는 상대의 빈말을 지적하지 않았다. 대신 부드럽고 여상스럽게 말했다.
“운이 좋으셨네요. 어둠에 한 번 빠지면 못 나오는 경우도 많은데.”
“아. 그러게 말입니다… 운이 좋아서 구조받았지요.”
“구조? 혹시 재난관리국의 도움을 받으셨나요?”
이사의 말투는 변하지 않았으나 이병진 과장은 펄쩍 뛰었다.
이 이사는 정부와 엮이는 걸 극히 불편해하다 못해 보복까지 하는 사람이다.
식은땀이 등 뒤로 흘렀다.
“그, 그럴 리가요! 우리 회사 직원이 절 찾아줬습니다!”
“그러셨군요.”
“예예. 아, 이번 현장탐사팀 신입인데, 아주 괜찮은 친구예요! 정말!”
이런 보신주의적인 인간의 입에서 저런 발언을 뽑아낼 수 있을 줄이야.
이사는 웃으며 물었다.
“그분 성함이 어떻게 되나요?”
“아! 김솔음입니다…. D조 신입. 김솔음.”
이병진 과장의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큰 용기를 낸 것이었다.
생명의 은인에게 보답하기 위해!
‘호 이사가 좀 섬뜩하긴 해도 괜찮은 윗사람이지.’
발작하는 키워드만 안 건들면 말이다.
“아주 싹수 괜찮은 신입 친구입니다. 예.”
그렇게 장본인도 모르는 곳에서 라인이 형성되고 있었다!
이병진 과장은 코를 쓱 훔쳤다.
‘솔음 씨, 나중에 알면 나한테 고마워하겠구만!’
아니었다!
하지만 어쨌든 이병진 과장의 이 행동은 꽤 큰 나비효과를 불러오는데….
“오, 기억해 둬야겠네요.”
바로 며칠 후, 회사에 사건이 터진 것이다.
정확히는 현장탐사팀에.